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eloved-13화 (13/66)

13.

몇 초간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윤재였다.

“잊고 간 거라도 있나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아까 양과장의 일행이 차지했던 테이블을 쳐다본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대답을 듣고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전한다는 말을 잊었다는 게 생각나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 다시 습관처럼 시선을 피하는 윤재의 곁으로 수영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느긋한 걸음에 따라 질 좋은 울 코트의 얇은 끝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손은 괜찮아?”

“!”

뜻밖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무심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찬 물에 식혔음에도 불그스레한 흔적이 남아 있는 손등에는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요.”

“.......”

짧은 침묵 뒤 이어진 윤재의 대답을 듣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수영이 습관처럼 담뱃갑을 찾으려다 이곳이 음식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손을 빼냈다.

“우리 과장님이나 아까 같이 온 동료들은 아무래도 이 집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야. 음식 맛도 분위기도 좋다고 하던데.”

“.......”

“전부 네가 만드는 거야?”

직접적인 질문을 받은 윤재가 잠시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재료 준비는 성호... 아르바이트생이 도와주고 있어요. 만드는 건 대부분 제가 맡고 있고요.”

“얼마 전까지는 회사에 다녔다고 들었는데 요리에 꽤 소질이 있는 모양이지.”

“여기서 만드는 요리는 전부 어머니에게서 직접 배운 거예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그래? 어쨌든 동료들뿐 아니라 내 입에도 꽤 잘 맞는 것 같아. 네가 한 요리들.”

묘하게 진지한 수영의 말에 당장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 지 알 수 없어진 윤재가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 채 침묵을 지켰다. 아무라도 좋으니 이 어색한 상황을 종료시켜줄 누군가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주변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아까 음식 쓰레기로 가득 찬 통을 들고 나간 성호도 아직까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줄곧 회사에서 일한 뒤 퇴근 후까지 회식 자리에 어울리느라 한밤이 된 지금 조금 피곤한 상태에 있는 수영이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가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이제부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주 금요일에 여기서 송년모임을 가질까 생각하고 있어. 모일 인원수는 대략 서른 명 정도 될 거고.”

“!”

갑작스런 얘기를 듣고서 다시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곧바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렇게 많은 인원수의 단체 손님을 한 번에 받을 여력은 없어요.”

그의 말 대로였다. 실질적으로 거의 혼자서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윤재로서는 아까 전 가게 내의 손님을 다 합해 스무 명 정도가 되는 상황에서 주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직면했었다. 같은 서른 명이라도 그나마 각각의 팀으로 나뉘어 시간의 차이를 두고 온다면 어찌해볼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 작은 주점에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수의 단체 손님이 들어온 일은 없었다.

“많은 손님을 받는 게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영업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

“.......”

“...가게에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가져온 얘기인가요?”

윤재의 질문을 받고 일순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근처의 의자를 가까이로 끌어온 뒤 그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이어 우아한 긴 팔을 움직여 팔짱을 낀 그는 더없이 태연한 말투로 부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별로 그렇진 않아. 말했잖아. 우리 회사 직원들이나 나나 여기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

돌아온 수영의 대답에도 윤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눈앞의 남자에게 만큼은 부담스런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호의를 거절해서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그 인원의 단체손님을 받기엔 제 능력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온 윤재의 대답쯤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수영의 얼굴 위에 실망한 기색은 드리워지지 않았다. 다만 좀 전에 비해 한층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마주한 윤재를 쳐다보았다. 마치 관찰하듯 예리한 시선으로.

아무 거나 꺼내 걸쳐 입은 듯한 옷차림에 양념의 흔적이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윤재는 그런 와중에도 더없이 단정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호연처럼 사람들의 눈을 확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면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세련된 옷으로 바꿔 입혀 놓으면 평소 윤재를 그냥 지나쳤던 이들도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게 될 거라고 수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부터 하는 거야?”

