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17화 (17/66)

17.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문득 건너편에서 들려온 연석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수영이 앞에 놓여 있는 잔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오랜만에 만나서 눈도 제대로 안 맞춰주는 거야? 그 젊은 사장과 한창 잘 되는 모양이지?”

“!”

연석의 입에서 나온 ‘젊은 사장’이라는 단어에 일순 움직임을 멈춘 수영이 이어진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의 사장 말이야. 이름이 장호연이라고 했나?”

우스웠다. ‘젊은 사장’이라는 단어를 듣고 곧바로 떠올린 것이 호연이 아닌 윤재라는 것이.

이틀 전 저녁 우연히 지나는 길에 그와 만났던 것이 꽤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때? 요새도 자주 만나?”

제법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오는 연석을 슬쩍 한 번 쳐다본 수영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최근엔 그렇게 자주는 못 만나고 있어. 각자 일이 바쁘다 보니.”

“가장 최근에 만난 게 언젠데?”

“나흘 전. 자, 거기에 대한 질문 계속 할 거면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고.”

비교적 순순히 대답을 해주는가 싶던 수영이 곧바로 선을 긋자 모처럼 만의 만남을 허무하게 날릴 생각이 없는 연석이 깨끗이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연석이 수영과 만나는 건 한동안 출장으로 해외에 나갔다 돌아온 이후로 오늘이 두 번째였다. 이제까지의 패턴 상 먼저 연락을 취하는 건 늘 연석의 몫으로, 그는 늘 수영의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물론 가엾기 짝이 없는 자신의 입장에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중간 중간 다른 상대를 찾아 만나 봐도 수영 정도로 잠자리에서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상대를 찾아내지 못한 연석은 결국 쾌락에 대한 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영에게 연락을 취하는 패턴을 벌써 몇 년째 반복해오고 있었다. 밖에선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어두운 뒷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 주도한 기획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며.”

자연스레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려던 수영이 곧바로 짐작 가는 상대를 떠올리고 대답 대신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내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 중에 몇 개월 전 연석과 짧게 사귀었던 적이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언젠가 연석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적이 있는 그였다.

“어차피 나 혼자서 한 일도 아니야.”

“그래도 당신이 주도한 건 맞잖아.”

평소의 행동은 오만해도 일과 관련해서 만큼은 그다지 그런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수영의 이중적인 모습을 연석은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단순히 사회인의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뿐인지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회사에서 동료들이 볼 수영의 모습을 대략적이나마 짐작해보는 것은 연석에게 있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요즘 에 얼굴을 안 보인다고 제이가 말하던데.”

“일이 바빠서 갈 틈이 없었어.”

“예전엔 가끔씩 들러서 즐겼잖아. 파트너도 고르고.”

“이제 슬슬 그럴 나이도 지난 게 아닌가 싶어.”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대답하는 수영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연석이 예쁜 잔에 반쯤 남아 있는 호박색의 술을 단숨에 목 안으로 넘기고서 말했다.

“섹스보다 일이 더 좋은 남자가 된 건 아니겠지? 재미없게.”

“섹스에 미쳐서 자기 일도 나 몰라라하는 편이 좋아?”

돌아온 반문에 잠시 고민에 빠진 연석이 ‘글쎄...’라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섹스를 잘 하는 상대가 좋지만 그것도 다른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섹스만 잘 할 뿐인 무능한 인간은 별로 섹시하지 않다고 연석은 생각했다. 너무 뻔한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원하는 타입은 능력과 정력을 모두 갖춘 미남이었다. 당장 옆자리에 그 완벽한 예시가 있었다.

“혹시 죽은 동물 만져본 적 있어? 차에 치어 죽은 개라던가.”

“!”

수영으로부터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연석이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만져? 징그럽게. 차에 치이면 내장도 다 튀어나오는데 더럽기도 하고.”

예상대로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의 끝 부분을 내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당신은 만질 수 있어?”

“아니. 나도 보통의 인간이라 더럽고 징그러운 건 싫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냥.”

싱겁게 대화를 마무리 짓는 수영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 연석이 잠시 후 근처로 다가온 바텐더를 확인하고 그에게 다시 한 잔의 술을 주문했다. 차를 가져온 수영은 오늘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한 터라 그의 몫으로는 논알콜의 칵테일을 한잔 주문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연석은 슬쩍 한 번씩 테이블 아래로 손목을 걷어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슬슬 올라갈까?”

방금 온 문자를 확인하고 있던 수영이 갑작스런 연석의 말에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묘한 기대를 품고 있는 표정을 보고서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수영은 그러나 냉정히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이제 곧 갈 거야.”

