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갑자기 어쩐 일이야?”
빙판길 위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윤재가 묻자 무거운 짐을 손에 든 채 고개를 돌려온 준석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조금 전에 <민들레> 가니까 문이 닫혀있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잠깐 들러봤어. 너 웬만한 일로는 가게 문 안 닫잖아.”
최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사흘 연속으로 야근을 했던 준석은 조금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오늘도 야근 뒤 곧바로 집으로 향하려다 중간에 잠시 윤재의 얼굴이나 볼까 하고 <민들레>에 들렀던 그는 ‘쉽니다’라는 뜻밖의 안내문을 발견하고 곧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평범하게 게으름을 피우거나 노는 사람이면 몰라도 윤재처럼 평소 성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갑자기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걸 알게 되면 자연스레 머릿속엔 좋지 않은 방향의 생각들이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문은 왜 닫은 거야?”
눈에 익은 빌라를 발견하고 조금 걸음을 늦춘 준석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묻자 그의 시선을 받은 윤재가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서 내일 병원 가기 전까지 좀 쉬어둘까 하고. 어머니가 날 볼 때마다 계속 안색이 안 좋다고 하시니까 그게 은근히 신경 쓰여서.”
어제 하루 푹 쉰 덕분에 감기는 많이 나아 있는 상태였다. 특히 며칠 동안 목을 괴롭혔던 기침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엔 이제 그럭저럭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서 노곤한 피로감은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괜히 준석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기 싫은 윤재는 굳이 스스로의 입으로 감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일 병원 가는구나. 어머니는 좀 괜찮으셔?”
“전화로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일단 가서 직접 봐야 알 것 같아.”
“그럼 이 반찬들은 내일 병원에 가져갈 거겠네?”
묵직한 짐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물은 준석이 ‘응’이라는 짧은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의 야근으로 간신히 중요한 일 하나를 마무리 지어놓은 그는 토요일인 내일 하루 내내 집에서 잠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윤재가 병원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조금 생각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윤재와 긴 인연을 유지해온 만큼 자연스레 그의 모친과도 친분을 갖고 있는 그는 오랜만의 인사차원에서라도 한동안 만나지 못한 그녀의 문병을 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직접 식당을 운영하던 당시 윤재의 모친은 준석에게 있어 혼자 자취를 하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밑반찬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고마운 은인이기도 했다.
“내일 몇 시에 갈 거야?”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아닌데 일단은 점심 먹고 출발하려고.”
“그래? 그럼 열 두 시쯤 볼까?”
갑작스런 준석의 질문에 무심코 발을 멈춘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너도 같이 가려고?”
“응. 오랜만에 어머니한테 인사 좀 드릴까 하고. 그간 못 뵌 지 꽤 오래됐는데 인간된 도리로 한 번은 인사를 드려야 옳지 않겠어?”
‘인간된 도리’라는 다소 거창한 말까지 붙인 준석이 문득 윤재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서 곧바로 고개를 숙여 마주한 얼굴을 살폈다. 줄곧 깜깜한 밤이라 모르고 있었는데 가로등 근처로 오자 윤재의 얼굴 위에 평소보다 심한 피로감이 드리워져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포착된 것이었다.
“어디 아파?”
“아프긴, 그냥 좀 피곤한 것뿐이라니까. 최근에 계속 손님을 많이 받았었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엷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 윤재가 잠시 멈춰 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일로는 가게를 쉬는 일이 없는 윤재를 알고 있는 준석으로서는 여전히 걱정스런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최근 손님이 많았다는 건 며칠 전 전화를 통해 윤재에게 들은 적이 있는 터라 그게 이유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였다.
지어진지 오래되어 낡은 외관을 하고 있는 빌라 앞에 다다른 두 사람은 나란히 익숙한 계단을 올랐다. 앞서 걸어간 윤재가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자 그 안으로 들어선 준석은 곧바로 구두를 벗고 좁은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줄곧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린 준석이 뒤따라 들어온 윤재를 쳐다보았다. 윤재의 손에는 무거운 짐을 대신한 준석의 서류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럼 내일 열두 시까지 올게. 간다.”
“어, 바로 가게?”
