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죄, 죄송해요! 제 남자친구가 지금 많이 취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과 동시에 그의 앞으로 달려 나간 여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반복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행동은 마주 선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경직된 공기를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대와의 눈높이가 역전되자 잠시 움찔한 반응을 보인 남자는 그러나 바로 옆에서 여자 친구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때문인지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상대로 해서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자기야, 뭐해! 빨리 사과 안하고! 아무리 취해도 그렇지 어떻게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어?”
졸지에 중간에서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여자가 남자친구의 팔을 붙잡고 사과할 것을 종용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뻔뻔한 남자의 태도에 따라 그와 마주선 수영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알아차린 윤재가 아무래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서 서둘러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당장은 참고 있는 수영이 언제까지 인내심을 발휘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윤재는 오래 전 아직 학생이던 시절 함께 외출에 나섰다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부딪쳐온 뒤 사과하지 않는 상대를 붙잡아 코뼈가 부러질 때까지 때렸던 수영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피해자가 한껏 흥분한 채 폭력 혐의로 고소를 하겠다고 나서자 치료비 명목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던져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일을 무마시킨 그는 이후에도 실컷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한 뒤 결국엔 돈으로 해결하는 패턴을 몇 번이나 더 반복해 보였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도 사회인이 된 만큼 예전과 같이 행동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손님, 제가 보기에 손님이 사과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분은 그냥 자리에 앉아계셨던 것뿐이지 않습니까?”
상황의 원만한 수습을 위해 중간에 나선 윤재가 여자 친구의 손에 팔을 붙들린 채로 요지부동인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윤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빼고 더한 것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 그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없는 입장의 남자는 여전히 술기운으로 벌건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만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마주한 상대가 만만치 않은 남자라는 것만은 분위기로 읽어낸 듯 좀 전까지 발산하던 흥분은 많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손님.”
수영의 인내심이 버티고 있는 사이에 어떻게든 남자의 입에서 사과의 말을 끌어내기 위해 윤재가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섰다.
“굳이 이런 일로 경찰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으시죠? 지금 여기서 좋게 해결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손님도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달래는 윤재의 말을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남자가 힐긋 마주하고 선 수영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보는 것이지만 적대심을 끼고 봐도 정말로 잘 생긴 얼굴이라고 남자는 내심 생각했다. 조금 전 자신이 부은 맥주로 인해 강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음에도 술에 젖은 머리카락의 일부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것조차 마치 일부러 연출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잘 어울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기에 충분히 화가 날만한 상황임에도 단 한마디의 고성도 내뱉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여유도 마치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게 느껴졌다.
“나는...”
순순히 사과하자니 왠지 분한 기분이 든 남자가 어떻게든 다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영의 눈매가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뜬금없이 봉변을 당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 일단 지금 현재 머리와 몸을 뒤덮고 있는 지독한 맥주 냄새와 젖은 감촉에 무척이나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수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시니컬한 감정 상태에 있지 않았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그는 다만 몇 시간 뒤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과, 가능한 한 윤재가 주인으로 있는 가게에서 사건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 생각을 앞세워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 수영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여자 친구와 윤재의 설득에도 침묵을 지킨 채로 고집스럽게 버티던 남자가 한참 만에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술김에... 세탁비는 물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수영에게로 몸을 돌린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차를 가져오셨나요? 아니시면 그 상태로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기 힘드실 텐데 택시비도 따로 드릴게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잠시 그대로 쳐다보던 수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남자가 배짱 좋게 먼저 공격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예상 밖으로 시시하게 종료된 지금의 상황에 오히려 찜찜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세탁비나 택시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과 한 마디와 돈 몇 푼에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면 자신이 그 몇 배를 치르고서 눈앞의 남자를 기분대로 손봐주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세탁비와 택시비 명목의 4만원과 반복된 사과의 말을 남기고서 문제의 커플이 떠난 후 텅 빈 가게 안에 윤재와 단 둘이 남은 수영은 조금 전 여자가 놓고 간 돈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느슨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테이블에 던지듯 놓았다. 일단은 굽히고 나왔으니 곱게 보내긴 했지만 자신이 당한 일을 다시 생각하면 역시 몇 대는 패고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조금은 들기도 하는 그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조율하던 수영이 문득 곁에서 들려온 윤재의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찌개, 다 완성이 되었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윤재가 말을 멈추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식적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음식이 입에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젖어있는 수영의 머리카락과 셔츠를 스치듯 쳐다본 뒤 등을 돌렸다.
