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하나 같이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윤재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 역시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이들처럼 정장을 입고 회사를 다녔다는 사실이 마치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이곳처럼 크고 대단한 회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니는 동안 많은 정이 들었던 회사 내에서 나름대로 좋은 평판을 얻으며 즐겁게 일을 했던 기억이 있는 윤재는 로비 입구에 놓인 긴 의자의 한 켠을 차지하고 앉아 잠시 그리운 전 회사 동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머, 저기 혹시 ‘민들레’ 가게 사장님 아니세요?”
또각거리는 하이힐 굽 소리가 가까워져 오는 것도 모른 채 회상에 잠겨 있던 윤재가 문득 자신의 앞에 멈춰선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향수 냄새를 몸에 두른 채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 건 이전에 가게에서 본 기억이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아... 저...”
하루에도 여러 손님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세세한 내용까지는 기억해내지 못한 윤재가 곧바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살짝 망설이자 그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상대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전에 회식 갔을 때 뵈었었죠. 전 유혜리이고요, 이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전에 사장님이 만드신 생태찌개가 맛있었다고 말했었잖아요. 혹시 그건 기억나세요?”
그제야 분명히 기억을 떠올린 윤재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네.’라고 대답했다.
평소 나이 든 단골손님들로부터 어머니가 만드신 음식과 맛의 차이가 많이 난다는 따끔한 질책을 주로 들어온 그에게 있어 당시 혜리로부터 들었던 칭찬은 큰 위안이 되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일이라면 지금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양과장님께 전해 드릴 것이 있어서요.”
“아, 그럼 제가 올라가서 말씀드릴까요?”
“아뇨, 방금 전에 만나서 전해드렸어요. 이제 돌아가려는 길이에요.”
“아... 그래요.”
가게에서 잠시 보았던 윤재에 대한 첫인상이 꽤나 좋았는지 그를 바라보는 혜리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사실은 그도 그럴 것이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접근해오는 남자직원들과 주로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온 그녀에게 있어 또래의 남자들과 전혀 다른 청량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윤재는 충분히 특별하게 여겨질 만도 했다.
“저 그럼 이것 드세요. 전 이제 올라가봐야 해서.”
손에 들고 있던 컵 캐리어 안에서 하나의 종이컵을 빼내 윤재에게 건넨 혜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동료들 커피 심부름하는 중이거든요. 이건 아메리카노인데 혹시 다른 거 좋아하시는 게 따로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아뇨, 전 괜찮습니다. 가서 동료 분들과 같이 드세요.”
“저번에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서 드리는 거예요. 혹시 받기 부담스러우시면 다음에 제가 친구랑 가게에게 갈 때 살짝 서비스 좀 해주시면 되죠. 그쵸? 자, 어서 받으세요. 팔 아파요.”
상대가 순수한 호의를 담아 건네는 커피를 결국 마지못해 받아든 윤재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또 봬요.’라는 짧은 인사를 남긴 혜리가 천천히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혜리의 뒷모습을 잠시 그대로 서서 바라보던 윤재가 살며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따스한 온기가 덩달아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입구로 들어선 수영을 발견한 윤재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수영에게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조금 부담스러운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시선을 받는 일이라면 익숙한 듯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윤재를 묵묵히 지켜보는 수영의 시선이 자연스레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종이컵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이 잠깐 사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그로서는 충분히 이상하게 여겨질 만도 했다. 만약 회사 내에서 볼 수 있는 자판기 종이컵이라면 납득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윤재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최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커피 전문 브랜드의 컵으로, 그 가게는 회사 밖으로 나간 뒤 적어도 10여분은 걸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묵묵히 수영의 뒤를 따라 부자연스러운 걸음을 옮기던 윤재가 잠시 후 건물 입구 근처에 세워져 있는 한 대의 차를 발견하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일반 회사원이 몰고 다니기엔 너무 비싸 보이는 차였지만 너무도 태연하게 그 차량 앞으로 다가간 수영은 운전석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아직 뒤에서 느린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윤재를 돌아보았다. 말이 아닌 시선으로 빨리 올 것을 재촉하고 있는 그는 윤재가 일정의 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운전석의 문을 열어놓은 채 그대로 서있었다.
“타.”
마침내 근처까지 다가온 윤재를 향해 짧게 한 마디를 던진 수영이 먼저 운전석에 올랐다. 자리에 앉은 뒤 가장 먼저 히터의 온도를 조절한 그는 곧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조수석에 오르는 윤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건 어디서 난 거야?”
윤재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컵을 쳐다본 수영이 조금 전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질문했다.
“아까 로비에서 직원 분에게 받았어요. 전에 가게에 양과장님과 함께 오셨던 일행분이요.”