문득 들려온 수영의 말에 무심코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도 아닌 수영의 입에서 저런 스포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성실한 대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진 그는 아직 화끈거리는 통증이 남아 있는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현실적인 시간으로는 단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윤재에게 있어 수영과 마주한 뒤 흐르는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나간 뒤로 벌써 꽤나 오랫동안 손님을 맞지 못하고 있는 가게 안은 그 어느 때보다 적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중요한 모임이라면 여기보다 훨씬 더 넓고 메뉴도 다양한 곳에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주도로 데려오는 손님은 대규모라도 받기 싫다?”

“.......”

긍정의 뜻이 담긴 침묵을 지킨 윤재가 잠시 뒤 이어 들려온 수영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요즘 장사가 어렵지 않아? 과장님 말씀으로는 모친이 운영하셨던 때에는 형편이 괜찮았던 모양이지만.”

“.......”

“지금 같은 상황이면 아르바이트생 월급이나 건물임대료도 부담이 될 텐데 사실 그보다도 어머니의 병원비용을 충당하는 게 제일 문제가 되겠지.”

윤재의 입장에선 분하게도 조금 전 들려온 수영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모친이 가게를 운영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음식 맛이나 여유로운 접객 태도에 만족하며 이곳을 자주 찾았던 단골들의 상당수는 윤재가 가게를 이어받은 뒤 미묘하게 달라진 음식의 맛에 적응하기를 포기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은 가게를 찾지 않고 있었다. 윤재로서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떠나간 손님을 다시 불러들이는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양과장처럼 입맛이 까다롭지 않거나 윤재의 음식에 만족해하는 새로운 손님들의 영입으로 적자를 보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전 수영이 말한 대로 모친의 병원비와 이번에 새롭게 뽑은 아르바이트생 성호의 월급을 빼고 나면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빠듯한 것이 <민들레>의 운영 실정이었다.

“너한텐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순수하게 지인들에게 맛있는 안주를 소개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괜한 부담가질 필요도 없어.”

덤덤한 말투로 이어서 말한 수영이 천천히 팔짱을 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할 수 있는 대로 해봐. 한꺼번에 많은 주문을 받으려면 손이 바쁘긴 하겠지만 우리 쪽에서 특별히 재촉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수영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벽 어딘가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 있던 윤재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금요일이라고 했나요?”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면 서른 명에 가까운 단체손님을 한꺼번에 받는 건 현재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나 저번 주는 내내 손님의 수가 눈에 띠게 적었던 만큼 이번의 건이 성사되면 누적된 적자분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였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돈이 없는 건 몰라도 처음으로 채용하게 된 아르바이트생의 월급을 미루거나 모친의 병원비를 체납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윤재는 순수하게 손님의 입장을 내세우는 수영의 말을 이번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과장이나 그의 동료들도 이곳을 알게 된 뒤 사석에서 다른 지인들을 불러오는 일은 많았으니 이번에도 그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면 될 거라고 그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일단... 가게에 오시는 시간을 말씀해주세요. 그때 주문할 메뉴도 대략 정도는 미리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여전히 뻣뻣한 말투를 쓰고 있지만 어쨌거나 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윤재를 내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수영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빠르면 금요일 밤 아홉시쯤 될 거야. 퇴근 후에 만나서 일단 저녁을 먼저 먹고 2차로 올 거니까. 메뉴는... 일단 저기 벽에 붙어 있는 것 중에 찌개류랑 마른안주는 다 주문한다고 생각해둬. 미리 재료를 준비했다가 소용없게 되면 손해가 날 테니까 만약 주문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값은 따로 지불할게.”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수영의 말을 듣던 중간, 미간을 좁힌 윤재가 앞으로 나섰다.

“팔지 않은 음식에 대한 돈까지 받을 생각은 없어요.”

다른 가게의 주인들이라면 두 팔 벌려 반길 제의를 윤재는 당연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아는 김윤재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은 그 부분에 대해선 차후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로 적당히 넘긴 뒤 일단 잠시 끊겼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

“차를 댈 곳은 이 앞뿐이야?”

“옆의 가게 주인 분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면 그 앞쪽도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일단 두 군데에 나눠서 주차하는 걸로 할게.”

