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벽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신음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멈춘 두 사람은 벽 너머에 있는 이들도 분명히 알아 챌 수 있을 정도의 흥분된 숨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둘이 한창 좋은 모양이네.”
속옷이 다 비치는 얇은 시폰 원피스를 걸친 채 바닥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있는 혜나가 그녀의 옆에 앉아 핸드폰 액정을 주시하고 있는 수영의 허벅지에 손을 대며 말했다.
“부러우면 가서 껴달라고 해. 셋이 해본 적 있잖아.”
한동안 멈춰있던 손을 움직여 재떨이에 재를 털어낸 수영이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하자 곧바로 입술을 삐죽인 혜나가 줄곧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치워내고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수영을 만난다는 생각에 일부러 비싼 옷까지 쇼핑해 입고 나온 혜나의 노력이 헛되게도 몇 개월 만에 만난 수영은 그녀에게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3년 전 처음 클럽에서 만나 사교 모임-정확히는 섹스가 목적인-을 결성한 뒤 한동안은 소위 구멍이 닳을 정도로 틈만 나면 붙어 해댔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모임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성 당시에서부터 이 사교 모임에서 중심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던 우수영이 사회인의 가면을 쓰고 난 뒤로 대놓고 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탓에 그를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자연히 앞으로 나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늘 모임은 단 여섯 명만이 초대된 자리로, 수영과 짝을 짓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들떠 있던 혜나와 나머지 두 여성 멤버 사이에서는 한때 신경전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정작 그녀들의 타깃이 된 수영은 오랜 만에 모임에 얼굴을 내비쳤음에도 메인 디쉬인 섹스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치열한 신경전 끝에 간신히 수영과 단 둘이 방에 남는 기회를 얻게 된 혜나의 입장에선 충분히 애가 탈 만한 상황이었다.
“아까부터 뭘 계속 보는 거야? 문자?”
의식적으로 커다란 가슴을 들이대며 묻는 혜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수영이 대답했다.
“회사에서 일정과 관련된 문자가 왔어. 갑자기 변경이 돼서 좀 골치가 아파.”
“뭐야, 오랜 만에 만나서 회사 일에만 신경 쓰는 거야?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회사일은 내일부터 생각하고... 응?”
한껏 정성들여 치장한 얼굴 위로 살짝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 혜나가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돌려온 수영의 팔에 부러질 듯 가녀린 팔을 휘감았다. 벌써 몇 개월 전 수영과 나누었던 섹스의 강렬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그 여파로 현재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와의 잠자리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정숙한 아가씨의 연기를 잘 해내고 있었지만.
“이 옷 어때? 이틀 전에 강남 매장에서 산 건데, 예쁘지?”
애교 있는 말투로 그렇게 질문을 던진 혜나가 수영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이끌었다. 한겨울에 입기엔 지나치게 얇고 노출이 심한 원피스는 적어도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골을 부각시키는 역할만은 충실히 해주고 있었다.
“아읏- 아아! 흐으!”
간헐적으로 벽을 끼고 들려오고 있는 달뜬 신음소리에 덩달아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혜나가 천천히 새하얀 손을 뻗어 수영의 벨트 버클을 잡았다. 지금 눈앞의 상대에게 스스로 움직일 의지가 없다면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아무런 협조도 해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접촉을 거부하지도 않고 있는 수영의 곁으로 바짝 몸을 붙여 조심스레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처음엔 그저 입술을 벌려주는 정도의 반응만을 보인 수영은 서서히 흥분한 혜나가 기어이 몸을 내던지듯 위에 올라타자 그제야 조금씩 분명한 응대를 해주기 시작했다.
다소 격렬해지는 키스를 나누는 동안 혜나의 날씬한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한 수영은 입술이 떨어진 뒤 흐트러진 숨소리를 낸 채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혜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늘 모임은 아주 오랜만에 잠시 얼굴이나 내비칠 작정으로 왔지만 각각 옆방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두 커플 사이에 혜나만 홀로 방치해두는 것도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수영은 어느새 자신의 벨트를 풀어내고 고개를 숙여온 혜나의 주도대로 일단 자신의 몸을 맡기기로 했다.
“당신 거, 진짜 큰 거 알아?”
만족스런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낸 혜나가 아직 미약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수영의 페니스를 혀끝으로 할짝거리며 핥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몸 안에 들이고 싶었지만 모처럼 손안에 넣게 된 기회를 시시하게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그녀는 나중에 지인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집중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하나도 안 움직일 거야?”
