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23화 (23/66)

23.

새벽에 내린 비로 거리를 덮고 있는 빙판은 한층 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거리를 이동해 오는 동안 벌써 두 명의 행인이 크게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을 목격한 일행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눈에 띠게 조심스러워져 있는 상태였다. 얼마 전 영업과의 한 직원이 빙판길에 크게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은연중 그들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했다.

“염화칼슘이 없으면 흙이라도 대충 좀 뿌려놔야지.”

“어차피 또 눈이 온다니까 지금 뿌려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하나보네요.”

“그래도 이렇게 미끄러운데 그냥 놔두면 큰 사고가 날 거 아냐. 안 그래도 사람들 왕래가 잦은 곳인데. 어디 누구 하나 뼈가 부러져야 듣는 척 하려나.”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도 벌써 두 번 휘청거리다가 옆에 있는 부하직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버텨낸 양과장으로, 그는 지금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다섯 명의 직원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순대국밥부터 우동까지 나온 의견은 다양했으나 결국 오늘 점심 메뉴를 결정한 건 역시나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양과장이었다. 상사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기 때문에 부하직원의 입장에선 당연히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눈치 없는 양과장은 시도 때도 없이 부하직원들에게 함께 식사를 할 것을 권유해오고 있었다.

“벌써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인가. 시간 참 빨리도 가네.”

“최근엔 일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영진씨는 내일 데이트야?”

“뭐, 그렇죠.”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영진을 향해 동료들이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단 한 사람 수영은 제외하고서.

“좋겠네. 아우, 나도 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야 되는데.”

“그냥 나처럼 일과 결혼하라고.”

“일과 결혼은 무슨. 너 어제도 업소에 갔잖아. 거기 영미씨인가가 마음에 든...”

“야, 뭔 소리야.”

황급히 옆에 있는 세민의 입을 틀어막은 형주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현재 같은 사무실 내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 샌가 단순한 동료를 넘어서 친구에 가까운 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뒤에서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대화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수영이 뒤뚱거리는 양과장과 위치를 맞추기 위해 살짝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187센티의 장신인데다 유난히 다리가 긴 체형의 그는 당연히 그만큼 보폭도 넓어서 이렇듯 스스로 제어하지 않으면 일행들과 섞여 걸을 수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활기 찬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양과장이 행선지로 정한 식당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일단 창가 쪽의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한창 점심시간인 터라 식당 안은 인근의 회사원들로 붐비고 있었다. 각자 따로 왔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인을 발견한 자들이 각각 다른 자리에 앉은 채 눈과 손짓으로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이따금씩 눈에 띠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각자 원하는 것을 주문한 양과장의 일행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있었던 회의의 내용을 주제로 토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낸 견적과 비교하면 우리 쪽이 유리한 건 맞지만 가격적인 면으로 보면 순수익이 줄어드니까 일단 좀 더 계산을 해서 결정을 해야 할 거야. 이 기획안 대로면 위에서 승인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우리 쪽에서 맡은 건 고품질 라인이니까 어느 정도의 추가비용은 감수하고 있지 않겠어요?”

“샘플이 잘 나오기만 하면 위에서도 군말 않고 승인을 내주겠지. 어쨌든 일주일 전에 먼저 보낸 샘플은 별다르게 좋은 평은 못 받았으니까 확실히 손을 봐야 돼.”

“색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대리님.”

줄곧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수영이 문득 자신에게 향해진 질문을 받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 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일단 여기저기 다시 수정을 해보긴 하겠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한 색상 변경은 없을 거야. 조합 상 이쪽이 재질과 만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번에 보낸 샘플도 지적받은 부분은 색상이 아니라 디자인이었으니까요. 역시 푸른색 계열이 무난하고 사람들 눈에 익히기에 좋죠.”

이후에도 한참을 더 이어지던 진지한 대화가 멎은 건 점원의 손에 들려나온 음식들이 차례로 넓은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한 시점에서였다.

대부분은 알탕으로 통일된 가운데 다른 메뉴를 주문한 두 사람은 조금 늦게 나온 음식을 앞에 두고 뒤늦게 식사에 합류했다.

“에이, 저도 그냥 알탕으로 시킬 걸 그랬나 봐요.”

