소설리스트

beloved-24화 (24/66)

24.

몇 곡 째 이어지는 블루지한 선율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휘감고 있었다.

푸른색을 베이스로 한 조명은 세련되면서 적당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었고,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나무 재질의 장식물들과 크고 작은 화분들은 자칫 지나친 세련됨으로 삭막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적절하게 완화시켜주고 있었다.

이렇듯 한눈으로 보나 꼼꼼히 살펴보나 과연 유명 디자이너의 설계로 만들어진 바(bar)다운 높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는 덕분에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인 지금 를 채우고 있는 손님은 그렇지 않아도 많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상태였다. 특별한 날인만큼 한껏 치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로 인해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플로어조차 오늘은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 오늘밤은 손님이 특별히 더 많네. 누군지 몰라도 여기 오너는 참 좋겠어.”

문득 들려온 정우의 말에 슬쩍 그에게 시선을 던진 호연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현재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이 멋진 바(bar)의 오너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호연은 잠시 후 중요한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 탓에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점잖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모두가 꾸미는 가운데 더 멋지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일부러 일본에서 걸음을 하는 중요한 손님과의 만남을 앞에 두고는 예의상의 차원으로 그와 같은 욕심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손님은 가게의 확장과 관련된 세부적 의견을 나눌 일본 출신의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2층의 전망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호연의 일행은 약 30여분 째 끝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들의 모습을 중간에 한 번씩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특히나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이율은 혹시 보이는 손님들 중 마음에 꽂히는 남자가 없는지 매의 눈을 하고서 오가는 손님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남녀손님을 받는 일반 바(bar)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내부 인테리어나 손님들의 퀄리티가 높다고 워낙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일반인들 뿐 아니라 심미안이 까다로운 게이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해서 종종 구석진 자리에서 남자 손님들끼리 은밀한 접촉을 갖는 경우가 목격되고 있었다.

“바텐더 또 갈아치운 거야? 새로운 얼굴이 몇 명 보이는데.”

눈썰미 좋은 이율의 질문에 호연이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몇 가지 사정이 있어서 교체했어. 대체적으로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 스펙이 이전보다 훨씬 나아. 키나 마스크도 더 뛰어나고.”

“그냥 네 취향에 맞춰 고른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흘깃 옆을 쳐다 본 이율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건 별다른 표정 없이 잔을 들고 있는 수영이었다. 지금 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동갑내기 정우와 호연, 이율보다 세 살이 어린 수영은 이미 몇 차례 그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 만큼 별다른 위화감 없이 지금의 자리에 섞여들어 있었다. 물론 호연의 오랜 지기인 정우와 이율은 이미 한참 전부터 수영과 호연 두 사람이 깊은 관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긴, 네 취향은 여기 앉아 계신 이쪽 분이신가.”

농담 섞인 이율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은 호연이 마주한 수영의 잔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술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지금 테이블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몇 가지 종류의 술은 현재 이 바(bar)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들이었다.

“와- 인간 장호연 많이 변했네. 말하지 않아도 직접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이왕 따르는 김에 내 것도 좀 따라줘 봐.”

“재미없는 농담하지 마.”

“아이고, 솔로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솔로라니. 전에 만났을 때 누구랑 동거하고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건 끝났어. 밤 궁합은 꽤 잘 맞는데 그것 빼곤 다 안 맞는 것 같아서.”

시원스럽게 대답한 정우가 쯧 하고 혀를 찬 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결과적으로 헤어지긴 했지만 한동안 꽤나 깊이 빠져 있었던 만큼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그의 얼굴엔 씁쓸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

문득 들려온 벨소리에 곧바로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든 호연이 먼저 발신자를 확인하고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선 유창한 일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여튼 대단하지. 저 잘난 얼굴에 머리까지 똑똑하니까. 이렇게 좋은 가게의 주인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신을 향한 이율의 말에 ‘그렇군요.’라고 형식적인 대꾸를 해준 뒤 몇 모금의 술을 목안으로 넘긴 수영이 잠시 후 통화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호연을 쳐다보았다.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간 뒤에 VIP룸으로 안내해야겠어.”

VIP룸은 3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수영씨, 혹시 당신도 VIP룸으로 가고 싶으면 유민이에게 말해. 술은 원하는 만큼 주문하고. 다시 돌아올 거니까 두 사람과 적당히 이야기 나누고 있어.”