간략하게 대답한 윤재가 손에 든 것을 내밀자 곧바로 쓴웃음을 머금은 수영이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너한테 준 거잖아. 마셔.”
은은한 커피향이 감도는 차 안은 출발과 동시에 불편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운전석에 앉은 수영은 앞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전대를 쥔 손만 움직일 뿐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윤재는 이제 미지근하게 변한 종이컵을 양손으로 감싼 채 옆의 유리창을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불편한 침묵을 깨뜨린 건 차가 막히는 구간을 막 벗어난 시점에서 울리기 시작한 윤재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두터운 점퍼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내 먼저 발신자를 확인한 윤재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수영에게 스치듯 시선을 던진 뒤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네. 아뇨, 지금 가게로 가는 중이에요....네. 네.... 모자랑 내복이요? 네, 그럼 사서 내일 아침에 가져갈게요. 저기, 어머닌 괜찮으시죠? 네, 기껏 신경써주셨는데 죄송해요. 이모. 아뇨, 당분간은... 전 괜찮아요. 잘 챙겨먹고 있어요. 네... 네... 알았어요. 그럼 내일 뵐게요. 이모.”
최대한 간략하게 통화를 마친 윤재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점퍼 주머니에 넣은 순간, 그의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는 얘긴 들었는데 상태는 어떠셔?”
예상치 못한 수영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던진 윤재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이컵을 감싸 쥔 그의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부친의 죽음을 전했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남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모친의 병세에 대해 묻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윤재로선 쉽게 현실로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인사치레일 뿐인 거라고 빠르게 현실적인 답을 찾은 그는 그 역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대답했다.
“반 년 전까지는 계속 악화되는 상태였는데 다행히 최근엔 현상유지를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나아진 것도 없으니 희망적인 상황도 아니죠.”
윤재의 대답을 듣고 잠시 그대로 침묵을 지키던 수영이 잠시 후 신호에 따라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세우고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커피를 손에 든 채 옆의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는 윤재는 당장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개를 돌려오지 않았다.
성격이나 정황 상 따로 관리를 받고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터틀넥의 넥 부분 위로 언뜻 보이는 목이 무척이나 희고 고왔다. 두툼한 점퍼로 가려진 상태임에도 그 몸이 얼마나 말라 있는지는 일단 눈으로 보이는 부분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종이컵을 감싸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거의 퍼진 부분이 없는 딱딱하고 가는 허벅지. 지금 당장 벗겨보면 지방질이라곤 어느 한 군데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가게는 매일 문을 여는 거야?”
수영의 입에서 다시 질문이 나온 뒤에야 줄곧 유리창에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린 윤재가 그 사이 다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의 옆모습을 스치듯 쳐다보고 대답했다.
“평일과 토요일은 밤부터 새벽까지 열고 일요일은 온종일 열어요.”
“휴일은 없어?”
“격주 토요일에 쉬고 있어요.”
낯선 도로명이 적힌 간판을 확인한 윤재는 어서 빨리 가게 앞에 도착해 이 불편한 공기에서 벗어나 수 있길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평생 처음 타보는 고급 승용차의 승차감은 무척이나 좋았고, 좋은 성능의 히터가 만들어내는 온기 역시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윤재는 이 차에 오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시도 불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영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불편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 역시. 아주 오래 전 잠시나마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던 그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 더없이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당시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라서 지금도 윤재는 의식적으로 수영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
“!”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윤재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요.”
예상했던 대답을 들은 수영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옆 좌석과의 현실적 거리는 불과 몇 센티미터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수영은 자신을 향한 명백한 거부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윤재를 스치듯 쳐다본 뒤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평일 낮 시간대라 훤히 뚫린 도로를 시원스레 달린 차는 어느새 윤재의 가게가 있는 동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럼 내가 물을게. 이번 주 토요일은 쉬는 토요일이야?”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은 윤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수영이 곧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둬. 저번에 옷을 빌려준 데에 대한 답례로 좋은 곳에서 식사 대접할 테니까.”
마치 평범한 친구에게나 할 법한 태연한 말투로 말하는 수영을 조금 당혹스런 눈으로 쳐다본 윤재가 마침내 가게 앞에서 차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이에요?”
“별로 깊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답례일 뿐이니까.”
“답례 같은 거 바라고 한 일 아니에요. 부담 주려고 한 일은 더 아니고요. 손님으로 오는 것까지 막지는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게 관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윤재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 고개를 돌려 조수석 문으로 손을 뻗은 순간 갑자기 반대 쪽 그의 손목이 강한 힘에 의해 붙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에서 떨어진 종이컵 안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순식간에 조수석의 시트를 적셔나갔다.