수영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바꾼 연석이 잔뜩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곧 가다니? 나랑 만나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알기는 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라고 만날 때마다 상대해줄 수는 없어.”

“어쩌다 한 번 만나면 할 수 있는 거잖아? 그 정도 바라는 것도 잘못이야?”

이곳이 평범한 호텔의 라운지라는 것을 잊은 듯 크게 소리치는 연석을 잠시 말없이 쳐다본 수영이 문득 옆에 놓아둔 코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질구질한 마누라처럼 굴지 마. 그렇게 외로우면 성능 좋은 딜도라도 하나 구해줘?”

냉소 섞인 발언을 듣고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연석을 두고서 냉정하게 등을 돌린 수영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사실 특별히 뒤에 약속을 정해놓은 것은 없었다. 그대로 좀 더 이야기를 하거나 모처럼 만의 만남이니 봉사의 개념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수영의 기분은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이 칙칙한 기분 상태를 맞이한 시점은 아까 연석으로부터 ‘젊은 사장’이라는 단어를 듣고 윤재를 떠올린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실은 그 날 저녁 야산에서 보았던 윤재의 모습이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도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 수영이었다.

연신 차가운 바람에 날리던 머리카락도, 죽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손도, 어딘가 묘하게 쓸쓸해 보이던 하얀 얼굴도.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는 상대인데도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대해왔던 타인들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

만날 약속을 정하자는 지인의 문자에 끝내 답을 주지 않은 수영이 갑자기 운전대를 쥔 손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원래는 곧장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막 바뀐 행선지는 <민들레>였다. 이틀 전 만난 윤재로부터 오늘 다시 문을 연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곳에 잠시 들러 가볍게 몇 잔을 걸칠 생각이었다. 궁상맞게 혼자서 술을 마시는 취미는 없었지만 <민들레>로 향하는 지금 그는 굳이 일부러 동행을 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민들레>에 도착한 건 호텔에서 출발한 지 삼십 여분이 지나서였다. 그 날 보았던 윤재의 몸 상태가 꽤나 좋지 않아 보여서 반신반의의 마음가짐으로 가게를 찾은 수영은 다행히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뭐야, 오랜만에 찾았는데.”

“나중에 다시 와야지 뭐.”

“생태찌개만이라도 포장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벌써 정리하는 분위기던데.”

옆을 스쳐가는 일행의 대화를 듣고 의아함을 품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수영이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수영의 기척을 알아챈 듯한 윤재가 주방 입구로 얼굴을 내밀었다.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수영의 얼굴을 본 것과 동시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문 닫는 거야?”

텅 빈 가게 안을 슬쩍 둘러본 수영이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손님이 있었던 듯 몇몇 테이블 위에는 빈 그릇과 냄비가 놓여 있었다.

“아직 감기가 다 나은 게 아니라서 무리하지 않고 오늘은 일찍 닫으려고 해요.”

윤재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추운 날 그 몸 상태로 밖을 돌아다녔으니 나으려던 감기도 도리어 악화될 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당장 보기에도 그렇지만 잠시 만났던 당시에도 윤재가 그리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던 것을 수영은 흐릿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알바생은?”

이곳에 올 때마다 봤던 남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수영이 묻자 ‘성호는 오늘 일이 생겨서 못 왔어요.’라고 윤재가 대답했다.

갑자기 집에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성호의 전화를 받은 시점에서부터 가게 문을 여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린 윤재였지만 이틀 전 스스로 입구에 써붙여 놓은 손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오늘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문을 연 것이었다. 그와 같은 본인의 굳건한 의지와 달리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가뜩이나 온전치도 않은 몸 상태에서 혼자 일을 하는 건 역시 무리였다고, 뒷정리를 하는 내내 윤재는 몇 번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더 이상 장사를 못해요. 일부러 찾아오셨는데 미안해요.”

아직 입구 근처에 그대로 서있는 수영을 향해 가게의 주인으로서 사과의 말을 건넨 윤재는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좀처럼 움직이려하지 않는 수영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수영이 잠시 후 입구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대신 윤재에게 말을 건네 왔다.

“밖에는 휴무라는 표시를 해야 하지 않아? 찾아온 손님들이 알아서 돌아가게.”

그렇지 않아도 종이에 글을 써서 붙여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최대한 빨리 뒷정리를 하고 셔터를 내리는 게 좋을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던 윤재는 수영의 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서 고무장갑을 벗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 근처의 서랍에는 연습장과 펜을 비롯한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쉽니다’라고 간략하게 쓴 종이를 박스 테이프로 바깥쪽 문에 붙이던 윤재가 문득 따라서 밖으로 나온 수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럼 지금부터 뒷정리 할 거지?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도와줄게.”