짧게 말을 남기고 호연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정우와 이율의 시선이 수영에게 향해졌다. 두 사람의 시선엔 부러움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랜 시간 호연과 알고 지내오며 호연이 이렇듯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지금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상대로 부러움을 넘어서 동경의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대단한데. 대체 어떻게 요리한 거야? 천하의 장호연님을.”

진심어린 호기심을 드러내는 정우와 스치듯 시선을 교환한 수영이 꺼내든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별로 뭘 한 기억은 없는데요.”

“에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호연이가 저렇게 될 리가 없잖아. 보라고. 저건 완전히 현모양처야. 아주 좋다고 알아서 나서서 서방님한테 술까지 따르는 거 보라고. 예전에 사귀던 남자들한텐 진짜로 얄짤 없었는데 와-”

진정성이 느껴지는 감탄사가 연이어 터지는 것을 들으며 수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벽 너머로 1층 플로어의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계단을 내려간 호연이 대기하고 있던 바텐더와 짧게 몇 마디를 나누고서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짙은 차콜 베이스의 초크스트라이프 수트를 멋지게 소화하고 있는 호연은 스치는 손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씬한 체격에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 그는 센스도 무척이나 뛰어나서 스스로를 어떻게 꾸며야 가장 빛이 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단순히 외모에 반해서 호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정작 그가 이 넓은 바(bar)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옆에서 마주한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적당히 흘려들은 채로 호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영은 이제 막 호연이 사라진 입구 주변을 무심코 훑어보던 중 일순 뜻밖의 장면을 시야에 들이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

수영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입구 주변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얼굴에.

수영의 입가가 이내 냉소로 비틀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고. 최근 며칠 동안 습관처럼 떠올렸더니 이제 아예 헛것까지 보이는 모양이라고 짧게 스스로를 비웃은 그는 정신을 환기시키듯 잠시 다른 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구석진 자리로 시선을 되돌렸다.

“.......”

여전히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듯 쳐다보던 수영이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닮은 누군가가 아닌, 틀림없는 윤재였다. 얼굴도 확실하지만 말할 때의 제스쳐나 움직이는 입술의 모양이 그가 알고 있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가 윤재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그와 마주한 자리에는 <민들레>의 알바생인 덩치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성호의 존재를 확인하자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가 되는 수영이었다. 애초에 윤재 혼자서 이런 떠들썩한 장소에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지금 윤재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성호에게서 찾고 있었다.

<민들레>에서 봤을 때와 달리 일부러 차려입은 듯한 윤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말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엷은 분홍색의 니트와 회색 코트의 조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색의 조합이 윤재의 하얀 피부와 맞춘 듯이 잘 어울리고 있었다. 이제껏 <민들레>에 여러 차례 걸음을 하는 동안 수수한 옷차림을 한 윤재를 보며 그가 여기서 조금만 꾸미면 훨씬 눈에 띨 것이라 여겼던 수영의 예상을 지금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앉아 있는 윤재는 제대로 증명시켜주고 있었다. 그 증거로 주변에 앉아 있는 몇몇 커플이 중간에 슬쩍씩 윤재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윤재와 성호가 언제 가게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마신 듯 두 사람의 앞에 놓여 있는 술병들 중 한 병과 다른 한 병의 3분의2 가량이 비워져 있었다. 오래 전 잠시 만났던 시절 윤재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수영의 시선은 자연스레 윤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그레해진 뺨과 반복되는 웃음. 몇 번 손사래를 치면서도 결국 윤재는 성호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소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윤재는 지금도 이미 충분히 취해 있는 상태였다.

어째서 윤재가 오늘 같은 날 성호와 함께 이곳에 와 있는 것인지 수영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의 두 사람이 휴일을 함께 사용한다는 사실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재와 성호 사이에서 특별한 분위기가 읽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두 사람이 그 쪽으로 깊은 관계였다면 남들보다 분위기를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수영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음 주말에 스키 타러 리조트에 갈 예정인데 괜찮으면 같이 가지?”

문득 자신에게 향해온 질문을 들은 수영이 그제야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이율과 정우를 쳐다보았다. 얼마의 시간동안 일행의 대화를 관심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던 그는 좀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동 없이 쥐고만 있던 사이 꽤나 쌓여 있는 담뱃재를 바로 앞 재떨이에 툭툭 가볍게 털어낸 수영이 입을 열었다.

“다음 주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서요.”

“신년이니까 가족모임이라도 있는 거야?”

“뭐, 그렇죠. 할아버지의 생신으로 친척들이 다 같이 모이는 자리라 얼굴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유명한 정치인이시라고 호연이한테서 들은 것 같은데.”