떠들썩한 주변의 대화소리를 들으며 잠시 식사에 열중하던 일행이 불만이 묻어나는 세민의 말을 듣고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알탕은 어제 먹어서 오늘은 생각이 없다며 생태찌개를 주문했던 그는 몇 숟가락 국물을 떠먹고서 근처에 놓인 밑반찬을 뒤적이고 있었다.

“별로야?”

“네. 전에 그 허름한 가게에서 먹었던 게 몇 배는 맛있어요.”

“허름한 가게?”

“네, 술집이요. 다리 저는 남자가 주인인 가게 있잖아요.”

세민의 입에서 ‘다리 저는 남자’라는 말이 나온 순간 미간을 좁힌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민에게 시선을 던졌다.

“<민들레> 말하는 건가?”

“아, 맞아요. 그 가게. 거기 생태찌개가 맛있잖아요. 첨엔 별로 특징이 없다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숟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맛이 있어요.”

“맞아. 다른 것도 괜찮은데 특히 생태찌개가 맛있지. 그 집은.”

“전 오징어 버터구이가 제일 맛있더라고요.”

좀 전까지 진지하게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일행은 어느 샌가 <민들레>의 메뉴들을 화제에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영은 대화에 끼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당분간 일에 매진하기 위해 일부러 윤재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했던 그로서는 윤재의 가게가 화제에 올라 있는 지금의 상황이 역시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내내 ‘그 날’의 일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였다. 상대가 좀 더 가볍게 놀 만한 성격이었거나 아니면 이번이 첫 만남이었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생각대로 행동했을 그는 크게 걸리는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상황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으로 인해 한 번 상처를 입은 윤재를 또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수영이었다. 애초에 윤재와 같은 타입은 자신과 어울릴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자신과 맞는 성향의 상대-연석과 같은-와 적당히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뒤끝이 없어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영은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며칠간 <민들레>에 발길을 뚝 끊고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대로 이쯤에서 감정이 정리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길일 터였다. 자신보다도 윤재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나 그런 수영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그의 일행은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는 와중에도 <민들레>에 대한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근데 갈 때마다 빈자리가 왜 그렇게 많은 거야? 그 집은.”

“가게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좀 후미져서 그런 거 아닌가? 아는 사람은 찾아서 가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쉽게 들를 만한 위치가 아니잖아.”

“난 거기 주인 좋더라. 상냥하기도 하고 남잔데 묘하게 참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착하긴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장사할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왜?”

“허여멀건데다 가늘가늘 해서 만만하게 보일 타입이잖아. 진상 손님이 오면 혼자서 해결하기 힘들걸. 힘이 센 것도 아니고 기가 센 것도 아니고. 그런 타입은 조용히 회사원으로 사는 게 좋다고. 이왕이면 연구직 같은 분야로.”

세민의 말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뜻하지 않게 윤재가 진상손님에게 당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한 그는 적어도 그 부분과 관련해서 만큼은 세민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이 가게를 꾸려가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윤재는 사람들을 접대하며 돈을 벌 만한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모름지기 장사란 성실하고 상냥한 태도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 거기 생태찌개가 좋다고.”

“뭐,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도 여자 손님은 많은 것 같던데? 아주머니들도 많이 보이고.”

“주인 얼굴이 예쁘장해서 그런가. 요즘 보면 그런 스타일이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것 같더라고.”

“칫, 잠깐 사귈 거면 몰라도 결혼하라고 하면 다들 싫다고 할 걸. 안 그래도 더 좋은 조건 찾는다고 깐깐하게 구는 게 요즘 여자들인데 그런 하자있는 남자를 누가 좋다고 하겠어? 일단 같이 다니기 쪽팔려서라도 싫다고 할 걸. 내가 여자라도 싫겠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문득 들려온 비웃음 섞인 형주의 말에 젓가락을 쥔 수영의 손이 멈췄다.

냉정한 현실에 비춰볼 때 조금 전 들려온 말이 그다지 틀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수영이었다. 아마도 형주가 지칭한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도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넘겼을 터였다.

