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26 아카데미 교관
얼마 전에 뼈 아픈 지출에도 큰맘 먹고 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재희만의 방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으어어어. 좋다아아......!“
사쿠라 길드에서 얹혀살 때 쓰던 침대와 이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지고 부드러운 감촉에 몸이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걸 사는데 들어간 돈을 생각하니 눈물이 주르륵.
"엄마엄마! 많이 힘들어요?!“
자신의 방에서 요양 중인 이지원과 지희밖에 없던 집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혹시 엄마인가 해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더니 역시나. 지희의 엄마였다. 엄마는 지희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는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돈을 벌기 위해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까지도 집을 비우며 외지에서 힘들게 돈을 버느라 딸인 자신의 목소리를 차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걱정된 지희는 도도도. 짧은 발걸음으로 엄마를 따라 엄마의 방에 들어가서는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재희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아... 지희야. 그러네. 많이 힘드네.“
굳이 따지자면 색깔 등급에 올라오기 전, 다이아 등급 이하 게임이 더 힘들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다이아 등급 이하의 게임들은 예외 없이 전부가 현대 문물이란 찾아볼 수 없는 무인도에서 약 한 달간 버티며 참가자들을 죽여대야 하니까. 그리고 여자가 없으면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고.
근데 색깔 등급부터는 단체전이라서 그런지 게임이 진행되는 무인도에는 현대 문물이 가득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바람과 비를 피할 천막과 화장실을 비롯한 여러 시설들이, 거기다가 죽을 위험도 별로 없다 보니 예전에 비해 안전하고 편할 따름이지만 재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몸이 편하긴 한데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과 그로 인해 강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재희는 눈앞에 보이는 사랑스러운 딸, 지희의 몸을 이끌어 누워있는 자신의 품에 꼬옥 안았다. 편안하다. 이제 더는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여자로 살고 있기에 배아파서 낳은 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희는 완전히 자신의 딸이 되어있었다.
"우으... 지희가 얼른 커서 엄마 대신에 돈을 많이 벌어줄 거예요!“
"그래? 기대되네. 그거.“
인조생명체에 두 살인 것에 비해 몸은 이미 여섯 살 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신체에 맞게 지희를 여섯 살이라고 정해 두었고, 일방적인 아이와 완전히 같은지, 작년보다 신체가 조금 커진 게 성장까지 하나 보다. 그렇기에 재희 대신 돈을 벌어주려면 20살이 되는, 14년이 족히 지나야 할 것만 같다.
'음... 그 전에 빚 때문에 파산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희만을 믿어 세월을 느긋하게 보냈다가는 원금의 50%나 되는 이자로 인해 파산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순진무구하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어린아이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수는 없지.
"엄마는 지희만 믿으면 되겠네?“
"응! 그러니까 엄마는 이제 일하지 않아도 돼! 지희가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돈을 왕창 벌 테니까!“
"어머나!“
생각만 해도 좋네. 빚과 이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래도... 그래도 재희는 근심 걱정을 지우고 감격하는 표정을 띄우자 이 순진한 아이는 벌써부터 돈 문제를 해결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좋아했다. 쉽기는.
'일단은 그러려니 할까.‘
그래도 엄마가 지금 돈을 벌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가는 의미 없는 언쟁이 벌어질까 봐 입을 꾹 닫았다.
"......“
지희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힐끔. 엄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힘들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지 살짝 수축해 있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파 왔다. 성장도 덜 되었고, 나이도 어리며, 아는 것도 없어 엄마에게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자신 때문에.
'이대로 계속 있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운 것도 모자라 지희를 끌어안고 두 눈을 감은 채, 일정한 숨을 뱉어내는 것이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기껏 집에 돌아와서 이제야 편히 잠을 자는데, 조금 불편한 자세라서 편한 자세로 바꾸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깰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당분간 이렇게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지희도 잠에 들었다.
*
"재희야. 일어나요. 밥 먹어요.“
"으응... 아아. 알았어. 알았어.“
이번 게임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팀원 덕에 일주일이라는 정말 짧은 시간 만에 게임이 끝이 났다. 그래도 그 일주일간 불편한 잠자리에 들었다가 지금 푹신한 잠자리에 몸을 뉘이니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민정이가 깨우더라도, 게임 안에서 먹는 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밥을 먹을 생각이라도 말이다.