짙은 커피향이 차안의 공기를 휘감으며 퍼져가는 가운데 수영과 시선을 마주한 윤재가 이내 상황을 또렷이 인식하고 수영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붙잡힌 손목에 잔뜩 힘을 실었다. 그러나 필사적인 입장의 윤재와 달리 애초에 완력에서 자신과 상대가 되지 않는 윤재가 헛된 힘을 쓰는 것을 지켜보는 수영의 표정은 너무도 태연해서 단순히 그의 얼굴만 보면 지금 차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압적인 상황이 현실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였다.
“관여?”
냉소적인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 수영이 윤재의 손목을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지금 이 순간 고통에 일그러진 윤재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 안에서는 비틀린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대로 저항하는 윤재를 당장 단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끌고 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예전 잠시 사귀었던 시절 첫 경험에서 아프다고 눈물까지 보이는 그를 괜찮다고 달래가며 끝내 마지막까지 거칠게 안았던 당시의 흥분이 지금 수영의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김윤재라는 남자는 다른 이들처럼 대놓고 교태를 부리기는커녕 기본적인 유혹 방법조차 모르는 주제에 묘하게 상대의 성욕과 가학성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아파요.”
점차 격화되는 상황에서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를 낸 윤재가 시선으로 놓아줄 것을 부탁하자 빠른 시간 내에 감정을 가라앉힌 수영이 줄곧 손에 넣고 있던 힘을 빼내고 윤재의 손목을 해방시켜주었다. 조금 전 잠시나마 자신이 품었던 생각을 눈앞의 상대가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기도 했지만 이 이상 윤재에게 자신을 경계할 빌미를 제공해줄 생각이 없는 그는 일단 적당히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시트 세탁비라면 드릴 테니 나중에 청구해주세요.”
이미 시트를 흥건히 적신 뒤 소량의 커피만이 남아 있는 종이컵을 집어든 윤재가 확연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강한 커피향이 차안의 더운 공기를 타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내릴게요. 여기까지 바래다주셔서 고맙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 윤재가 조수석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수영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웃음소리를 듣고 자연스레 옆으로 고개를 돌린 윤재가 단정하게 세팅된 머리를 귀찮다는 듯 쓸어 올리는 수영을 바라보았다.
“세탁비는 필요 없어. 방금 전은 내가 잘못한 거니까.”
“.......”
뜻밖에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수영을 말없이 바라본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진 말에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혹시 부담되면 아까 내가 한 얘기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봐.”
“.......”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밥만 먹고 헤어질 거야. 어차피 저녁때엔 따로 약속도 있으니까.”
“...따로 약속도 있으면서 왜 굳이 나와 밥을 먹겠다는 거죠?”
“저번에 도움을 받은 데에 대한 답례라고 말했잖아. 받으면 반드시 돌려줘야 마음이 편해지거든. 그게 은혜든 원수든 말이야. 나는 평일 저녁에도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넌 토요일밖에 안된다고 했잖아. 그것도 격주로만.”
은혜는 몰라도 원수라면 반드시 갚을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조금 전 쏟아져 나온 커피로 물들어 있는 시트를 잠시 내려다본 뒤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로 젖은 시트도 시트지만 일단 여기까지 차로 바래다준 성의를 생각하면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제의를 끝까지 거절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그였다. 어차피 밥만 먹고 헤어지는 정도에 이 이상 강한 거부를 보이는 것도 상대에겐 과잉 반응으로 비칠지 몰랐다. 다른 무엇보다 상대로부터 아직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되는 건 결코 원하지 않는 그였다.
깊이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답을 내린 윤재가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 아는 막국수집이 있어요. 거기라도 괜찮다면 생각해 볼게요.”
“막국수?”
지인들과 종종 찾는 고급 레스토랑의 풀코스 메뉴를 생각해 두고 있었던 수영이 예상치 못한 윤재의 말을 듣고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막국수라는 메뉴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답례란 것도 어느 정도 상대가 원해야 이뤄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일단 그쯤에서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한 시에 보는 걸로 할게. 상관없지?”
“...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한 뒤 차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를 남긴 윤재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본 뒤 다시 운전대에 긴 손가락을 휘감은 수영은 슬쩍 시계에 시선을 던져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조금 속도를 내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민들레>
내부만큼이나 허름한 가게의 간판을 잠시 쳐다본 뒤 차를 출발시킨 수영은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로 진하게 나는 커피향을 희석시키기 위해 조수석의 창문을 열었다. 이내 밀려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줄곧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던 차안의 공기를 일시에 바꿔놓았다.
아마도 이건 동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윤재가 처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연민 위에 지난날에 대한 미안한 감정에 덧입혀진 결과물인 거라고. 받겠다고 한다면 돈이라도 건네고 싶은 게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김윤재라는 남자가 그런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리가 없다는 것을 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전 사람들 많은 장소에서 절뚝거리며 걷던 윤재의 모습을 잠시 씁쓸한 기분으로 머릿속에 떠올리던 수영은 이내 침착된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곧 힘찬 비트로 시작된 곡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 성호 왔구나.”