예상치 못한 수영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윤재가 이내 다시 테이프를 쥔 손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일이라고 해야 얼마 없어요. 저 정도는 혼자서 금방 하고 갈 수 있는 정도니까...”

“둘이 하면 더 빨리 끝내고 갈 수 있겠지. 본인은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안색이 안 좋아. 이 상태에선 한 시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쉬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감기 기운에 의한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온 수영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을 만 하면 한 번씩 바깥바람을 쐬고 있는 탓에 이래서야 내일은 오늘보다 상태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은 어제 병원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것도 내일로 미뤄둔 터라 자연스레 그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던 윤재였다. 몸이 무거운 가운데 일부러 오후 일찍부터 가게를 찾아 몇 종류의 밑반찬들을 만들어 놓은 것도 내일 병원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홀을 치울까, 아니면 설거지를 할까?”

수영의 입에서 나온 ‘설거지’라는 단어에 윤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애초에 도와준다는 말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그는 ‘설거지’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들려온 지금 수영이 단순히 지나가는 말을 던진 게 아니라는 것을 현실로 깨닫고 있었다.

“설거지 해본 적 있어요?”

어째서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 장면에 윤재가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집에서도 일회용품만 사용하고 살 것 같아?”

“.......”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다. 상식적으로 설거지가 하기 싫다고 해서 집에서 나무젓가락이나 종이컵만 이용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픈 탓일까, 아니면 벌써 며칠 새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 익숙해진 탓일까. 적어도 당장 습관적인 경계를 내비칠 기력도 없는 상태에 있는 윤재는 진심으로 돕겠다고 나선 수영에게 그 이상 사양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처음이면 모를까 이틀 전에는 차도 얻어 탔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체념의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릇을 옮기거나 씻는 건 제가 할 테니까 그럼 홀만 한 번 쓸어주세요. 빗자루는 입구에 세워져 있어요.”

윤재의 말을 들은 것과 동시에 ‘알았어.’라고 짧게 대답한 수영이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기껏 청소를 하려고 이곳까지 차를 몰아 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윤재로부터 소소하나마 부탁을 받게 된 것이 수영에겐 생소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당장은 아프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몸을 감싸고 있는 열을 동반한 감기 기운이 자신을 향한 윤재의 경계심을 조금은 느슨하게 만든 것일 거라고.

미리 말한 대로 윤재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그릇들을 모두 혼자서 옮겨 씻기 시작했고, 값비싼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고 소매를 걷어붙인 수영은 빗자루를 쥔 채 홀의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며칠을 쉰 모양이지만 평소 제대로 청소를 해온 건지, 아니면 오늘 하루 바짝 청소를 한 건지 빗자루에 쓸려나오는 이물질은 거의 없었다. 예상보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빗자루 질을 끝내고 내친 김에 옆에 놓인 청소도구로 바닥을 닦는 것까지 끝낸 수영은 아직까지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윤재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편 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싱크대 한 켠에는 깨끗이 씻긴 그릇들이 차례로 정렬되어 쌓여 있었고, 개수대에는 아직 씻어야 할 그릇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 정도의 양이면 금방 끝날 듯 했다.

파스텔 블루의 스웨터를 입고 있는 윤재는 이런 삭막한 주방의 풍경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아픈 탓에 분명 멋을 내기보단 대충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걸쳐 입었을 텐데도 기본 바탕이 좋기 때문일까, 당장 허름한 주방의 한쪽에 서서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는 수영이 얼마 전 바(bar)에서 만났던 한껏 멋을 낸 지인들보다 몇 배는 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틀 전 저녁 수영이 느꼈던 쓸쓸한 분위기는 적어도 지금의 윤재에게선 나타나고 있지 않았다. 역시 그 날의 상황이 우울했던 탓에 단지 스치는 환상처럼 그렇게 비쳤던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수영은 설거지에 열중하고 있는 윤재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물소리가 마침내 멎고서야 허리를 편 윤재가 그제야 입구에 선 수영의 존재를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왔다.

“이제 다 끝난 거야?”

“...네.”

“그럼 이제 집에 돌아가는 거지?”

“네.”

반복된 대답을 듣고서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몸에 걸친 수영이 곧바로 안쪽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말했다.

“밖에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나와. 집까지 바래다줄게.”

“아뇨, 전 이 앞 정거장에서 버스로...”

