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4화 〉124 1년 뒤 (124/140)



〈 124화 〉124 1년 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아니,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던가. 알바하던 중간에 TV에서 방영되던 영화를 우연히 봤을 때 이 대시는 고요함 속, 그리고 긴장되는 순간에 하던 대사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 쓰는  맞을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적 포착. D지점에서 거리 약 50m. 네  발견.]


재희의 귀에 꼽힌 작은 무전기에서 동료의 말이 울려 퍼졌다. 적이 50m 앞이라는 것만으로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절대 안 되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감도  잡히던 기나긴 탐색전이 이제와서야 드디어 끝이 났으며, 지금은 전쟁 시작의 직전이었다. 아군이 적의 위치를 파악했고, 아마 적도 마찬가지로 아군의 위치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왜 이런 지레짐작 하냐고? 그 의문에 이 한 마디로 해결되었다. 브론즈, 실버, 골드, 그리고 플래티넘 등급의 게임에서는 양학을 하고 다녔던 재희조차 색깔 등급에서는 그 활약이 불가능하니까. 색깔 등급까지 올라오려면 무력과 지력 중에 하나라도 비상식적으로 좋아야 하는데 재희처럼 둘 다 소질이 있는 경우는 여럿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 있으니 긴장을 놓치지 않더라도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니, 남녀의 신체적 차이 때문에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을 수밖에 없어 예쁜 외모를 지닌 재희가 죽을 위기는 없겠지만 사로잡히는  순간 게임이 끝날 때까지 끔찍한 강간을 쉬지도 않고 계속 당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여리여리한 몸을 지닌 재희를 보고 방심하는 이들은 많아도  수가 늘어나면 강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려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그 때문에 안전한 헤븐에서 재희를 기다리고 있을 애인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재희는 색깔 등급의 게임, 전쟁에서 여러 번 강간을 당할 뻔했었다. 그럴 때마다 행운이 따라주거나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처럼 적의 방심을 비집고 들어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했었다. 근데 그런 운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져서는  되었다.


[윽?! A, A지점. 기습입니다!]

A지점이란 전선의 시작되는 외곽 쪽이었다. 베테랑들이 비어있는 옆을 칠 거라는 생각을 아예  한 건 아닐 터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텐데. 기습이라. 생각지도 못한 경로를 이용한 건가? 상대방 지휘관의 머리가 보통이 아닌가 보다.

"재희야. 준비해. 온다.“

재희와 같은 조인 강 헌은. 앞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적들을 보며 말했다.

'셋인가.‘

각 팀의 인원은 총 서른인데 눈앞에 보이는 적의 수는 셋. 정원의 10%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하지만 저들과 달리 재희와  헌, 단 둘뿐인 E조에 비해 한 명이 더 많아 수적 열세라 싸운다면 패배할 확률이 상당히 컸다. 그러면 강 헌은 죽고 재희는 범해지겠지.

'뭐, 이것도 3대2로 정정당당히 싸웠을 때의 얘기고.‘

거침없는 발걸음을 보아서는 아직 재희와 강 헌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없는 노릇. 재희는 곧장 석궁을 들어 가장 강해 보이는 적에게 겨누었다. 솔직히 석궁은 동료가 곁에 있으면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활과 석궁은 사기라고 해도 무방할 무기였다.


그래서 수량이 제한되었고, 석궁은 자주 쓰지만 활은 잘 쓰지 않는 추세였다. 그야 그럴 것이 석궁처럼 적은 동작으로 쏠  있는 반면에 활은 동작이 무척 커져서 위치가 발각될 위험이 있으며, 애초에 숲이 우거진 무인도에서 활은 아예 쓰지 않아 쏘는 방법과 명중률이 너무 떨어졌다.

'먼저 한 발.‘


피흉~!


방아쇠를 당기자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갔다.

"윽?!“

명중했는지 앞에서 고통 어린 신음성이 들려오고 재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듯이 곧장 등에 메고 있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피해!“


장전하려는 그때. 강 헌이 재희의 몸을 밀쳤다. 이유도 없이 밀친  아닌지. 재희가 있던 장소에 단검이 날아와 뒤의 나무에 박혀버렸다.

"저, 저 무식한 새끼들!“


저 거리에서 정확히 단검을 던져 맞출 거라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거  헌이 아니었다면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뵌 뒤에 염라대왕의 앞에 서서 지옥과 천국  두 곳에 어딜 갈지 심사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둘 중 한 곳에  간다면 당연히 지옥이지 않을까. 어쩔  없다 해도 사람을 죽인 수가 백을 넘어가는데.

"튀자. 이거 안 되겠다.“
"왜?“
"첫발 맞은 놈은 치명상이 아니었는지 배에 박힌 화살을 터프하게 뼈대를 부러뜨리고 달려오고 있다고!“
"쳇. 실패인가?“

명중하긴 했는데 게임 측에서 밸런스를 맞춘다며 석궁의 성능을 너프해서 그런지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유의미한 피해를 주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전투는 근접전이 되었다.