그러나 조금 전 형주가 비웃음으로 내리 깐 건 다른 사람이 아닌 윤재인 만큼 간단히 남의 일로 치부하고 그 말을 흘려 넘길 수 없는 수영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아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탁-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형주가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난 소리는 수영이 테이블 위에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난 마찰음이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을 굳이 나서서 비하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형주씨.”

줄곧 대화에 끼지 않고 있던 수영이 모처럼 만에 입을 열자 그때까지 형주에게 고정되어 있던 동료직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수영에게 옮겨졌다. 수영의 말로 인해 졸지에 약자를 험담한 인간쓰레기의 이미지가 생성되어 버린 형주가 황급히 변명하기 위해 나섰다.

“아뇨, 대리님. 전 비하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 사람은 일반인도 아닌 다리에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이야기라도 가려서 해야 할 말이 있는 겁니다. 특히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회사에서 가르쳐야 합니까?”

날카로운 수영의 일침을 듣고 할 말을 잃은 형주가 잠시 미간을 좁힌 채 침묵을 지키다 결국 ‘주의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끝까지 변명을 해봤자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냉정히 인정한 결과였다. 평소 대화에 끼는 일이 많지 않은 수영이 가끔씩 입 밖에 내는 말은 그 한 마디가 남들과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 만큼 절대적인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조심하는 게 좋지.”

한동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양과장이 마침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슬쩍 앞으로 나서 수영을 거들었다. 윤재의 모친과 일정의 친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일부러 지인들을 데리고 갈 만큼 평소 <민들레>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양과장의 말까지 더해지자 한층 더 궁지에 몰린 입장이 된 형주가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가끔씩 기분에 따라 막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맡은 일만큼은 확실한 결과를 내고 있는 그는 빠르게 상황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순식간에 침울해진 분위기를 깬 건 문득 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언쟁소리였다.

“아, 왜 남의 가방을 집어던져?!”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누가 맘대로 가방을 놓으래요?”

“지금 다른 사람들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빈 그릇 앞에 두고 언제까지 자리 차지하고 있을 건데? 다 먹은 거 보고서 자리 맡으려고 놓은 건데 그게 잘못이야?!”

“아니, 이 여편네가 어디서 재수 없게 꼬장이야? 하여튼 가방부터 던지고 보는 무식한 꼬락서니 하고는. 밥 못 쳐 먹어서 걸신들린 귀신이라도 붙었나.”

“뭐야? 이 새끼야! 그래, 귀신 붙었다! 귀신 붙었는데 뭐!”

들려오는 내용으로 보아 한 아주머니가 아직 주인이 있는 자리에 가방을 놓았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남자와 언쟁이 붙은 듯 했다. 나이는 여자 쪽이 위인 듯 했지만 이미 감정싸움을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엔 손가락질과 고성만이 오갈 뿐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나온 젊은 종업원이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나섰지만 이미 잔뜩 흥분한 두 사람은 금세라도 몸으로 맞붙어 싸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슬슬 가봐야겠는데. 시간이... 에이, 아깝네. 좋은 구경 놓치게 돼서.”

사소한 시빗거리로 시작되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싸움을 잠시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던 수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양과장을 따라 긴 몸을 일으켰다.

“손님, 여기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 조금만 진정해주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싸우는 손님들을 말리고 있는 젊은 점원은 언젠가 윤재가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하.’

이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에조차 자연스레 윤재를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를 비웃고 싶은 기분이 든 수영은 요란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손님 중 한 명인 중년 남자가 크게 몸을 움직이다 지나가는 자신의 어깨에 부딪쳐오자 곧바로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아...”

그렇지 않아도 높은 곳에 머리가 있는 수영의 강한 기세에 눌린 것일까, 조금 전까지 안하무인으로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수영에게 부딪친 것에 대한 짧은 사과를 남기고 부랴부랴 여자의 곁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세요?”

옆에서 물어온 세민에게 짧게 고갯짓으로 대답한 수영은 잠시 멈춰 서 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여 입구로 향했다. 그 사이에도 그의 등 뒤에서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가게 안을 울리는 남녀의 고성과 쩔쩔매는 점원의 애원 섞인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수영의 일행이 입구를 나설 때까지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벌써 몇 곡의 노래가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늘 이어폰으로만 듣다가 난생 처음 생으로 접한 사운드는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히 흥분에 도취되어 가고 있는 관객들은 언제부터인가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색색의 조명 아래 멋진 연주를 하고 있는 뮤지션과 그 아래서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는 관객들의 화려한 몸짓.

