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어머, 머리 예쁘네. 어제 한 거야?”
“응. 파마하는 김에 염색도 살짝 했지. 어때, 너무 튀진 않지?”
“응. 보기에 딱 좋네. 얼굴빛이 확 살아 보여. 오늘 평소보다 화장도 신경 써서 한 거 같은데 퇴근 뒤에 남친이랑 약속 있나보지?”
은근히 부러워하는 듯한 동료의 질문에 ‘뭐, 그렇지.’라고 대답하고서 가볍게 웃음소리를 낸 소연이 문득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
높은 곳에 위치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한 소연의 뺨이 조금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반쯤 무시한 채 복사기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대는 상품기획부에 소속되어 있는 우수영 대리로, 이미 그의 존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 회사 안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복사할 게 많이 남아 있나요?”
질문을 받은 것과 동시에 근처로 다가온 수영의 손에 서류가 들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소연이 그 사이에도 쉴 새 없이 윙윙소리를 내고 있는 두 대의 복사기를 빠르게 번갈아 쳐다본 뒤 조금 전 동료와 말할 때와 비교해 확연히 가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탁 받은 게 아직 남아 있어서... 저기, 혹시 많이 바쁘시면 놓고 가세요. 필요한 장 수를 말씀해주시면 제가 복사해서 사무실로 가져다드릴게요.”
친절한 제안 안에 담겨 있는 명백한 흑심을 어렵지 않게 읽어낸 수영이 일순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수작을 걸어오는 상대라면 이미 질릴 만큼 겪어온 그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얼굴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몸매는 꽤 괜찮아 보였다. 특히 취향 상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라인을 중요시 여기는 수영의 눈에 들어온 여자의 다리는 제법 예쁜 선을 이루고 있었다.
“아뇨, 별로 급하진 않으니 나중에 다시 오죠.”
짧게 이어지는 침묵을 나름대로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던 소연이 잠시 텀을 두고 들려온 수영의 대답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분위기 상 설마 거절의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이 일순간에 당혹감과 민망함으로 굳어졌다.
‘아...네.’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소연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수영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복사실을 빠져나왔다. 입구의 문이 닫히기 직전 동료를 향한 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차피 사석에서 만날 사이도 아니니 뒤에서 자신에 대해 무슨 험담을 하든 별로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신이 여자를 임신시키고 튀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질 나쁜 소문이 회사 내에서 떠돌았던 일까지도 경험했던 만큼 이제 어느 정도의 악소문쯤은 가볍게 웃어넘길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된 그였다.
“여기 이 부분 수정하라고 하지 않았어? 아직도 그대로인데 제대로 안 본 거야? 아니면 내 말을 그냥 흘려들었어?”
“아,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고치겠습니다!”
“하여튼 정신이 어디 가 있는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날 선 호통 소리에 반사적으로 발을 멈춘 수영은 양과장의 투덜거림을 등으로 받아내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철우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도 서류를 검토 받는 과정에서 크게 한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는 그는 무척이나 성실하지만 일하는 요령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남자로, 수영에겐 입사 2년차의 선배였다.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자신의 곁을 스쳐가는 철우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수영이 계속해서 불만을 통해내고 있는 양과장을 바라보았다.
“회사에 취직만 하면 장땡인가. 시간이 갈수록 빠져가지고 그냥 월급이나 축 내는 인간들은 잘라버리든지 해야지 원.”
꽤나 거친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아 아까 전 전체 회의에 참석했던 양과장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짐작한 수영은 사무실 내에 있는 직원들 모두가 숨죽인 채 양과장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입사한 이래 적어도 일로 인해 지적을 받은 적이 없었던 수영은 성질이 괴팍한 양과장으로부터 그나마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부하직원인 만큼 이 사무실 내에선 유일하게 양과장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존재로 통하고 있었다.