“정치는 그만 두신지 오래 됐어요. 지금은 주말농장을 꾸미는 게 낙인 평범한 할아버지로 살고 계시죠.”

그렇게 말한 뒤 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은 수영이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곧장 윤재에게로 향했다.

‘!’

좀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잦은 웃음을 보이던 윤재가 어느 샌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그와 마주한 위치에 앉아 있는 성호가 이따금씩 말을 건네는 듯 보였지만 윤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타고난 체질 상 남들보다 주량이 센 덕분에 어떤 자리에서도 만취를 해본 적이 없는 수영으로서는 겨우 저 정도의 술-그것도 둘이 나눠서-을 마시고 완전히 뻗어버린 윤재의 상태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지금 이 순간 가슴을 답답하게 메우고 있었다.

일부러라도 보지 않아야 했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며칠째 안고 있는 제어되지 않는 감정이 이 이상 깊어지기 전에 깨끗이 끊어내는 것이 옳은 거라고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민들레>에 발길을 끊어버린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자신을 볼 때마다 움츠리는 상대를 앞에 두고 점점 더 격화되는 감정을 누를 자신이 없었다. 이 감정이 점점 더 자라다보면 언젠가는 우는 윤재를 내리깔고 억지로 범할 지도 몰랐다. 수영은 그와 같은 일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시선을 돌려야 했다. 봐서는 안 될 상대로부터.

‘!’

문득 들려온 문자 수신음에 윤재에게서 시선을 거둔 수영이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호연이었다.

<한 시간쯤 뒤에 가게에 도착할 거야. 내가 손님을 접대하는 시간동안 피곤하면 먼저 맨션에 가 있어. 비밀 번호는 알지?>

호연이 보낸 문자는 특별히 답을 요구하는 내용이 아닌 만큼 답장을 전송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재킷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 놓은 수영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정우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호연이지?”

오랜 지기의 패턴쯤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듯 정우의 얼굴엔 확신이 담겨져 있었다.

“잘 아시네요.”

“당연하지. 예전에 잠깐 사귀기도 했...”

거기까지 말하던 정우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수영에겐 비밀로 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작 비밀 이야기의 한 부분을 들은 수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호연과 정우 사이에 오간 몇몇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예전에 잠시나마 사귄 관계였을 거라고 내심 짐작하고 있던 그는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정우를 향해 오히려 엷은 미소마저 지어 보였다.

“예전의 일 아닌가요. 별로 그렇게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자신부터가 깨끗한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 만큼 남의 과거에도 관대한 수영이었다. 어차피 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섹스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그에게 있어 굳이 과거를 숨기거나 숨기기 위해 거짓을 늘어놓는 일은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참 쿨하네. 수영씨는. 하지만 호연이가 들으면 조금 서운해 할 지도 모르겠는걸.”

“원래는 호연이도 그랬지. 어차피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바람이 다 뭐냐고 말이야.”

“그때야 그랬지만 과연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할까? 난 ‘아니다’에 돈 걸게.”

“나도 ‘아니다’에 걸래.”

“야, 넌 다른 쪽에 걸어야 내기가 되지.”

“아까 현모양처 빙의한 거 못 봤어? 예전의 장호연은 장렬히 사망했다고.”

호연이 막강한 상대를 만났다며 웃음 섞인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무심코 다시 아래층으로 시선을 옮긴 수영은 이내 시야에 들어온 장면을 머리로 인식한 것과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낯선 한 남자가 곤란해 하는 성호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윤재는 이미 완전히 취한 듯 낯선 상대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는 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 수영씨?”

갑자기 재킷을 손에 들고 일어나는 수영을 향해 이율과 정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스치듯 돌아본 수영은 ‘중요한 일이 생각나서요.’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서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 전 낯선 남자의 손이 윤재의 몸에 닿는 것을 본 순간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지금 수영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종종 게이들이 상대를 물색할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아까 전 윤재를 일으키던 남자의 행동을 그저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1층으로 향하는 수영은 이미 두 차례나 지나는 손님과 몸을 부딪칠 정도로 서두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호연과 아까 전 그가 보내온 문자의 내용,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지켜지고 있었던 단단한 결심, 그리고 이후의 일들.

그러나 그 모든 생각들을 뒤로 물리치고 있는 것은 조금 전 보았던, 낯선 남자에게 부축되어진 채로 휘청거리던 윤재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술 취한 남자를 맛있게 먹어치웠다는 경험담을 듣고 가볍게 웃어 넘겼던 수영은 지금 그 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웃음의 흔적조차 없는 얼굴로.