"지희야. 일어나자.“
"우웅... 네에.“
지희도 마찬가지로 엄마의 품에서 계속 자고 싶은지 눈조차 뜨지 않은 채 대답하고 있었다.
"재희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했으니까 식기 전에 어서 먹어요.“
불고기라. 일주일 동안 먹었던 꽤 푸짐한 반찬 중에 딱딱한 고기와 비교가 안 될 부드러운 고기, 불고기라는 말에 재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읏샤!“
상체를 세우면서 여전히 품에 안겨서 졸고 있는 지희의 상체 또한, 세웠다.
"아으!“
"응? 지희야 어디 아파?“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거짓말이다. 사실은 불편한 자세로 자다 보니 몸이 그 상태로 굳어 고통을 호소하는 것. 그래도 심하게 아픈 게 아닌지라 지희는 꾹 참고 실실 웃으며 걱정하는 엄마를 향해 괜찮다는 말을 전하며 엄마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익숙하게 커다란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다양한 반찬들의 모습이 보였다.
"재희야. 고생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언니언니! 무사해서 다행이야.“
사쿠라, 유지나, 그리고 예림이는 걱정이야 되긴 해도 이젠 단체전 게임이라 예전만큼의 걱정은 덜했다. 여태까지 무사했던 사실도 포함되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게임에 있을 당시 하루하루가 지옥이고 어찌나 무서운데 말이지. 이걸 모르고 있으니 그녀들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며,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도 싶지가 않으니 이 짐은 끝까지 짊어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원이는?“
그나저나 부상을 당한 지원이는 어디 있지?
"민정이 언니가 데리러 올라갔으니까 곧 내려올 거예요.“
다리에도 부상이 있는지라 걷는데 무리가 있기는 해도 충분히 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부상을 당한 채로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게 된다면 상처는 다 낫질 못하거나 심하면 덧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지원이는 움직임을 강제로 최소화하게 만드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아. 재희야. 어서 와.“
민정이의 부축함에 2층에서 내려온 이지원은 집에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재희가 눈에 보이자 심각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우와. 심하네.‘
기력도 없어 보이고, 얼굴에도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게 정말 심해 보였다. 단순히 다리와 팔, 그리고 갈비뼈가 부러졌을 뿐인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정말 심각한 부상으로 보일지언정. 비쓰온 게임에서의 등급이 색깔이라는 것을 감안 한다면 가볍게 넘길만한 부상이었다.
'오늘은 몰래 해 줘야 하나?‘
이지원도 고작 이 정도의 상처로 이렇게까지 심각한 모습할 리가 없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하필... 하필 갈비뼈가 부러진 탓에 재희와 섹스를 못하니 삻의 희망을 잃었다. 거대한 재희의 자지에 끊임없이 박혀대면 팔과 다리는 그렇다 펴도 갈비뼈는 아파질 수밖에. 그래도 쾌감을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는데. 안 된다고 한다. 재희나 민정이를 포함한 여자들이.
"재희야. 도저히 안 되겠어. 오늘 나랑 섹......!“
"어,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민정이가 다급히 이지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섹.....?“
아무것도 모르는 하얀색 도와지와도 같은 지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지원의 마지막 말을 나지막하게 되새겼다.
"지희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이 언니는!“
"미안해! 내가 잠시 미쳐서 지희를 생각하지 못한 건 미안한데.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벌써 3주라고! 3주우우우! 너 3주 동안 안 해 본 적 있어? 있냐고!“
3주...? 그것 밖에 안 지났나? 뭐... 이번 게임이 꽤 빨리 잡히긴 했는데 고작 3주밖에 지나지 않은 건가.
"그건... 없지.“
"그럼 말을 하지 마아아아! 이미 아래는 거미줄이 처진 기분인데! 너무 하고 싶은데... 그리고 이젠 다 나았어. 나았으니까 해도 되잖아!"
"무슨 소리야! 의사가 못해도 한 달 반은 요양해야 한다는데 무슨 벌써 낫는다는 거야?“
"야! 이민정. 너가 내 몸을 아니?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니까 내가 나았다고 하면 나은 거잖아.“
"무슨 궤변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재희는 서서히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는 둘을 바라보았다.