애초에 남의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싸한 분위기를 방치한 채로 일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은 수영은 주변 동료들이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간절한 시선을 일단 접수하기로 하고 아직까지도 혼자서 투덜거리고 있는 양과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자신 분으로 자판기에서 빼온 커피를 조심스레 책상에 놓으며 수영이 묻자 뒤늦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양과장이 미세하게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래, 고맙네.’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부서 내의 방침 상 각자 마실 커피를 직접 타거나 빼오기로 되어 있는 만큼 다른 보통의 회사처럼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이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는 상황은 이제껏 자신의 기분을 우선시해서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수영에게 있어서 여전히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상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노력 따위는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와 같이 다소 뻣뻣하던 태도도 시간이 흐르는 사이 어느 샌가 조금은 유연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건 남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사회인의 입장에 정착되어간다는 증거일 터였다.
명백하게 저혈압 상태인 양과장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수영은 일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진지해진 양과장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의견을 조용히 말로 이어갔다. 다행히 양과장의 얼굴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흡연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수영이 문득 뒤에서 들려온 철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한산한 흡연실 안을 크게 한 번 둘러보면서 수영의 곁으로 다가온 철우는 곧바로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불까지 빌려주는 수영에게 눈짓으로 감사의 표시를 한 그는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을 잠시 눈으로 쫓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괜히 주제넘게 나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그런, 아니야. 아까 수영씨가 나서지 않았으면 퇴근 때까지도 사무실 분위기가 싸했을 거야. 뭐, 내가 실수를 한 건 사실이니까 어느 정도 싫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과장님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흘깃 주위를 둘러본 철우가 넓은 흡연실 안에 이제 자신과 수영 단 둘만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과장님은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계속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 경향이 있으니까...”
수영이 입사하기 전 이미 2년간 양과장을 옆에서 겪어온 철우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뒤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한테 도움이나 받고... 내 꼴이 참 한심하네.”
“별로 제가 도운 건 없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일부러 날 도와준 거 알아. 원래 우대리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타입이잖아. 그런 우대리가 굳이 자진해서 과장님 앞에 나선 건 아까 전 내 입장이 좀 안되어 보였기 때문이었겠지.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아까는 정말 부끄러운 꼴을 보였어.”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는 철우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수영이 어느 순간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근처에 놓인 재떨이에 눌러 끄고 버렸다. 이어 손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그는 여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철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슬슬 퇴근할 준비를 해야겠네요.”
“아, 퇴근 후에 무슨 약속이 있는 거야?”
“네.”
“혹시 데이트?”
조금 놀리는 듯한 철우의 질문에 ‘글쎄요.’라고 애매한 대답을 한 수영은 이어 ‘내일 봬요.’라는 말을 남긴 뒤 그대로 흡연실을 나섰다.
‘쳇, 누구는 데이트고 누군 야근인가...’
조금 전 수영이 나선 입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쉰 철우는 한동안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천천히 입술 사이로 밀어 넣고서 고개를 저었다. 벽의 절반을 채우고 있는 창문 너머로 어느 샌가 한층 강렬해진 붉은 빛이 넓게 펼쳐진 건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대화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소 소란스럽게 뒤엉킨 목소리들을 표정 없이 귀에 담은 채 수영은 일제히 자신에게 향해지는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는 넓은 바(bar)안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수영씨.”
반가운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수영에게 말을 건네 온 것은 이곳 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유민이었다. 정갈하게 다듬은 콧수염과 턱을 조금 넘는 길이의 단발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그는 유들유들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넉살 좋은 성격의 남자로, 이곳의 사장인 호연과는 대학 시절 선후배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랜 지인이니 만큼 호연이 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그는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진 호연과 수영의 관계를 일찍이 눈치 채고서 수영을 상대로 이전보다 눈에 띠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우와- 머리 짧게 치셨네요. 엄청 깔끔하고 세련 돼 보여요. 야~ 이런 머리는 얼굴형이나 두상이 안 예쁘면 절대 시도 못하는 스타일인데 말이죠. 역시 미남은 무슨 머리를 해도 다 잘 어울리네요. 저도 두상만 예뻤으면 이런 스타일 시도해 봤을 텐데 아쉬워요.”
