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설마 준석이 와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윤재는 처음 몇 초간 그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뺨을 누그러뜨렸다. 안도와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 그의 엷은 미소 속에 담겨져 있었다.
“방금 주문을 받아서 이제 바로 시작해야 돼. 앞치마는 주방에 있으니까 거기서 꺼내줄게.”
먼저 재킷을 벗어 카운터 부근의 선반에 놓은 준석이 윤재와 성호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어 단단히 일할 채비를 마친 그는 잠시 후 그의 앞에 내밀어진 앞치마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아마도 새것으로 보이는 깨끗한 앞치마에는 양 볼에 핑크색 원이 붙어 있는 노란색 코끼리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네 마리씩이나.
“너 도와주러 올지 모른다고 해서 혹시 전에 쓰던 게 있나 하고 찾아보니까 이게 나오더라. 보니까 아직 한 번도 안 쓴 것 같아. 자, 일단 이거 써. 난 물 끓는 것 좀 볼게.”
윤재에게서 받아든 앞치마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 짧은 한숨과 함께 몸에 두른 준석이 옆에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듯 보이는 성호는 준석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근처의 선반에서 물수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뭐부터 하면 돼?”
“아, 저쪽 식탁 끝에 해물누룽지탕에 넣을 재료 미리 썰어서 양푼에 담아둔 게 있거든. 그것 좀 볶아줘.”
“알았어. 프라이팬은 지금 여기 꺼내놓은 거 쓰면 되지?”
“응.”
윤재의 대답을 들은 준석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대학시절에 자취를 시작한 뒤로 자연스레 조금씩 요리를 손에 익혀나간 준석은 딱히 빼어나지는 않아도 대한민국 남성들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정도의 요리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윤재가 이 길로 나서지 않았던 시절엔 가끔 퇴근 후 자신의 집에 들르는 그에게 오므라이스나 카레 정도의 기본적인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던 그였다.
잠시 후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서는 성호를 발견한 윤재가 이제 막 무쳐낸 과메기 초무침을 근처에 놓인 접시에 담아내며 말했다.
“성호야, 이거 단체 손님 테이블로 좀 가져다줘. 이 앞에 둔 마른안주들하고 같이.”
“네.”
윤재가 빠른 손놀림으로 준비해주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쟁반으로 옮긴 성호가 흘깃 가스레인지 앞에 서있는 준석을 쳐다보았다. 엷은 하늘색의 셔츠와 정장 바지 위에 앙증맞은 앞치마를 걸치고 열심히 프라이팬에 뭔가를 볶고 있는 그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방 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와 더운 공기에 슬슬 땀이 나는지 어느 샌가 그의 셔츠 단추는 세 개까지 풀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추가된 일을 수습하느라 예정에도 없는 야근을 한 탓에 무척이나 피곤할 텐데도 귀가를 하는 대신 곧장 이곳을 찾은 선택을 한걸 보면 눈앞에 보이는 두 사람의 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성호였다. 문득 자신에게도 이 정도의 헌신적인 친구가 있는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서 현실로 돌아왔다. 남한테 기대하기 전에 우선 자신부터가 친구들에게 이 정도의 헌신을 해줄 자신이 없는 그였다. 자신뿐 아니라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해 생각을 정리한 그는 잠시 후 또 하나의 접시가 추가로 담겨진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홀을 채우고 있는 손님은 가장 최근에 들어온 대규모 단체 손님을 제외하고 세 팀이었다.
테이블을 채운 숫자 자체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수영의 일행 자체가 워낙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덕분에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은 드물게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는 상태였다. 그에 따라 자연히 여기저기서 나와 한 데 뒤엉킨 대화소리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전체적으로 들을 땐 마치 뭉개진 하나의 소음처럼 들리고 있어서 벌써 수차례 분주하게 홀과 주방을 오가고 있는 성호는 슬슬 귀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찌개랑 탕 종류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 좀 늦는 것 같네.”
단체 손님이 자리한 테이블에 마른안주가 담긴 접시를 차례로 내려놓던 성호가 바로 근처에 앉아 있는 여자 손님의 말을 듣고 접객용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일제히 자신에게 향해지는 시선에 부담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일단 마지막 접시까지 테이블에 옮긴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안에서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까 곧 나올 거예요. 일단 먼저 나온 마른안주들부터 한 번씩 맛보세요. 여기 오시는 손님 분들이 많이 칭찬하시는 메뉴 중 하나가 이 과메기 무침입니다.”
