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6인용 병실 안에 하나뿐인 tv의 채널은 온종일 소란스런 쇼 프로그램에 맞춰져 있었다. 병실 안 침대를 채우고 있는 여섯 명의 환자들 중 유일하게 리모컨을 소유하고 있는 영감님이 유달리 쇼 프로그램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높은 연배임을 내세워 자연스레 채널의 주도권을 손에 넣은 그는 잠시나마 드라마나 뉴스를 틀어달라는 다른 환자들의 요청을 가볍게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뜻만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tv속에서 어린 가수들이 나와서 떠드는 소리를 적당히 한 귀로 흘려들으며 줄곧 입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심은 잠시 후 병실 안으로 들어선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윤재야.”
모친의 부름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어선 윤재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그를 바라보는 병실 안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뒤 다시 모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밖에 많이 춥지? 어머나, 뭘 가져온 거니?”
“밑반찬 좀 싸왔어요. 이모는요?”
“이모는 아래층에 잠깐 귤 좀 사러 갔어. 금방 올 거야.”
두 달 째 자신을 대신해 모친의 간병을 맡고 있는 이모의 모습을 찾던 윤재가 곧바로 들려온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종이 백에 담아온 용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작은 냉장고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들이 입에 잘 맞지 않는다는 모친의 말을 듣고 일부러 장을 봐서 꼬박 밤을 새다시피 해서 만들어놓은 반찬들이었다. 오랜 경력의 모친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요리 실력이었지만 어쨌거나 아들이 만들어준 건 다 맛있다는 모친을 위해 모처럼 정성을 듬뿍 담아 만든 반찬들은 윤재 본인이 맛을 봐도 제법 괜찮은 맛이 났다.
“몸은 좀 어떠세요? 며칠 사이 상태가 나빠지거나 하진 않았어요?”
걱정스런 윤재의 질문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인 모친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요즘은 컨디션이 좋아. 안 그래도 이모가 옆에서 많이 챙겨주거든. 그보다 가게는 어떠니? 어제부터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쓰겠다고 했지? 어떤 사람이니? 일은 잘 해?”
“대학을 잠깐 휴학한 남학생인데 지금까지 일을 많이 안 해봐서인지 사람 대하는 게 좀 서툴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요.”
“그래. 열심히 노력하면 금방 늘겠지. 뭐니 뭐니 해도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최고야.”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보호자용의 긴 의자에 앉은 윤재가 순식간에 진지해진 주변의 공기를 읽어내고 마음의 준비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텀을 두고 이어진 모친의 말은 이곳에 올 때까지도 윤재가 줄곧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했던 어젯밤 통화의 내용의 연장이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잠깐 만나보는 것뿐이니까. 만나서 아니다 싶으면 다신 안 보면 되는 거지. 모처럼 이모가 가져온 얘기니까 한 번만 만나봐, 윤재야. 정말 참하고 괜찮은 아가씨래. 이모가 평소에 널 얼마나 걱정하는데 이상한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니? 안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지만 전 당분간 그쪽으론 생각이 없어요.”
곤혹스런 기분을 안은 채 일단 이곳을 방문하기 전 결심한대로 침착하게 거절의 말을 꺼낸 윤재는 곧바로 이어진 모친의 항변을 잠시 동안 묵묵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어머니와 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연애나 결혼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그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도 내후년만 지나면 곧 서른인데 이제 슬슬 결혼을 해서 정착을 해야 하지 않겠니?”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윤재야, 이번 아가씨는 얘길 들으니까 정말로 너무 놓치기 아까워서 그래. 날 생각해서라도 딱 한 번만 만나보면 안되겠니? 바로 뭘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니까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만나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억지로 사귀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어머니.”
