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럼 목발은 사용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네, 일상엔 큰 지장 없이 조금씩 저는 정도라 목발은 쓰지 않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입 주위를 티슈로 닦아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여성이 마주앉은 윤재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본 뒤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지금 윤재의 건너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며칠 전 간절한 모친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한 윤재가 맞선을 보기로 한 상대 여성으로, 이름은 차수연이라고 했다. 이런 선 자리에 맞춤처럼 어울리는 연한 핑크색의 원피스를 선택한 그녀는 작은 키에 다소 통통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지금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요즘 좀 힘들죠?”
수연이 습관대로 또다시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묻자 잠시 텀을 두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윤재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요즘 어디든 다 그렇죠. 특히 저희 가게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위치한 게 아니라서 더 크게 불황을 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주시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간신히 유지가 되고 있는 정도랄까요.”
“아... 그렇군요.”
윤재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내심 실망을 했는지 수연의 표정이 어색한 미소로 물들었다. 돌아온 반응을 통해 지금 수연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생각을 짐작해낸 윤재는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일시에 소강상태를 맞이한 것을 기점으로 서서히 마음을 비워냈다.
이후 형식적으로 함께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 수연으로부터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윤재는 그것으로 상대의 마음을 확실히 인식하고 웃는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예상했던 결과라 특별히 씁쓸한 기분이 남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지금쯤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모친과 이모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된 사실에 다소 무거운 마음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한 윤재는 늘 그렇듯 더없이 고요한 집안을 습관처럼 한 번 둘러본 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욕실로 향했다.
‘많이 실망하시겠지... 오늘 아침에만도 전화로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셨으니.’
가벼운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대 끝에 걸터앉은 윤재가 먼저 벽에 시선을 던져 지금의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사십 분.
저녁 식사 전에 헤어진 터라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예정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온 것을 다시금 인식한 윤재는 슬슬 모친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잔뜩 기대를 안은 채 자신의 연락을 기다릴 모친을 생각하면 선뜻 핸드폰으로 손이 가지 않았지만 어차피 결론이 난 바에야 조금이라도 일찍 부딪치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그는 모처럼만에 꺼내 입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짧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이제 막 모친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윤재의 고개가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특별히 이 시간에 이곳을 방문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일단은 서둘러 옷을 걸쳐 입고 현관으로 향한 윤재는 다시 한 번 초인종 소리가 이어지자 그제야 방문객을 확인하기 위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준석이었다.
조금 전 맞선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짧게 통화를 했던 그가 이렇듯 갑자기 집을 방문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윤재가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 갑자기 어쩐 일이야?”
“미리 연락 못하고 와서 미안. 오는 길에 보니까 그 새 배터리가 다 됐더라.”
벙 쩌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재의 곁을 지나쳐 현관 안으로 들어선 준석이 강풍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전화로 네 목소리 들으니까 영 힘이 없길래 위로나 좀 해줄까 해서. 술도 좀 사왔는데 마실래?”
그제야 준석의 갑작스런 방문의 이유를 알게 된 윤재가 쓰게 웃었다.
“별로 우울하지 않았는데 네가 술 사 들고 오니까 갑자기 우울해진다.”
“하하. 그래? 어쨌든 아까 네 목소리는 진짜로 힘이 없었다니까. 집에 도착하면 혼자 구석에서 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한테 보고 드릴 생각하니까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랬나...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에 전화하셔서 엄청 잔소리를 하셨거든. 옷은 어떻게 입고, 아가씨 앞에선 어떤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얘기를 하면 안 되고...”
“어머니 마음이야 뭐, 이해가 되지. 하나뿐인 아들이 빨리 가정을 이루고 정착을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실 테니까.”
“나도 그 마음은 알고 있어. 하지만 연애나 결혼 같은 건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윤재가 자신을 향한 준석의 진지한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재빨리 얼굴 위로 미소를 드리웠다.
“술 마실 거지? 컵 가져올게. 안주는 지금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좀 기다릴래?”
“됐어. 오징어랑 과자 사왔으니까 그거랑 해서 먹지 뭐. 가게 일만도 힘든데 집에서까지 안주 만들 필요 있냐?”
“너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아?”
“조금만 마실 거니까 상관없어.”