“그래요?”
제법 능숙하게 상황을 넘긴 성호가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수영이 문득 옆에서 들려온 대화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와, 이 과메기 무침 맛있다. 너무 짜지도 않고 감칠맛도 나고.”
“그래? 나는 이 버터구이 오징어가 입에 맞는데.”
“근데 조금 전에 왔던 사람은 그냥 알바생이지? 그럼 여기 주인은 아까 두 남자 중에 어느 쪽이야? 여기선 수영이 너만 알겠네.”
갑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온 용국을 슬쩍 쳐다본 수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대답했다.
“아까 이 앞에서 직접 주문을 받았던 남자. 정확히 말하면 주인의 아들이지만.”
“그래? 언뜻 보니 걸음걸이가 좀 이상한 것 같던데.”
반대편에서 들려온 말에 무심코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은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굳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윤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남들 앞에서 떠벌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보다도 지금 수영은 조금 전 봤던 하나의 장면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의 입장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아마도 가까운 지인인 것은 틀림없는-남자의 등장에 기쁜 듯이 뺨을 누그러뜨리며 웃던 윤재의 모습.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을 시야에 들인 몇 초간 수영은 마치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함께 어울렸던 몇 년 전, 윤재가 자신을 향해서도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던 그 때로.
그러나 조금 전 보았던 그 미소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수영의 기분을 미묘하게 침착시키고 있었다.
우습다고 생각했다. 먼저 내버렸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깨끗이 잊고 있던 남자를 상대로 크든 작든 상실감이란 것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아니, 사실은 우스운 정도를 지나쳐 짜증이 밀려왔다.
나름대로 평정을 가장하고 있음에도 은연중에 불쾌한 기분이 얼굴 위에 드러난 것일까, 문득 자신에게 쏠려 있는 일행의 시선을 알아차린 수영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뭘 그렇게 봐?”
“아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새삼 참 잘난 얼굴이다 싶어서.”
이곳에서 가장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진웅의 진지한 말에 쓴웃음을 지어 보인 수영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아, 드디어 따끈한 국물이 나오나보다.”
다시 주방에서 나오는 성호를 발견한 누군가가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잠시 동안 수영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이동해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냄비가 놓인 쟁반을 들고 곧바로 수영의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온 성호는 그것을 내려놓자마자 뒤에서 들려온 부름을 받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곳에 몇 번을 왔지만 이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성호를 본 적이 없는 수영은 문득 여기서 보이지 않는 주방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서빙을 하는 알바생이 이 정도로 바쁘다면 지금쯤 여러 가지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을 주방 안의 분위기도 결코 평온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까 그 남자도 저 안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건가.’
스치듯 짧게 봤던 남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 수영이 쓰게 웃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고 넘겼겠지만, 아까 전 보았던 남자의 옷차림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까의 상황에서 윤재가 보였던 표정은 결코 오는 게 당연한 상대를 맞으며 지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와- 국물 맛있다. 이게 수영이 네가 추천하던 그 생태찌개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은영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이 담배 끝을 재떨이에 털어내며 말했다.
“맛 괜찮지?”
“응. 맛있어. 첨엔 그냥 평범하다 싶었는데 몇 숟가락 더 먹어보니까 입에 남는 맛이 깔끔해서 좋은 것 같아.”
이전에 함께 왔던 회사 동료들과 비슷한 감상을 말하는 은영에게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라고 적당히 대꾸해준 수영이 이어서 들려오는 음식에 대한 칭찬들을 묵묵히 귀에 담았다. 지금 일행들의 반응을 보면 다행히 일부러 이곳을 추천한 자신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지는 않을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용국이 넌 몇 개월 사이에 살이 엄청 찐 거 같다?”
“엄청은 무슨. 그냥 조금 찐 정도지.”
“몇 킬로그램 늘었는데?”
“15킬로인가...”