“네가 어서 짝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걸 봐야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텐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이모와는 눈만 마주치면 그 얘기뿐인 걸 아니?”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모친의 태도에서 그녀의 강경한 의지를 읽어낸 윤재는 더없이 간절한 표정으로 승낙을 기다리는 모친의 시선을 더는 차갑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장소가 이곳이 아니고 모친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마지막까지도 거절의 의사를 피력했겠지만 아픈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끝까지 외면할 만큼 윤재는 몰인정한 아들이 아니었다.
“윤재야...”
다시 한 번 모친의 간절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린 윤재가 마지막까지 이어진 고민을 간신히 마무리 짓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일단 한 번만 만나 볼게요.”
마침내 윤재의 승낙을 얻어낸 모친이 그제야 얼굴 위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정심이 오늘 일부러 바쁜 윤재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물론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것으로, 일단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그녀는 조금 전에 비해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재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상대측 아가씨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를 언니로부터 전해 듣고 난 뒤로 혹시나 어렵게 성사된 자리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그녀로선 이것으로 가장 큰 고비 하나를 넘기게 된 셈이었다.
“정말 착한 아가씨래. 나이는 너보다 한 살 어리고 지금은 작은 공장에서 경리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이모가 아는 사람의 딸인데 어릴 적부터 그렇게 얌전하고 착했대.”
모친의 이어지는 칭찬에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은 윤재가 의미 없이 빈 종이백을 만지작거렸다.
착한 아가씨일 거라는 말은 아마도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즘 같은 세상에 특별히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남자와-그것도 다리를 저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선뜻 선을 보겠다고 나설 리가 없었으니까.
만약 만나서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천천히 관계를 진전시켜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한 윤재는 잠시 후 병실 안으로 들어선 이모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윤재 왔구나.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더 고와졌네.”
“언니는. 다 큰 남자한테 고와졌네가 뭐야.”
“고와졌으니 고와졌다고 말한 건데 뭐. 윤재는 어릴 적부터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곱상해서 우리 딸내미들 기를 죽였었지.”
윤재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한 이모-은심이 힐긋 동생인 정심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뒤 다시 윤재를 마주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시간은 언제쯤이 괜찮겠니?”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윤재가 곧바로 이어져 들려온 말을 듣고서 자연스레 표정을 굳혔다.
“굳이 시간 길게 끌 필요 없이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보는 게 낫겠지?”
두 사람이 단합해서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는 윤재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은심의 말대로 어차피 만나기로 결심을 한 이상 굳이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윤재는 이어지는 설득의 말을 적당히 듣다가 시간이 비는 날짜를 말했다. 주점 일의 특성 상 주말보다는 평일에 약속을 정하는 편이 좋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 쪽에서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므로 일단 윤재는 대답을 기다리는 이모에게 최대한 상대측의 의견에 맞춰주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럼 그쪽 아가씨에겐 내가 다시 연락을 해볼게. 날짜를 대충 맞춰본 뒤에 다시 연락줄 테니까 너도 어느 정도 미리 준비하고 있어. 그런 자리에서 입을 만한 옷은 있지?”
“...네.”
가게 일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회사 생활을 했던 터라 수트라면 몇 벌 가지고 있는 윤재였다. 안타깝게도 그 가운데에 특별히 좋은 자리에 입고나갈 만큼 멋진 건 없었지만.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반복하는 모친과 이모에게 적당히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선 윤재는 다소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고 싶었지만 저녁때에 또 다시 가게 문을 열기 위해서는 장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2년여 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서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제대로 밤잠을 이뤄본 적이 없는 윤재는 벌써 몇 개월째 피로한 몸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이용하는 재래시장을 들러 몇 가지 필요한 식재료를 산 뒤 가게로 돌아온 윤재는 습관처럼 가장 먼저 불을 켜고 내부를 밝힌 뒤 주방으로 향했다. 어제는 갑작스럽게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어서 자칫하면 재료가 부족한 사태에 이를 뻔 했었지만 다행히 미리 미리 넉넉하게 재료를 준비해두었던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새벽이 올 때가 되어서야 가게 문을 닫고 뒷정리까지 한 뒤에는 당장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손님이 많은 건 장사치의 입장에서 분명 환영해야 마땅한 일임에도 기본적으로 체력이 그리 좋지 못한 윤재로선 어제와 같은 호사를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성호 왔니?”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받은 윤재가 파를 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고 주방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여기저기 어색한 태도가 남아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일을 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성호는 먼저 들고 있던 가방을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이어서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놓고 윤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파 다듬는 중이세요? 같이 할까요?”