그러나 귀가 멀어버릴 듯 떠들썩한 이 상황에서 지금 성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유명 밴드가 아닌, 바로 곁에 서있는 윤재였다.

윤재가 웃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주변이 워낙 소란스러워 또렷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간간이 주변의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윤재의 목소리는 성호의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동안 마치 홀린 듯이 윤재를 바라보던 성호가 문득 자신에게 고개를 돌려온 윤재와 시선을 마주하고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실제로 보니까 신기해!”

그렇게 외친 윤재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당신의 모습이 더 신기해요-라는 것이 지금 성호의 속마음이었지만 그는 일단 말 대신 미소로 대답을 해주었다.

평소 좋아해온 밴드라는 준석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윤재는 공연이 이어지는 내내 거의 전곡을 흐트러짐 없이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관객들처럼 제자리에서 쿵쿵 뛰거나 적극적으로 몸을 흔드는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평소 가게 안에서의 윤재의 모습만을 봐온 성호로선 이 정도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평소 늘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왔던 윤재도 사실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의 청년이라는 사실을 새삼 현실로 느끼고 있었다.

두 시간에 걸친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고 인파들 틈에 섞여 공연장을 빠져나온 성호와 윤재는 아직도 조금 전의 흥분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한 채였다. 특히나 윤재는 마지막 앵콜 곡으로 불려졌던 노래를 나직하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사를 보지 않고도 막힘없이 흥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평소 이 곡을 자주 들었던 모양이라고 성호는 윤재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며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같이 가자고 안했으면 어쩔 뻔 하셨어요?”

장난기 섞인 성호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추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평소 자주 들으셨나 봐요? 가사 보지 않고도 부르시는 거 같던데.”

“응. 특히 3집 곡은 전부 다 좋아해서 CD 사놓고 하루에 몇 번씩은 들었던 것 같아. 지금도 가끔씩 듣고 있고.”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그의 행동에 따라 덩달아 걸음을 멈춘 성호는 윤재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는 것을 보고서 자신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성호가 짧게 소리를 낸 것과 동시에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내리기 시작하나 보다. 일기예보에선 확률이 낮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의 눈.

예정대로라면 이 로맨틱한 눈을 여자 친구와 함께 봤을 성호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며칠 지나지 않은 탓일까 지금 현재 그의 가슴 한 켠엔 실연의 아픔이 남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우울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윤재가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다가 한 노점상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걷던 도중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그는 갑작스런 윤재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향해 ‘좀 출출하지 않아? 간단하게 뭐 좀 먹자.’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잠시 후 윤재가 주문한 건 버터구이 오징어와 칠리 핫도그였다. 할머니가 주인으로 계시는 노점상의 메뉴는 안타깝게도 그 두 가지 메뉴가 전부였다.

윤재로부터 버터구이 오징어를 건네받은 성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가게에서도 매일 보는 건데 여기에서도 보네요.”

“다른 데서 파는 것과 맛이 어떻게 다른지 한 번 비교해보려고.”

이런 곳에서까지 투철한 직업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윤재를 슬쩍 쳐다본 성호가 들고 있던 오징어를 입에 넣었다.

“워뗘? 맛있지?”

마주한 위치에 서있는 할머니의 질문에 성호와 윤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맛있었다. 버터의 향이 깊진 않았지만 대신 좋은 오징어를 쓰는지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정말 맛있네요. 이 오징어는 어디서 사 오시는 거예요?”

윤재의 질문을 받은 할머니가 오징어에 버터를 바르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집이 있어. 거기 오징어가 참 실하고 좋거든. 아들놈의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집인데 그 녀석이 참 착혀.”

이어지는 아들 내외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한 태도로 들어주던 윤재는 결국 할머니로부터 오징어를 구입해오는 가게의 주소와 연락처를 얻어냈다. 지나던 길에 그냥 한 번 들러본 것뿐이었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두 봉지 더 주세요.”

추가로 두 봉지를 더 구매한 뒤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깥으로 나온 윤재는 아직까지도 오징어를 질겅거리고 있는 성호를 쳐다보고 작게 웃었다.