덤덤한 말투로 대답한 용국이 확실히 몇 개월 전보다 살이 많이 붙은 턱을 긁었다. 이제 간신히 30대에 가세한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부장님의 포스를 내뿜는 외모를 하고 있는 그는 반년 전 결혼을 한 이후 이전과 달리 스스로의 외모를 꾸미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듯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피부과도 다니고, 좋다고 소문난 화장품은 죄다 한 번씩 사서 써보며 세세한 후기를 전하기도 했던 그는 결혼을 하고서 곧바로 아이까지 생기자 이제 과감하게 주요 관심사를 다른 방향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야, 조금이 뭐야. 15킬로면 엄청 찐 거지. 너 이제 예전 옷은 하나도 못 입지? 날씬할 땐 그래도 몸매는 괜찮았는데 이젠 아주 후덕해져서 완전히 아저씨가 다 됐다. 너 혼자 여기서 몇 살은 연상으로 보이는 거 알지?”
웃는 얼굴로 촌철살인의 말을 늘어놓는 은영을 슬쩍 흘겨본 용국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이미 국물의 3분의 2가 사라진 냄비 안에 숟가락을 넣었다. 예전부터 은영에게 기가 눌리는 모습을 보여 온 그는 이후 세월이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 아빠가 될 예정에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녀의 손 안에 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한때나마 은영을 좋아했던 과거가 은연중에 그녀의 앞에서 용국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
주위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대화를 반쯤 흘려 귀에 담고 있던 수영이 문득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들려온 조금 거친 목소리를 캐치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어묵탕이잖아? 내가 아까 분명 알탕으로 주문했는데 장난해?”
취기로 벌개진 얼굴을 하고 좁은 가게가 떠나가라 언성을 높이고 있는 건 칙칙한 색의 양복을 걸친 채 홀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뭐하는 거야, 대체? 어?”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다가 남자의 부름을 받고 곧장 그의 곁으로 다가간 성호가 갑작스런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며 재빨리 테이블에 놓인 주문서를 집어 들었다.
“!”
체크가 된 부분을 눈으로 확인한 것과 동시에 성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탕과 어묵탕 중간에 걸쳐 표기되어 있는 체크 위에 엑스가 쳐져있고, 어묵탕 옆의 칸에 다시 한 번 체크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성호는 일단 눈앞에서 크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다시 끓여서 가져오겠습니다.”
“뭐? 죄송? 지금 죄송하면 다야? 여태까지 기다린 시간이 얼만데? 저기 저쪽 테이블처럼 단체 손님이 아니라고 괄시하는 거야 뭐야?”
“정말 죄송합...”
“아니, 됐다. 너랑은 말이 안 통하겠어. 여기 사장이 누구야? 당장 나오라고 해! 손님을 이따위로 취급해? 내가 어디 그냥 지나가나 봐!”
사장을 부르라는 남자의 말에 완전히 사색이 된 성호가 다시 한 번 깊이 허리를 숙이고서 몇 번이나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이미 거나하게 취한데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의지를 놓아버린 남자는 쉽사리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해? 사장 나오라니까! 이런 거지같은 가게라도 주제에 사장이라고 얼굴도 쉽게 안 보여주는 거야 뭐야?”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지르자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모아졌다. 둘 이상씩 짝을 이뤄 앉아 있는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과 달리 혼자서 이곳을 찾은 그는 당장 옆에서 말려줄 일행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목에 핏대를 세워갔다. 혼자 온 손님이라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강한 분노감을 표출하고 있는 남자는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엎을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젖은 손을 앞치마로 닦아내며 급하게 주방에서 나온 윤재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달려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레 이제 가게 안의 시선은 그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네가 여기 사장이야?”
“그렇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 죄송? 죄송하면 다가 아니지? 사람 찔러놓고도 죄송하다고 말하고 끝낼 거야?”
비꼬는 남자의 말에 가게 안 어디선가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바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씨발- 할 말 있으면 자신 있게 앞에서 나와서 하라고! 비겁하게 뒤에서 수군거리지 말고!”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곁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선 윤재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실상 냉정하게 따지면 이번의 일은 전적으로 성호의 잘못이었지만, 이 가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당장 이곳의 주인인 자신이 져야 하는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홀로 나오겠다고 한 준석을 억지로 주방에 남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윤재의 앞에 서있는 남자는 그저 성실한 노력만으로 극복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네가 사장이라고? 생각보다 많이 어린 거 같네. 그래도 손님 대접하는 정도는 배워서 알 거 아니야? 아니면 알면서도 혼자 온 손님은 대충 먹여서 빨리 내보내자 이런 생각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손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조금 전의 일은 명백한 저희의 실수...”