“아, 그래. 그럼 지금부터는 네가 좀 다듬어줘. 난 양념장을 만들 테니까.”
“네.”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성호에게 바톤을 넘긴 뒤 몸을 일으킨 윤재는 아까 전 장을 봐온 몇 가지 식재료들 중 당장 필요한 것을 장바구니에서 꺼내 싱크대 위에 늘어놓았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재료를 썰고 다듬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손을 다쳤던 그는 차츰 일에 적응이 되어감에 따라 이제 주방 안에서 제법 그럴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파 다 다듬었는데 다음으로 뭘 할까요?”
“벌써 다 다듬었어? 그럼 홀 청소 좀 해줄래? 내가 아침에 한 번 하기는 했는데 손님 받기 전에 한 번 더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다듬은 파가 담긴 소쿠리를 싱크대 위에 올린 뒤 서둘러 손을 씻고 주방을 나서는 성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윤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사람을 뽑는 건 처음이었지만 운 좋게도 정말 괜찮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생각에 흐뭇한 기분이 든 그는 문득 성호에게 주기 위해 따로 담아놓은 반찬을 떠올리고 자연스레 냉장고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새벽 모친에게 전달할 반찬을 만드는 김에 좀 더 양을 늘려 성호의 것까지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한다고 말한 성호가 아마도 평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윤재는 작으나마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영업을 개시한 뒤에도 마치 어제의 일이 허망한 꿈이었던 것처럼 가게 안은 한산했다. 그나마 퇴근 시간 뒤에 가게를 찾은 두 팀의 손님들에 의해 간신히 두 개의 테이블만 채워진 상태에서 벌써 두 시간여가 흘러가고 있었다. 덕분에 주방을 맡고 있는 윤재도, 서빙을 맡고 있는 성호도 당장 크게 할 일이 없어 자연스레 두 사람의 귀는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 손님들의 대화소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들려오는 화제는 다양했다. 가장 보편적인 직장 내에서의 이야기에서부터,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의 사생활 이야기, 연애 문제, 정치에 대한 열띤 토론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쉼 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었다. 처음 화기애애하던 테이블의 분위기가 정치 이야기로 넘어간 뒤 잠시 경직되는가 싶더니 중간에 눈치 빠른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 다시 연예인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자 다행히 잠시 얼어붙었던 가게 안의 분위기는 서서히 처음의 평온함을 되찾아갔다. 처음 이곳에 즐거운 기분으로 함께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져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손님들을 이미 몇 차례나 겪어온 윤재는 조금 전 중재에 나선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까 저녁 제대로 못 먹었지? 지금 한가하니까 뭐라도 좀 먹을래?”
주방에 서서 물끄러미 홀 안의 분위기를 지켜보고 서있는 성호의 등을 두드리며 물어본 윤재가 ‘괜찮아요.’라는 대답을 듣고 이어서 말했다.
“평소엔 늘 이래. 어제가 좀 이상하게 손님이 많았던 거야. 어쨌든 한산한 동안에는 그렇게 다리 아프게 서있지 않아도 돼.”
“네.”
“아참, 아까 만들어놓은 누룽지탕 살짝 덥히기만 하면 되는데 먹을래? 아직 밤 새려면 멀었는데 미리 속을 든든하게 채워놔야지.”
