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어떻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인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애써 상대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쟁반에 담겨 있는 접시들을 차례로 테이블에 옮긴 윤재는 다시 한 번 수영으로부터 이름을 불린 뒤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등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저기 앉아 계신 손님과 아는 사이니?”
의아함이 담긴 모친의 질문에 ‘아니, 잠시...’라고 애매한 대답을 한 윤재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싱크대에 내려놓고서 조금 전 벗어두었던 고무장갑을 다시 양손에 차례로 낀 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비닐을 찾아들고 서둘러 가게 입구를 나섰다.
어딘가 경직된 아들의 태도에 조금 걱정스런 기분이 든 주인아주머니는 어쨌든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두 종류의 찌개를 조심스레 쟁반에 담은 뒤 양과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져갔다.
“조금 전 나간 총각이 아드님인가 보네요. 얼핏 보니 참 단정하니 곱게 생겼던데요,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가. 하하. 나이가 어떻게 되죠?”
평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의 양과장이 재빨리 무거운 냄비를 받아들며 그렇게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아주머니가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올해로 스물일곱입니다.”
“아, 그래요. 아까 보니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는 것 같던데 다친 건가요?”
“.......”
“아, 저기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2년 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그 뒤로 조금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듣고 무심코 마주앉은 수영에게 시선을 던진 양과장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쯤에서 자신은 뒤로 빠지는 대신 곧바로 수영에게 바톤을 넘겼다.
“아까 보니 자네와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수영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재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던 만큼 아직까지도 다소 얼떨떨한 기분을 안고 있는 그는 조금 전 상대가 자신을 향해 보였던 경직된 태도를 머릿속에 떠올리고서 조금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하던 모습은 누가 봐도 철저한 외면의 반응이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지만.
“일전에 잠시 알던 사이입니다. 특별히 친했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두 사람 분의 시선을 받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 수영은 잠시 후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하는 아주머니에게 스치듯 시선을 던졌다가 양과장의 잔에 먼저 소주를 채워준 뒤 이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양과장이 이 이상 호기심을 품고 캐물어오기 전에 일부러 적당히 잘라 대답한 것도 있었지만 실제 수영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기억자체도 그리 대단할 것은 없었다. 일시적인 부상이 아니라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영구적인 장애가 생겼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란 것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두 번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상대가 어떻게 되든 그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노석진 그 자식이 중간에 나서서 막았었다니까.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아주 내가 반 죽여 놓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눈 깜짝할 사이 소주 두 병을 털어 마신 양과장이 슬슬 취기가 오르는지 조금씩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 영업과의 노석진 과장과 앙숙처럼 지내고 있는 그는 술에 취할 때마다 반드시 습관처럼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곤 했기 때문에 지금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 역시 수영의 입장에선 이전에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던 기억이 있는 내용들이었다.
한참을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던 양과장이 거의 비슷한 템포로 잔을 비우고 있음에도 그와 달리 여전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영을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길게 하품을 했다. 이제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 모양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놈이 싸가지 없이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나간단 말이지. 하여튼 그 자식은 싹수가 노랗단 말이야. 그런데도 어떻게 과장 자리까지 꿰찬 건지 하여튼 썩을 놈의 대한민국은 인성교육을 개차반으로 받은 인간이라도 그저 일만 잘하면 성공한다는 거지. 소위 엘리트라는 검찰 집단도 봐, 어디까지 썩었는지. 욕을 실컷 처먹어도 그때뿐이지 결국엔 떵떵거리며 잘만 살잖아? 하여튼 노석진 그 새끼 그렇게 지저분하게 살다가 언젠가 칼 맞아 뒈질 거야. 두고 봐.”
눈과 혀가 풀려갈수록 비난의 기세는 점점 더 거세져갔다. 별로 나서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따로 화제에 떠올릴 만한 이야기도 없는 만큼 이대로 좀 더 떠들게 놔두다 적당한 타이밍에서 일어나는 분위기로 몰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심히 양과장의 말을 대충 귀에 흘려 담던 수영은 잠시 후 차가운 바깥바람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선 윤재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분위기가 좀 변한 건가.’