“수완이 좋으신데요?”

“수완이라니...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여쭤본 것뿐이야.”

돌아온 윤재의 대답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윤재가 건네는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 역시 조리가 간단한 음식일수록 원재료의 중요성이 높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는 그는 봉투 안에서 새 오징어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이제 막 구운 거라 아직 뜨거운 감이 있었지만 혀가 조금 데는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는 과연 수많은 연인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한껏 차려입고 나온 연인들은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한층 더 들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캐럴과 야간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물들, 팔짱을 낀 채 간지럽게 애정표현을 하는 연인들.

거리를 지나는 동안 눈에 보이는 장면은 솔로들의 염장을 지르는 것들뿐이어서 오징어를 우물거리는 성호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굳어졌다. 며칠 전만 해도 엄염한 커플이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솔로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조금 슬픈 기분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거리를 지나는 연인들을 조용히 바라보던 윤재가 입을 연 것과 동시에 몇 발자국 앞서 걷던 성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모처럼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나오셨는데 벌써 들어가면 아깝잖아요.”

성호의 말에 윤재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모처럼 외출을 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신경 써서 옷을 입고 나온 윤재는 지금 검은 슬랙스와 흰 셔츠, 그 위에 인디언핑크색의 니트와 회색 코트를 걸친 깔끔한 옷차림을 선보이고 있었다. 평소에도 이미지 자체가 깨끗하지만 이렇듯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그는 그야말로 곱상한 도련님의 분위기를 제대로 내고 있었다.

“사장님은 니트 종류를 좋아하시나 봐요. 평소에도 가게에서 스웨터를 많이 입으시던데요.”

윤재가 입고 있는 인디언핑크색 니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성호가 슬쩍 질문을 던지자 남은 오징어가 들어 있는 봉투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윤재가 대답했다.

“추위를 좀 많이 타는 체질이라서. 거기다 니트류를 입으면 살이 좀 쪄 보이는 효과도 있고.”

“아... 그래서 많이 입으시는구나. 사실 평소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특히 지금 입고 계신 엷은 분홍색 니트요, 사장님 피부가 하얗고 깨끗한데다 목이 길어서 그런지 진짜 잘 어울려요. 완전 사장님을 위해 만들어진 옷 같아요!”

열정이 담긴 성호의 목소리가 조금 크게 울려 퍼지자 마침 곁을 스쳐 지나던 한 커플이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진정성이 담긴 칭찬을 받고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된 윤재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좋게 봐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엄청 비싸 보이는데 어디서 사신 거예요?”

윤재의 니트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대답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사러 갈 기세의 성호였다.

“비싼 거 아니야. 며칠 전에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지나던 길에 산 건데 그 때 3만원인가 주고 샀을 거야.”

윤재의 대답을 들은 성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재가 워낙 잘 소화를 하고 있는 덕분에 당장 보기에 비싼 옷처럼 보이긴 하지만 확실히 평소 그의 성격을 보면 가게의 매출도 시원찮은 상황에서 자기 외모를 꾸미겠다고 비싼 옷을 사 입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눈에 봐도 자신의 니트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성호를 앞에 두고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벗어서 선물로 주고 싶은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성호와 윤재의 체격 차이는 제법 심했다. 두 사람 간에 몸무게로만 따져도 20kg 차이 이상은 날 것이 분명했다.

“일 년에 한 번 뿐인 크리스마스이브인데다 눈까지 내리는데 이대로 그냥 집에 가면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놀다 가요.”

“놀다니... 어디서?”

“술도 있고 분위기도 좋은 곳이요.”

술 얘기가 나오자 성호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을 느낀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나, 술은 잘 못 마셔. 금방 취하거든.”

“그럼 조금만 마시면 되죠. 오늘은 모처럼이니까 긴장 풀고 놀아요, 네?”

필요 이상으로 업 되어 있는 성호의 태도에서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한 노력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여자 친구와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금 주변을 지나는 연인을 보고 있는 성호는 내심 무척이나 씁쓸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윤재였다. 평소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것도 멋진 공연을 즐기고 나온 여운이 남아 있는 데다 구색 맞춰 눈까지 내리고 있는.