다정하게 이어진 윤재의 말에 그제야 형식적인 사양을 거두기로 한 성호가 조금 머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럼 먹을게요. 그런데 저는 저보다 사장님이 더 걱정되는데요. 평소에 끼니는 다 챙겨 드시는 거 맞죠? 볼 때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혹시 쓰러지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요.”
뜻밖의 성호의 말을 듣고 일순간 말문이 막힌 윤재가 대답 대신 쓴웃음을 머금었다. 몇 개월 간 좀처럼 손에 익지 않은 가게 일을 챙기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던 탓에 피로가 쌓인 상태라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장 남의 눈에 그렇게 확연히 보일 정도라곤 생각지 못했던 윤재였다.
“쓰러지다니... 그 정도로 심각해 보여? 일단 바쁘더라도 최대한 끼니는 챙겨 먹고 있는데... 아, 손님 오셨다.”
문득 입구에서 들려온 소리에 곧바로 그쪽으로 몸의 방향을 돌린 윤재가 그 사이 빠르게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는 성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걱정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현재의 상황이 한층 뚜렷하게 인식이 되었다. 본인 스스로도 몇 개월 사이 허리둘레가 2인치 정도는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 전 들은 말이 아무래도 가볍게 웃음으로 넘겨지지가 않았다.
괜히 큰 일이 생기기 전에 조만간 하루나 이틀 휴일을 정해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윤재는 자신도 걸음을 옮겨 홀로 나갔다.
“이거, 오늘도 손님이 없네. 장사가 이렇게 어려워서 어쩌나.”
쯧쯧 혀를 차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모친의 말에 의하면 수수한 겉모습과 달리 꽤나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듯한 그는 종종 이곳을 찾은 인연 덕분에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모친으로부터 ‘양과장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평소 자주 앉는 자리로 향하는 양과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넨 윤재가 이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입구에 시선을 던지자 양과장의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차례로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 부하직원들인 듯 다들 입고 있는 옷차림이 단정했다.
“!”
그리고 잠시 후 양과장의 말에 따라 차례로 자리를 채우는 일행들 사이에서 눈에 익은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윤재의 표정이 눈에 띠게 굳어졌다.
‘서비스업을 하면서 표정 관리가 전혀 안되는군.’
스쳐 지나는 와중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는 윤재를 보고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수영이 이내 자신을 부르는 일행의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잠시 제자리에 굳어 있던 윤재가 문득 옆에서 들려온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성호를 향해 스치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곧바로 주문서를 들고 양과장의 일행이 채우고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일제히 자신에게 향해지는 시선을 느끼며 잠시 그대로 테이블 옆 자리를 지킨 윤재는 양과장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주문을 손에 든 주문서에 체크해 나갔다.
“이 집 안주는 찌개류가 특히 맛있어. 여기, 일단 소주 일곱 병하고... 맥주도 일곱 병. 안주는 새우젓 두부찌개, 생태찌개, 그리고 또... 뭘로 하나... 아, 여자들은 그걸 좋아하던데... 그래, 저기 버터 오징어 구이하고 과메기 초무침으로 우선 먼저 갖다 줘요. 모자라면 따로 더 주문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한 윤재는 그 사이 물수건과 컵들을 옮기는 성호의 모습을 슬쩍 쳐다보고서 서둘러 음식 준비에 나섰다.
설마 수영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윤재로선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당혹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아는 우수영은 이런 분위기의 가게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남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껄끄러운 관계가 된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을 거라고는 당연하게도 생각지 않았던 윤재였다. 그러나 조금 냉정히 머리를 식혀 상사의 제안이 있었다면 부하직원의 입장에 있는 수영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의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놓인 뒤 수영의 일행이 자리한 곳의 분위기가 한층 떠들썩해졌다. 회사 동료들로 이뤄진 모임인 만큼 대화에 나오는 화제는 단연 일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았지만 각자의 입에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사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 소주 세 병이랑 버터 오징어 좀 더 주세요!”
