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바(bar)-Moderato
오랜만에 찾은 바는 여전히 소란스럽고 끈적거리는 공기로 들어차 있었다. 입구에 붙여져 있는 ‘여자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표지판 문구대로 바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전부가 남성들로, 그들은 각각 둘 이상의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호연씨.”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바텐더의 인사에 미소로 답한 호연이 차를 주차시키고 조금 늦게 입구로 들어선 수영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이 가게는 처음이지?”
“분위기 괜찮은데.”
“응. 대학 때 처음 알게 된 뒤로 지인들과 자주 왔었어. 직접 가게를 차린 뒤엔 그쪽 일이 바빠서 뜸해졌지만.”
그렇게 말하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린 호연이 근처의 바텐더를 불렀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떤 것으로 주문할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려놓았던 그는 평소 자주 마시던 걸로 주문하겠다는 수영의 말을 듣고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는 바텐더에게 각각 다른 종류의 술 두 잔을 주문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한 곡 연주해주시지 그래요?”
주문을 접수한 바텐더가 미소를 머금고 말하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옆자리에 내려놓던 호연이 ‘피아노를 치지 않은지 오래 돼서.’라고 대답했다. 바로 곁에서 그의 대답을 들은 수영이 살짝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피아노 칠 줄 알아?”
“굉장히 잘 치세요.”
호연을 대신해 대답한 바텐더가 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엔 이 가게에 오시면 몇 곡씩 쳐 주셨었죠. 여기 무대는 손님들에게 개방되어 있거든요. 가끔 실력이 안 되는 손님이 용기를 내면 고문 장소로 바뀌기도 하지만, 호연씨 정도의 실력자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듣는 사람은 공짜로 프로 연주회에 참석한 기분이 들죠.”
“너무 그렇게 띄워 주지 마.”
바로 앞에서 이어지는 칭찬의 말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든 호연이 수영이 건네는 담배를 받아들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전 호연은 별로 대단치 않은 실력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대학 시절 중간에 전공을 바꾸기 전까지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웠던 그는 전문적인 피아니스트의 실력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준 프로급 정도의 실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셨던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태생적으로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난 그는 중간에 전공을 바꾸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이름난 피아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당신 연주 한 번 듣고 싶은데.”
한 모금의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수영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던 호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대답대로 한동안 가게의 증축 일로 바빠 피아노를 전혀 만지지 않았던 터라 둥글게 거절의 말을 입 밖에 냈던 그는 바텐더에 이어 수영의 요청까지 듣게 된 지금 적당히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로 태도를 선회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일부러 자랑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뜻하지 않게 연인의 앞에서 특기를 펼칠 기회가 생겨버린 상황에서 끝까지 거절을 하는 것도 스스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오랜만이니까 조금씩 틀리더라도 감안하고 들어줘.”
절반 정도가 사라진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연이 수영의 어깨에 스치듯 손을 올렸다가 내리고서 피아노가 놓인 무대로 향하자 그의 움직임을 뒤늦게 포착한 주변의 손님들이 각자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왔다.
근사한 조명 아래 능숙한 태도로 건반과의 거리를 조절해 자리에 앉은 호연은 잠시 적막한 침묵이 감돌던 공간 안에 서서히 감미로운 선율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기교를 빼고 담백하게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여서 과연 조금 전 들려온 바텐더의 칭찬이 괜한 공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자체가 몸소 연주로서 증명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외모 자체가 눈에 띠는 데다 능숙한 연주 실력까지 갖추고 있는 호연에게 매료되었는지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 손님들의 상당수가 무대 중앙에 앉아 있는 그에게 얼어붙은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말 멋지죠.”
문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줄곧 호연에게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거둔 수영이 바텐더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러네요.”
“전문적으로 나갔으면 꽃미남 피아니스트로 유명해졌을 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긴 하지만요.”
그윽한 조명 아래서 능숙하게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호연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바텐더가 잠시 후 멀찍이서 들려온 부름을 듣고 몸을 돌렸다.
붙임성 좋은 성격의 바텐더가 멀리로 사라지고 난 뒤 그제야 주문되어 나온 술을 두어 모금 목으로 넘긴 수영은 언뜻 시선이 마주친 호연을 향해 엷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 호연을 보며 어딘가 묘하게 예술적인 기질이 느껴진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가 이 정도의 훌륭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수영은 뜻밖의 사실을 확인한 지금 조금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입는 옷이나 관심 분야의 서적, 좋아하는 영화 등 종종 호연과 취향이 겹치는 부분을 발견할 때 느꼈던 만족감을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었다.