많은 인파를 뚫고 계단을 내려와 마침내 줄곧 시야에 두고 있던 장소에 다다른 수영은 다행히 아직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는 세 사람을 확인하고 곧장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큰 키로 인해 멀리서도 눈에 띠는 수영의 모습을 발견한 성호가 놀란 표정을 지은 채로 다가오는 수영을 맞았다.

“아...”

수영의 이름을 모르는 성호가 입을 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정확히 그와 마주선 위치에서 발을 멈춘 수영이 입을 열었다.

“나 기억하지?”

“아, 네. 그런데 저기... 여기엔 어쩐 일로...”

성호의 질문을 받은 수영은 그러나 일단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룬 채 옆에 서있는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나름대로 차려입은 듯 하지만 보기 흉하게 붙어 있는 살들로 인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핏을 선보이고 있는 남자는 한 손으로 윤재의 팔을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역시나 검은 꿍꿍이가 있었는지 위에서 내려오는 수영의 예리한 시선을 받은 남자는 곧바로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저기, 저희 사장님이 많이 취해버리셔서... 고맙게도 이 분께서 차로 바래다주시겠다고 하셨어요.”

남자의 말을 순수하게 호의로 받아들인 듯한 성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수영이 문득 긴 팔을 뻗어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윤재를 자신의 품으로 데려왔다.

“고맙습니다만 여기서부터는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고맙기는커녕 기분대로는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 당장 이곳에서 큰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는 수영은 의식적으로 평정을 가장한 채 남자에게 말했다. 어딘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러난 남자는 곧바로 등을 돌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서둘러 입구를 빠져나갔다.

“얼마나 마신 거야?”

근처의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쳐다보며 수영이 묻자 성호가 쓴웃음을 지은 채 대답했다.

“사장님은 별로 안 마셨어요. 저기 빈 병은 거의 제가... 사장님이 술 잘 못 한다고 하셨는데 이 정도 도수의 술은 괜찮을 것 같아서 몇 잔 권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도 너무 빨리 취하셔서 저도 놀랐어요.”

대답하는 성호의 얼굴에서 곤란한 기색이 느껴졌다. 확실히 테이블에 놓인 병들 중 빈 것은 두 병뿐으로, 그다지 높은 도수의 술도 아니었다. 술집 주인이라고 해서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이 정도의 주량이면 평범한 사회생활에 참여하기에도 힘든 수준이었다.

차라리 윤재답다고 해야 할까.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윤재의 몸을 지탱한 채 성호에게 말했다.

“윤재... 사장님의 집은 알아?”

“아뇨... 사장님한테 주소를 여쭤보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드셔서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분께라도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하필 사장님이 오늘 핸드폰을 잊고 안 가져오셔서 그것도 안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성호의 말을 들은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도 그의 주변은 오고가는 손님들로 분주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나한테 맡기고 가.”

“아... 네?”

그 사이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낸 수영이 그것을 성호에게 건넸다.

받아든 명함에서 제일 먼저 유명 회사의 이름을 확인한 성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장님은 내가 전에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 적힌 핸드폰 번호로 연락해.”

“아... 그치만...”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수영의 질문을 받은 성호가 잠시 망설이다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술 취한 윤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간다는 것이 찜찜한 그였지만 당장 앞에 서있는 남자의 당당한 기세에 눌린 그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기로 했다. 수영과 윤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성호의 입장에서 수영이 윤재의 집을 안다는 말은 꽤나 신빙성 있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지금 받아든 명함에 적혀 있는 번듯한 회사명과 직함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성호의 의심을 상당 부분 희석시켜주고 있었다. 이전에도 수영이 양과장의 부하직원으로 무척이나 좋은 회사에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터라 명함에 대한 의심은 전혀 품고 있지 않은 그였다.

“저... 그럼 사장님 좀 부탁드릴게요. 오늘 저 때문에 많이 걸으셔서 아무래도 무릎에 무리가 갔을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동하다 다치지 않게 잘 좀 부탁드릴게요.”

“그래.”

“저 그럼 전 계산하고 갈게요.”

테이블에 놓여 있는 계산서를 손에 든 성호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곧바로 계산을 위해 바테이블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수영은 따뜻한 체온을 안기며 자신에게 기대있는 윤재를 슬쩍 내려다본 뒤 그를 부축해 입구로 향했다.