먼저 나간 손님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윤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한 수영은 이내 지저분한 접시들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불안정한 걸음을 관찰하듯 지켜보다 쓰게 웃었다.
김윤재.
수영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는 3년 전 잠시 맛을 보고 미련 없이 버린 상대 중 한 명이었다. 동생인 재영의 가정교사로 집을 오갔던 윤재에게 절반은 호기심으로 접근했던 수영은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윤재를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했지만 늘 그렇듯 그와 같은 신선한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급격히 퇴색되어 갔다. 수영이 의식적으로 보인 상냥함을 진실로 받아들였는지 반강제로 이끌린 상황에서 끝내 망설임을 떨쳐 내고 육체적 관계까지도 받아들였던 윤재는 융통성이 없는 성격에 더해 경험까지 미숙했던 탓에 침대 위에선 시종일관 뻣뻣한 반응을 보였었고, 그와 같은 반응은 평소 능숙한 상대와의 관계에 익숙해있던 수영에게 있어 처음엔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 신선함이 퇴색되자 이내 귀찮고 짜증스런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어느 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윤재의 진심어린 마음이 귀찮게 느껴진 수영은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홀로 판단을 내린 시점에서 이미 여러 명의 상대에게 해왔듯 윤재에게 역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슬슬 관계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윤재에게서 무거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수영은 말뿐인 공허한 위로를 전한 후 곧바로 처음의 계획대로 이별을 통보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윤재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심한 처사였지만, 당시 특별히 마음을 두고 있던 상대와 이제 막 좋은 분위기로 이어지던 상황에서 한낱 심심풀이 상대였던 윤재의 존재는 등을 돌리고 멀어지면 곧바로 잊어버릴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윤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굳어져가던 것을 조용히 머릿속에 떠올리던 수영은 갑작스럽게 앞에서 들려온 양과장의 투덜거림을 듣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말이야, 저번 모임에서 기껏 그 자식을 골탕 먹일 방안까지 생각해놨는데... 글쎄 그 쥐새끼 같은 놈이 냄새를 맡았는지 집에 큰 일이 생겼다며 홀랑 빠졌지 뭐야, 제기랄.”
완전히 취한 상태에서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노과장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양과장을 슬쩍 서늘한 눈으로 쳐다본 수영은 이제 이쯤이면 충분히 일어나도 될 타이밍이라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채워져 있던 잔을 들었다. 슬쩍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처음 이곳에 들어온 이후 약 두 시간 반 정도가 흘러가 있었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새로운 손님으로 채워진 테이블은 단 하나 뿐이었다. 이곳을 처음 찾은 수영조차 자연스레 걱정이 될 만큼 아무래도 가게는 영 장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대다 기어이 지쳐 나가떨어진 양과장을 일단 그대로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수영이 주방을 향해 ‘계산이요.’라고 말하자 곧 주인아주머니가 양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전부 해서 3만 4천원이네요.”
“요즘 장사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며 수영이 말하자 곧바로 크게 고개를 끄덕인 주인아주머니가 깊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요즘은 뭐, 어디라도 다 그렇지요. 그나마 오늘처럼 둘이서 같이 일을 하면 괜찮은데 내일부터는 제가 다시 병원 생활을 시작해야 해서요. 아들 혼자서 종일 가게를 보려면 힘들 텐데 요즘처럼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선 사람을 따로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걱정이에요.”
말하는 중간 흘깃 주방 쪽을 쳐다본 아주머니가 문득 들려온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크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양과장을 발견하고 곧장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아유, 이렇게 취하셔서 어떻게... 걸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아주머니를 향해 괜찮다고 말하며 휘청거리는 양과장을 재빨리 손을 뻗어 부축한 수영이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밖은 추웠다.