“그 술은 좀 쓰지 않나요?”
“!”
호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이 문득 옆에서 들려온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곁으로 다가와 있는 한 남자가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수영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처럼 적극적인 상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론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기분을 낼 목적의 커플들도 많이 찾지만, 그 이상으로 하룻밤 상대를 구하기 위한 솔로들의 헌팅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게이 바의 특성 상 처음 보는 상대로부터 노골적인 유혹을 받는 것은 적어도 이 장소 내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불어 속사정이야 어쨌든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남녀 모두에게 후한 점수를 받기 충분한 입장에 있는 수영에게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은 이미 충분히 익숙한 것이었다. 잘난 외모의 사람이 좋은 대우를 받는 건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하룻밤 잠자리 파트너를 찾는 이들의 상당수는 상대를 고르는 절대적인 기준을 오로지 취향에 맞는 외모에 두고 있는 덕분에 어느 정도 말끔히 생긴 남자의 경우 이곳에서 상대의 선택을 받지 못해 혼자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물며 수영 정도의 보기 드문 레벨이야 굳이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었다.
“혼자 오신 건 아닌 모양이네요.”
수영의 옆 자리에 놓인 외투와 그 앞의 가득 찬 잔을 차례로 시야에 들이고 그렇게 말한 남자가 ‘그래요.’라는 수영의 대답을 듣고 미소를 머금었다. 확답을 듣고 오히려 의욕적인 표정으로 변한 그는 임자가 있는 상대에게 한층 더 끓어오르는 타입인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시면 한 잔 사드려도 될까요? 파트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잠깐 정도 말동무를 해드리고 싶은데요.”
애교 있는 말투로 재차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쳐다본 수영이 적당히 거절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연 찰나, 줄곧 유려하게 바(bar) 안을 채우던 선율이 뚝 하고 멎었다.
자연스레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수영의 시야에 들어온 건 굳은 얼굴을 한 채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호연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연주를 하던 도중 고개를 돌렸다가 수영이 낯선 남자로부터 헌팅을 당하는 장면을 봐버린 모양이었다.
옆의 파트너가 아닌 자신에게 똑바로 시선을 고정하고서 다가오는 호연의 기세에 눌린 것일까, 좀 전까지 넉살 좋게 헌팅을 시도했던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띠게 경직되어갔다. 그런 그와 달리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수영은 호연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기 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호연의 옆에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수영이 말했다. 이런 일에 일일이 변명에 나서는 건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괜한 오해를 받은 채 있는 것도 내키지 않는 그였다.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스치듯 수영을 돌아보고 그렇게 말한 호연이 곧바로 멈춰 있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각지대에 도달한 뒤 한층 걸음에 속도를 올린 그는 잘 꾸며진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것과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
조금 전 수영에게 헌팅을 시도했던 갈색머리의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연의 모습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찰나,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날아간 호연의 주먹이 깨끗이 남자의 뺨에 적중되었다.
“아욱-!”
예상치 못한 급습을 당한 남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덕분에 젖은 바닥을 나뒹구는 추태는 면할 수 있었지만 이미 상대의 기세에 눌려버린 남자는 감히 반격에 나설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치고 있는 호연은 이미 외모에서부터 격이 다른 곳에 있는 존재였다.
직업 상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옴으로써 자연스레 사람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된 남자가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서있는 것을 잠시 동안 관찰하듯 지켜보던 호연이 이내 한 걸음씩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겁도 없이 남의 파트너에게 집적거려?”
냉소가 섞인 호연의 말을 듣고 일순 눈을 가늘게 뜬 상대가 조금 전 호연의 주먹에 맞아 욱신거리는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남자가 당신 하나만 볼 것 같아? 착각도 자유야.”
잔뜩 움츠린 태도와 달리 서슬 퍼런 말을 내뱉은 상대를 차갑게 노려본 호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이제껏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만큼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호연은 자신의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할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아까의 상황에서 수영이 조금만 눈에 띠는 반응을 보였다면 지금 여기서 센 척 말을 내뱉고 있는 남자는 당장 제대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호연으로부터 지독한 폭력을 당했을 지도 몰랐다.
“남의 것이나 빼앗으러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새끼가 꼴리는 대로 지껄이긴. 너 같은 쓰레기를 상대해주는 인간들의 수준이야 뻔하지. 오죽할까. 너 같은 새끼랑 뒹굴겠다고 나설 정도로 굶주린 인간의 수준이.”