“차, 안 가져 왔나요?”
“이런 날씨니까 두고 왔어.”
“.......”
택시를 불러 타고 간다고 해도 일단 맥주를 덮어쓴 지금 상태로 움직이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윤재가 수영을 돌아보고서 말했다.
“주방이지만 호스를 연결하면 간단하게 머리 정도는 감을 수 있어요. 괜찮으면 이쪽으로 오세요.”
자신의 가게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일정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오는 수영을 쳐다본 뒤 먼저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남자가 지금 자신의 등 뒤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그는 당연하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이고, 또 어째서 자신은 그가 옆에 있는 걸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게의 주인이 된 입장에서 손님으로 온 상대를 무턱대고 쫓아낼 수는 없다는 현실의 상황을 대입하더라도 ‘그 날’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던 그와 자신이 또다시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지금의 이 상황이 윤재는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확인한 뒤 일단 물을 잠그고서 호스를 수영에게 넘겨준 윤재가 조금 전 수영이 벗어 근처의 선반에 놓아둔 셔츠를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임에도 셔츠에 배어 있는 맥주 냄새가 제법 강하게 코를 찔러오고 있었다.
“...조금 작아도 상관없다면 잠시 입을 만한 걸 찾아올게요. 집에 갈 때까지 입으신 뒤에 버려도 상관없으니 따로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변하지 않았네. 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그대로 침묵을 지킨 윤재가 곧 짧은 한숨과 들려온 ‘가져다줄래?’라는 말을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갔다.
살다보니 이상한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드는 윤재였다. 별 것 아니라고 해도 설마 자신이 우수영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주게 되는 상황이 오다니. 별 다른 의미 같은 건 없었다. 가끔씩 가게를 들르는 노숙자나 두루마리 화장지를 파는 노인에게도 거리낌 없이 도움을 줘온 자신에게 있어선 지금의 이 일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뿐라고 윤재는 생각했다.
가게 안에 딸려 있는 작은 방 안에 들어선 윤재가 구석에 놓인 커다란 박스 안에서 옷가지들을 꺼냈다. 가끔씩 가게에서 잘 때를 대비해 미리 가져다 놓은 옷들은 대부분 편의를 우선시한 티셔츠 종류가 많았다. 자신과 비교하면 수영의 옷 사이즈가 한 치수나 두 치수 정도 클 듯했지만 어차피 잠시만 입을 테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윤재는 꺼내놓은 옷가지들 가운데서 그나마 가장 넉넉한 사이즈로 보이는 짙은 회색의 니트를 골라냈다. 언제 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꽤나 오래 전에 사놓고 입지 않은 옷인 듯 했다.
나머지 옷들을 다시 개어 박스 안에 집어넣은 뒤 골라둔 니트를 들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윤재는 그 사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내고 있는 수영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방에는 평소 자신이 사용하는 은은한 샴푸향이 나고 있었다.
윤재가 건네는 니트를 말없이 받아든 수영이 먼저 니트를 펼쳐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재본 뒤 팔을 꿰었다. 187센티의 장신인 그는 날씬한 체형임에도 기본적으로 골격이 좋은 편이라 보통의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윤재의 옷은 역시나 많이 작은 감이 있었다.
어깨가 끼고 팔이 9부쯤 되는 선에서 간신히 니트를 몸 위에 걸친 수영은 아직 젖은 그대로인 머리카락을 다시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실내에서 젖은 채 있으려니 살짝 오한이 느껴졌지만, 아까 전 맥주를 뒤집어 쓴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의 추위는 웃으며 버틸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교통사고라고 들었어.”
“!”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수영의 말에 호스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 윤재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 바로 앞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었어요. 사고를 당한 순간에 기억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골반과 무릎 쪽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죠. 재활훈련을 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몸도 몸이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도 오래 쉬어야 해서 수술비나 그 사이에 나오는 병원비가 걱정이 됐죠. 남의 차량으로 사고를 낸 사람은 보험도 들어놓지 않았는데 사고 후 얼마 안 있다가 자살을 해서 결국 모든 피해는 우리 가족이 다 떠안아야 했어요.”