몇 번째 이어지는 주문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성호를 쳐다 본 윤재는 잠시 후 가게 안으로 들어선 새로운 손님 일행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곧바로 주문서를 들고 그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윤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운데 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두 남자는 한눈에 봐도 거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아마도 제대로 빨지 않은 듯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는 옷차림도 그랬고 무엇보다 잔뜩 그을린 얼굴과 뭉툭하게 닳아빠진 손가락에 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이는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반 대 정도로 보이는 두 남자 모두 꽤나 매서운 인상을 하고 있어서 그들 가까이에 앉아 있던 한 쌍의 커플이 조심스레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제가 주문 받을게요.”
양과장의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추가로 주문을 받은 음식과 술을 가져다 놓은 뒤 서둘러 윤재의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손에 묻어 있는 물기를 허리춤에 닦아내며 말했다.
“아냐, 여긴 내가 받을게. 가서 물수건 좀 가져올래?”
“네.”
윤재의 말에 짧게 대답한 성호가 몸을 돌려 물수건을 가지러 가자 그동안 잠시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두 명의 남자 손님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여긴 처음인데 뭐가 맛있어?”
다짜고짜 반말을 사용하는 남자의 태도에 일순 빠르게 눈을 깜빡인 윤재가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애써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이 가게를 맡은 뒤로 몇 번인가 질 나쁜 손님들과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는 그는 이제 이 정도의 무례한 태도에는 크게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가장 잘 나가는 메뉴는 생태찌개와 부대찌개입니다. 마른안주로는 버터 오징어 구이를 많이 찾으시고요.”
“아, 그래? 그럼 생태찌개랑 소주 네 병 먼저 갖다 줘 봐. 먹다 부족하면 더 주문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남자의 주문을 받고서 주방으로 향한 윤재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재료 준비에 나섰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뿐 아니라 힘든 일이 있을 때 이곳을 찾는 손님들도 많은 만큼 각자 다른 그들의 기분을 최대한으로 맞춰줘야 하는 것이 윤재의 입장이었지만, 아직 일에 익숙지 않기 때문인지 혹은 역시 타고난 성격 상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 어려운 탓인지 때때로 이렇게 잔뜩 날이 서있는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된 기분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더 많은 손님들을 맞이한 가게 안에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로 떠들썩하게 채워졌다. 처음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얌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몇몇 손님들마저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 취기가 오르자 너나 할 것 없이 발개진 뺨을 하고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에서 어느 샌가 최근의 정치 문제로 전환된 화제는 누군가의 주도에 따라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사회 문제에 대한 성토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호의 도움을 받아가며 바쁘게 주방에서 안주를 만드는 내내 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의도치 않게 귀에 담고 있던 윤재는 어쩌다 한 번씩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수영 자체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지는 않고 있는 탓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따금씩 윤재의 귀에 닿아온 수영의 목소리는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로 이전과 다름없이 냉정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스치듯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별 통보의 말들이 귓가에 되살아난 윤재는 재빨리 사소한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 날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래서 영업과의 윤지영씨라고 있잖아요, 그 아가씨가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우는 걸 봤다며 여기저기에 떠들고 다니더라고요.”
“상사로써 부하직원의 프라이버시를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다니 진짜 인성이 영 아니네. 그런 상사를 둔 영업부 직원들이 불쌍하다.”
“별로 불쌍할 것까지는 없어. 그래도 식구라고 자기네들끼리 엄청 챙겨주던데 뭐.”
“그것도 예전 얘기 아니야? 최근엔 실적이 떨어져서 그런지 그쪽 분위기가 싸해 보이던데 말이야.”
“아, 그 얘긴 나도 들었어. 회사 내의 이야기를 잘 아는 후배 말로 요즘 영업부 분위기가 많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
“윗사람이 통솔을 못하니 엉망진창이 되는 거지. 하여튼 노석진 그 자식은 그 능력으로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몰라.”