아직 제대로 덥혀지지 않아 서늘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그렇게 대답한 준석이 곧바로 손을 움직여 과자봉지들을 뜯기 시작했다. 퇴근길에 바로 오느라 평소 볼 때와 달리 정갈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잠시 후 윤재가 가져온 잔에 술을 따르는 것으로 모든 세팅을 끝낸 뒤에야 줄곧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근처의 침대에 던지듯 놓았다. 이미 이전에 몇 번 이 집을 찾아온 적이 있는 그는 어느 샌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집주인처럼 편안하게 행세하고 있었다.
“그냥 뻔한 속물이네, 그 여자.”
윤재로부터 오늘 맞선에 대한 대략의 정황을 전해들은 준석이 과자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이미 눈 깜빡할 사이 맥주 세 잔을 깨끗이 비워낸 그는 그럼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죽마고우인 윤재조차 확실한 주량을 모를 정도로 술이 센 남자이니 만큼 이대로 술자리가 진행된다면 늘 그랬듯 오늘 역시도 뒷정리는 그의 몫이 될 터였다. 돌아가신 부친을 닮아 그다지 술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의 윤재는 그런 스스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모처럼 만에 준석이 깔아준 멍석을 마다하지 않고 조금 풀어진 기분으로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별로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영악하게 웃는 얼굴로 상대의 조건 떠 보고, 계산하는 인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인간들이 뇌가 없지 않고서야 대놓고 속물인 거 얼굴에 티내고 다니겠어? 어쨌든 그 여자, 네가 가게 운영하고 있다는 말에 혹해서 나왔다가 장사가 잘 안 된다는 말 듣자마자 안면몰수 한 거네.”
“...그래... 그런 건가... 하긴, 미리 하나라도 생각해 둔 게 있지 않으면 보통은 다리를 저는 상대와 선을 안 보겠지.”
낮게 읊조리듯 말하는 윤재를 슥 쳐다 본 준석이 곧바로 스스로의 실언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미안,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알아. 지금 얘긴 자학이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있는 현실을 말한 것뿐이야. 어쨌든 현실은 그런 거니까 결과는 이렇게 됐어도 일단 맞선 자리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난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는 윤재가 그 어느 때보다 안쓰럽게 느껴진 준석이 다시 한 번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문득 윤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윤재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친에게서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짐작한 준석은 말없이 비어 있는 윤재의 잔에 맥주를 따라준 뒤 자신의 잔도 채웠다.
“네. 아뇨... 서로가 아직 결혼 마음은 없는 걸로 얘기가 오가서요. 그 쪽 분도 지금 한창 일이 많이 바쁜가 봐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좋은 분위기로 헤어졌어요. 네... 만나 보니 착한 아가씨 같긴 했는데 아무래도 저랑 인연은 아닌 것 같아요. 네...”
기대가 무너지자 곧바로 안면 몰수한 속물 같은 여자라고 해도 혹여나 오늘의 일로 인해 나쁜 얘기를 들을까 싶어 중간에서 조율하는 윤재의 속 깊은 배려에 한층 더 마음이 아파온 준석이 잠시 후 긴 통화를 끝내고 이쪽을 돌아보는 윤재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
“응.”
“아쉬워하셔?”
“...응.”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한 윤재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여자였다면 너한테 시집갔을 텐데.”
예상치 못한 준석의 중얼거림을 듣고 무심코 눈을 크게 뜬 윤재가 이내 뺨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누가 받아주긴 한데?”
“뭐야, 내가 어때서? 이래봬도 집안일도 꽤 잘 한다고. 나랑 결혼하면 넌 매일 아침마다 따끈한 밥 먹고 출근할 수 있을 걸. 원하면 밤엔 요부로 변신도 가능하고 말이야.”
살짝 투덜거리는 준석을 향해 작게 웃음소리를 낸 윤재가 일시에 비워낸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근처에 있는 과자를 한 웅큼 쥐었다.
혹시나 모친의 전화를 받은 자신이 한층 더 우울한 기분을 느낄까 싶어 일부러 농담을 해오고 있는 준석의 마음을 알고 있는 윤재는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을 짓고 웃음소리도 크게 냈다. 애초에 맞선 자리에 큰 기대를 품고 나가지 않았던 만큼 돌아온 결과를 두고 특별히 크게 실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 통화에서 들려온 모친의 실망한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이 윤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번에야 말로 좋은 소식을 가져다 달라며 맞선이 있는 오늘까지 며칠에 걸쳐 신신당부를 했었던 모친이 조금 전 전해들은 보고로 인해 얼마나 큰 실망감을 느꼈는지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내가 좋은 소식을 전해드려야 어머니 건강도 좋아질 텐데...”