퇴근 후 회사 건물을 나섰을 때보다 급격히 떨어진 온도도 피부로 와 닿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쌩쌩 불고 있는 바람의 강도가 무척이나 드셌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간 상태임에도 이 정도의 추위를 느낄 정도라면 아마 지나는 행인들이 느끼고 있을 추위는 혹독한 수준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불편한 술자리에 강제적으로 동석한 것도 모자라 계산까지 자신이 한 데다 끝내는 귀찮은 주정뱅이를 귀가시키는 역할까지 떠맡게 돼 한껏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던 수영이 잠시 후 등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를 듣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절뚝거리며 서둘러 다가오고 있는 것은 윤재였다. 조금 전까지도 주방 일을 하고 있었던 듯 아직 왼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수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자 희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목도리 놓고 가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윤재가 내민 것은 수영의 머플러였다.
양과장을 부축한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수영이 그것을 건네받자 서둘러 몸을 돌리려던 윤재가 곧장 들려온 수영의 말을 듣고 일순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 얼굴을 보는 게 무서워?”
의식적으로 시선을 마주하려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명백히 비꼬는 말투로 그렇게 질문을 던진 수영은 그제야 간신히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온 윤재의 얼굴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과연 잠시나마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관계로 몰아가는 노력을 기울이게 했을 만큼 꽤나 취향인 얼굴이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이제 조금은 성숙하게 변한 전체적 분위기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성인 남자치고 신기할 정도로 청결한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가 잠시 동안 수영의 눈을 사로잡았다.
“너무 그렇게 경직적인 태도 보이지마. 오히려 더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야.”
“.......”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반응을 보이는 윤재를 향해 조금 서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수영은 그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곧바로 등을 돌려 다시 가게로 향하는 윤재의 뒷모습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쳐다보았다.
확실히 좋지 못한 이별이었다는 자각이 있는 만큼 자신을 향한 윤재의 경직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인 무시를 당하는 것은 역시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절뚝거리며 멀어져가는 윤재의 뒷모습을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던 수영은 이내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뒤 그 사이 완전히 늘어져 있는 성가신 상사를 부축한 채 서둘러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늘 그렇듯 이제 막 정오를 지난 시간에 찾은 재래시장은 한산했다. 약 삼 개월의 시차를 두고 근처에 대형마트 두 개가 들어선 이후 이곳을 지나는 손님의 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눈에 그대로 보일 정도이니 이곳에 몸담고 있는 상인들의 시름이 얼마나 깊을 지는 굳이 그들의 입을 통해 따로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곳을 찾았던 윤재의 입장에서 조금씩 문을 닫는 자리가 늘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역시나 씁쓸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여기 감자랑 당근 좀 주세요.”
“아, 윤재 총각 왔구먼. 감자는 그거보단 이쪽 게 더 탱글하고 좋아. 가장 최근에 들여온 거라 싱싱하거든.”
“네, 그럼 그걸로 담아 주세요.”
이미 몇 가지 식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윤재의 말에 잽싸게 바가지에 담아두었던 감자와 당근을 각각 두 개의 봉지에 나누어 담은 아주머니가 그것을 윤재에게 건넨 뒤 받아든 지폐를 지저분한 앞치마의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어머니는 어때? 좀 괜찮아지셨어?”
이곳에 들를 때마다 듣게 되는 질문에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은 윤재가 상냥한 느낌이 묻어나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검사 결과 악화되진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아진 부분도 없어서 당분간은 지켜봐야할 것 같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 정말 걱정이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윤재 총각 혼자 가게를 맡고 있지? 요리 실력은 좀 늘었어?”
“일단 배운 대로 충실히 만들고는 있는데 역시 맛의 차이가 나는지 몇 번인가 단골손님한테서 따끔한 말을 들었어요.”
조금 무거워진 목소리로 윤재가 대답하자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아주머니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어머니야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지만 윤재 총각은 반년 전만 해도 회사원이었잖아.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로 혼자서 가게를 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앞으로 요령이 붙으면 점점 더 손에 익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머니의 진심어린 위로를 듣고 오히려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진 윤재는 그 이상 불필요하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남긴 뒤 걸음을 옮겼다.