“하, 뭐라고?”
“참고 있을 때 꺼져. 제대로 폭발해서 진짜로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기 전에.”
“...씨...발...”
서늘한 목소리로 들려온 말의 내용은 허언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 남자는 잠시 동안 말없이 시선으로만 대치하던 상황을 자신 쪽에서 먼저 끝내기로 하고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호연이 무대 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지금의 그를 이토록 무력한 패배자로 만든 것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해봤자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이제 와서 머릿속에서 도로 꺼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
먼저 꼬리를 내린 상대가 욕설을 내뱉으며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간 뒤 홀로 남겨진 호연은 곧바로 입구로 향하는 대신 몇 걸음을 옮겨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좀 전까지 흥분해 있었던 탓일까, 얼굴에 엷은 홍조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손을 뻗어 세면대의 물을 튼 호연이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간신히 제대로 마음에 든 상대를 만난 지금 이제 와서 그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일 따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든 이 정도로 취향과 육체의 상성이 잘 맞는 상대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차가운 물로 가볍게 세수를 하는 것으로 열기를 가라앉힌 뒤 화장실을 빠져나온 호연은 그 사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수영의 곁에 작은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가 미리 주문해 두었던 칵테일은 아직까지도 처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수했어?”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호연에게 고개를 돌려온 수영이 말했다.
“응, 얼굴이 좀 뜨거워져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호연을 잠시 지켜보던 수영이 평소보다도 잘 세팅이 되어 있는 짧은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쓸어 올렸다.
“이번 주 금요일이라고 했던가, 대학 동기들 모임 있다고 했지?”
갑작스런 호연의 질문을 받은 수영이 그렇다고 짧게 대답한 뒤 테이블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들어 그 안에서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처음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그의 앞에 놓였던 재떨이는 어느 샌가 담배꽁초들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하면 어때? 비용은 절반으로 해줄게.”
뜻밖의 제안을 듣고 담배에 불을 붙이던 손을 잠시 멈춘 수영이 불이 붙은 담배를 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미소를 머금었다.
“안 그래도 손님으로 넘치는 가게인데 절반이라... 파격적이네.”
“당신이 성의만 좀 보인다면 하루 정도는 아예 전세를 내줄 수도 있어.”
“...성의?”
묘한 미소를 머금은 호연을 바라보며 덩달아 입꼬리를 올린 수영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의 끝을 재떨이에 털어내며 말했다.
“구미가 당기는 거래지만 아쉽게도 그 건은 이미 결정이 났어.”
“결정? 장소도 말이야?”
“응.”
“어디서 하는데?”
턱을 괸 채 시큰둥한 목소리로 묻는 호연을 슬쩍 쳐다본 수영이 다시 한 모금의 연기를 들이마시고서 대답했다.
“회사 퇴근하면 직원들과 가끔 회식하러 가는 가게가 있어. 거기 찌개 안주 맛이 제법 괜찮아.”
“평소 직장 동료들하고 질리도록 가는 곳에서 굳이 연말 모임을 갖겠다고?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이야?”
비꼰다기보다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얼굴로 묻는 호연의 옆에서 잠시 침묵을 지킨 수영이 ‘글쎄.’라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객관적인 사항으로 보면 가게의 규모 면이나 위치 면에서 특별히 좋다할 만한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직원들의 칭찬을 종종 들었던 것이 은연중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이제는 그 허름한 특유의 분위기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느껴지고 있는 수영이었다. 그러나 우선 다른 사항을 모두 젖혀두고 그가 최종적으로 <민들레>를 모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이 물론 그 가게의 주인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정이든 호기심이든 혹은 기타의 어떤 감정이든 윤재와 뜻밖의 재회를 한 뒤로 그에게 관심의 일부를 보내고 있는 사실까지 애써 부정할 마음은 없는 그였다.
“그럼 다음 기회가 있다면 로 데려와. 당신의 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니까.”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들려온 호연의 말에 고개를 돌린 수영이 커다란 손으로 턱을 괴고서 말했다.
“그때도 절반 할인으로 해줄 거야?”
“글쎄... 일단은 당신의 성의를 좀 보고나서.”
그렇게 말하며 스치듯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허리를 기울인 호연은 수영의 입술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빼내고서 천천히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
“여기, 거스름돈.”
“네.”
받은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고 있는 윤재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짐이 많네. 요즘 장사가 잘 되나봐?”
