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혹시 서두르다 자신처럼 넘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다가오는 수영을 바라보던 윤재는 잠시 후 무사히 바로 앞에 안착한 수영이 내미는 손을 쳐다보았다.
“일어나.”
“.......”
수영으로선 별다른 의미 없이 내민 손일 텐데도 윤재는 그 손을 잡는 것이 망설여졌다.
잠시 수영이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재는 결국 자신의 힘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데는 없어?”
빙판 위로 내딛는 윤재의 걸음이 부자연스러웠지만 평소에도 다리를 저는 그인 만큼 지금의 이 불균형한 걸음이 넘어진 후유증에 의한 것인지 수영으로선 알기가 어려웠다.
“그냥 살짝 넘어진 거라서 다친 데는 없어요.”
“엉덩이에 눈 묻어 있어.”
“아...”
지적을 받은 윤재가 뒤로 손을 뻗어 엉덩이를 툭툭 털어냈다.
조금 전 다친 데는 없다고 대답했지만 부딪친 부분에 살짝씩 힘이 닿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들어가세요.”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어낸 뒤 그렇게 말한 윤재가 앞서 걷기 시작하자 수영도 그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
입구를 지나친 순간 수영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차장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예상한대로 단 세 팀의 손님만으로 채워진 내부는 썰렁했다. 그나마도 한 팀은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가뜩이나 썰렁한 가게 안은 이제 아예 휑한 분위기가 될 듯 했다. 어제와 오늘 수영이 찾았던 다른 몇 곳의 가게들은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던 만큼 냉정히 말해 지금의 이 썰렁한 사태를 단순히 날씨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넓지 않은 가게 안의 한 구석에 플라스틱으로 대충 모양만 잡아 놓은 싸구려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 있었다. 나름대로 연말의 분위기에 맞춘다고 가져다 놓은 듯한 트리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장식이 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불이 깜빡 깜빡거리는 루돌프 모양의 장식물이 놓여 있었다. 수영이 가장 최근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자리에 앉은 수영의 시선이 크리스마스트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챈 윤재가 들고 온 물티슈와 컵을 그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인 성호가 가져온 거예요. 연말 분위기니까 조금은 장식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요.”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미지 상 윤재가 저런 것을 직접 가져다 꾸몄을 것 같지는 않다고 여기고 있던 그였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질문을 받은 수영이 벽에 걸린 메뉴를 쭉 한 번 눈으로 훑어보았다. 사실 차를 가져온 만큼 술을 마시겠다는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먹을 만한 메뉴의 종류는 많았다. 전에 일행들과 함께 왔을 때 먹었던 메뉴들 중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몇 가지 종류를 머릿속에 담고 있는 수영은 일단 대리운전을 부를 각오를 하고 술을 마시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적당한 걸로 만들어줘.”
애매한 대답을 들은 윤재가 문득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퇴근 후에 바로 오신 것 같은데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그럼 식사를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내어올 밑반찬은 몇 가지 없지만요. 그거라도 괜찮으시겠어요?”
배려가 담긴 윤재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문 채 뭔가를 생각하던 수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주점인데 밥도 파는 거야?”
“메뉴에 없듯이 평상시엔 팔지 않아요. 밥은 그냥 저랑 성호가 먹기 위해 따로 조금 해놓은 거죠. 어쨌든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으니까...”
말하던 도중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윤재가 ‘그럼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썰렁한 가게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한 수영의 기분은 생각이 깊어질수록 착잡해졌다.