“그 반찬통들 다 들고서?”

식탁 위에 한가득 쌓여 있는 반찬통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수영이 물었다. 얼마 전 함께 재래시장을 찾았을 때 구매한 듯 보이는 반찬통들 안에는 뭔지 모를 음식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가짓수도 많지만 무엇보다 재질이 유리인 만큼 무게가 상당할 터였다.

“몸도 안 좋은데 괜한 힘쓰지 마. 어차피 기름 나갈 바엔 차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는 게 낫잖아. 그게 더 경제적이고.”

사실 비용 문제를 먼저 생각하면 그다지 몰고 다니기에 효율성이 좋은 차는 아니었지만 그런 사실이야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꾸만 이리저리 자신을 피해가려 하는 윤재를 잠시나마 붙잡아 두고 싶은 오기 섞인 바람이 지금의 수영을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많이 안돼 보이나요?”

“!”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수영이 눈매를 가늘게 만들자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던진 윤재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당신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죠. 그때마다 제 마음은 불편했고요.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당신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거라고 했지만 저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잠시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문 윤재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저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수영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제 다리가 이렇게 된 걸 알게 돼서 혹시 예전 일에 대한 미안한 감정으로 이러는 거라면 그만 하셔도 돼요. 말했잖아요. 이제 와서 원망하지 않는다고.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이미 전 오래 전에 다 잊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절 잊은 채로 그렇게 사시면 돼요.”

윤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니, 어쩌면 희미한 웃음기마저 두른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작정 원망에 의한 거부가 아니었다. 다만 윤재는 과거의 기억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는 걸, 수영은 더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전하는 진심을 묵묵히 귀에 담고 있었다.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어째서인지 기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 뒤 값싼 동정에 의한 도움이 아니라는 대답을 입 밖에 내려던 수영은 생각을 말로 바꾸기 전 문득 입을 다물었다. 동정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굳이 나서서 그를 도왔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당장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들려온 윤재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 전 들은 윤재의 말처럼 지금까지처럼 잊은 채로 살 수 있을까.

이틀 전 어두운 야산에서 보았던 그 쓸쓸한 옆모습도 이제까지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하얗게 잊혀지게 될까.

잠시 침묵을 지킨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수영이 문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노력한다면 안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태에서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그럴 마음도 없는 그는 적어도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야말로 가장 자신다운 모습대로.

“별로 동정이라거나 미안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착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

“그냥 간단히 생각해서 내 변덕이라고 여기면 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에 잠시 어울려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네가 베풀어주는 입장이 되는 거겠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난 좀 비뚤어져 있어서 상대가 거부할수록 더 오기가 생기는 타입이니까 괜히 귀찮아지기 싫으면 잠시 어울려주면 돼. 그러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내가 알아서 떨어져나갈 테니까.”

제멋대로인 말이지만 그것은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수영이라는 남자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는 ‘흥미’였고, 결과적으로 윤재가 그와 잠시 만났던 것도 헤어진 것도 모두 ‘흥미’가 이유가 되었었다.

“...제가 지금 여기서 싫다고 해도 어차피 당신은 듣지 않겠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야 많이 남아 있었지만 애초에 눈앞의 남자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윤재는 체념으로 수영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길지 않은 시간일 터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한 수영이 곧 다시 흥미를 잃고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갈 때까지 혼자 진지해져서 억지로 거부하는 것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윤재는 준비하고 나오라고 말한 뒤 먼저 입구로 향하는 수영을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길지 않은 시간이라면 가게의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하면 될 거라고 홀로 생각을 정리한 윤재는 잠시 놓고 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미리 준비한 종이백 안에 쌓아둔 반찬통들을 차례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

“이쪽 길이야?”

“이 앞에서 우회전하면 돼요.”

조수석에 앉은 윤재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곧바로 운전대의 방향을 틀었다.

“종이백에 넣은 반찬들은 병원에 가져가는 거야?”

문득 들려온 질문에 차창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윤재가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늘 이렇게 많이 만들어?”

“보통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이번엔 오랜 만에 문병을 가는 거라서 평소보다 많이 만들었어요.”

“그래?”

수영이 대꾸를 한 것과 동시에 뒷좌석에 놔둔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벌써 네 번째였다.

꽤나 길게 이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급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윤재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르는데 받지 않아도 괜찮나요?”