“여기저기서 날 무시하니까 이젠 술 먹겠다고 찾은 가게에서까지 무시를 당하네, 나 참 더러워서. 그래서 어쩔 거야? 좆같은 안주 좀 먹겠다고 기다린 내 피 같은 시간 어떻게 물어낼 건데?”
조금 전 실수에 더해 가게의 주인으로서 약자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윤재가 저자세를 취하자 그 모습을 보고 한층 더 기세가 오른 남자가 스리슬쩍 금전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실직을 한 뒤 금전적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는 그는 이 기회에 적은 액수나마 가게의 사장인 윤재를 상대로 위자료 명분의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저 씨발 새끼...’
자신이 해결하는 동안 주방 일을 맡아달라는 윤재의 단호한 요청에 따라 홀로 나가지 않고서 주방을 지키던 준석이 점점 안하무인으로 변해가는 남자의 태도에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주방 입구로 다가갔다. 여차하면 앞으로 나서기 위해서였다.
“손님, 제가 주문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겁니다. 사장님은 잘못이 없으세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졸지에 윤재가 금전적인 손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성호가 잠시 동안 쥐 죽은 듯이 상황을 지켜보던 태도를 버리고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금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윤재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그였다.
“성호야. 넌 가만히 있어.”
“그치만 사장님, 솔직히 이 정도로 피해보상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성호가 솔직한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자 그 말을 들은 남자가 곧바로 눈을 뒤집고서 고함을 질렀다.
“하, 뭐가 어째? 이 새끼 이거 좀 전까지 잘못했다고 살살 빌더니 이제 보니 그게 다 새빨간 거짓 연기였구만? 어?”
기세로 상대를 이기겠다고 작심이나 한 듯 말이 이어질수록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여튼 하류 인생이란...”
다소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냉소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건 수영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진규였다. 수영이 다니고 있는 회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크고 유명한 회사에 몸담고 있는 그는 최근 좋은 조건의 여자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는 남자였다.
“저런 쓰레기와는 애초에 상종할 필요가 없어.”
“우리도 나이 들어서 저렇게 안 되도록 해야지. 무섭다.”
“쉿, 듣겠어.”
절반은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혹시 모를 피해를 당하기 싫다는 생각에, 또 절반은 단순히 재미있는 싸움구경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일처럼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괜히 진상한테 걸려서 여기 사장도 참 고생이네.”
“하필 얼굴도 곱상하게 생겨서 더 만만하게 보이나봐.”
“그러게. 딱하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야 뭐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
“괜히 남의 일에 나섰다가 험한 꼴 당하는 경우도 많잖아. 우리 회사 직원 한 명도 밤길에 아가씨 한 명 구해주겠다고 나섰다가 각목에 맞아서 전치 3주나 나왔다고. 안 나서도 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어?”
“내 말이. 요즘은 세상이 워낙 무서워서 가능하면 몸을 사려야...”
의식적으로 낮춘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던 용국이 갑자기 옆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끼고서 고개를 돌렸다.
“!”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수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일행들은 지금 그의 걸음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다름 아닌 소란의 원흉이 자리한 남자가 서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일제히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수영과 중년 남자의 사이가 좁혀지는 것을 지켜보며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비단 수영의 일행들 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팀의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막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영의 모습을 의아한 심정으로 쳐다보던 준석은 정확히 대치하고 있는 세 남자의 중심쯤에 걸음을 멈춰 세운 수영이 그들 중 윤재 쪽으로 몸을 튼 순간 무심코 눈을 가늘게 떴다.
“주문한지가 꽤 됐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겁니까?”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수영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윤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서둘러줘요. 먼저 도착한 안주도 거의 다 떨어졌으니까.”
“아...”