아주머니의 질문을 받고 애매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오늘은 대규모 단체 손님이 예약되어 있어서요.’라고 대답했다. 하루로 한정된 호황이지만 그래도 가게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면 힘이 솟는 그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두 번이나 가게 안을 청소했고 재료준비에 나서는 시간도 한 시간을 앞당겼다. 성호도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와서 돕겠다고 했고, 어젯밤의 통화를 통해 재차 일을 도우러 오겠다는 준석의 약속도 받은 만큼 수영으로부터 일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난 뒤 품었던 처음의 걱정은 어느 정도 희석이 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막상 닥쳐봐야 아는 것이었지만.
꼼꼼히 손에 들린 수첩을 체크해가며 오늘 당장 필요한 식재료들을 구매해 차의 뒷좌석에 실은 윤재는 운전석에 앉아 혹시 뭔가 잊은 것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뒤 차를 출발 시켜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신선도가 생명인 재료를 냉장고에 집어넣고서 우선적으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채소들을 다듬는 데만 거의 두 시간을 투자한 윤재는 조금 서둘러 감자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잠시 방심한 사이 손가락에 작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아...”
벗겨진 살 껍질 아래로 붉은 피가 배어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윤재가 쓰라린 통증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같으면 여기서 연고를 발라두겠지만 지금의 바쁜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상처 입은 손가락을 대충 한 번 찬물에 씻어내는 것으로 조치를 취한 뒤 다시 주방의 한 구석에 앉아 감자를 집어 들었다.
벽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오후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성호가 오기 전까지 혼자서 어느 정도 재료 준비를 끝내놓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윤재는 지금도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고 있는 쓰라린 통증을 무시한 채 한층 더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수영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순수하게 자신의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도 윤재는 절대로 흠이 잡힐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음식의 맛이야 손님들 각자의 입맛이 다르니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서비스와 관련된 부분만큼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좋지 않은 뒷얘기가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게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
예상치 못한 성호의 등장에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 윤재가 아직 그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 30분 이상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성호를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점심 먹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점심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 아니야?”
“사실은 어제 늦게까지 친구들이랑 만나서 술을 마시고 그대로 뻗어버려서 좀 전에 일어났어요. 알람을 맞춰놨는데 못 들어서요. 으...”
그렇게 말하며 배를 살살 문지르는 성호의 안색이 과연 좋지 않았다. 너무 많이 자서 퉁퉁 부어버린 눈두덩이 탓에 그의 눈은 평소의 절반 크기로 보였고, 오는 동안 찬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 듯한 입술은 당장 보기에 바삭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라 있었다.
괜히 빨리 오라는 재촉이 될까 싶어 일부러 성호에게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 전화를 하지 않았던 윤재는 한눈에 봐도 숙취 기운이 남아 있어 보이는 성호의 몰골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감자와 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나 먹으려고 끓여둔 생태찌개가 남아 있으니까 데워줄게.”
“아, 괜찮으니 앉아계세요. 제가 차려서 먹을게요. 지금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는 냄비죠?”
“응. 밥은 밥솥에 있어.”
그렇지 않아도 생각보다 재료 준비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걱정을 하고 있던 윤재가 돌아온 성호의 말을 듣고 순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보다 일찍 준비에 나섰지만 장보기에 예상 외로 많은 시간이 소비된 탓에 개업 시간 전까지 그리 여유가 없을 듯 했다.
최대한 빨리 식사를 끝내고 주방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성호는 이곳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던 당시와 비교해 눈에 띠게 능숙해진 솜씨로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빈속에 밥을 집어넣고 나서 조금은 쓰린 속이 나아졌는지 아까 전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랑 달리 이제 제법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마주한 윤재에게 어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시시한 농담 몇 마디를 들려주었다.
“재미있지 않아요? 하하.”
“요즘 인터넷에선 그런 게 유행인가 보네.”
“사장님은 인터넷 안 하세요?”
“하긴 하지만 별로 많이는 안 해. 일단 가게 문을 닫으면 바로 뻗어서 자게 되니까 일어나면 벌써 낮이고... 그러면 또 가게 열 준비해야 하고.”
“...그러네요.”
대꾸하기 전까지의 미묘한 침묵을 알아차린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되게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했지?”
“아뇨.”
“솔직히 말해도 돼.”
“아니 뭐... 좀... 그렇다고 할까요... 아직 젊으시잖아요. 자고로 젊을 땐 좀 놀아야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게 제 평소의 지론이거든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성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윤재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래봬도 예전엔 놀기도 했어. 대학시절엔 미팅도 몇 번 해봤고.”