단순히 예의상의 칭찬은 아닌 듯 수영을 바라보는 유민의 시선에 진심어린 부러움이 담겨져 있었다. 본인이 패션에 관심이 많은 만큼 평소 타인의 패션을 신중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 그는 수영이 이곳을 처음 찾았던 날 입고 있었던 옷차림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이곳이지만 그 많은 손님들 중에서 수영만큼 눈에 띠는 남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눈썰미만큼이나 기억력이 좋은 유민이 지금까지도 수영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진으로 드릴까요?”
평소 수영이 자주 주문하는 메뉴를 먼저 입에 올린 유민이 차를 가져왔으니 논알콜 칵테일로 적당히 만들어달라는 수영의 주문을 받고 곧바로 몸을 돌려 제작에 들어갔다.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드는 유민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수영이 문득 뺨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친 순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긴 머리의 여성이 이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여자는 아닌 척 힐긋 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수영에게 말을 붙여왔다.
“저기, 혼자 오셨나요?”
흔해빠진 작업 멘트에 비웃을 기분도 나지 않은 수영이 최소한의 예의 상 일행이 있다고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여자는 곧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거절이라면 이미 몇 차례나 경험해본 듯 좀 전과 비교해서 여자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담대한 성격의 인간을 상대로 해서든 수치심으로 펑펑 울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수영은 잠시 동안 여자의 시선과 마주한 채 그녀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상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다가 이내 깨끗이 시선을 거두었다.
한껏 신경을 쓴 티가 나는 머리모양과 역시 진지하게 공을 들여 완성했을 법한 메이크업이 아깝게도 이목구비의 조화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여자의 얼굴은 수영의 까다로운 잣대로 평가할 때 이미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수준의 것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죽어도 자연 미인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수영은 아니었지만, 성형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보기에 추하면 그것만으로 상대할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당연했다. 본인 스스로가 남들 앞에 나설 자신이 있는 만큼 상대를 고르는 기준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그는 설령 단 하룻밤의 상대라고 해도 외모가 어느 정도 눈에 차지 않으면 절대로 상대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한 귀로 적당히 흘려듣던 수영은 잠시 후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가 기다렸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늦어서 미안해. 잠깐 중요한 손님과 이야기를 하느라...”
수영의 곁으로 다가오자마자 먼저 사과의 말부터 꺼낸 호연이 거의 비워지지 않은 수영의 잔을 확인하고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유민에게 말했다.
“나도 같은 걸로 한잔 만들어 줘.”
“네.”
짧게 대답을 한 뒤 돌아서는 유민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호연이 수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세련된 옷차림을 선보이고 있는 호연은 아무리 봐도 이 넓은 가게의 오너라고 보기엔 너무도 젊고 화려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으니 저녁 식사는 아직이겠네.”
“어차피 곧 나갈 거잖아. 가는 길에 먹든지 아니면 가서 먹어도 되고.”
“그럼 오늘은 내가 자주 가는 가게로 안내할게. 가끔 친구들이랑 만나면 가는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이 있는데 메뉴도 다양하고 맛도 깔끔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말한 호연이 수영의 어깨에 올려 둔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을 실은 순간, 몸을 돌려 곁으로 다가온 유민이 완성된 칵테일이 담긴 잔을 조심스레 호연의 앞자리에 놓아주었다.
“고마워.”
“셜리템플이에요. 수영씨가 차를 가져왔다고 논알콜 칵테일로 달라고 하셔서요.”
“응.”
유민의 말에 짧게 대답한 호연이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문득 뭔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 사이 돌아서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려는 유민을 불렀다.
“유민아, 잠깐만. 아까 전에 내가 보관해달라고 한 것 좀 줄래?”
호연의 말을 듣고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진 유민이 이내 뭔가를 기억해내고서 자세를 낮춰 근처의 선반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들려져 나온 것은 고급스런 포장이 되어 있는 엷은 회색의 상자였다.