"야. 헌아. 튀자.“
"오키. 그 말을 기다렸음. ㅌㅌ“

1대2? 무리. 그건 무리다. 다이아몬드 등급에서도 1대2는 가능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색깔 등급에서는 이제  올라온 적이 아니라면 1대1도 벅찬 상황이라 한꺼번에  명을 상대하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도주를 선택하고. 사람 한 명은 거뜬히 죽일 듯한 얼굴을 한 남자들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E지점. 수적 열세로 후퇴합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이때, 헛된 죽음은 되도록 피해야만 했다. 이런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힘겹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영웅 놀이를 하다 죽을 병신은 없지만.

[E 지점은 D 지점에 합류해 전투를 이어나가도록.]


대답한 이는 피를 부르는 사나이. 이 새끼는 1년이 지났고, 이렇게 급한 상황 속에서도  2병과 같은 말투를 버리지 않았다. 재희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귓가에 가져다 댄 손을 떨어뜨리며 잠시 뒤를 살펴보았다.

"여자! 시발. 여자다!“
"존나 예쁘네. 잡아. 꼭 잡아야 해!"

헤븐이 한국어로 통일되어 있듯이 유럽 쪽 대륙은 영어로 통일되어 있어 알아듣기 쉬웠다. 아니, 지금은 알아듣고 싶지 않은데. 저 말을 들으면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만 같아 골치가 아팠다.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이라도 편안했을 텐데. 어휴.

"야. D가 어디였냐?“
"뭐? 야. 그것도 숙지 안해 놓고. 뭐 했냐?“
"아. 모를 수도 있지.  그리 타박해? 상처받게.“
"끙.....!“

더는 여자를 만나지 않을 거라 다짐한 강 헌에게 재희의 미모는 너무나 예뻤기에 무조건 기억해 놓아야 하는 지점을 까먹은 것에 대해 여기서  타박하지 못하였다.


'하, 시발. 어쩔 수 없다니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외우려고는  보았는데 하필 이번 팀에는 여자가 없었다. 색깔 등급에는 보기보다 여자의 수는 다른 등급에 비해서 많았다. 왜냐하면, 합법적으로 따먹을  있는 여자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강한 여자도 있지만 일방적으로 남자보다 약하기에 한 팀에 30명이 정원인  이용해 상대방의 전력을 약화하는 전략으로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게임에 두세 명씩 여자가 반드시 있어서 이지원이 없을 때는 그녀들을 유혹해 범하며 성욕을 해결했는데 이번 게임에는 여자가 영 없었다. 전에는 이틀이면 한계가 차서 미쳐버리는데 게임에 참가하면서 강제적으로 성욕을 참아오다 보니 한계점이 늘어났다. 대충 일주일 정도? 어제가 5일 치여서 자위를 정말 오랫동안 하다 잠에 들었다.


'아.. 지원아. 보고 싶다!‘


재희와 함께 게임에 참가해서 색깔 등급까지 오른 이지원. 그러나 그녀는 이번 게임에 참가하지 못했다. 앞선 게임에서 상처를 입었기에 쉬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재희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성욕은 어떻게 해결할 거냐며 따져 물었는데 대체 어떤 이가 환자가 된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보내겠는가. 근데 이제와서 보니 잘못된 생각 같아 보이긴 한다.


'시발. 여자. 여자가 먹고 싶다!‘

동양인들과 달리 서양인 여자는 고단한 생활에 얼굴이 폭삭 늙긴 해도 몸매는 동양 쪽보다 뛰어났다. 어떨 때는 재희의 여자들보다 몸매만 매력적인 여자가 눈에 띄지 않았던가.

"E조 합류했습니다!“


아직 전투에 돌입하지 않은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D조에 합류하자마자  헌은 소리치었고, 숨이 가파르게 차오르지만 쉴 틈도 없이 바로 전투 준비를 하였다.

"몇 명이야.“
"세 명.“
"헤? 한 명 더 많다고 도망친 거야? 꼴사납네.“
"......“
D조의 진도열은 마치 재희를 자극하듯 비웃으며 말하자 재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왜 이 시발새끼는 한 명이라도 소중할 때에  분열 조짐을 보이게 만드는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 알고는 있어도. 시발. 기분 좆같네.‘


외모와 권력 등 모든  가진 진도열이 유치하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어렸을 적,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애정을 주는 방법을 몰라 괴롭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걸  큰 어른인 진도열이 하니. 기분이 참 더러웠다. 뭐... 지금 재희는 귀여운 딸을 가진 미망인이니까. 그리고 재희를 얻으면 다섯 명의 미인들까지 한 번에 얻을 수 있으니까 욕심을 부리는 게 이해는 되... 긴 개뿔.


'누가 넘어가냐?!‘


여자가 그러면 마음이 흔들릴지언정. 남자가 그런다고 과연 재희가 넘어갈까. 병신같은 망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교전. 시작.“

재희와 강 헌을 쫒던 남자 세 명과 D조의 앞에 나타났다던 적들이 모여서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자 진도열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낮게 말하였다.