이렇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평소의 수영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현재의 이 상황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끊임없이 가게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지나쳐 윤재를 부축한 채로 를 나선 수영은 곧바로 차도 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대리운전을 부를 생각으로 차를 가져왔던 그는 예상치 못한 일행이 생긴 지금 가장 편하게 택시를 잡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 유흥가는 취객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들 중 일부는 구석도 아닌 차도 근처에서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고, 또 다른 일부는 목이 터져라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여자 친구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건네는 이벤트를 벌이며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과연 크리스마스이브다운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차도 부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팔을 뻗고 흔들고 있는 터라 얼마의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한 대의 택시를 잡은 수영은 우선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줄곧 부축하고 있던 윤재를 밀어 넣은 뒤 자신도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윤재의 옆자리에 올랐다.

탕-하고 뒷좌석의 문이 크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곧 택시는 출발했다.

“사장님?”

앞의 택시가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호연이 문득 옆에서 들려온 직원의 부름에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미안해. 곧 따라 갈 테니 먼저 안으로 모시도록 해.”

중요한 손님을 옆에 두고 잠시 동안 혼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호연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의 입구로 향하는 일행의 모습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게 얼어붙은 채였다.

잘못 본 것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조금 전 택시에 오른 남자는 틀림없는 수영이었고 그가 앞서 뒷좌석에 태운 건 취해 있는 낯선 남자였다.

일시에 밀려든 불쾌한 기분은 곧 초조함으로 바뀌어 갔다. 애초에 각자 흥미가 다하면 지체 없이 헤어지자는 수영의 말로 시작된 관계이지만 적어도 호연은 지금 당장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영 역시 아직까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만큼 조금 전 호연이 시야에 들인 광경은 더더욱 그를 당혹스럽고 초조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최대한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안으로 들어선 호연은 곧바로 바텐더인 유민을 찾아 그에게 다가갔다. 한창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유민이 호연을 보고서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생각보다 빨리 오셨...”

“조금 전 수영씨랑 같이 나간 남자 누군지 알아?”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유민이 곧바로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계속 바빠서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수영씨가 누구랑 같이 나가신 건가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바테이블을 바쁘게 두드리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회색 외투에 분홍색 니트를 입고 있는 남자였어. 머리는 까맣고 취해 있었던 것 같아.”

이어진 호연의 말을 듣고서 문득 뭔가를 떠올린 유민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의 뒤쪽에 있던 동료 바텐더가 이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빨리 주문받은 칵테일을 만들어달라고 재촉해왔다. 그에 곧바로 호연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 안 보여?”

오너인 호연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은 바텐더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서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런 그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 호연이 유민에게 시선을 옮기고서 말했다.

“뭐라도 상관없으니까 짐작 가는 게 있으면 말해줘.”

“회색 외투라면 흔하지만 분홍색 니트라고 하니까 생각나네요. 꽤 예쁘장한 남자였죠. 그 남자는 오늘 처음 봐서 잘 모르지만 그와 같이 온 남자는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오늘 빼고는 늘 여자 친구랑 왔었는데 여자 친구가 저한테 술에 대한 질문을 해서 그 친구랑도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거든요.”

하나의 단서를 잡아낸 호연이 눈동자를 빛낸 순간 유민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몇 번 만난 것 외엔 아는 게 없어요. 현재 휴학 중이라는 말만 얼핏 들은 기억이 나네요.”

완전히 도움이 되지도,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정도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들은 호연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가장 확실하게는 직접 수영에게 묻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이 수영을 질리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호연은 다소 느리더라도 최소한의 부작용을 낳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혹시 그 휴학생이 다시 오면 적당히 서비스를 해주고 그 일행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줘. 가능하면 직업이나 연락처까지.”

“아...”

지금 내뱉어진 호연의 말이 부탁이 아닌 명령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유민은 당혹스런 기분을 억누른 채 얼굴 위로 애써 미소를 드리우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이처럼 고요하게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호연의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유민은 조만간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아는 장호연은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해서 스스로 버리면 모를까, 아직 애착을 갖고 있는 자신의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남자였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유민을 잠시 서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호연이 문득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전 차로 도착한 뒤로 어느 샌가 십여 분여가 흘러가 있었다. 이 이상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현실적인 생각을 떠올린 그는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들려온 문자수신음을 듣고 그대로 제자리에 발을 멈춘 호연이 재킷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수영이었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미안해.>

짧은 문자를 확인한 것과 동시에 호연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핸드폰을 쥔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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