덤덤하게 이어지는 윤재의 말을 듣는 수영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많이 힘들었겠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저보다도 어머니가 더 힘들어하셨죠.”
모친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살며시 미간을 좁힌 윤재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호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치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처럼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가 윤재도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이라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은 탓일까, ‘그 날’ 자신이 당했던 일이 그는 여전히 명확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윤재에게 그 날의 사고가 현실이었음을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이전처럼 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때때로 그를 괴롭히는 끔찍한 다리의 통증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면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눈물짓는 모친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더 떳떳하고 강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미안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과의 말이 들려온 순간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윤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수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일순 환청이라도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수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잠시 수영과 시선을 마주한 채 침묵을 지키던 윤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동정인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지만 좀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는 남자답다고 생각한 윤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둥글게 감은 호스를 근처의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애초에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그것도 동정에 의한 사과를 받게 되니 오히려 한층 더 마음이 착잡해진 그였다. 우수영이라는 남자의 입에서 저런 진지한 사과의 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자신이 그렇게 가엾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은 쓴웃음조차 드리울 수가 없었다.
잠시 주방 안에 흐르고 있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건 문득 홀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수영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한동안 윤재의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현실로 돌아와 다리를 움직였다.
발신자는 호연이었다. 내일 밤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조정하고 싶다는 그에게 잠시 후 자신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한 뒤 짧게 통화를 끝낸 수영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몸에 걸치고 서류가방을 들었다. 소매를 걷어 확인하니 어느덧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만 갈게.”
그렇게 말한 수영이 지갑에서 만 원 권 몇 장을 꺼내 계산대 테이블 위에 놓자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그것을 본 윤재가 재빨리 수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요.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아까 전에 찌개 다 만들어졌었잖아. 상황이 그렇다 보니 먹지만 않았을 뿐인데 당연히 계산해야지.”
조금 강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이 자신에게 다시 돈을 건네려는 윤재의 손목을 붙잡았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가늘었었나...’
수영으로 하여금 여기서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대로 꺾여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떠올리게 할 만큼 그의 커다란 손에 잡혀 있는 윤재의 손목은 너무도 가늘었다. 재회했던 당시에도 윤재의 몸이 예전과 비교해 눈에 띠게 마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수영이었지만 이렇듯 실제로 접촉을 해본 윤재의 몸은 살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럼... 알겠어요, 이건 받을 테니 대신 이 돈은 꼭 가져가세요. 아까 전 그 여자 손님이 세탁비랑 택시비로 남겨둔 거예요.”
수영이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곧바로 근처의 테이블로 손을 뻗어 아까 전 여자가 두고 간 4만원을 집어든 윤재가 곧장 그것을 수영에게 건넸다.
“.......”
그다지 떠올리기도 싫은 상대가 남겨둔 푼돈 따위 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일단 이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끌기 싫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받아든 수영은 곧바로 윤재가 이어서 건넨 종이백도 받아들었다. 당장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아까의 소동으로 젖은 셔츠가 담겨 있을 거라고 짐작한 수영은 잠시 후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모처럼 만에 새롭게 가게 안으로 들어선 손님은 벌써부터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젊은 커플이었다.
“또 올게.”
새로운 손님에게 주문을 받아야 하는 윤재에게 짧게 인사를 남기고서 가게를 빠져나온 수영은 마침 그 앞을 지나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올랐다.
아직 일부가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올리며 창밖에 시선을 던진 수영이 빠르게 스쳐가는 거리의 풍경을 시야에 담은 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정인가요.’
아까 전 들었던 윤재의 한 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뚜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제껏 수영은 잘 사는 것도 못 사는 것도 모두가 타고난 제 복이라는 생각 하에 누군가를 동정해본 일이 없었다. 가끔씩 tv 채널을 돌리는 과정에서 우연히 하층민들의 애환을 접했을 때에도 그저 그런 인생도 있구나 하는 사실 정도만 의식했을 뿐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다니던 회사가 망한 것도, 아이들이 희귀병에 걸리는 것도 애초에 타고난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윤재가 이런 불행을 겪은 것도 그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고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라고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건가...’
어딘가 가슴 언저리에 걸리는 한 부분을 두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수영은 시트에 깊이 등을 기댄 채 피로한 눈을 감았다.
그가 호연에게 다시 연락을 해주기로 한 사실을 떠올린 것은 집에 돌아간 뒤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