얼마 전만 해도 손님이 좀 느는가 싶던 가게가 이처럼 일시에 휑해진 데에는 아무래도 근래에 있었던 갑작스런 휴무 탓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 그는 지금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들이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이제까지 남의 가게야 장사가 되든 말든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수영은 어딘가 보기에 안쓰러운 윤재의 존재 때문인지 <민들레>에 들를 때마다 무심코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의 수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잠시 후 기다리는 수영의 앞에 음식을 가져다주러 나온 것은 윤재가 아닌 성호였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오는 성호를 향해 적당히 인사말을 건넨 수영은 자신의 앞에 하나하나 차례로 놓이는 반찬들을 훑어보았다.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겨져 있는 밑반찬은 가지무침과 미역튀각, 어묵 볶음이었고 한 가운데 놓인 채 아직도 보글보글 활기 찬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찌개는 꽁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로 보였다.
찌개에 시선을 두고 있는 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성호가 문득 고개를 든 수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마침 돼지고기가 떨어져서요. 대신 꽁치를 넣은 건데 괜찮으세요?”
“별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이미 몇 번 얼굴을 본 상대에게 수영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덩치는 크지만 묘하게 어린 티가 나는 성호의 외모를 스치듯 관찰한 수영은 대충 눈대중으로 그의 나이가 자신보다 너 다섯 살쯤 어릴 거라고 비교적 정확히 짐작하고 있었다.
“저기... 가끔 오시는데 저희 사장님과는 어떤 사이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수영이 대답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윤재와 자신의 관계.
그것은 수영이 이곳을 찾는 내내 머릿속에 두고 있던 의문이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진지하게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손님과 주인이겠지.”
잠시 생각하던 수영이 결국엔 가장 객관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제 와 예전의 일을 들춰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생판 남에게 발설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시구나... 사실 전 두 분이 가끔 같이 계시는 걸 보고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친구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분위기이긴 했지만요. 살짝 서먹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
마냥 가벼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나름대로 눈썰미는 있는 모양이라고, 수영은 앞에 서있는 성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희 사장님, 정말 좋은 분이세요. 성실하고 배려심 깊고 또 웃으면 참 예쁘시죠. 아, 예쁘단 얘긴 혹시라도 전하지 말아주세요. 사장님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래.”
성호에게 듣지 않아도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김윤재가 어떤 남자인지는. 심지어 그의 피부결과 몸을 열 때의 세세한 반응까지도.
“어쨌든 앞으로도 저희 사장님, 아니, 저희 가게 잘 부탁드릴게요. 유명한 회사에 다니신다는 얘길 언뜻 들은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주변에 아는 지인 분들도 가끔씩 데려와주세요. 사실 저번엔 정말 큰 도움이 됐거든요. 보면 아시겠지만 어제하고 오늘은 정말 처참할 정도로 손님이 없어서 제 마음 같아선 당장 아는 사람들이라도 다 부르고 싶은 심정이에요.”
알바생의 신분을 넘어서 마치 <민들레>를 자신의 가게처럼 걱정하는 성호의 말에 수영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찬 부족하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수영을 단골손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호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주방에서 들려온 윤재의 부름에 따라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근처의 슈퍼에 가서 부족한 몇 가지 재료 좀 사와 달라는 윤재의 부탁을 받은 그는 늘 그렇듯 밝은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점퍼를 걸쳐 입고 가게를 나섰다.
음식이 나오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수영은 젓가락을 들었다.
찌개 하나와 단 세 가지 종류의 밑반찬. 놓인 반찬 수는 조촐하지만 먹어보니 모두가 깔끔한 맛을 내고 있었다. 단순히 돈을 아끼려고 최소한의 재료만을 사용했다고 하기엔 맛이 꽤나 괜찮아서 식사를 하는 동안 수영은 이 앞에 놓여 있는 반찬들이 사실은 어디 전문 반찬가게에서 사온 게 아닐까 하는 진지한 의구심마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여기 오징어 버터 구이 좀 더 가져다주세요!”
문득 등 뒤에 있던 손님 중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자 잠시 텀을 두고 윤재가 주방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손님이 주문한 음식이 담긴 쟁반이 들려져 있었다.
“오늘은 손님이 없네요. 이상하네, 여기 안주 진짜 맛있는데.”