“에이- 요즘 세상에 누가 미팅 정도로 논다고 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노는 건데?”
“논다는 건 그거죠. 이성도 여럿 만나보고 또 술도 많이 마셔보고...”
심플한 성호의 대답을 들은 윤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의미라면 놀았다는 대답을 하기엔 자신이 한참 부족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 그는 문득 오래 전 오직 단 한 사람을 상대로 깊이 느꼈던 연정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사장님. 핸드폰 울려요.”
성호의 말을 들은 윤재가 일부러 근처에 놔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응, 나.]
“응.”
너머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윤재가 곧바로 이어진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미안한데 나 오늘 갑작스럽게 야근하게 될 것 같아. 후배 새끼... 후배가 또 실수를 저질러놔서. 이번 회식 때 과장님한테 이 새끼 자르자고 건의할 거야.]
“아... 그래. 그런 사정이면 어쩔 수 없지 뭐.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일 열심히 해.”
[미안하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여긴 진짜 괜찮으니까 그쪽 일 실수 안 하게 신경 써. 응, 나중에 봐.”
준석으로부터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도와주러 오겠다는 말을 들었던 만큼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던 윤재였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 순식간에 여건이 불리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애초에 그가 머릿속에 두고 있던 일손은 자신과 성호였고 결과적으로 지금은 처음의 생각대로 된 것뿐이었다.
“못 오신대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온 성호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됐대.’라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한 윤재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다시 감자 칼을 집어 들었다.
“미안한데 우리, 조금만 서두르자.”
“네.”
믿음직한 얼굴로 대답하는 성호에게서 시선을 거둔 윤재는 감자 칼을 쥔 손에 한층 속도를 올렸다.
수영이 그의 일행들과 <민들레>를 찾은 것은 정확히 그가 미리 언급했던 시간 즈음에서였다. 미리 방문할 인원수를 전해 듣고 넓게 자리를 만들어둔 만큼 다행히 앉을 자리가 부족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퇴근 후의 모임자리라서인지 수영을 비롯한 그의 일행 대부분은 점잖은 수트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다소 화려한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는 일부의 일행은 지극히 서민적인 가게의 분위기와는 다소 엇나가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여기 찌개 맛이 그렇게 좋은가?”
“수영이가 직접 추천할 정도면 대단하겠지. 이 녀석 웬만해선 참견 없이 방관하는 타입인데 이번엔 웬일로 직접 나섰잖아.”
“그러게. 이제 맛없으면 다 우수영 책임으로 돌리는 거다?”
“메뉴 보면 별로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뭐, 시켜서 먹어보면 알겠지.”
“그래. 일단 주문부터 하자. 나 2차 때 제대로 먹겠다고 아까 식당에서 밥도 조금만 먹었다고.”
거대한 일행이 만들어내는 떠들썩한 대화를 부담스런 기분으로 들으며 한곳에 대기하고 있던 윤재가 잠시 후 주문하겠다는 수영의 말을 듣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찌개 종류랑 무침 류는 다 하나씩 내주세요. 마른 오징어랑 해물누룽지탕, 알탕도 추가해주시고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수영은 주문을 받는 윤재를 상대로 정중한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와의 대화에선 늘 일방적으로 존댓말을 사용해왔던 윤재로선 다소 생경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가 아는 수영은 사회에서의 기본 에티켓 정도는 칼같이 지키는 남자였다.
주문서에 체크가 늘어갈수록 윤재의 표정은 굳어져갔다. 기본으로 주문한 술만 맥주 스무 병에 소주 열다섯 병. 안주로는 당장 손이 많이 가는 찌개와 탕 종류만 해도 양손을 사용해서 세어야 할 정도였다.
재료 준비를 미리 어느 정도 해놨음에도 심각하게 우려가 되는 상황에서 일단 묵묵히 마지막 주문까지 모두 체크하고 등을 돌린 윤재는 그와 마찬가지로 긴장된 표정을 지은 채 한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성호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컵과 물수건부터 좀 옮겨줘. 다 옮긴 뒤엔 바로 주방으로 오고.”
“네.”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성호의 대답을 듣고 쓴웃음을 지은 윤재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딸랑-
갑자기 들려온 종소리에 다시 몸을 돌린 윤재가 이제 막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눈으로 확인한 것과 동시에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앞치마부터 줘.”
조금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한 것은 지금 회사에서 곧바로 온 듯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