"빵!“


재희의 얼굴과 몸매를 훑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그것도 언제 쏠지 알려주듯 다 보이는 데서 쏘니 손에 들린 검으로 손쉽게 화살을 쳐내었다.


"애교가 거치네?“
"어우. 시발.“

입꼬리를 귀에 걸며 화살을 쳐낸 남자는 위험한 애교를 부린다고 씩 웃으며 말하자 소름이 돋았다. 적당히 생겼으면 뭐라  하는데 저렇게나 얼굴이 박살이 났는데 저 표정에 저 말까지. 욕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소질이 있었다.

"터프하네. 미친 새끼.“


화살 뒷부분이 부서진 채로 배에 박혀있는 것이. 이 남자가 재희가  화살에 맞고 부서트린  남자가 확실해 보였다.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것이 아파 보이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빠르게 장전해서 쏜다면   더 가능하겠지만 치명상을 주지 못한다면 당하는  재희가 되니 손에 들린 석궁을 버리며 허리춤에 걸린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딴 거로 뭘 하려고?“
"음? 그걸 묻기 전에. 뒤를 조심......“


슈컹!


"윽?!“

저럴  알았다. 1대1 구도가 아니라 다중과 다중인 상황에서 태연하게 행동하더니 결국엔 강 헌이 휘두른 칼날에 배가 베여버렸다.

"하는 게 좋을 텐데. 이미 늦었네.“
"시, 시발새끼가?!“

여기가 이렇다. 앞에 상대하는 적이 있더라도 빈틈이 생겨나면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나 다른 적을 공격한다. 남자는 화살로도 모자라 칼자국이 배에 새로 생겨나자 강 헌을 죽일 듯이 노려보지만.

"익?!“

여자라고 재희를 무시하며 강 헌을 다구리 치려 하려던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나가 레이피어를 내찌르자 그는 다급하게 재희의 공격을 검날로 쳐내었다.

"네 상대는 나지 않아?“
"시발년이. 잡히기만 해 봐라.“
"어우야. 절대 잡히면 안 되겠네.“

딱 보니 이 새끼는 SM 쪽인 것으로 보인다.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될 무서운 존재. 잡혔다가는 남자에게 허락한 적  번도 없던 몸뚱이를 저 못생긴 남자에게, 그것도 사디스트에게 사로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만 같다.


"으아아아!“

기술이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직 괴력만을 이용해 무식하게 대검을 휘둘렀다.


'이거 쉽겠네?‘

재희가 상대하기 가장 편한 적은 다름 아닌 스피드는 없이 대검을 이용하는 적이었다. 대검 공략법은 간단하다. 그냥 더럽게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방으로 공격을 해대면 눈은 따라와도 대검은 따라오지 못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연히 여기서 고작 그런 이유로 패배한다면 색깔 등급이 아니지. 이곳에는 여러 가지의 무기들이 있는데 단검처럼 짧은 검을 가진 적을 수도 없이 상대해서 올라왔을 그가 스피드에 대한 대책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근데 검처럼 길고, 칼날은 얇은 데다가 스피드까지 있는 레이피어를 상대해 봤을 리는 없다. 재희조차 자신 말고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까. 저 남자는 대책이 없었다. 같은 헤븐의 식구는 재희가 레이피어를 사용한다며 해결 방안을 생각해 두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던  남자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푹!


"끅!“


재희의 허벅지보다 두꺼운 팔 근육을 뚫고 레이피어가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치명상까지 아닌  남자는 아는지. 커다란 기합과 함께 레이피어의 칼날을 붙잡았다. 이게 단점이었다. 레이피어는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치명상을 주기가 힘들뿐더러 반격하기가 무척 쉬웠다. 그런데.


"아쉽네?“

이럴 줄 알고 칼날에 기름을 발라두었는데. 

"뭣?!“

아무것도 발려있지 않으면 순수한 악력으로 칼날을 붙잡아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무기를 빼앗을 수 있는데. 기름 때문에 아무리  잡더라도 수월하게 칼날이 도로 빠져나왔다.

"ㅂㅂ“

레이피어만 어떻게 한다면 공격할 수단이 사라지니 다음 행동을 생각해 두지 않은 탓에 상당히 쉽게 재희는 남자의 이마  중앙에 부착된 물체에  찔렀다.


"끄아아아악!“

그랬더니 감전이라도  것처럼 비명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기절. 그는 기절했다.

"참. 편리해. 이거.“

 물체는 파괴되는 순간 사람이 버티질 못할 만한 전류를 흘려보내 참가자를 기절시켜 리타이어 만드는 용도였다.


"피가 튈 염려도 없고 말이야.“

안 그래도 적은 인원을 조금이라도 구해보고자 이 물체를 부셔서 상대방을 리타이어 시킨다면 5억이라는 큰돈이 떨어졌다. 그러니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걸 부수려고 노력했다. 이곳 무인도에 갇힌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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