“눈이 많이 와서 그런 것 같아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윤재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이어지는 손님의 말을 들었다.
“여기 원래 계시던 아주머니가 어머님이신가봐요? 얼굴이 쏙 빼닮았네.”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네. 어머님이 미인이시던데 아들도 참 미남이네. 소문나면 여기에 여자 손님들이 많이 오겠어.”
“내가 자주 가는 헬스클럽에 젊은 아가씨들이 많거든. 나중에 다 같이 한 번 올게. 대신 서비스 좀 해줘요~”
“나도 나중에 신랑이랑 같이 올게. 자주 가는 목욕탕에 가서 소문도 많이 내주고.”
“감사합니다.”
연말 모임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아주머니들의 수다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는 것을 기회로 자리를 벗어난 윤재는 주방으로 돌아가기 전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윤재의 말을 들은 수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차(茶)가 있으면 좀 갖다 줄래?”
“차요? 판매용은 아니지만 홍차와 녹차가 있는데...”
“녹차로 줘.”
“알겠어요.”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리려던 윤재가 문득 입구에서 들려온 종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수영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있었다.
“아이고~ 왜 이렇게 안이 썰렁해?”
쯧쯧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선 건 한손에 양푼을 들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중년 여성이었다. 윤재와는-정확히는 윤재의 모친과-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그녀는 이 근방에 있는 제법 큰 떡집의 여주인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윤재야. 이거 방금 전에 뽑은 시루떡인데 맛 좀 보라고 가져왔어.”
그렇게 말하며 아주머니가 내민 양푼 안에는 이제 갓 만들어진 시루떡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상태로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 이거 손님들께 조금씩 나눠드려도 괜찮죠?”
“응? 아, 그래. 그러면 좋지.”
아주머니의 승낙을 받고 곧바로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윤재가 떡이 담긴 세 개의 접시를 각각 다른 세 개의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당연하게도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는 자리엔 더 많은 양의 떡이 담겨 있었다.
“저,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응? 아냐, 아냐. 난 조금 전에 저녁 먹어서 생각이 없어. 그보다 전에 내가 한 얘기 있지? 그것 때문에 왔는데...”
문득 진지해진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뭔가를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장사중이니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그는 말했지만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듯한 아주머니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하필이면 손님도 거의 없는 휑한 상태인지라 손님 접대를 이유로 내보내는 것도 쉽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는 윤재는 또다시 말을 이으려는 아주머니를 향해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 그럼 주방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여긴 손님들이 계셔서...”
“아, 그래. 그럼 안으로 들어가지.”
“그 전에 잠시만요. 손님께 가져다드릴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주방 안으로 사라진 윤재는 잠시 후 작은 컵이 들린 쟁반을 들고 수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좀 전에 비해 눈에 띠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는 녹차가 든 컵을 수영의 앞에 놓아준 뒤 곧바로 등을 돌려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
평소 회사에서도 종종 마셔온 익숙한 맛의 녹차를 천천히 두 모금 목으로 넘긴 수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대충 흘려 넘긴 채로 주방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의 위치상 주방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떡집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워낙에 카랑카랑하고 큰 탓에 대화의 일부가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보라니까. 아주머니가 어디 너한테 이상한 여잘 소개시켜주겠니? 응? 안 그래?”
“죄송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전 아직 그쪽으로 생각이 없어요.”
“아직이 뭐야, 윤재 너 이제 곧 스물여덟이지? 그럼 딱 결혼하기 좋은 나이 아니니? 어머니도 날 만날 때마다 네가 혼자인 게 보기 안쓰럽다고 얼마나 걱정하며 말씀하시는지 아니? 네가 형제가 있니? 의지할 아버지가 있니? 그렇다고 사귀는 아가씨도 없지.”
“아주머니, 전...”