"재희야. 안 돼. 이젠 안 된다고! 하자. 지금 당장 하자!“
"이 언니가 정말 미쳤어?!“
이지원은 침을 흘리며 지희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고 있던 잠옷의 상의를 들었고, 동시에 바지를 벗으려고 하자. 민정이는 다시금 이지원의 행동을 저지했다.
"못 참겠다고오오오!“
"아니! 이 언니가 진짜!“
"읍...! 읍읍!“
뭐, 재희도 이지원의 몸을 먹고 싶긴 한데 대신할 여자가 많으니 두 달간은 이지원과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긴 하였다. 근데 재희가 아니라면 박아줄 사람이 없는 그녀의 입장에선 한 마디로 죽을 맛. 그렇다고 자위 따위로 대체하기에는 이미 커다란 쾌감의 인질이 되어버려 만족할 수가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달그락. 달그락.
이성을 되찾은 이지원과 민정이까지 식탁에 둘러앉자 즐거운 식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자. 이것도 먹자.“
"네!“
생선 가시를 발라 부드러운 살만을 지희의 밥그릇 위에 올려두자 지희는 불평하는 것 없이 숟가락 가득, 밥과 재희가 발라준 생선 살을 퍼서 입에 넣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나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엄마가 반찬을 자꾸만 올려주면 짜증은 나지만 차마 화를 내지 못해 그냥 먹었었는데. 기쁜 듯이 받아먹은 적은 없었다고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희는 대체 누구 집 딸이라 이렇게 착한 건지.
'어머! 내 딸이네?‘
아이고 기분 좋아라. 왜 엄마들이 자기는 먹던 밥을 마저 먹지 않고 쓸데없이 아이에게 밥과 반찬을 먹이려고 드는지 이제야 알게 된 재희는 이번에는 불고기 쌈을 만들어 지희의 입에 가져갔다.
"너무 큰가?“
"아니에요! 먹을 수 있어요!“
와앙. 딱 봐도 크게 싼 것 같은데. 지희는 가능하다며 입을 크게 벌려 무리를 했다.
"진짜 다 먹었네. 우리 지희 대단해!“
"우웅웅! 지히 대다네요!“
미간은 찌푸려지고, 입술은 닫히지 않아도 칭찬을 받으니 마냥 좋은 듯 보인다.
"그나저나. 재희야. 쉴 생각은 없어요?“
"응? 갑자기?“
"네. 이번에 위험했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이번에는 정말 멍청한 새끼들 때문에 진도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언제 끝나질 모를 지옥의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조금 쉬는 게 어때요? 그리고 이 정도도 많이 모은 건데. 천천히 해요.“
"어떻게 그래. 아직 많이 남았는데.“
고작 50억 밖에 못 모았는데. 아끼고 또 아꼈어도 한 100억에서 200억 정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1조라는 빚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차피 기간 안에 못 모을 거잖아요. 게임 측도 알고 있을 거고. 그러니까 역으로 쉬엄쉬엄 모으면 금액을 낮추거나 유예 기간을 더 주지 않을까요?“
"......“
1년 전에 지희를 데리고 왔을 때 재희가 원래 남자였으며, 실험체라는 사실까지 모조리 털어놓았기 때문에 게임 측에서 재희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새로운 성공한 실험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게 되면 얼마나 좋겠냐.‘
재희가 아직 플래티넘 등급이었을 때, 이밴트라고 말하면서 재희의 의사도 없이 마음대로 참가시키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참가 안 하면 협박까지 했었는데. 이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어 재희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저리. 쉽게 말을 하는 게 하는 것이다.
"마침. 아카데미 교관을 구하더라고요. 한번 해 보는 게 어때요?“
"아카데미?“
"네. 재희가 벌어들이는 돈만큼은 주지 않는데. 그래도 일단 해 보는 거예요.“
오... 그거 꽤 괜찮지 않은가? 일단 게임 측 몰래 교관이 되는 즉시 게임 측에서는 재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야 그럴 것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에야 헤븐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데 재희가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건만. 뒤늦게 게임에 참가시키려고 개입을 한다? 그럼 재희와 게임 측과 어떠한 사이라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버린다. 그럼 혼란스러워지겠지. 후후. 좋아. 좋아. 이러면 괜찮을 것 같네!
"그거 좋네!“
재희는 잠시 쉴 겸. 아카데미 교관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