자신을 돌아보는 윤재를 향해 다시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성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어깨에 걸쳐 매고 있던 가방에 집어넣으며 윤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게 문을 열기 전엔 항상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해온 윤재가 웬일로 밖에 나와 있는 건가하는 생각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간 성호는 잠시 후 윤재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라면 박스 안에 놓인 넓적한 깡통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에요?”
“아, 응. 개집...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박스 하나 달랑 둔 거니까 집이라고 하기에도 좀 뭐하지만.”
윤재의 대답을 듣고 나니 그제야 빈 박스가 개집으로도 보인다는 생각이 든 성호는 커다란 깡통을 3분의 1크기로 잘라놓은 것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음식물인 것을 확인하고 뭔가를 납득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이 동네에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걸 몇 번 봤다고 하더니 결국엔 이런 정성까지 들이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윤재의 말로는 어릴 적에 키우던 개랑 비슷하게 생겨서 정이 간다고 했지만 이 착한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품종의 개였다고 해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성호는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옆 가게 부동산 아저씨랑 앞의 슈퍼마켓 할머니도 하루에 한 번씩 근처에 밥을 놔두는데 그 개가 가끔씩 와서 먹고 간대.”
“그래요?”
“응.”
떠돌이 개가 자신이 놓아둔 먹이도 먹어줄 것을 기대하는 윤재의 얼굴 위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관찰하듯 윤재를 지켜보던 성호는 이제 곧 가게 문을 열 시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시키고 가게 입구로 향했다.
“이거 껍질 좀 벗겨줄래?”
잠시 후 주방 안으로 들어와 먼저 깨끗이 손을 씻은 윤재가 좀 전에 미리 씻어두었던 감자가 담긴 양푼을 성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다듬을 것도 있으면 주세요.”
“나머지는 내가 아까 해놨어.”
“네.”
대답과 동시에 곧바로 감자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한 성호의 표정이 평소보다 눈에 띠게 밝은 것을 알아차린 윤재가 파를 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무슨 좋은 일 있는 거야?”
윤재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와 시선을 맞춰온 성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티가 나요?”
“응. 입이 귀에 걸려 있어.”
윤재의 대답을 듣고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성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은 좀 전에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고 왔거든요. 200일이라고 커플링 준비해서 줬더니 울지 뭐에요. 이벤트나 그런 건 진짜 쑥스러워서 안 하려고 했는데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거 보니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바라보는 윤재도 덩달아 미소를 머금었다.
“부럽네. 좋은 사람이면 놓치지 말고 끝까지 잘 해줘. 가끔 이벤트도 해주고, 선물도 해주고.”
“네. 그러려고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대답한 성호가 그쯤에서 다시 손을 움직이려는 윤재를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은 여자 친구 없으세요?”
뜻밖의 질문을 받은 윤재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있어 보여?”
“...아뇨. 늘 가게일로 바쁘시잖아요.”
뒤늦게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한 성호가 윤재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뒤늦게 윤재의 불편한 다리가 머릿속에 떠오른 그는 현실적으로 윤재가 지금 당장 연애라는 것을 하기에 여러 모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성호가 생각하는 윤재는 어디에 내놔도 좋은 평가를 얻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지만, 단순한 친구나 동료관계가 아닌, 연애나 결혼의 대상을 고르는 여자들의 눈에 그가 어떻게 비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성호가 지금쯤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생각을 짐작한 윤재가 씁쓸한 기분을 안은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연애란 게 힘들어.”
“.......”
“.......”
“...경험은 있으시죠?”
조심스런 성호의 질문에 대답 대신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윤재가 잠시 텀을 두고 말을 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든 얼마나 뜨거웠든 연애의 대다수는 결국 끝이 나잖아. 그 끝을 보는 게 무서운 건지도 몰라. 그래서 결국... 계속 이런 상태인 거지.”
“.......”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윤재가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 양 손에 각각 감자와 칼을 든 채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호를 확인하고 애써 밝게 표정을 바꾸었다.
“미안. 한창 좋은 연애하고 있는 너한테 괜한 소릴 했네. 지금 건 그냥 잊고 넘겨줘.”
“죄송해요. 괜히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네요.”
“아니야. 이젠 다 옛날이야긴데 뭐. 이젠 아무렇지 않아.”
윤재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조금 전 그가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성호였다. 자신의 기분에 취해 본의 아니게 상대의 아픈 기억을 들쑤셔놓은 상황이 된 지금 윤재를 향해 더없이 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성호는 감자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손을 한층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여자 친구랑 300일이 되면 가게에 데리고 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줄게.”
문득 들려온 다정한 윤재의 말에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춘 성호가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