나직한 윤재의 중얼거림을 듣고 쓴웃음을 머금은 준석이 나란히 비워져 있는 두 개의 잔을 다시 채우기 위해 맥주병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갑자기 윤재가 허물어지듯 방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아직 덥혀지지 않아 미지근한 방바닥에 한 쪽 뺨을 대고 누운 그는 자신을 향한 준석의 시선을 깨닫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바닥이 서늘하니까 좋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제대로 오른 모양이었다. 평소 술자리를 가져도 의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자제해온 윤재는 오랜 만에 주량을 넘기는 술을 마시고서 다소 느슨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버릇이라고 해봐야 잠시 헤헤거리며 웃다가 잠드는 게 전부인 윤재를 잘 알고 있는 준석은 평소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헤헤거리는 윤재를 관찰해보기로 하고 비워져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찬 데 누워 있지 마. 무릎 쑤시잖아.”
“괜찮아. 별로 차갑지 않아. 적당히 서늘해서 좋아.”
대답은 착실히 하고 있지만 말투에 리듬이 생긴 걸로 보아 아까 전보다도 좀 더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곯아떨어지게 될 터였다.
이미 예전에 한 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준석은 이미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윤재를 억지로 일어나게 하는 대신 근처의 침대에서 이불을 가져와 그의 위에 덮어주었다. 오래된 집이라 보일러를 틀어도 바닥이 덥혀지는 데에는 시간이 꽤나 걸리지만 다행히 준석이 손을 대보니 바닥은 이제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상태였다.
“준석아... 정리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
“됐으니까 잠이나 자.”
발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나려는 윤재를 향해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한 준석은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진 뒤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홀로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여자한텐 네가 아깝다고, 윤재야...”
순한 양처럼 잠들어 있는 윤재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렇게 나직이 중얼거린 준석은 한 손에 잔을 든 채 윤재의 어깨 위에 비스듬히 덮여 있는 이불을 고쳐주었다.
*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차가 막힐 것을 우려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한 다수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모처럼 만에 지옥 같은 지하철 출근길을 체험했던 수영은 어쨌거나 유리창 너머로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차를 두고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온종일 내리네요. 퇴근길이 엄청 막히겠어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수영이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동료 후배-진수의 인사를 받고 스치듯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좀 전까지 사무실에서 양과장에게 거하게 혼이 난 철우를 도와 일을 했던 그의 얼굴에는 명백하게 지친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남들보다 조금 일이 더딘 철우가 양과장의 화풀이 대상으로 찍혀 버렸다는 것은 이미 사무실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은 다 끝났어?”
“아뇨, 일단은 과장님이 급선무로 처리하라고 하신 것만 간신히 처리해놓은 상태에요. 송대리님이 나머지 부분은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같이 남아야 할 것 같아요.”
“수고가 많네.”
수영이 옆의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건네자 진수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양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번 회의에서 유일하게 통과된 기획안을 작성하신 게 우대리님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양과장님이 계속 칭찬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갑작스런 칭찬을 듣고 진수에게 시선을 던진 수영이 손에 들고 있던 빈 종이컵을 옆의 재활용통에 넣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통과된 건 아니야. 이번엔 평소보다 기준이 엄격해서 중간에 한 번 지적을 받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수정했어. 덕분에 사흘 연속 야근을 했고 말이야. 다행히 그 노력이 인정을 받은 건지 마지막까지도 다른 기획안과 비등하게 저울질되다 운 좋게 선택된 모양이야. 뭐, 일단 통과는 됐지만 위에서 몇 가지 부분을 수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또 한 번 손을 봐야 돼. 그러니까 소문으로 도는 것처럼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상황이야.”
“그래도 통과됐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향해 과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오는 진수에게 스치듯 쓴웃음을 지어 보인 수영은 문득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근처의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서류파일을 집어 들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로 느껴지는 나른한 기분을 쫓기 위해 잠시 나온 터라 이제 슬슬 사무실로 돌아갈 타이밍이 되었다.
“먼저 갈게. 다 마시고 천천히 와.”
“아, 네. 잘 마실게요.”