입 안 가득 품고 있던 것을 천천히 밖으로 꺼낸 혜나가 얇은 입술을 핥으며 유혹적인 목소리로 묻자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뜬 수영이 스치듯 미소를 머금고서 대답했다.
“넣고 싶으면 직접 세워 봐. 그럴 마음이 들게 하면 그 땐 제대로 해줄게.”
“하라면 못 할까봐?”
수영의 말을 듣고 한층 의욕이 충천한 혜나가 잠시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지던 것을 다시 입으로 품은 뒤 서서히 속도를 조절해가며 목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수영의 입에서 흐트러진 숨소리가 나올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릴 듯 흥분이 된 그녀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높은 신음을 응원삼아 점점 더 적극적으로 수영을 한계로 몰아갔다. 이미 수많은 경험으로 남자를 요리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그녀의 얼굴엔 벌써부터 의기양양한 승리자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
혜나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난 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수영이 문득 들려온 익숙한 벨소리에 눈을 떴다. 바로 근처에 놓아둔 그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 와중에도 열심히 펠라를 하고 있는 혜나를 내버려둔 채 손만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든 수영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발신자는 회사의 동료였다.
굳이 일요일에 연락을 해올 정도면 회사일로 뭔가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짐작한 수영은 그의 페니스를 입에 품은 채 열심히 목을 움직이고 있는 혜나의 머리에 살짝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멈출 것을 지시했다. 갑작스런 수영의 손길에 따라 일단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꺼내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혜나는 잠시 뒤 옆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수영의 통화 내용을 들으며 예쁜 살구 색 틴트가 칠해진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전문용어들이 섞여 있는 내용은 어쨌거나 아주 중요하고 긴박한 상황인 것처럼 들렸다.
예상보다 길게 이어진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수영이 옆에 앉아 있는 혜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미안, 가야겠어.”
“어? 간다고? 지금?”
“첨부파일로 받은 서류에 문제가 발견 돼서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다시 손봐야 돼. 내일 미팅에 쓸 거라 시간이 없어.”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나에게 다음에 만나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전한 뒤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가죽 재킷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
이틀 전 손녀를 보았다는 양과장의 컨디션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인 덕분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딱딱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사무실 안은 모처럼 편안한 공기로 들어차 있었다. 아침 회의 시작 전에 한 직원이 실수를 함으로써 자칫 커다란 목소리가 나올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입장에 있는 양과장이 평소답지 않게 가벼운 몇 마디의 질책으로 넘겨준 덕분에 다행히 직원 모두 퇴근 전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괴로운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주말 전에 철우씨가 실수한 거 우대리가 같이 붙어서 수정했다고 들었는데 아직인가?”
“아...”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과 동시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철우가 뭔가를 말하기 위해 망설이는 사이, 그보다 조금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책상 한 켠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서류 파일을 집어 들고서 과장의 자리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흘깃 철우에게 눈짓을 보낸 그는 다소 소란스럽게 책상 위를 뒤적여 서류를 찾아 달려오는 철우와 적당히 걸음속도를 맞춰 양과장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양과장의 손에 안착한 서류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팔랑이는 소리를 내며 넘겨져 갔다.
“뭐, 잘 고쳐진 것 같군.”
철우와 수영이 건넨 보고서를 각각 신중하게 훑어본 양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수영과 달리 이번에도 또다시 실수가 나오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철우는 과장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온 것과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자신은 못 믿어도 이번에 과장의 지시에 따라 같이 일을 하게 된 수영의 일처리 능력은 믿고 있는 만큼 꼼꼼한 그의 검토를 거친 서류에서 이상이 발견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생각하고 있던 철우였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조금 전까지도 줄곧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 작년 대비 통계치 비교 내용을 첨부하라고 했는데 그건 어디 있지?”
보고서를 꼼꼼히 살피고 있는 양과장의 질문을 받은 철우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미리 따로 체크를 해둔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이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굳이 변명거리를 말하자면 이번에는 워낙 수정할 부분이 많아 정신이 분산되어 있었던 것이었지만 물론 그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코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이쪽에 있습니다.”
“!”
이제 곧 들려올 호통을 각오하며 하얗게 질려 있던 철우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고 있던 서류를 펼친 수영이 양과장에게 통계치가 첨부된 부분을 보여주며 간략하게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아, 그래. 내가 찾던 게 이 부분이었어. 이렇게 바로 비교를 해놔야 위에서도 금방 납득을 하거든.”