연신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윤재의 양손에 들려 있는 비닐봉지를 소란스럽게 흔들어댔다. 급하게 장을 보러 나오느라 미처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지 못한 그는 조금이라도 바람을 막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입고 있는 점퍼의 지퍼를 가장 위까지 올린 뒤 다시 불안정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시장을 오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일부러 차를 꺼내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맹추위를 피부로 실감하고 있는 지금 그는 그와 같은 선택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
허름한 골목길을 돌아선 윤재가 아직 셔터가 올려 지지 않은 가게 앞에 서있는 한 대의 차량을 발견하고 곧바로 그리로 향했다.
눈에 익은 승용차로 다가가 조수석의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곧바로 유리문이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장 보고 오는 길이야?”
“응. 미리 사둔 재료가 다 떨어져서.”
짧게 대답한 윤재는 잠시 후 차의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준석을 슬쩍 돌아다본 뒤 들고 있던 비닐봉지들을 가게 앞 근처 바닥에 내려놓고서 점퍼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줘, 내가 열게.”
거의 낚아채듯 열쇠를 가져간 준석이 곧바로 셔터를 올리고 문을 여는 것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윤재가 바닥에 놓아두었던 비닐봉지들을 다시 들고 그 사이 먼저 안으로 들어간 준석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여기 온 걸 보니 오늘은 휴일인 모양이네.”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월차 내고 잠 좀 푹 잤어.”
“그래? 그럼 얼큰한 것 좀 만들어줄까?”
장을 봐온 식재료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정리하던 윤재가 잠시 손을 멈추고 묻자 주방 입구에 서서 윤재의 행동을 지켜보던 준석이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라면이나 좀 끓여줘. 김치 좀 많이 넣고서.”
“감기로 몸도 안 좋은데 무슨 라면이야. 해물탕 끓여줄게.”
“됐어. 그렇게 재료 많이 드는 건 나중에 손님한테 주문받고서나 만들어. 난 지금 라면이 먹고 싶으니까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라면이 먹고 싶은지 평소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준석을 향해 스치듯 쓴웃음을 지어보인 윤재가 근처에 놓여 있던 냄비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는 어떠셔?”
“어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어. 얼마 전 검사결과로는 악화되진 않았지만 더 나아지지도 않은 상태야.”
엷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윤재가 대답하자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준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뒤 자연히 그의 모친과도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의 친분관계를 유지해온 준석으로서는 지금 들려온 대답을 좋게도 나쁘게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대장암 판단을 받으신 뒤 고심 끝에 2년 반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어머니를 대신해 가게를 이끌어가게 된 윤재가 아직까지도 지금의 입장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준석은 퇴근 후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이곳을 찾아 그를 도와주곤 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어딘가 묘하게 외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었던 윤재는 2년 전 큰 교통사고를 겪은 뒤 한층 더 내버려둘 수 없는 분위기를 품게 되어서 자연스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준석으로 하여금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떨쳐낼 수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조금씩 맛있는 냄새가 주방 안을 채우기 시작하더니 이내 넓은 그릇에 담겨진 라면이 준석의 앞에 대령되었다. 그의 리퀘스트대로 김치가 듬뿍 들어가 있는 라면의 국물이 새빨갰다.
“찬밥 냉장고에 넣어둔 거 있는데 가져올까?”
“응, 갖다 줘.”
아침까지만 해도 온몸을 휘감았던 열이 내려가자 슬슬 식욕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준석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것과 동시에 준석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근처의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가져온 윤재가 곧바로 그것을 준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달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아직 가게 문 열기 전까지 시간 있으니까 만들어줄게.”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빠르게 그릇을 비워가던 준석이 이어져 들려온 윤재의 말을 듣고 젓가락을 든 손을 멈췄다. 자연히 윤재에게 시선을 던진 그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픈 사람한테는 자상하네. 평소엔 몇 번을 와도 일만 시키더니.”