유민으로부터 상자를 건네받은 호연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려는 유민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보곤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수영에게 건넸다.
“어제 백화점에서 쇼핑을 좀 했는데 지나다가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머플러가 보여서 샀어.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가볍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하고 상자를 연 수영이 곧바로 그 안에서 담겨 있는 머플러를 꺼냈다.
엷은 베이지를 바탕으로 중간 중간 심심하지 않게 차콜 색의 체크가 살짝 덧입혀진 디자인의 머플러는 당장 손바닥에 닿는 감촉만 봐도 꽤나 고급스런 재질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수영 역시 평소 사용하는 상당수의 물건들을 고가의 브랜드 제품으로 구매하고 있는 만큼 굳이 택을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받은 머플러가 어느 브랜드의 제품일지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고르는 안목이 좋네. 마음에 들어.”
“당신이 좋아할 것 같은 색으로 샀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색?”
“응. 평소 보는 당신의 넥타이나 머플러 색이 이런 계열인 것 같길래. 아, 먼저 사용하던 머플러는 어디에 있어?”
“여기.”
수영이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 안에서 머플러를 꺼내 보여주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호연이 그것을 가져갔다.
“맞아, 이거. 색이 참 예쁘다 싶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당신 취향 은근히 나랑 맞는 것 같아.”
“그래?”
호연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선물 받은 머플러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이제껏 누구와 사귀든 관계가 끝난 뒤에 물건을 처리하는 것이 귀찮아서 서로 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그로썬 졸지에 떠안게 된 머플러의 존재가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겉으로는 상대의 성의를 생각해 적당한 반응을 취해주었다. 싫은 상대로부터의 선물이라면 일찌감치 거절했겠지만 최근 들어 그런 분위기로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호연은 분명 수영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켜주는 상대였다. 깔끔하고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성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수영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요인은 침대 위에서 보여주는 그의 능숙한 태도였다. 부담스런 ‘처녀’보다는 차라리 놀고 끝내기 편한 ‘걸레’가 낫다는 주의의 수영은 섹스에 있어서 소극적인 타입을 싫어했고 그런 기준에 맞춰 볼 때 호연은 수영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자질을 가진 상대였다.
호연의 손에 들려 있는 머플러를 가만히 쳐다보던 수영은 잠시 후 호연이 그것을 자신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손을 내민 순간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목도리 놓고 가셨어요.’
며칠 전 엉망으로 취한 양과장을 부축하고 나서던 길에 들었던 짧은 한 마디.
무척이나 오래간만에 듣는 윤재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결국 재회한 순간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한사코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하지 않았던 윤재의 모습은 어찌 보면 겁먹은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려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어느 쪽이든 마주하는 입장에서 불유쾌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던 전적이 있는 만큼 윤재가 자신을 상대로 그처럼 냉랭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어서 적당히 넘어가긴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때 두어 마디쯤은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수영이었다.
‘교통사고라...’
절뚝거리며 다리를 절던 윤재의 모습을 떠올린 수영이 엷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낱 스쳐가는 관계일 뿐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한때나마 몸을 섞었던 상대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고서는 아무리 냉정한 그라고 해도 역시 좋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잠시나마 관계를 지속했던 당시 수영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윤재는 적어도 수영의 주위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타입의 남자였다. 그의 대다수 지인들과 달리 남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윤재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으며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고지식한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다. 장담컨대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스스로가 상처를 입는 쪽을 선택할 그는 성격 상 타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만약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충분히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허점투성이의 남자이기도 했다.
처음엔 얼굴이 꽤나 취향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에 이어 반 장난으로 건넨 호의에 조금씩 마음을 여는 윤재의 모습을 보고는 마치 게임이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수영이었다. 절대로 육체관계를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윤재가 조금은 강압적인 상황에 의해 끝내 몸을 열게 되었을 때는 마치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진귀한 음식을 맛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적지 않은 흥분을 느끼기도 했던 수영은 그러나 그와 같은 신선한 기분이 서서히 사라져감에 따라 곧바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제 막 부친을 잃은 상대에게 내던진 이별 통보.