얼큰하게 취한 양과장이 고함에 가까운 큰 목소리로 중간에 끼어들자 그때까지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이어가던 부하직원들이 슬쩍 양과장의 눈치를 보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좀 전까지 취기에 의해 반쯤 잠들어 있던 양과장의 존재를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그들은 어쨌든 양과장이 다시 앞으로 나선 시점에서 한결 태도를 가지런하게 바꾸었다.
“노석진 그 새끼는 진짜 잘라버려야 돼. 잘라야 된다고... 그런 놈은 기생충이야. 기생충...”
완전히 취해 횡설수설하는 양과장을 잠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던 직원들 중 한 명이 이제 슬슬 일어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에 동조하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열 한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전에 종종 찾았던 넓고 쾌적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상사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어 끌려오듯 오늘 이곳을 찾은 직원들은 생각보다 괜찮은 음식들의 맛에 어느 정도 만족을 했는지 회식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그들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접시들은 대부분이 깨끗이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계산은 어떻게 하죠?”
“아까 양과장님께서 미리 카드를 맡기셨으니 그걸로 계산하면 돼.”
“아, 그래요?”
술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그다지 주량이 세지 않은 양과장이 다행히 미리 카드를 맡겨놓는 센스를 발휘한 덕분에 잠시나마 곤란한 심정으로 이미 취해 곯아떨어진 양과장의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은 손쉽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지호씨 오늘 엄청 잘 먹네. 여기 안주가 입에 잘 맞나봐. 아까 보니 아주 마지막까지 냄비를 싹싹 긁어먹던데.”
“아, 네. 여기 음식 맛이 참 좋네요. 과장님이 괜히 여기로 데려오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맞아. 나도 생태찌개 좋았어. 맛이 깔끔하니 얼큰한 느낌도 제대로고. 아, 여기 주인이시죠? 여기 있는 음식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슬슬 계산을 하려는 분위기를 알아채고 주방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윤재가 문득 자신에게 향해진 질문을 듣고 순간적으로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네. 정말 맛있었어요.”
단순한 예의상의 칭찬은 아닌 듯 다시 한 번 ‘맛있었어요.’를 반복하는 혜리의 표정에 만족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전까지 어느 회식자리를 참석하든지 특별히 음식의 맛에 대한 감상을 말한 적 없었던 그녀인 만큼 조금 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칭찬의 말들은 백퍼센트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에 분명했다.
“맛있기는, 개뿔! 이딴 걸 돈 받고 팔아 쳐 먹다니 양심도 없지!”
“!”
잠시 동안 혜리의 말에 동조한 몇 명의 직원들이 그녀와 비슷한 말을 차례로 늘어놓는 것을 조금은 민망한 기분으로 듣고 있던 윤재가 갑자기 반대쪽 테이블에서 터져 나온 누군가의 거친 언사에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씨발, 누군 돈 몇 만 원 벌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리가 빠지는데 누군 이 따위 허접한 음식 내놓고 참 쉽게도 돈 벌어 쳐먹는구만. 건더기도 쥐꼬리만큼 넣어놓고 국물은 또 왜 이렇게 밍숭맹숭 해? 이런 걸 돈 받고 팔다니 진짜 양심도 없는 인간들이네.”
대놓고 윤재와 성호를 노려보며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까 전 잔뜩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던 두 명의 남자 손님 중 좀 더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는 쪽으로, 다짜고짜 윤재에게 반말로 주문을 했던 남자였다.