“...네.”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만 간략히 알린 수영이 문득 벽에 시선을 던졌다.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자정까지 십 여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나서 다소 험하고 민망한 말들이 나오더라도 적당히 흘려 넘겨줘. 개중엔 취하고 나면 인사불성이 되는 놈들도 있으니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아무래도 다른 손님들에게 큰 폐가 된다 싶으면 우리 쪽에서 알아서 데리고 나갈게.”

“...알겠어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하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문득 윤재의 손목으로 손을 뻗자 곧바로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윤재가 이제 막 닿으려던 쪽의 손을 재빨리 뒤로 뺐다.

자신을 향한 상대의 명백한 거부의 반응에 일순 눈매를 가늘게 뜬 수영이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등이 빨갛기에 어느 정도인가 살짝 보려던 것뿐이야. 겨우 이 정도에 일일이 흠칫거리며 놀랄 건 없잖아?”

상대에게 거절당하는 일이 흔치 않은 수영은 눈에 뻔히 보이는 윤재의 태도에 불쾌함과 동시에 명확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손님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나름의 융통성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가 오직 자신을 상대로 해서만큼은 날을 세우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지금 상대가 하는 행동이 자신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한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수영에겐 흥밋거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정작 눈앞의 남자는 상대가 자신을 이런 눈으로 보는 것을 알 리도, 결코 반길 리도 없었지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때 사귀었고, 또 한 번은 스스로 버렸던 상대가 어떤 의미에서든 흥미를 주고 있다는 건.

“...괜찮다고 아까 말했잖아요.”

“너 같은 타입이 말하는 ‘괜찮다’를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만큼 멍청한 인간은 세상에 별로 없어. 이런 얘기, 누구한테서든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들은 적 있지 않아?”

예리한 수영의 질문을 받고 일순 말문이 막힌 윤재가 벌어진 입을 다시 다문 순간, 문득 입구의 문이 열리는 기척과 함께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불편한 공기가 흐르던 공간 안에 구원자처럼 등장한 것은 양손으로 빈 음식물쓰레기통을 들고 있는 성호였다. 바깥의 혹독한 바람을 한참 동안 맞았던 탓인지 그의 양 뺨이 붉게 변해 있었다.

“어...”

윤재의 옆에 서있는 수영의 모습을 시야에 들인 것과 동시에 어색한 표정을 지은 성호가 ‘통 가져다놓을게요.’라고 윤재에게 말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수영이라면 일전에 회식으로 온 양과장 일행들 사이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터라 잘 기억하고 있는 성호였다. 물론 중요한 건 얼굴을 본 횟수가 아니었다. 아마 단 한 번을 봤더라도 수영의 외모면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아무리 봐도 접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나란히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성호는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조금 전 보았던 손님이 뭔가를 놓고 갔거나 뒤늦게 찌개를 포장해달라는 이유로 다시 가게를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조금 전 성호가 보았던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전혀 그런 쪽은 아니었다.

‘채무관계인가...’

다소 경직되어 있던 두 사람의 분위기를 토대로 나름의 추론을 하며 음식물쓰레기통을 행주로 닦아내던 성호가 문득 입구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장소가 변경되면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연락해주세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준비해 둘게요.”

이윽고 문이 열리는 기척과 함께 종소리가 난 뒤 가게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 남자를 보낼 때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가 평소 들은 적 없이 경직되어 있었다는 걸 느낀 성호는 잠시 후 주방 안으로 들어선 윤재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 그의 표정은 어느 샌가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저기, 조금 전 손님은...”

“아... 이번 주 금요일에 단체 예약을 하러 오신 거야.”

“그런가요. 몇 분이나...”

“들은 얘기로는 멤버가 서른 명쯤 되는 것 같아. 미리 말해두지만 그 날은 정말 많이 힘들 거야. 각오해둬.”

“서른 명이요? 와... 가능해요?”