수영의 설명을 듣고 만족스런 미소를 띠운 양과장이 반대쪽 편에 서서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우에게도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수영 덕분에 간신히 커다란 위기를 넘기게 된 철우는 양과장의 칭찬을 받으면서도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수영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야 이전에도 많이 있어왔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정면으로 인지하게 되는 건 그에게도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우수영은 그런 남자였다. 비단 철우가 아니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어느 정도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해온 사람도 무심코 그의 존재를 위에 두고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잘난 척이라도 하면 험담이라도 실컷 할 수 있으련만 누가 봐도 능력 있고 모범적인 회사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싫은 소리를 듣는 일이 없었다. 이미 그의 외모에 하트 눈이 된 여자들이야 대놓고 찬양이요, 여직원들에게 잘난 동료를 폄하하는 찌질한 남자로 찍히기 싫은 남직원들은 사석에서 딱히 수영을 칭찬하지 않아도 여직원들의 찬양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각자 자신들이 속 넓은 남자임을 어필하고 있었다.
틈만 나면 모여서 수다를 늘어놓은 여자직원들은 수영을 두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남자라고. 지나는 길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과도한 찬사라며 인상을 찌푸렸던 철우는 적어도 한 가지 사항에는 깊이 동감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단순히 외형만 보더라도 그가 신에게 사랑받은 건 분명한 것 같다고. 그 증거로 지금 당장 이 사무실 안을 둘러보더라도 회사원이라기보다 잡지 모델에 가까운 수트 핏을 선보이고 있는 건 수영이 유일했다. 이 안에서 최장신이니 아무래도 좀 더 좋은 그림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약간 키가 작은 신입사원 현호와 비교해도 수영의 허리선은 확연히 높은 곳에 있었다.
“자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나?”
“!”
갑자기 들려온 양과장의 목소리에 그제야 수영의 허리에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둔 철우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 같으면 이 상황에서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다며 한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아침부터 손녀 생각으로 기분이 좋은 양과장은 껄껄 웃는 것으로 가볍게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다 같이 회식을 하지. 저번 주는 종일 바빴으니까 잠시 짬이 날 때 하는 게 좋겠어. 혹시 중요한 약속 있는 사람 있나?”
갑작스런 양과장의 질문에 사무실 내에서 줄곧 각자의 일을 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몇몇은 이미 약속이 있는 듯 했지만 이 상황에서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주도해 만든 회식 자리에 누군가가 빠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상사를 잘 알고 있는 부하직원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그럼 모처럼 만에 다 모이는 걸로 하지. 예쁜 손녀를 본 기념으로 내가 쏠 테니까.”
“와-!”
작은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심으로 기뻐서라기보다 양과장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반응이었지만 공짜로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든 분명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장소를 정하지. 신길동에 있는 닭갈비집으로 갈까, 아니면 연신내에 있는 그때 갔던 그 전골집도 괜찮고...”
“오랜 만에 호프집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호프집도 뭐 나쁘진 않은데...”
“저기, <민들레>는 어떤가요?”
그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수영이 뜻밖에 들려온 윤재의 가게 이름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발언을 한 혜리를 쳐다보았다.
“아, 거기도 좋지.”
사적인 자리에서도 종종 <민들레>를 찾는 양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혜리의 옆에 서있는 진호가 살짝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거긴 좀 가게가 너무 작던데.”
“에이, 크기 좀 작은 게 무슨 상관이야. 인원이 다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어차피 갈 때마다 자리도 텅텅 비어있던데.”
“그래도 난 전에 갔던 전골 집이 회식하기엔 더 좋은 것 같은데...”
각자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잠시 동안 홀로 고심을 하던 양과장이 문득 고개를 돌려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수영을 쳐다보았다.
“우대리, 자네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나? 평소 아는 가게도 많을 것 같은데 달리 좋은 곳이 있으면 추천을 해줘도 좋고.”
양과장의 질문을 받은 것과 동시에 사무실 내에 있는 직원들의 시선을 독점하게 된 수영이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회식 자체에 끼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그는 어쨌든 이렇게 된 분위기 속에서 혼자 빠질 수 없다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들레>가 좋지 않을까요. 여기서 제일 가깝기도 하고...”
내심 <민들레>의 찌개 안주를 마음속 일순위로 두고 있던 양과장이 수영의 대답을 듣고 뺨을 누그러뜨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 수영을 두고서 일만 잘할 뿐 아니라 상사의 마음도 잘 안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사실 수영이 그와 같은 의견을 낸 데에 양과장의 심중은 단 1퍼센트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에게 있어 애초에 양과장과 직원들의 존재는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좋아, 그럼 조금 있다가 퇴근 후에 <민들레>로 가는 걸로 하지. 다들 불만 없지?”