다른 손님들 앞에서 거침없이 악의 섞인 말을 쏟아내는 남자를 조금 당혹스런 기분으로 쳐다보던 윤재는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차례로 밖으로 나가는 양과장의 일행을 알아채고 일단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괜히 남의 일에 휘말리기 싫은 듯 최대한으로 말을 아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무례한 손님을 한 번씩 흘겨보고 입구를 빠져나간 손님들은 가게 바로 앞 주차장에서 이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떠들썩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입구를 나서기 전 잠시 윤재에게 시선을 던졌던 수영도 차 열쇠를 손에 쥔 채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일행을 대표해 계산대 앞에 선 것은 아마도 양과장 다음으로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듯 보이는 비쩍 마른 중년의 남자였다. 스치듯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 윤재가 곧장 자신에게 내밀어진 주문서와 카드를 받아들었다.
그 사이에도 쉼 없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는 무례한 남자는 일단 성호가 혼자서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또 찾아주세요.”
계산을 마치고 입구를 나서는 손님을 향해 습관처럼 입에 붙은 말을 건네고 서둘러 성호의 곁으로 달려간 윤재는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층 더 과격해진 행동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앞에 섰다.
“손님,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 조금만 진정해주세요.”
“뭐? 진정? 왜? 여기 있는 다른 년놈들이 날더러 시끄럽다고 좀 닥쳐 달라고 하던?”
“손님...”
첫 등장 때부터 날이 바짝 서있던 남자는 취기가 오름에 따라 점점 더 거칠게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덩달아 맞장구를 치던 일행조차 이제는 슬슬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손님, 일단 앉으세요. 그렇게 흥분하지 마시고...”
남자의 태도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둘 차례로 일어나서 계산대로 향했다. 그들로썬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성호야, 계산대 좀 봐줘.”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일에 적지 않게 겁을 먹은 듯 보이는 성호를 계산대로 보낸 윤재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남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금 손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건 음식에 대한 불만사항이신가요?”
“그래, 이 따위 걸 내놓고 돈 받아먹겠다는 건 진짜 양심도 없는 짓이지.”
이런 식으로 애꿎은 음식에 대한 불만을 토하며 계산을 거부하는 손님들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적이 있는 윤재였다. 실컷 배부르게 먹어놓고 막상 계산을 하려니 돈이 아까워진 몇몇의 사람들은 때때로 술기운을 빌려 이렇게 생떼를 쓰곤 했는데 아마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남자도 그런 부류일 거라고 판단을 내린 윤재는 일단 속으로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흥분한 채 맛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남자의 앞에 놓인 접시는 거의 대부분이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야! 이거 다 네가 만든 거야? 어? 진짜 이 따위로밖에 못 만들겠어!?”
“입에 맞지 않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손님한테 말대꾸야? 어린놈의 새끼가!”
실컷 다 먹어놓고서 막상 계산할 때가 되자 돈을 내기 싫어서 꼬장을 부리는 주제에 그래도 스스로를 손님이라고 상석에 놓고 있는 남자의 태도가 경멸스럽게 느껴진 윤재가 말아 쥐고 있는 주먹에 살며시 힘을 실었다. 자신이 옳아도 옳다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 장사치의 입장이었지만 때때로 이렇듯 더러운 꼴을 봐야하는 상황에 놓일 때마다 윤재는 지금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 대해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쭈, 이 새끼 이거 주먹을 쥐었네. 어디, 날 패려고? 아까 보니 불쌍하게 다리를 절던데 주제 파악이나 좀 하시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뒤섞여 들려온 말에 일순 어깨를 움찔한 윤재가 갑자기 앞을 막아선 성호의 등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말 가려서 하세요.”
명령에 가까운 성호의 말을 듣고 잠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남자가 곧바로 상황을 인식하고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의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하, 이 새끼 봐라. 이게 어디서 훈계질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나이만 먹으면 어른인 줄 압니까?”
“이 씨발 새끼야, 진짜 뒈지고 싶냐?”
“성호야!”
아무래도 분노로 열이 오른 듯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성호를 참고 보다 못한 윤재가 앞으로 나선 순간, 끝내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성호에게로 주먹을 뻗었다.
“그만 하세요!”