크게 놀란 표정을 짓는 성호를 향해 스치듯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 몸을 돌린 윤재가 서둘러 소매를 걷어붙이고 근처에 놓여 있던 양푼을 집어 들었다.

“노력을 해봐야지. 나도 이 가게를 직접 운영한 뒤로 처음 받는 대규모 단체손님이라 어찌 될 지 잘 모르겠어. 손이 많이 부족할 것 같으면 그 날 하루 같이 일할 사람을 추가로 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솔직히 걱정이 되긴 하는데 그래도 가게가 꽉 찰 거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기쁜데요.”

“그래?”

평소 한산한 가게를 지키며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한 듯한 성호를 쳐다보는 윤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성호의 월급은 제 때에 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자 여전히 무거운 마음 한편으로 다행스런 기분이 드는 그였다.

“그 날은 마음 단단히 먹고 와야겠어요. 밥도 든든히 먹어두고요.”

“밥은 여기 와서 먹어. 그 날은 평소보다 일찍 재료 준비를 시작할 거니까 시작 전에 맛있는 밥 먹여줄게.”

“밥까지 먹여주신다는 얘기 들으니까 그 날은 진짜 엄청 부려 먹힐 것 같아서 겁나는데요.”

장난 섞인 성호의 말에 작게 웃음소리를 낸 윤재가 양푼을 씻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했다.

“맞아. 엄청 부려먹을 거야. 그런다고 중간에 도망가지는 마.”

“네, 도망은 안 갈게요.”

익살스런 말투로 대답하는 성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철 지난 유행가의 선율로 이루어진 벨소리는 윤재의 것으로, 근처의 선반에 놓아둔 가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깐.”

성호에게서 몸을 돌려 선반 앞으로 다가간 윤재가 곧바로 가방에서 꺼낸 핸드폰의 액정을 먼저 확인했다.

“!”

발신자는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만큼 일단 통화버튼을 누르고 먼저 정중한 안부인사로 말문을 연 윤재는 곧 너머에서 들려온 한숨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통화는 꽤나 길게 이어질 듯 했다.

*

오랜만에 평일의 저녁에 만난 준석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는 안색이 많이 좋아져있었다. 최근 회사일로 한창 바빠 통화를 할 짬도 내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지금쯤 피로에 푹 찌들어있을 거라고 예측한 윤재는 그래도 모처럼 제대로 된 안색을 보이고 있는 준석의 얼굴을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식사는 잘 챙겨먹고 있었는지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조금 오른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얹히겠다.”

“아, 미안. 먹어.”

좋아하는 고등어조림을 앞에 두고 빠르게 움직이던 수저를 멈춘 준석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곧바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윤재가 자신도 다시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준석이 퇴근을 한 뒤 잠시 시간을 내 만난 두 사람은 지금 준석의 회사 근처에 자리한 고등어조림으로 유명한 식당에 마주앉아 있었다. 예전부터 ‘그 집 조림 아주 맛있으니 한 번 먹어봐’라는 준석의 말을 적당히 지나가는 말로 흘려 넘겨온 윤재가 오늘 웬일로 준석에게 전화를 걸어 그 맛을 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매일같이 자기 가게의 음식만 접하다보니 문득 다른 집 음식 맛이 보고 싶어진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추론을 한 준석은 오늘은 칼 퇴근을 할 예정이니 회사 앞으로 오라는 지령을 윤재에게 내렸고 결국 오늘의 만남은 그런 과정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맛, 어때?”

“응. 맛있다. 뒷맛이 칼칼하니 좋네. 감기 기운 있을 때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아.”

“이 집, 고등어조림 말고 갈치구이도 아주 잘해. 먹어보고 배울 수 있는 건 배워봐.”

“배우면 나야 좋지만 이런 전문 음식점에서 남한테 레시피나 재료 같은 건 절대 안 가르쳐주잖아. 특히 같은 요식업에 종사하는 라이벌에게는.”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그냥 먹어보고 혀에 남은 맛으로 재료와 레시피를 유추하는 수밖에.”