“글쎄, 내 말 들어보라니까.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 솔직하게 까놓고 말할게. 그래, 까놓고 말해서 윤재 너 다리가 이러니까 여자 사귀는 일이 쉬운 게 아니잖니?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지금 네 입장에선 여자가 결혼하자고 하면 그냥 무조건 잡아야 하는 거야.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이게 다 아주머니가 널 아들처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서운하게 듣지 말고. 응?”
들려오는 대화의 일부를 조용히 듣고 있던 수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의 앞에 놓인 녹차는 처음의 두 모금 이상 비워지는 일 없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윤재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상대의 입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와 같은 모진 말을 듣고 있을 윤재의 표정을 상상하자 수영의 기분은 점차 바닥으로 가라앉아만 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수영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아주머니는 오늘 아주 확답을 얻어내겠다는 결심을 품고 온대로 마음에 있는 말을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다.
“그 아가씨, 진짜 괜찮은 아가씨야. 아주머니 친구가 일하는 상점에서 포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성격이 그렇게 싹싹하대. 솔직히 인물은 좀 그렇긴 한 모양인데 에이, 사람이 얼굴 뜯어 먹고 살 것도 아니고 성격이 착하면 됐지, 안 그래? 아니면 윤재 너도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된다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니?”
“아뇨, 아주머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저는 정말로 당분간은 일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려고 그쪽으로 공부도 하고 있는 중이고요...”
“그런 건 나중에 결혼한 뒤에 가정 꾸려서 와이프랑 같이 하면 되잖아. 글쎄, 아주머니 말 들어. 넌 일단 상대가 만나주겠다고만 하면 가리지 말고 무조건 만나야...”
거기까지 말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옮긴 윤재는 주방 앞에 서있는 것이 수영임을 확인하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필요한 게 있으세요?”
수영을 향해 그렇게 묻는 윤재의 표정이 아까 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을 가장하려 했지만 눈치 빠른 수영은 이미 윤재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잠시 홀린 듯 수영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문득 자신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이유를 상기시키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건 괜찮지? 나 지금 가서 문자로 아가씨한테 알려준다?”
“아주머니, 그 얘긴...”
“그러니까 일단 만나보라니까. 쇠뿔도 단 김에 빼란 말이 있잖아. 이번 주 주말 어때? 시간 괜찮지? 아주머니가 아가씨한테 전화해서 시간 알아볼...”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
신나게 말을 이어가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에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로부터 매서운 한 마디를 들은 그녀는 당장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머니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가 잠시 후 상황을 인식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이미 수영을 향해 완전히 돌아선 아주머니가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나서는 거예요? 난 여기 이 사람이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이렇게까지 와서 얘기하는 거라고요. 알기나 해요?”
“오래 지내서 잘 아는 사이면 막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뭐? 막말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아주머니의 태도에 수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굳이 윤재에게 아까의 모진 말들을 반복해 들려주고 싶지 않은 그는 무엇이 막말이냐고 따져 묻는 아주머니를 잠시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설득하다 안 되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할 줄도 알아야하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강요해도 싫은 건 싫은 것일 텐데 하물며 아주머니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 않습니까? 주제넘은 강요는 그쯤 해두시죠?”
상대에 대한 예우를 스스로 포기한 수영의 입에서 나온 노골적인 말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은 아주머니가 이내 조금 전 들은 말을 현실로 인식하고 얼굴을 붉혔다. 금방이라도 몸싸움을 시도하려는 듯 양쪽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한 그녀를 막은 건 당연히도 윤재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시고요.”
“윤재야!”
“죄송합니다. 일부러 신경 써 주셨는데 정말로 죄송해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아주머니는 그러나 평소답지 않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윤재의 기세에 일단은 한 수 접어주기로 하고 그쯤에서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수영으로부터 매서운 일침을 당한 후유증으로 벌겋게 변해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남아 있는 분노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단은 간다만 너도 다시 잘 생각해 봐라. 이게 다 널 위한 얘기니까.”