당시의 상황에서 윤재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상대가 어떻게 되든 냉정히 말해 수영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어제 이별한 상대가 오늘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들 이미 이별의 순간에 상대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는 그의 입장에선 스치듯 약간의 씁쓸한 뒷맛만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평생 다시는 보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와 뜻밖의 재회를 했기 때문일까, 며칠 전 보았던 윤재의 모습은 그와의 첫 만남 이상으로 뚜렷하게 수영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줘. 위층에 올라가서 먼저 귀가하겠다고 말하고 올게.”
짧게 말을 남기고 호연이 자리를 떠난 뒤 잠시나마 다시 혼자가 된 수영은 조금 전 호연에게서 선물 받은 상자를 서류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중간 중간 적당히 대꾸를 해주었던 덕분에 좀 전까지 호연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을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머지않아 제대로 된 관계를 만들어갈 상대를 앞에 두고 줄곧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던 스스로를 조금 반성한 수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며칠 전 기분전환 삼아 비교적 짧게 쳐낸 머리카락의 생소한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사장님 기분이 많이 업 되셨네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수영이 잠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어느 샌가 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는 유민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인상 자체는 꽤나 강한 편이지만 이렇게 웃고 있을 때의 그는 묘하게 다정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아까 사장님이 갑자기 제게 상자를 내미시길래 웬일로 저한테 선물을 주는가 싶었어요. 당연하게도 그럴 리가 없었지만요.”
머쓱한 얼굴로 웃는 유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수영이 물었다.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들었는데 유민씨는 지금까지 사장님한테 선물 받은 적 없어요?”
“뭐, 생일과 명절 때는 보너스를 챙겨주시죠. 하지만 정성들여 포장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어요. 사장님이 로맨틱해지는 건 철저하게 연애 상대에 한해서만...”
거기까지 말하던 유민이 뒤늦게 실언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껏 호연과 수영의 관계를 모르는 척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던 태도를 취해온 그로서는 무심결에 사실을 실토해버리고 만 지금의 상황이 조금은 당황스럽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런 유민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낸 수영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되요. 아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수영의 말을 들은 뒤에야 간신히 굳어 있던 뺨을 누그러뜨린 유민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 쪽으론 사장님도 만만치 않은 타입인데 제가 보기엔 수영씨가 한 수 위에요.”
“한 수 위? 어떤 면에서요?”
“글쎄요... 뭐라고 표현할까, 막상 대답하려니 어려운데 사람의 감정을 잘 파악하고 지배하는 타입이라고 할까요.”
더없이 진지한 유민의 대답에 살며시 미간을 좁힌 수영이 반쯤 비워져 있는 잔을 들며 말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유민씨가 절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담스러운 기분이 드는데요.”
“과대평가가 아니에요. 저희 콧대 높은 사장님을 이 정도로 움직이게 만든 사람, 전 이제껏 수영씨 밖엔 본 적이 없어요.”
여전히 진지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유민이 이내 다시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두 분의 조합은 정말 보기에 좋네요. 말 그대로 눈이 호강한다고 할까요. 사실 지금도 수영씨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손님이 몇 분 계신 거 알죠?”
유민의 말을 듣고서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수영이 흘끗 고개를 돌려 조금 전 호연의 등장 이후 비워진 옆 자리를 쳐다보았다. 일행이 있다는 말에도 꿋꿋이 작업을 걸어왔던 여자는 정말로 일행이 나타난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어쩔 수 없이 그쯤에서 의지를 꺾고 철수한 듯 보였다.
“아, 사장님 오시네요.”
유민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린 수영은 저 멀리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호연의 모습을 확인한 뒤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막 혀를 적시고 퍼져나가는 향만큼이나 달콤한 정사가 기대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