“야, 그건 전문가의 경지지. 나 아직 이쪽 세계에선 초보인 거 잊었어?”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윤재의 앞으로 이제 막 점원이 새로 가져다준 반찬을 밀어준 준석이 피식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말해놓고 나서야 자신이 초보에게 너무 큰 것을 바랐다는 자각이 드는 그였다.

늘 그렇듯 식사는 적당히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진행이 됐다.

과연 맛 집으로 이름난 가게답게 퇴근 시간 후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님으로 붐비는 내부의 자리는 이 부근의 회사 사람으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남자들의 다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운영하는 가게 내 자리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때가 많은 윤재로선 부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확실히 지금 맛보고 있는 고등어조림의 맛도, 가게가 위치한 자리도 이곳은 <민들레>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의 우위에 있었다. 모친이 <민들레>를 운영할 당시라면 적어도 맛에서는 뒤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어찌됐든 지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건 윤재 자신이니 이제 와 만약의 경우를 대입하는 건 그저 허무한 일일 뿐이었다.

“또래의 회사 동료들 중에 벌써 결혼한 사람들 있지?”

뜬금없는 윤재의 질문에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춘 준석이 일단 ‘그렇지, 뭐.’라고 대답하자 살짝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윤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전에 세희씨랑 헤어진 뒤로 벌써 2년 넘게 여자 친구 안 만들고 있지?”

또다시 이어진 질문에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준석이 평소와 달리 자신을 상대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윤재를 잠시 관찰하듯 쳐다보다 결국 추궁에 나섰다.

“너, 혹시 어머니한테 전화 받았어?”

“!”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급습을 당한 윤재의 표정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것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준석이 잠시 멈춰 있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말했다.

“이번에 가져온 선 자리 내가 안 본다고 고집부리니까 너한테 전화해서 협력을 요청한거구만. 어머니 생각이야 안 봐도 뻔해. 네 어설픈 연기도 다 눈에 보이고.”

“.......”

나름대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내려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자 윤재의 얼굴 위엔 실망감과 동시에 안도의 표정이 내려앉았다. 몇 번이나 간절히 부탁을 해온 준석의 모친에게 좋은 답을 들려줄 수 없게 된 사실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되지도 않는 연기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잠깐 만나는 정도는 괜찮잖아...”

“난 당분간 생각 없어. 일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연애는 무슨...”

“.......”

“야, 그런 표정 하지 마.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어머니한텐 내가 알아서 잘 말씀드릴 거니까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여튼 어머닌 왜 애꿎은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하시는지...”

젓가락을 움직이며 투덜거린 준석이 어느 순간부터 얼음상태인 윤재를 뒤늦게 알아채고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다 식겠다. 식으면 뻑뻑해져. 빨리 먹어.”

“...응.”

“아무튼 어머니한테 부탁받은 얘긴 다 잊어버려. 그보다 너 이번 주 토요일이 쉬는 토요일이지? 오랜만에 한국에 온 성욱이가 얼굴 좀 보자는데 그 녀석이 서울에서 시간을 낼 수 있는 게 이번 주 금요일 하루밖에 없대. 너 휴일 하루 앞당겨도 되지?”

“성욱이가?”

“응, 그 자식 엊그제 갑자기 귀국했나 보더라. 얼마 전에 거기서 결혼식 올렸대.”

“아, 그래? 거기서 결혼식을...”

성욱은 윤재와 준석과 고3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로, 군 제대 후 새로운 꿈을 펼치겠다며 미국행 비행기를 탄 뒤 몇 년에 걸쳐 간간이 전화 연락을 취해오고 있었다.

“많이 변했을까... 얼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윤재가 과거의 성욱을 머릿속에 회상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그와 마주한 위치에서 대답을 기다리던 준석이 ‘그럼 금요일에 약속 정해도 되지?’라고 재차 윤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응...”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윤재가 뒤늦게 ‘금요일’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키고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 금요일은 수영의 단체 손님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아, 미안. 그 날은 안 되겠다. 이미 중요한 일정이 잡혀있어서...”

“중요한 일정?”