드물게 수영이 직접 의견을 낸 데에다 이처럼 의욕적으로 상황을 진행시키고 있는 양과장의 앞에 굳이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나설 이는 없었다. 사실 지금 모여 있는 이들 중 갑작스런 회식자리가 내키지 않는다면 모를까 정해진 장소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은 조금 전 반대 의견을 낸 몇 명을 빼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엔 단순히 보이는 외관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던 직원들 가운데엔 이제 <민들레>를 종종 사적인 약속장소로 이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음식 맛이지만 어딘가 허름한 가게 안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그들의 마음을 잡아끌고 있는 듯 했다.
회식 장소가 정해진 뒤 조금씩 정리되는 분위기 속에서 양과장으로부터 돌려받은 서류를 들고 자리로 향한 수영이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아온 철우를 돌아보았다.
“아까, 고마웠어. 덕분에 살았어.”
안 그래도 평소 실수가 잦은 철우가 이번에도 뭔가를 빠뜨릴 것 같다는 생각 하에 일부러 더 꼼꼼히 수정작업에 임했던 수영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철우의 태도를 눈에 들이고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애초에 둘이 같은 작업을 한 건데 미안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저로서는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저, 나중에 한 턱 크게 쏠게. 이번 수정작업도 우대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붙어서 도와줬으면 이렇게 한 번에 못 끝냈을 거야.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몇 번이나 반복되는 감사의 인사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진 수영은 간신히 중요한 고비 하나를 넘기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가는 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처리 능력은 그저 그래도 성격 자체는 좋으니 직장 내에서 나쁘지 않은 수준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 했지만 지금의 이 상태가 앞으로 계속 유지가 된다면 철우도 더 이상은 상사의 눈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표를 쓰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양과장이 다소 심하게 말을 하는 성격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같은 사무실 내에서 일하는 동안 철우의 실수를 몇 번이나 목격한 동료들은 그에 대한 양과장의 독설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바탕 회식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사무실 안은 어느 샌가 평상시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일단 결제 전까지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할 서류를 책상 한 쪽으로 밀어 넣고 착석한 수영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은 채 스크린세이버가 떠있는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
“여기, 소주 다섯 병 더 주세요!”
“찌개도 거의 다 먹은 것 같은데 하나 더 추가해요.”
“그래? 저기, 여기 소주 다섯 병이랑 생태찌개 하나 추가해 주세요.”
“버터오징어도 조금 밖에 안 남았는데?”
“에이, 진짜. 한꺼번에 말하라고. 다른 거 더 추가할 거 또 뭐 없어?”
“해물누룽지탕.”
“그럼 난 과메기 초무침.”
“알았어. 또 없지? 저기, 여기 아까 말한 소주 다섯 병이랑 생태찌개랑 또 해물누룽지탕이랑... 또... 아, 버터오징어랑 과메기 초무침 추가해주세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감에 따라 테이블의 분위기가 눈에 띠게 산만해져 있었다. 처음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다소곳한 태도를 보이던 몇몇 여직원들은 어느 샌가 발개진 뺨을 한 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손님이 많은 데다 갑작스럽게 추가된 단체손님으로 빽빽이 채워진 가게 안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각자의 대화소리로 귀가 아플 만큼 떠들썩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님들의 주문으로 정신없이 테이블을 오가는 아르바이트생 성호는 얇은 티셔츠 한 장 차림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이제껏 주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아 온 윤재도 오늘은 적극적으로 서빙에 나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요. 이쪽이에요!”
몇 가지 음식이 담긴 커다란 쟁반을 들고 홀로 나온 윤재를 발견한 혜리가 손을 번쩍 들고서 외쳤다.
“생태찌개는 지금 끓이는 중이라서 다 완성되면 따로 가져다 드릴게요.”
쟁반에 담긴 것을 테이블로 옮기는 윤재를 돕기 위해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손을 뻗었다.
“아!”
밀려드는 다른 손님들의 주문을 들은 윤재가 조금 서둘러 음식을 옮기던 도중 크게 흔들린 그릇에서 넘친 뜨거운 국물을 손등에 덮어쓰고 짧게 소리를 냈다.
“어머, 괜찮아요?”
윤재의 근처에 앉아 있던 혜리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자 다른 직원들도 일제히 그녀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윤재를 쳐다보았다.
“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차가운 물로 식히면 금방 가라앉아요.”
“그래도 어떡해... 많이 아프실 텐데.”