준석의 장난기 섞인 대답을 들은 윤재가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찰나, 문득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영업을 개시하지 않은 대낮의 시간인 만큼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손님이 아닐 거라는 윤재의 짐작대로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선 것은 허름한 옷차림을 한 채 양손 가득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두루마리 화장지부터 들이미는 할아버지를 향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은 윤재가 ‘죄송하지만...’으로 말문을 열자 곧바로 돌아올 대답을 예상한 할아버지가 간절한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총각, 미안한데 하나만 사줘. 오늘 새벽부터 돌았는데 딱 하나밖에 못 팔았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윤재의 표정에서 조금씩 분명해지는 연민의 감정이 드러났다. 천성적으로 잔정이 많고 남에게 모질지 못한 성격의 그는 상대의 말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이상 결국 강매를 당하고 말 것이라는 준석의 짐작대로 잠시 망설이던 끝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아든 윤재가 주머니를 뒤적여 찾아낸 오천 원 권 지폐를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정말 고마워요. 총각. 복 받을 거야.”
거칠게 닳아 있는 손으로 소중히 지폐를 감싸 쥔 할아버지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돌아서려는 순간 꼬르륵하는 제법 큰 소리가 그의 뱃속에서 새어나왔다.
“아이코...”
흘깃 두 사람을 돌아본 할아버지가 민망함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전에도 라면을 먹고 있는 준석을 잠시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그는 그렇지 않아도 끼니를 거른 데다 아까 전부터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맛있는 냄새에 자극받아 큰 허기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시장하시면 잠시 식사 좀 하고 가시겠어요?”
“!”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돌아서서 입구로 향하던 할아버지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온 뜻밖의 말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일순 기뻐하는 빛이 눈동자에 어렸지만 아무래도 염치를 생각해서인지 즉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는 그와 같은 망설임의 반응을 긍정으로 읽어낸 윤재가 ‘괜찮으니 편하게 드시고 가세요. 별로 좋은 반찬은 없지만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용기를 내 발길을 되돌렸다.
이미 전에도 몇 번 윤재가 지나는 노숙인에게 공짜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 준석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저 말없이 눈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끓인 찌개가 조금 남아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그걸로 덥혀올까요? 지금부터 새로 끓여도 되지만 그러면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유, 나야 주면 뭐라도 그냥 고맙게 받아먹을 뿐이지, 어디 내가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인가?”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할아버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윤재가 스치듯 준석의 시선을 마주한 뒤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사도 잘 되지 않는 마당에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 화장지를 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짜 손님에게 식사까지 대접해주려는 윤재의 모습이 조금은 못마땅하게 여겨지면서도 일찍이 그런 그의 성격을 파악한 이래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준석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예쁜 총각이 마음도 참 착하네 그려. 저렇게 착해서 장사는 잘 하려나 몰러.”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걱정의 말에 준석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것에는 현실적인 몇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준석이 보기에도 약삭빠르게 계산을 해야 하는 장사꾼이 되기에 윤재는 여러 모로 부족한 면이 있었다. 물론 윤재가 이 가게를 맡기로 결심한 것은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기 때문이었지만, 그 결심 이후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손님들을 상대로 서툰 처세술을 보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끔씩 이곳을 찾는 준석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게끔 하고 있었다.
‘진짜로 착해빠져서는...’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포함해 윤재가 그간 얼마나 손해 보는 장사를 해왔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 준석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후 따끈한 김이 나는 찌개와 덥힌 밥, 몇 가지 밑반찬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온 윤재는 그것을 할아버지의 앞에 놓아주었다.
“아이고, 진수성찬이네 그려.”
눈을 반짝이며 수저를 드는 할아버지를 향해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라고 말한 윤재는 이어서 조금 전 준석이 깨끗이 비워놓은 그릇을 빈 쟁반에 올렸다. 영업 개시 전까지 가게 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려면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바닥 청소는 내가 할게.”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윤재의 등에 대고 준석이 말하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 윤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응, 부탁 좀 할게.”
아직 감기기운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려니 미리부터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앞에서 기뻐하는 윤재의 얼굴을 보자 역시 오늘 이곳을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준석은 마지막으로 근처에 놓인 컵을 들어 시원하게 물을 마신 뒤 청소도구가 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