끝내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은 아주머니는 꼿꼿이 목을 세워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수영의 얼굴을 있는 힘껏 노려보고서 그의 곁을 스쳐 가게를 나섰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기적적일 만큼 조용한 퇴장이었다. 흥분한 상태에서도 이곳이 영업 중인 남의 가게라는 것은 그나마 인지하고 있었던 듯 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갑작스런 싸움 소리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방 앞으로 몰려들었던 다른 손님들은 다시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수영뿐이었다.
또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손님들의 대화소리를 배경으로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도움을 받았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할게요. 하지만 이건 제 일이에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는 단호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애초에 인사를 받겠다고 나선 것도 아닌 수영은 자신을 향한 윤재의 날이 선 말을 듣고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거절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말은 잘 하네.”
“...평소 자주 인사를 주고받는 분이라 최대한 좋게 거절하려고 노력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그런 얘기’까지도 얌전히 듣고 있었어? 좋게 거절하기 전에 대체 어디까지 들어주려고 한 건데?”
명백하게 비꼬는 수영의 말에 윤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지금 수영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 이렇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넌 아니잖아?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랑 연애하고 결혼하는 거, 어차피 넌 못 하잖아?”
확신이 담겨 있는 수영의 말을 들은 윤재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저는 누구와는 달라서 사랑 없이는 연애도 결혼도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누구와는’이라는 부분에 묘한 악센트가 들어가 있는 것을 눈치 챈 수영이 냉소를 머금고 반문했다.
“그럼 아니야? 너도 ‘누구와’ 같아서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거야?”
도발적인 수영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못 할 것도 없겠죠.’라고 내뱉듯이 대답했다. 사실은 이제껏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조금 전 수영이 확신을 담아 던진 말에 얌전히 순응하고 싶지는 않은 그였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낮춰 보이는 것이 싫었다.
“못 할 것도 없다고?”
예상 밖의 반격을 해오는 윤재를 내려다보는 수영의 입가에 냉소가 드리워졌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윤재가 보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허세일 뿐이라는 것을.
우수영이 아는 김윤재는 아무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살아갈 수 있는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김윤재는 바보 같을 만큼 착해 빠져서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보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더 힘들어하는 남자였고, 너무도 성실하고 순진해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만나 섹스를 하고 아이를 만들어 낳는 모습이 수영은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단지 상상하기 싫은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을 상대로 윤재가 보이는 모습은 허세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영은 자신의 마음이 비틀려가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때때로 윤재를 보면 이유도 없이 화가 났다. 어떨 땐 저 깨끗한 남자를 엉망진창으로 더럽히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사디스트인 모양이라고 윤재와 만나는 동안 수영은 몇 번이나 진지하게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수영에게 있어 윤재는 그런 상대였다. 지켜주고 싶다가도 어느 한 순간 철저하게 깨뜨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저항할 수 없는 미약한 생명을 짓밟아버리고픈 추악한 충동을 부추기는 그런 상대였다. 윤재의 잘못이 아니란 걸 물론 수영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윤재의 순수한 행동 하나하나가 순수하지 못한 자신의 눈에 비틀려져 비쳐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영은 지금 헐거워져 있던 하나의 걸쇠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사랑 없는 연애가 가능하다면 섹스도 굳이 못 할 건 없겠지, 안 그래?”
“!”
수영의 입에서 분명하게 나온 ‘섹스’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뜬 윤재가 그때까지 단단히 유지하고 있던 경계를 푼 찰나 문득 뚜벅이는 발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 곧바로 강한 힘에 팔을 붙들린 상태가 된 윤재의 몸이 강제로 주방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윽-”
주방의 벽 한 켠에 강하게 등을 부딪친 윤재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 것과 동시에 급하게 이어지던 발소리가 멎었다.
순식간에 단단한 벽과 수영 사이에 갇히게 된 윤재가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일시에 강한 힘이 실렸다. 반사적으로 벌어진 그의 입술 위에 수영의 입술이 겹쳐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