가방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준석을 쳐다보며 윤재가 물었다. 여기까지 무거운 짐을 들어준 고마운 친구에게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려 했던 윤재가 가방을 돌려주기 전 가스레인지 앞으로 향하며 말했다.
“잠깐, 뭐라도 좀 마시고 가.”
“아냐, 됐어. 어차피 몇 시간 있다가 또 볼 텐데. 밥 안 먹고 올 테니까 점심이나 먹여줘.”
“그래도 추운데 무거운 거 들어주느라 힘들었잖아.”
“별로 안 힘들었어. 오늘은 진짜로 너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잠깐 들른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너 지금 안색 별로 안 좋으니까 푹 자고.”
거의 빼앗듯 가방을 가져간 준석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를 향해 내일 보자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다시 고요를 찾은 집안에 홀로 남겨진 윤재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돌렸다. 어쨌든 이로써 내일 점심은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냉장고 앞으로 향하며 머릿속으로 몇 가지 메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
“오랜만이구나. 준석아.”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응. 요즘은 몸 상태가 좀 나아진 것 같아. 밥도 잘 먹고 있고.”
“다행이네요. 특별히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실 때는 제 번호 아시죠? 언제든 편하게 연락주세요.”
준석의 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정심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석이는 언제 봐도 참 싹싹하구나. 우리 윤재도 이런 건 좀 닮았으면 좋겠는데.”
정심의 말을 들은 준석이 흘깃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가져온 반찬통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있는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윤재는 성격 상 사람 대하는 게 좀 서툴긴 하지만 그 대신 남들보다 몇 배는 배려심이 깊으니까요.”
준석의 옹호를 받은 윤재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준석이 너 조만간에 선을 볼 예정이라면서?”
“!”
갑작스런 정심의 말을 듣고 윤재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둔 준석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요?”
“어, 아니니? 분명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준석이가 이번에 괜찮은 아가씨랑 맞선을 보게 될 것 같다고. 아가씨의 직업이 약사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약사’라는 단어를 듣고서야 뭔가를 머릿속에 떠올린 준석이 미간을 좁힌 채로 대답했다.
“그건 이미 거절한 자리에요. 어머니는 아직 미련이 남으신 것 같지만 저는 당장 선 같은 거 볼 생각이 없어요. 이제 스물일곱, 내년이라고 해봐야 스물여덟인데 요즘 추세로 보면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일찍 결혼해서 정착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준석이 너야 번듯한 회사에 다니고 있고, 인물도 그만 하면 어디 가서 안 빠지고, 무엇보다 성격이 참 좋고 말이야. 나한테 딸이 있었으면 무조건 너한테 시집보냈을 거야.”
“딸이 절 싫다고 하면 어쩌시게요?”
준석이 엷은 웃음기를 머금고서 질문하자 곧바로 단호한 표정을 지은 정심이 대답했다.
“싫어해도 보낼 거야. 딸이 있는데 네가 다른 집 아가씨랑 결혼하는 걸 배 아파서 어찌 보니? 너희 어머니도 막상 네가 결혼한다고 하면 속으론 참 아까운 기분이 드실 거야.”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심을 향해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준석이 그 사이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다가오는 윤재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 본 사이에 살이 또 빠진 것 같구나. 밥은 잘 챙겨 먹니?”
준석의 옆에 엉덩이를 내려놓는 윤재를 향해 정심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자식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게 어머니의 마음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입 밖에 낸 말은 단순히 그와 같은 심리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윤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크고 작게 다친 경험이 많았던 데다 대부분 또래 남자들의 평균을 밑도는 체중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모친의 입장에서 그런 아들을 볼 때면 걱정보다도 속상한 마음이 앞서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 아들을 잘 챙겨주지 못하는 상황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정심은 윤재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는 밑반찬 만들면서도 많이 집어 먹었어요.”
“네가 많이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니. 준석아, 네가 얘 많이 먹는지 옆에서 감시 좀 해줄래? 볼 때마다 살이 빠지는 것 같으니까 내가 아주 속이 상해서 죽겠다.”
정심의 말을 들은 준석이 쓴웃음을 머금고 윤재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의 눈에도 윤재의 턱 선이 더 날렵해진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밤새 잠은 잘 잤는지 어젯밤보다 안색은 많이 좋아진 듯 보였지만.