뒤늦게 자신을 발견한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무시하고 복도를 빠져나온 수영은 그대로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갈 때와 달리 어느 샌가 고요한 침묵을 되찾은 사무실 안은 여기저기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
“어휴, 오늘은 진짜 하루 종일 눈이 오네요. 아까 여기 올 때도 발이 푹푹 빠졌는데 방금 전에 보니까 그 새 또 엄청 쌓인 것 같아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음식물 찌꺼기들을 한 쪽에 모으며 그렇게 말한 성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윤재를 쳐다보았다. 폭설로 인해 평소보다도 손님이 없는 덕분에 몇 개 되지 않는 식기들을 씻어내고 있는 그의 손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저기 찌개 끓어요. 넘칠 것 같...”
성호의 말과 동시에 국물이 넘치는 요란스런 소리가 주방을 덮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가스레인지의 상황을 머리에서 지우고 있었던 수영이 서둘러 손을 뻗어 불을 껐지만 이미 가스레인지 주변은 흘러넘친 국물로 지저분하게 변해 있었다. 그나마 국물만 약간 넘친 정도인지라 손님 테이블에 내놓기에 특별히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게 다행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윤재가 군데군데 지저분하게 변한 냄비의 겉을 닦아내기 위해 근처의 행주를 집어 들자 눈치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거의 빼앗듯 그것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할게요. 사장님은 하시던 일 계속 하세요.”
“아... 그래줄래? 고마워.”
“고맙긴요. 일하러 온 건데 당연히 해야죠. 앞으로 좀 더 편하게 부려먹어 주세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한 성호가 이내 다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눈에 띠게 검은 피부에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다소 강한 인상을 풍기는 성호는 적어도 웃을 때만큼은 아직 제 나이 또래의 분위기를 풍겨서 윤재는 내심 그의 웃는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다 보니 강한 인상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기도 했지만, 면접을 통해 이야기를 나눌수록 성호의 인간 됨됨이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된 윤재는 결국 그와 같은 확신을 토대로 성호를 고용했고, 다행히 지금까지 성호는 맡은 바대로 일을 잘 해주고 있었다.
그 후로 두 시간 여가 지나는 동안 새롭게 테이블을 채운 손님 일행은 단 두 팀뿐이었다. 애초에 가게가 들어선 위치가 좋지 않은 탓에 지나다 들르는 손님의 수 자체가 적은 데다 오늘은 궂은 날씨까지 겹치는 바람에 영업을 개시한 뒤 받은 손님의 수는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오늘 장사는 문을 닫는 시간까지도 별반 여기서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한 윤재는 벌써 몇 번을 반복해 하릴 없이 테이블을 닦고 있는 성호를 가까이로 불렀다.
“며칠 있다가 시험이 있다고 했지?”
“네.”
한손에 행주를 든 채로 성호가 대답하자 윤재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 이만이라고 해도 업무시간 마감까지 세 시간도 안 남았지만.”
“네? 아뇨, 괜찮...”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손님이 거의 없을 거야. 서너 팀 정도까지는 나 혼자서 주방일 보고 서빙도 가능하니까.”
“그래도...”
“괜히 멀쩡한 테이블이나 닦고 있는 것보단 가서 시험 공부하는 게 훨씬 나아. 평소에 청소에 주방보조 일까지 많이 도와주잖아. 오늘처럼 널널할 땐 좀 쉬어도 돼. 괜찮으니까 가봐.”
연거푸 다정한 목소리로 윤재가 말하자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던 성호가 슬쩍 홀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넓지도 않은 홀이지만 그나마도 채워진 테이블은 두 개뿐. 일주일에 한 번씩 얼굴을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늘 그렇듯 자작을 하며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반쯤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 들어온 젊은 커플은 서로에게 바짝 몸을 붙인 채 연신 키득거리며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시험이라 줄곧 머릿속 한 켠에 그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던 성호가 조심스레 묻자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한 윤재가 성호의 손에 들려 있는 행주를 건네받았다.
“오늘 수고했어.”
“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잠시 후 옷을 챙겨 입고 나온 성호가 짧은 인사를 남기고서 가게 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윤재는 남는 시간 동안 가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양념 준비라도 해놔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이 가게를 맡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처럼 가장 기본적인 요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진지하게 인식한 뒤로 이것저것을 공부하고 연습한 덕분에 이제 가게의 인기 메뉴 종류는 능숙하게 만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오랫동안 이 가게를 맡아온 모친의 실력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그와 같이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좀 더 많은 노력으로 서서히 채워 가면 될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
싱크대 위에 재료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문득 가게 입구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조금 전 서둘러 나간 성호가 뭔가를 잊고 간 걸 깨닫고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주방을 나선 윤재는 잠시 후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묵직한 구두굽 소리를 내며 텅 빈 홀을 가로질러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것은 수영이었다.