재빨리 핸드백에서 물티슈를 꺼낸 혜리가 곧바로 그것을 윤재의 손등에 가져다댔다.
갑작스럽게 차가운 것이 닿아오자 따가운 통증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낀 윤재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조심스레 아까 뜨거운 국물이 튄 부분을 살피는 혜리를 쳐다보았다.
“많이 빨개지진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방에 들어가면 차가운 물에 좀 오래 대고 있으세요.”
“...네.”
“이쪽 손은 괜찮으시죠?”
일제히 자신과 혜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시선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된 윤재가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정면으로 자신을 향해오고 있는 하나의 시선과 마주치고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가게에 들어선 뒤로 줄곧 한 발 물러서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수영의 시선이었다.
주변에 자리한 다른 동료들과 달리 취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윤재와 시선을 마주한 몇 초간 일말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
뭐가 거슬리는 것일까, 혜리가 손을 놓아준 것과 동시에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방으로 사라지는 윤재를 바라보는 수영의 눈매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아, 응. 괜찮아. 그보다 저기 끓고 있는 거 4번 테이블에 좀 가져갈래?”
“네.”
잠시 찬물에 담그고 있던 손을 빼내고 수도꼭지를 잠근 윤재는 그의 지시에 따라 생태찌개가 든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서는 성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손에 닿은 국물이 무척이나 뜨거웠던 탓에 찬물에 일정 이상 담갔음에도 아직 손등엔 쓰라린 통증이 남아 있었다. 요식업의 특성 상 이런 일은 평소에도 가끔씩 경험해 왔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평소처럼 덤덤히 지나치게 되지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을 향해온 수영의 침착된 시선이 이상할 만큼 또렷이 윤재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여기 과메기 무침이랑 소주 추가요!”
문득 홀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윤재는 아직 쓰라린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손등을 빠르게 문지른 뒤 서둘러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한꺼번에 밀어닥쳤던 몇 팀의 손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떠났다. 그 중 거나하게 취한 한 팀이 값을 좀 깎아달라며 눈살 찌푸려지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 비슷한 타이밍에 계산대 앞에 선 양과장의 일행 중 누군가가 만류해준 덕분에 잠시 어수선했던 상황은 곧바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늘 그래왔듯 오늘도 역시 만취 상태에서 부하직원의 부축을 받은 양과장이 먼저 나가고 난 뒤 하나둘씩 그의 뒤를 따라 가게를 나서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깍듯이 인사를 건넨 윤재는 순식간에 한산해진 홀 안을 크게 한 번 둘러보았다.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갈 걸 각오해야겠어요.”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테이블 위를 치우고 있는 성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쪽 좀 치우고 일단 먼저 들어가서 설거지 시작할 테니까 나머지 좀 옮겨줘.”
“네.”
평소보다 많은 손님을 받은 탓에 심신이 지쳤을 텐데도 대답하는 성호의 표정은 밝았다. 늘 절반이상 비워져 있던 자리가 꽉 찼던 사실이 그에겐 무척이나 기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사실 가게의 형편 문제로 인해 내심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그만 와달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안고 있었던 그로서는 오늘과 같은 수고는 수고라기보다 오히려 축복으로 느껴질 만도 했다.
“저, 음식물 쓰레기 좀 버리고 올게요!”
마지막 손님들까지 계산을 끝내고 가게를 나선 뒤 순식간에 고요함을 되찾은 가게 안에 성호의 목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 윤재의 옆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이제 막 주방을 나서는 그의 양 손엔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파란 통이 들려져 있었다.
성호가 문을 나서는 것을 알리는 딸랑거리는 작은 종소리가 들려온 뒤 마지막으로 씻어낸 그릇을 선반에 올려놓고 한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던 허리를 편 윤재는 이제야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가 잘 되는 건 분명 환영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런 날이 매일 같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 드는 그였다. 결국 현실로 닥치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해내긴 할 터였지만.
피로한 눈가를 살짝 매만진 윤재가 싱크대 한 쪽에 놓인 양푼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 테이블 뒷정리를 하며 음식찌꺼기들 중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고기와 과일을 골라 담아 놓은 그것은 가끔 이 근방을 지나는 떠돌이 개를 위해 윤재가 일부러 따로 챙겨둔 것이었다.
‘지금 가서 두고 올까...’
-딸랑
문득 입구에서 들려온 종소리에 줄곧 싱크대를 향하고 있던 몸을 돌려 주방을 나선 윤재가 묵직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무심코 걸음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이 된 윤재를 마주하고 선 것은 조금 전 양과장의 일행과 나란히 가게를 나섰던 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