세 사람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문득 병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언뜻 듣기에 소란의 발단은 병실 안에 한 대 있는 tv의 리모컨을 가지고 있는 영감님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주머니 환자 사이에서의 채널 주도권을 사이에 둔 말다툼인 듯 했다.
“여긴 독재 체제인가 보네요.”
준석이 반쯤 농담을 섞어 말하자 윤재가 껍질을 벗겨 건네주는 귤을 받아들며 정심이 대답했다.
“처음엔 몇 사람이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나중엔 그것도 귀찮아졌는지 다들 참고 마는 상태라서... 드라마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제가 가서 한 번 말씀드려볼까요?”
진지한 윤재의 말을 들은 정심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한 말싸움 일으킬 필요 뭐가 있니? 어차피 나야 평소에 tv보다는 책을 주로 보니까 별로 상관없어. 가끔 저 영감님이 온종일 불교방송을 틀어놓을 땐 좀 지루하긴 하지만.”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정심이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슬쩍 쳐다보았다. 자신은 죽어도 드라마 재방송을 봐야겠다는 아주머니가 강제로 리모컨을 빼앗으려 하자 곧바로 손을 뒤로 감춘 영감님이 노인공경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자리를 비운 이모와는 만나지 못하고 병원을 나온 두 사람은 나란히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랐다. 밤새 잠을 잘 못 잤는지 연신 하품을 하는 준석을 대신해 운전대를 잡은 윤재가 또다시 들려온 하품 소리를 따라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많이 졸려? 집으로 바로 갈까?”
“아니, 모처럼 주말에 밖에 나왔는데 바로 들어가긴 싫어.”
“그럼 어디 가려고?”
윤재의 질문을 받은 준석이 소매를 걷으며 대답했다.
“이 앞에 있는 xx백화점에 좀 가자. 컴퓨터 관련해서 사야 할 책이 몇 권 있어. 넌 필요한 거 없어?”
“글쎄... 그럼 난 음반 매장 좀 둘러볼까. U2 6집을 어디에다 뒀는지 잊어버려서 찾을 수가 없어.”
“집 아니면 차 안에 있겠지. 잘 찾아봤어?”
“응. 몇 번 청소 하면서 찾아봤는데 결국 못 찾았어.”
짧게 대답한 윤재가 근처의 백화점을 행선지로 정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잠 못 잤어?”
앞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재가 묻자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댄 준석이 입을 열었다.
“자긴 잤는데 중간에 악몽을 좀 꿨더니 뒤숭숭한 상태로 깼어.”
“악몽? 어떤 꿈이었는데?”
“내가 전에 말했던 후배 있지? 툭 하면 실수 저질러서 날 엿 먹이는 놈.”
“아.”
“그 자식이 꿈에 나타나서 졸졸 따라다니더라. 양손에 서류를 한가득 들고서 일 좀 도와달라고. 너무 리얼해서 현실인줄 알았어.”
짜증 섞인 준석의 말을 듣고 작게 웃음소리를 낸 윤재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 목적지인 백화점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예상대로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은 듯 백화점 주차장은 수많은 차량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난 음반 매장 좀 둘러볼게.”
“응. 컴퓨터 관련 서적 쪽에 있을 테니까 다 보면 그 쪽으로 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넓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각각의 매장으로 이동했다.
한동안 이런 저런 일들로 바빠 마음먹고 외출을 하지 못했던 윤재는 오랜만에 찾은 음반 매장을 천천히 돌며 구경에 나섰다. 평소 그가 주로 듣는 음악은 Keane이나 Travis와 같은 감성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락 밴드의 음악들이었지만, 가끔은 기분 전환을 삼아 산뜻한 멜로디로 이뤄진 가요나 귀가 터질 듯 신나는 메탈 사운드를 듣기도 했다.
최근 tv에서 들어본 것 같은 아이돌의 이름이 죽 나열된 코너를 지나는 윤재의 귀에 근처에서 꺅꺅거리는 여학생들의 떠들썩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와, 얘네 신곡 나왔네? 나온 것도 몰랐는데.”
“얘네 진짜 안 망하냐? tv 보면 엄청 귀여운 척 하는데 볼 때마다 오글거려 죽겠어.”
“이번에 xx랑 사귄다고 기사 뜬 거 얘지? 여기 왼쪽에서 두 번째.”