“응. 대규모 단체 손님을 받기로 했거든.”

윤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듣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준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대규모? 몇 명인데?”

“서른 명 정도...”

“와- 그 정도 인원수면 가게 전세 내겠는데. 너 그 정도로 많은 단체 손님 받는 거 처음이지? 요즘 연말이라 다른 음식점들은 성수기인데 너희 가게만 혼자 비수기였잖아. 잘 됐네.”

“...응.”

예약을 주도한 사람의 존재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로선 가게의 상황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한 윤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석의 말대로 모임이 많은 시기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휑한 상태로 유지되어온 그의 가게가 모처럼 지금의 이 식당처럼 손님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아까 전 수영이 미리 언급한 메뉴의 가격만 대충 합해도 이미 충분히 높은 금액이 나온 상태였다.

“손님 수가 많은 건 좋은데 너 그 날 혼자 일 다 볼 수 있겠어?”

가장 걱정되고 있던 부분을 질문 받은 윤재가 ‘성호도 있으니까 둘이서 최대한 열심히 해봐야지.’라고 대답하자 곧장 그를 마주한 준석의 표정 위로 근심의 기색이 떠올랐다.

“너도 너지만 알바생 죽일 셈이냐?”

“...내가 최대한 많이 할 거야. 성호는...”

“알바생도 알바생이지만 너도 걱정된다고.”

“.......”

“...몇 시에 오는 손님인데?”

“아홉시 정도쯤.”

“아홉시...”

윤재의 대답을 듣고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준석이 다시 윤재에게 시선을 옮기고 입을 열었다.

“그 날 특별한 일 없으면 퇴근 후에 도와줄게. 중간에 또 재수 없게 후배 놈이 실수해서 괜한 일거리를 만들지만 않으면 도와주러 갈 수 있을 거야.”

전혀 바라지도, 생각지도 못한 준석의 지원 얘기에 놀란 윤재가 곧바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퇴근 후에 하기엔 일이 너무 힘들어. 안 그래도 퇴근 무렵엔 지칠 텐데 그 때부터 어떻게 시작하려고. 괜찮아. 나랑 성호 둘이서 할 수 있어.”

“괜찮긴. 집에 돌아가도 너랑 알바생 둘이 죽어라 일할 거 생각하면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냐. 그냥 도와준다고 할 때 네,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여. 누가 뭐 공짜로 해준대? 나중에 그만큼 다 받아 낼 거니까 괜히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렇게 말하고서 꽤나 마음에 든 듯한 동치미 국물을 시원스레 죽 들이킨 준석이 미역무침이 담긴 접시로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근데 별일이긴 하다. 넓지도 않은 너희 가게에 서른 명의 단체 손님이 예약을 다 하고. 뭐,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 입소문을 타고 인기가 많아지면 좋지만.”

“...응.”

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자연스레 수영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린 윤재가 스치듯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을 받아들인 이상 이제부터는 문제없도록 잘 진행해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린 결정인 만큼 이제 와서 후회는 없는 그였다. 물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무언가 걸리는 것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럼 성욱이한테는 다음에 보자고 말해야겠네.”

“응. 그래야겠지...”

“그래. 하긴, 뭐 청첩장도 안 보낸 무심한 놈 얼굴 봐서 뭐하냐.”

“청첩장 받으면 미국까지 가려고 했어?”

“내가 미쳤냐.”

돌아온 준석의 심플한 대답에 작게 웃음소리를 낸 윤재가 한동안 멈춰있던 손을 움직여 다시 식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조금 전 준석에게 들은 대로 혀에 남은 맛을 통해 레시피를 유추하려는 시도를 해본 그는 결국 칼칼한 뒷맛에 매료된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저 순수하게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진짜 맛있다. 살도 부드럽고.”

몇 번이나 ‘맛있다’라는 감상을 반복하는 윤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의 반응을 보여준 준석은 먼저 식사를 끝낸 뒤 이제 조금은 관찰하는 심정으로 윤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신 젓가락을 움직이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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