“가자.”

윤재의 허락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성호의 얼굴 위로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좋아하는 성호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윤재는 분위기 좋은 가게를 알고 있다며 앞장서기 시작한 성호를 따라 자신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역시 사람이 많네요.”

지하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의 상당수는 역시나 젊은 연인들이었다. 이미 멋진 데이트를 실컷 즐긴 듯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들의 손엔 인형이며 꽃이며 다양한 선물들이 들려져 있었다. 이런 날에 솔로들은 그냥 집에서 특선영화나 보는 게 낫다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어딘가 묘하게 사귀던 여자 친구와 닮은 여자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던 성호가 문득 자신의 앞에 자리게 난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곁에 서있는 윤재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앉으세요.”

“아냐, 괜찮아.”

“빨리 앉으세요.”

그 사이 자리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는 아주머니를 캐치한 성호가 거의 완력을 사용하다시피 해서 윤재를 앞자리에 앉혔다. 그로 인해 졸지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윤재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걷지 않고 서있을 때는 일반인들과 똑같이 보이는 그인 만큼 한창 젊은 나이의 남자가 떠밀리듯 자리에 앉게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것이 그로서는 민망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저는 다리가 불편합니다.’라고 외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가야 해?”

“일단 선릉에서 갈아타야 돼요.”

“응.”

성호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몇 걸음 떨어져 서있는 나이든 어르신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앉으세요.”

“아, 괜찮아요.”

“저희는 이제 금방 내릴 거라서요. 앉으세요.”

“아... 정말 괜찮은데... 이거 참 고마우이.”

자리에 앉는 할아버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가 옆에 선 성호를 쳐다봤다. 왜 일어났냐고 성호가 눈으로 묻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오히려 앉아 있는 게 더 불편해.”

“별로 흉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냥 사장님이...”

예뻐서-라고 말하려던 성호가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다 큰 남자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잘 갖춰 입은 오늘의 윤재는 평소보다 많이 화사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윤재의 질문을 받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성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흉본 건 아니라고요.”

그 증거로 지금도 주변에 있는 몇몇 젊은 아가씨들이 윤재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버젓이 남자 친구를 옆에 두고서.

그렇게 얼마간 주변의 시선 속에 방치되어 있던 윤재가 성호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온 건 그로부터 삼십 여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아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그 사이 꽤나 굵직하게 변해 있어서 화려한 불빛들로 빛나는 도심 거리의 간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하얀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여긴 사람이 더 많네.”

“이 근처에 클럽하고 술집이 많거든요.”

지나는 행인들을 슬쩍 한 번씩 쳐다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성호가 문득 뒤쳐져서 걷고 있는 윤재를 발견하고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갔다. 자신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 안 그래도 불편한 걸음에 속도를 올리고 있었을 윤재에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든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가끔씩 친구들과 찾았던 클럽과 나이트 몇 군데를 후보로 두다가 그나마 윤재와 가장 분위기가 맞을 듯한 장소를 행선지로 정한 성호는 이제야 처음 생각보다 먼 거리를 이동해온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윤재로부터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그였다.

“괜찮아. 이제 다 온 거지?”

“네, 바로 저기에요.”

짧게 대답한 성호가 멀리 보이는 간판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세련된 간판에 깔끔하게 새겨진 글자를 읽어낸 윤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voyage...?"

“네, 전에 여자 친구 추천으로 몇 번 같이 갔었는데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안의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바텐더 중에 미남이 많아서 이 근방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바(bar)래요.”

“...그래? 그러고 보니 간판부터 깨끗하고 세련된 느낌이 드는 것 같네.”

“그쵸? 안에는 예쁜 손님도 되게 많아요.”

벌써부터 예쁜 아가씨 손님을 볼 생각으로 뺨이 느슨해진 성호를 보며 윤재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훅 하고 불어온 바람에 주변으로 내리던 눈이 춤추듯 날리기 시작했다.

“아, 또 바람 부네. 추운데 빨리 가요.”

“...응.”

짧게 대답한 윤재가 잠시 멈춰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란히 선, 덩치의 차가 큰 두 사람의 뒷모습은 곧 쏟아지는 인파들 틈에 섞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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