“와- 화장으로 떡칠하고 이 정도야? 실물은 토 나오겠다.”
“맞아. xx가 100배는 아까워. 걔도 진짜 보는 눈 없다.”
좋아하는 가수의 염문설에 화가 난 듯한 누군가의 주도 하에 어느 여자 아이돌 그룹이 일행들 사이에서 신랄하게 비난을 당하고 있었다.
저 나이 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계속해서 떠들썩하게 이어지는 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이동하다 샘플 음반들 중 눈에 익은 재킷 하나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곧바로 헤드폰을 착용하고 원하는 곡을 선택한 윤재는 이미 수없이 들어 익숙한 선율을 귀에 담은 채 손에 들려 있는 CD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선택한 곡은 Travis의 Closer였다.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매장 안의 잡다한 소리들은 일시에 달콤한 선율에 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도 근처를 지키고 있는 여학생들이 한층 격앙된 표정으로 연신 입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들이 내는 소리들은 윤재의 귀에 닿아오지 못했다.
단지 헤드폰 하나를 착용한 것만으로 윤재는 잠시나마 현실에서 멀어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가게 일로 바빠 삭막한 일상을 보냈던 것이 은연중에 그로 하여금 음악에로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한동안 유리벽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즐거운 기분으로 음악을 감상하던 윤재는 이제 슬슬 준석이 책을 다 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헤드폰을 벗었다. 이어 곧바로 미리 골라두었던 두 장의 CD를 카운터로 가져가 계산을 마친 그는 여전히 소란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학생들을 지나쳐 음반매장을 빠져나왔다. 역시나 주말인지라 백화점 안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바로 옆의 매장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윤재는 두 번이나 행인들과 몸을 부딪칠 뻔 했다.
천장에 붙여져 있는, 서적의 종류를 알리는 푯말을 따라 불안정한 걸음을 옮기던 윤재는 잠시 후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책을 펼쳐 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를 발견했다. 평소 주로 보는 수트 차림 대신 휴일의 복장답게 청바지와 회색 니트, 그 위에 루즈한 재킷을 걸치고 있는 준석은 꽤나 두터워 보이는 책을 신중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
잠시 준석의 모습을 서서 지켜보던 윤재가 다시 다리를 움직이려는 순간, 문득 그의 시야 안으로 한 낯선 여성이 들어왔다.
엷은 하늘색의 코트를 입고 있는 한 아가씨가 준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준석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진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듯 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연신 습관처럼 등 뒤로 쓸어 넘기고 있는 아가씨는 특별히 눈에 띠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사랑스런 분위기를 품고 있어서 서로를 마주한 채 웃고 있는 두 사람은 당장 곁을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한 쌍의 예쁜 커플로 비쳐지고 있을 듯 했다.
아무래도 좋은 분위기를 깨는 눈치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 윤재는 먼저 그의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온 준석에게 조금 전 구입한 씨디가 들어있는 작은 비닐봉투를 살짝 들어 보여주었다.
“결국 샀어?”
“응.”
짧게 대답한 윤재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낯선 아가씨를 쳐다보자 곧바로 준석이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직원이야. 이름은 서지연씨고. 지연씨, 이쪽은 제 친구인 김윤재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동시에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역시나 동시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윤재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준석에게로 시선을 옮긴 지연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따로 저녁 약속이 없으시면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이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가 나오는 레스토랑을 알고 있거든요. 아, 돈은 제가 낼게요. 평소 이대리님께서 절 도와주실 때마다 나중에 꼭 보답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 명확한 호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졸지에 방해꾼이 된 것 같은 곤란한 입장에 처한 윤재가 계속해서 상냥한 말투로 함께 저녁식사를 할 것을 제의하고 있는 지연을 잠시 쳐다보다 옆에 서있는 준석에게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저기, 그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석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붙잡힌 윤재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한데 우리는 지금부터 가볼 데가 있어서. 월요일에 회사에서 봐요. 지연씨.”
“아...”
돌아온 실망스런 대답에 아쉬운 표정을 지은 지연은 그러나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다음 기회에 사게 해주세요. 친구 분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어디론가 향하는 지연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준석이 윤재에게 고개를 돌려왔다. 그의 미간 사이엔 엷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일이 있긴 뭐가.”