아직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서운 재촉을 당한 윤재가 당황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사이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있는 중년의 남자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수영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잠깐, 내 얘기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지금 갑자기 나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순서를 지켜서...”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단숨에 거칠게 떨쳐낸 수영이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일단 눈높이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다 무엇보다 결코 유순하지 않은 분위기를 품고 있는 수영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무심코 주먹에 힘을 실은 남자는 그러나 취기를 무기로 삼아 전혀 기세가 줄어들지 않은 커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란 게 있는 법이니까 댁도 순서를 지키라고! 우선 이쪽 일이 해결되면 그때 가서 안주를 찾던가 말던가 하란 말이야!”
“아까 시간을 허비하게 한 책임을 물라고 했던가요?”
“!”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향해진 질문에 빠르게 눈을 깜빡인 남자가 여전히 벌건 얼굴을 한 채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상황을 인식한 남자가 의식적으로 당당한 태도를 앞세워 대답하자 잠시 텀을 두고 수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당신이 되지도 않는 말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탓에 주문한 안주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몇인지 압니까? 당신이 하는 주장대로면 그 사람들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당신이 일일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군요?”
“!”
예상치 못한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된 남자가 처음 몇 초간 크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왜 책임을 져? 나는 피해자라고! 댁도 아까부터 여기서 있었던 일 다 지켜봤잖아?”
“봤습니다. 당신이 영업 방해는 물론 나머지 손님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는 전 과정을 말입니다. 우선 바쁜 일정을 쪼개 겨우 만난 제 일행부터가 지금도 당신 때문에 괜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죠. 그 아까운 시간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져주실 겁니까? 당장 여기서 따지기가 그러면 지금부터 경찰서로 가서 천천히 얘기를 해볼까요?”
“경...찰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죠. 기다리세요. 차 키를 가져올 테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곧바로 등을 돌려 자리로 향하려는 수영의 팔을 재빨리 붙잡은 남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처음 잘 풀리는 듯 했던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급속히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취기가 일시에 가시는 것을 느낀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수영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일을 벌였던 남자는 순식간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대로 경찰서까지 가게 될 경우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아직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이성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그는 일제히 자신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본 뒤 입술을 깨물었다.
취기가 가시자 좀 전까지의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남자는 잠시 동안 수영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듯 놓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나도 피해자니까 계산은 안 할 거야.”
최후의 통첩을 내뱉은 남자를 내려다본 수영이 입가를 비튼 것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알겠으니 그냥 가세요.’라는 윤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처 의자에 놓여 있던 두터운 점퍼를 집어 든 남자는 순식간에 가게 안을 채우기 시작한 수군거림을 뒤로한 채 서둘러 입구를 빠져나갔다.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 가게 안에는 일시적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움을 받은 데에 대한 인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곁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선 윤재를 쳐다본 수영이 이쯤에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내딛기 전 슬쩍 고개를 숙여 스치듯 윤재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건 적당히 데워서 우리 테이블로 가져다줘. 주문서에 추가하고.”
돌아올 윤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곧바로 그를 지나친 수영은 일제히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일행에게로 향했다.
가게에서 주인과 손님 사이에 시비가 일 경우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주인보다는 가게와 관련이 없는 제3자가 나서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볼 때 모양새가 낫다는 것을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도 조금 전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 그였지만.
“사장님...”
멀어져가는 수영의 뒷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윤재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성호의 부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여기고 각자의 대화로 돌아간 손님들을 배경으로 홀로 서있는 성호가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저 어묵탕 좀 가스레인지 위로 옮겨줄래?”
“아, 네.”
대답하는 성호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던 윤재가 문득 주방 입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준석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안의 일 좀 봐달라니까...”
준석의 곁으로 다가가 짧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한 윤재가 잠시 후 ‘아까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라는 준석의 질문을 받고 이제 막 움직이려던 다리를 다시 멈춰 세웠다. 곧바로 그가 돌아본 준석의 표정은 어딘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아직 손 안 댄 어묵탕 데워서 가져다 달라고.”
자신의 대답을 듣고 ‘그래?’라고 짧게 대꾸한 준석이 먼저 주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잠시 그대로 서서 쳐다본 윤재는 이내 지금의 바쁜 상황을 머릿속에 되새기고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주방의 입구 너머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음 섞인 대화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