퇴근길이라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회사에서 바로 온 것인지 단정한 수트 차림을 하고 있는 그는 자리에 앉은 뒤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옆의 서류가방 위에 내려놓았다. 혹시 다른 일행이 있나 하는 생각에 윤재가 입구 쪽에 시선을 던졌지만 닫힌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얼마 전 수영으로부터 다시 오겠다는 예고를 들었던 만큼 지금의 상황이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불편한 상대와 다시 마주하게 된 지금 윤재의 표정은 자연스레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대로 서서 자리를 지키던 윤재가 일단은 손님으로 온 수영의 주문을 받기 위해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긴장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수영의 가까이에 멈춰 선 윤재는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근처에서 1차 술자리를 갖고 와서 별로 술 생각은 없어. 적당히 속을 좀 달랠 만한 걸로 줘. 과일 안주하고.”
겉보기에 안색이 너무도 멀쩡해서 아무래도 술을 마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예전에 잠시 만났던 당시의 기억을 통해 수영의 주량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윤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수영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저 지나던 길에 들른 것뿐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그는 여기에서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큰한 찌개류로 가져올까요?”
최대한 다른 손님을 대할 때와 비슷한 태도를 갖추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나온 윤재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해오지 않는 윤재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문득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그제야 윤재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거두고서 대답했다.
“적당히 알아서 해줘.”
짧은 대답과 함께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기척을 느끼며 벗어둔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수영은 발신자의 이름을 먼저 확인한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발신자는 연석이었다. 얼마 전 통화에서 해외 출장을 간다고 말했던 그가 오늘에야 돌아온 모양이었다. 먼저 짧은 안부를 주고받은 뒤 곧이어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 당분간은 바빠서 힘들 것 같다고 대답한 수영은 순식간에 토라진 듯한 상대의 말투를 듣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당장 금요일인 내일 퇴근 후부터 이틀간은 호연과 지방으로 짧게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고, 일요일에는 아는 선배와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다. 굳이 만나려고 하면 평일 저녁에 시간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최근 간신히 기획안이 통과되어 그쪽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에 있는 수영은 혹시 모를 야근에 대비해 가능한 한 평일 저녁엔 약속을 만들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남자와 잘 되고 있는 모양이지? 요즘 에도 얼굴을 잘 안 내민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이 기회에 일편단심으로 돌아서기로 결심이라도 했어?]
대놓고 비꼬는 연석의 말에 짧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그에 대한 간단한 반론으로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문득 그의 뒤쪽 테이블에서부터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하영!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저쪽 쳐다봐? 어?”
“쳐다보긴 내가 언제 쳐다봤다고 그래? 자기야, 좀 조용히 해.”
“왜? 부끄럽냐? 저 놈이 볼까봐 부끄러워? 너 아까 저 자식 들어온 뒤부터 계속 쳐다봤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조금 전까지 맞붙어 앉아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닭살 돋는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이 어느 샌가 벌개진 얼굴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남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여자 친구가 계속 쳐다봤다는 남자’는 근처에 앉아 있는 수영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수영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계속되는 여자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 남자는 점점 더 격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자식이 그렇게 좋으면 가서 저 자식이랑 사귀라고! 최하영, 너 얼마 전에도 용식이한테 눈길 주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겉으로는 얌전떨면서 너 여기저기 눈길 주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고!”
“아, 진짜 아니라니까! 자기야, 제발 좀 조용히 해! 나 그런 적 없다고 했잖아!”
“없긴 뭐가 없어! 너 아까 저 자식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표정 싹 바뀌는 거 내가 다 봤는데! 씨발, 아주 얼굴이 발그레해갖고 좋아 죽더라? 그래, 생판 처음 보는 저 새끼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 당장 내가 앞에 있는데도 그렇게 눈 돌아갈 만큼 저 자식이 그렇게 좋냐고!!”
극도로 흥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가게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뒤 곧바로 이어진 여자의 비명을 듣고서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홀로 나온 윤재는 전혀 뜻밖의 장면을 시야에 들이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취기와 흥분으로 인해 발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빈 맥주잔과, 머리에서부터 셔츠의 상단까지 흥건히 젖은 채로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는 수영.
극도로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영이 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