“.......”
“.......”
“...분위기가 그래서 빠져주려고 한 것뿐이야.”
“분위기가 어땠는데?”
“그냥... 보기에 좋은...”
윤재의 대답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준석이 잠시 붙잡고 있던 윤재의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출근하면 매일 보는 사이니까 이왕이면 잘 지내는 게 좋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뭐, 확실히 밖에서 만나니까 조금 반가운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말한 뒤 미리 골라두었던 책을 손에 든 준석이 말을 이었다.
“계산하고 나가자.”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준석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윤재도 곧 다리에 힘을 실었다.
저렇듯 담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준석은 정말로 아까 전 본 아가씨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듯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둘 중 하나라도 그럴 마음이 없다면 결국 두 사람이 이어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괜찮은 아가씨 같았는데...’
적어도 예전에 준석이 사귀었던 상대보다는 훨씬 더 인상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문고를 나선 윤재는 자연스레 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코끝에 닿아온 냄새를 알아차리고 발을 멈추었다.
냄새가 풍겨오고 있는 방향에는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몇 걸음을 옮기다 문득 뒤에서 멈춰선 윤재를 알아차린 준석이 고개를 돌려왔다.
“아니, 그냥... 오랜만에 예전에 먹던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답한 윤재가 손가락 끝으로 패스트푸드점을 가리키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준석이 발길을 되돌려 윤재에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 가끔 하굣길에 학교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저녁을 해결하곤 했던 두 사람은 나란히 사회인이 된 이후로 한참동안 패스트푸드점을 찾은 기억이 없었다.
“먹고 싶어?”
슬쩍 윤재에게 질문을 던진 준석이 ‘너도 괜찮으면.’이라는 대답을 듣고 먼저 발길을 돌려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성큼 시원스런 걸음으로 주문대 앞으로 다가가 선 그는 뒤따라 들어온 윤재를 돌아보고 ‘치즈버거 세트지?’라고 물었다. 학창시절 윤재가 치즈버거를 제일 좋아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윤재는 다시 돌아서서 주문을 하기 시작한 준석을 쳐다보다가 근처에 자리가 난 것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패스트푸드점을 찾은 게 얼마만인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일부러 의식한 건 아니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부터 자연스럽게 패스트푸드로부터 멀어지는 생활을 해온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친의 식생활에 대한 조언에 비교적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 왔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체중이 늘지 않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체질은 어쩔 수 없는 듯 했지만.
잠시 후 주문해 들고 온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위치에 앉은 준석이 입을 열었다.
“내 건 햄버거 하나 더 시켰어. 너도 먹다 부족하면 더 주문해.”
“응.”
말이 끝나자마자 포장을 벗기고 치즈버거를 한 입 가득 베어 분 윤재가 곧바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 어릴 때 진짜 자주 먹었었는데.”
윤재의 말을 들은 준석이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옛날이니 어릴 때니 하지 마. 그러니까 우리가 꼭 늙은 것 같잖아. 아직 팔팔한 스물일곱인데.”
“한 달 뒤엔... 아, 한 달도 안 남았구나. 어쨌든 며칠 뒤엔 우리도 스물여덟인데 뭐.”
“스물여덟도 충분히 팔팔하거든.”
준석의 말을 듣고 ‘그런가...’라며 낮게 중얼거린 윤재가 양손으로 잡고 있는 버거를 다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몇 년 만에 먹는데도 맛이 예전 그대로인 게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지고 있는 그는 순식간에 치즈버거 하나를 뚝딱 먹어치우고 곧바로 감자튀김으로 손을 뻗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전투적인 태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들보다 눈에 띠게 마른 윤재를 보며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던 준석은 모처럼 제대로 속도를 내서 먹고 있는 윤재를 잠시 관찰하듯 진지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왜?”
한참 열심히 입을 우물거리던 윤재가 뒤늦게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아채고 묻자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준석이 대답했다.
“아니, 이거 다 먹고 어디 갈까 해서.”
“어디 가긴,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 내일 모레 출근하려면 이제부터라도 푹 쉬어야지.”
“네가 엄마냐?”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은 준석은 자신 분으로 가져온 아직 뜯지 않은 햄버거를 윤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순순히 그것을 손에 드는 윤재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