“나중에 확인하고 내가 다시 걸면 돼.”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상황을 맞았던 수영은 지금 걸려온 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일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짜증을 내고 나오면 몇 시간 뒤 연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패턴은 이전에도 몇 번 경험했던 만큼 수영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웬만한 상대에게 미련을 두지 않는 수영과 달리 애초에 싸우면 곧바로 풀어야 마음이 진정되는 타입의 연석은 웬만한 일로는 자신이 먼저 수그리고 들어가는 형태로 연락을 취해오곤 했었다.

섹스가 없다면 연석과는 나름대로 마음 편한 지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수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육체적 상성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즐거운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부터인가 수영은 연석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보다 거절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연석과의 섹스를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던 수영이 문득 옆에 앉아 있는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은 세세하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냥 간단히 지금의 윤재를 안는 장면을 떠올리면 평범한 흥분을 넘어서는 감정이 느껴졌다. 반복적으로 닿아오는 시선을 알지 못한 채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윤재는 분명 예전에는 없었던 묘한 공기를 두르고 있었다.

“만든 반찬은 어떤 거야?”

벗은 윤재의 다리를 크게 벌리는 장면에서 스스로 제동을 건 수영이 적당히 건전한 화제를 꺼냈다. 불과 두 시간 전 하자고 달려드는 상대를 차놓고 이제 와서 발정 난 수캐의 흉내를 내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양념한 깻잎과 무말랭이, 송이버섯 볶음, 감자조림 같은 기본적인 반찬이에요.”

“감자조림은 한동안 못 먹어본 것 같네. 맛있어, 그거?”

“.......”

“.......”

“...조금 덜어 드릴까요?”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수영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가 이내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로 먹고 싶어서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순진한 윤재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잘게 떨릴 정도로 크게 웃는 수영의 옆에서 윤재가 말했다.

“농담이었나 보네요.”

놀림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크게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감자조림은 정말로 먹어본지 오래 됐어. 많으면 좀 덜어줄래?”

대답 없이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조수석 바닥에 놔두었던 종이백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부스럭부스럭 반찬통을 꺼내기 시작했다.

운전에 집중을 하면서도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귀에 담고 있던 수영은 잠시 후 반찬통 하나를 꺼내든 윤재가 그것을 뒷좌석에 놓는 것을 스치듯 쳐다보았다.

“맛은 기대하지 말고 드세요.”

“병원에 가져가야 하는 거 아냐?”

“덜어낼 통이 없으니 그냥 가져가세요. 병원엔 며칠 있다가 또 갈 거니까 그 때 따로 가져가면 돼요.”

짧게 대답한 윤재가 무심코 차창에 시선을 던졌다가 눈에 익은 풍경을 발견하고 말했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지저분한 눈의 잔해로 덮인 골목 어귀를 가리키는 윤재의 말에 따라 수영이 그 근처에 적당히 차를 세웠다. 원래대로라면 집 앞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사는 곳이 어딘지 굳이 밝히고 싶어 하지 않을 윤재의 기분을 이해한 그는 그대로 자리를 지킨 채 조수석에서 내리는 윤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갈게요.”

“다음 주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단체 회식으로 <민들레>에 갈지도 몰라. 아직 확실히 결정된 사항은 아니니까 장소가 바뀔 수도 있지만.”

“...네.”

늘 그렇듯 감사의 인사를 남겨놓고 멀어져가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수영이 그 순간 또다시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서 짧은 한숨과 함께 뒷좌석으로 긴 팔을 뻗었다.

역시나 발신자는 예상했던 상대였다.

귀찮지만 어차피 이것으로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닌 만큼 수영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안 받아?]

“일이 좀 있었어. 왜?”

[...왜는. 그냥 아까 일이 찜찜하게 남아서 그렇지.]

“아까 일? 아... 그래,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어. 사과할게.”

[...뭐야. 갑자기 그렇게 순순히 사과를 다하고.]

“싫으면 취소하고.”

[하여튼 당신 성격 진짜 나쁜 거 알아?]

벌써 기분이 다 풀린 듯한 연석의 목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무심코 사이드미러에 시선을 던졌다가 일순 멈칫했다.

멀찍한 위치에 서있는 윤재가 어떤 남자와 마주한 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리 상 상대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 분위기나 체형으로 보아 일전에 <민들레>에서 봤던 남자와 동일인물인 듯 했다.

윤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키가 큰 남자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백을 받아들더니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잠시 뒤를 돌아보고 뭔가를 말하는 남자는 윤재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지켜보다 다시 등을 돌리고서 다리를 움직였다.

굳이 바로 옆에서 보고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꽤나 친밀하다는 건.

[여보세요? 듣고 있어?]

문득 크게 들려온 연석의 목소리에 그제야 자신이 통화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영이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로 점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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