가까스로 중간에서 남자의 팔을 붙잡은 윤재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핀이 나가버린 남자의 귀에 그 목소리는 닿지 않은 듯 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윤재의 손을 우악스런 힘으로 떨쳐낸 남자가 곧바로 꽉 말아 쥔 주먹을 윤재의 얼굴에 날렸다.
“사장님!”
갑작스런 공격을 당한 윤재가 일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자 그의 뒤에 서있던 성호가 재빨리 손을 뻗어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곧바로 성호의 눈에 들어온 윤재의 얼굴은 입술의 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게 왜 갑자기 나서길 나서? 아주 반 죽여 놓기 전에 알아서 기어 들어가.”
윤재의 입술이 찢어진 것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남자가 여전히 공격 태세를 풀지 않은 채 내뱉듯 말하자 그 말을 듣고 황급히 앞에 나선 성호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술 쳐 먹으러 왔으면 술이나 곱게 쳐 먹지, 왜 남의 가게에 와서 행패야? 이 개새끼야!”
“뭐? 야, 다시 말해봐, 이 새끼야! 이 씨발놈이 진짜 뒤질라고 작정을 했나? 야! 눈 안 깔아? 이 새꺄-!”
흥분한 남자가 끝내 근처에 있던 소주병을 들어 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성호의 얼굴을 피해 날아간 그것은 곧장 근처의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설마 이 정도의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던 윤재가 당혹감으로 굳어 있는 사이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온 남자가 이내 우악스런 힘으로 성호의 멱살을 쥐었다.
“다시 말해봐, 이 새끼야. 내가 그냥 겁 줄라고 집어던진 거 같지? 이 씨발, 내가 우습게 보여? 출소한지 한 달 만에 또 사람 반 죽여 놓고 감방 함 더 갈까? 어?”
남자의 입에서 ‘출소’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성호의 눈이 커졌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본 상황을 토대로 자신의 앞에 선 남자가 무척이나 질이 나쁜 인간이라는 건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마 그에게 전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돈은 내지 않으셔도 되니까!”
“왜? 전과가 있다는 얘길 들으니까 갑자기 겁이 나셨어? 아니면 나 같은 인간쓰레기는 이제 한 시라도 빨리 밖으로 치워버리고 싶어? 웃기지마, 이 병신 새끼야!”
이미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잔뜩 흥분한 남자가 줄곧 성호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이번에는 윤재의 팔을 붙잡았다. 그때까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일행이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지만 연신 거친 욕을 내뱉고 있는 남자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한순간에 얼려버린 것은 바로 그 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누군가의 기척이었다.
“!”
모여 있는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하는 가운데 뒤늦게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윤재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이런 허름한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런 수트 차림을 한 채 입구 근처에 서있는 것은 아까 전 다른 일행들과 어울려 가게를 나섰던 수영이었다. 자신을 향한 네 사람의 시선을 깨끗이 무시한 채 조금 전 자신이 앉아 있었던 자리로 향한 그는 바쁜 경황으로 인해 아직까지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이내 그의 손에 들려 코트 안쪽 주머니에 넣어진 것은 익숙한 외국 브랜드의 담뱃갑이었다.
더없이 냉정한 수영의 태도를 보고 그가 단지 놓고 간 물건을 가지러 온 것뿐이라고 여긴 남자가 잠시 주춤했던 기세를 다시 회복하고 윤재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입구로 향하는 대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 듯 했다.
“너 이 새끼, 이런 좆같은 가게라도 일단 사장님 소리 듣고 사니까 나 같은 놈은 우습게 보이지? 너도 그 새끼들이랑 똑같아. 날 위에서 내려다보고 지금도 마음속으론 상종하기도 싫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안 그래, 이 씨발 새끼야!”
악에 받쳐 잔뜩 흥분해 있는 남자가 멱살을 잡힌 윤재의 얼굴 가까이로 위협하듯 커다란 주먹을 들이민 순간, 그의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쯤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