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123 1년 뒤
지희와 만난 이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재희는 어느새 색깔 등급이 되어 있었다. 비쓰온 게임 내 등급 제도를 아는 사람들이 보아서는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플래티넘 등급에서 색깔 등급 레드에 도달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고 확답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등급 업의 조건이 낮은 등급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악랄하며, 애초에 인원도 적어 게임이 자주 잡히지 않아 조건에 충족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게임 측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전부 낮은 등급의 사람들뿐. 최소 골드와 플래티넘 쯤 되면 의심은커녕 오히려 재희를 존경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왜냐하면, 요 1년간 그녀의 행적이 소름이 돋으니까.
게임 측의 도움?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도움을 받긴 받았다. 근데 왜인걸. 좋은 의도가 아닌 나쁜 의도로 도움을 받았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경매로 재희를 산 자나 그 자에게서 재희를 빼앗아 저 아름다운 육체를 마구 탐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끊임없이 이벤트를 열어 반 강제적으로 재희를 참가시켰다.
이지원이 이곳으로 오게 된 원인처럼 흉악범들을 데려다가 게임 안에 풀거나 재희의 등급과 같은 게임이 잡히지 않았다며 일부러 한 등급 위인 게임에 참가시키거나 하는 그런 짓거리를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보니 온갖 수난을 헤쳐나가면서 그에 따른 보상을 주다 보니 이렇게 색깔 등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재희가 애인들 몰래 빚을 다 갚아 주었음에도 그녀들은 집에 갈 수 있는 상황에도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는다는 선택지를 택하였다. 대체 왜. 그냥 지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데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녀들이나 재희나. 여태까지 함께 지내오면서 정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린 게 문제였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까지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게 되어서 의견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재희를 홀로 남겨둘 수 없단 입장인 그녀들.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제외하고서라도 나가게 만들어 남은 생을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는 입장인 재희. 두 입장은 확고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곳에 남겠다고 말하니 게임 측에서도 별반 대응이 없다.
차라리 이곳에 남아 재희가 살아갈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며 굳이 그녀들이 목숨을 건 게임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달마다 지원금을 내주니 더더욱 여기서 나가지 않고 재희의 곁에 있으려고 했다. 어차피 헤븐은 바깥의 도시와 비슷한 문명 수준이며, 어떻게 보면 치안이 더 잘잡혀있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아도 꾸준히 돈만 나오면 괜찮아 보이긴 한다.
"하아... 내 입장에선 아닌데.“
초능력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재희는 무적이 아니다. 1조라는 빚을 갚기 위해 게임에 참가하다가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재희가 죽고 그 소식을 들은 그녀들은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갈까. 재희가 없는 세상은 살 의미가 없다며 따라 죽으려 들지만 않아도 다행일 노릇인데.
"그냥 좀 나가지.“
삶의 원동력이 되긴 해도 헤븐을 나가 있는 이상 끊임없이 걱정할 그녀들과 딸의 생각에 게임에 집중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 모든 게 그렇다. 위험하더라도 가끔은 무리해야 할 때가 있다고. 그녀들이 비쓰온 게임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바깥에 있다면 마음 편히 여러 차례 무리했을 테지만. 잘못하다가 죽어서 그 소식을 듣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소심해지니 답답할 노릇이다.
"걱정이 많나 봐?“
"아아. 그렇지.“
"애인이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성실한 애처가로밖에 안 보이는데 말이지. 대체 애 아빠한테 어떻게 대였길래 레즈가 됐냐?“
“닥치자 좀.”
"왜? 궁금하자나. 솔직히 네가 싸가지가 없어도 어러굴 하나면 지옥 끝까지 따라갈 남자들이 수두룩 한데.”
"그래서."
"뭐, 그냥 그렇다고. 애까지 딸린 이혼녀 씨."
재희와 친한 듯 보이는 이 남자. 그의 이름은 강 헌. 외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 닥치고 꺼져.“
"어디로 꺼질까? 여기서 꺼질대가 없는데? 그리고 나 소중한 존재라구~!"
"......“
그 말이 맞았다. 재희가 지금 있는 이곳은 바로 게임이 진행되는 무인도의 안이었다.
"짜증나.“
"넌 짜증이 나겠지만 난 기분이 좋네. 으헝헝.“
"시발.“
깐족대는 게 죽여버리고 싶은데 등을 맡길만한 믿음직한 동료이니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초월적인 미모를 가진 재희에게 나쁜 마음을 먹을 위험이 있는 남자를 믿는 걸까. 이에 대한 의문에는 누구든지 이해할만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가진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지만, 헤븐 안에서 멘탈이 산산조각이 난 미친놈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연히 아이까지 구하지 못했고, 그렇게 웃음이 가득했던 가정은 파탄이 났다. 애처가로 유명했던 그는 삶의 전부였던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서는 무작정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죽을 생각이었거늘. 죽기 직전만 되면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투영되어서 꾸역꾸역 살아남아 결국에는 색깔 등급 중 가장 아래 단계인 레드 등급까지 도달하게 되었었다. 그러면서 여러 인연을 만나 상태가 호전되었고, 빚을 다 갚았어도 정상이 되기 위해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등급에서 재희와 만났고, 첫인상은 서로 좋지 않았는데 재희의 미모에 홀리기는 했어도 나쁜 마음을 곧장 털어내며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돌아선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끝내, 이렇듯. 성별에 상관없이 편하게 대화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나저나 정찰 결과는 어때?“
"모르겠어. 실패야.“
색깔 등급의 게임은 단순히 무인도에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룰이 아니었다. 그런 룰을 채택하려면 인원이 많아야 하거나 공간이 협소하여 한시라도 빨리 싸우게 만든 다음 지루함을 해소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면 안 그래도 없는 인원은 더더욱 줄어들며, 게임 진행 시간도 확 줄어들게 된다. 즉, 들어간 돈에 비해 낮은 등급처럼 재미를 느끼기엔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인지 색깔 등급부터는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 시작된다. 그것도 다른 대륙과의 전투. 참고로 대륙이라는 것은 아시아, 유럽과 같이 비쓰온 게임 내의 6개의 섬을 간편하게 일터는 말이었다. 이번 상대는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대륙 중, 가장 위에 위치한 하라라는 섬의 유럽인들이다. 참. 이름 센스가 더럽게 없네. 아무튼,
"정찰이 안 돼. 경계가 삼엄해.“
단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상대방 네임드가 몇 명인지, 어디에 집중적으로 인원이 모여 있으며, 약한 곳이 어디인지 등. 하나하나가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위에서는 뭐래?“
여기서 위란. 레드, 블랙, 화이트 중, 가장 높은 등급을 가진 사람이 대장을 먹는다. 아쉽게도 헤븐에는 화이트 등급이 없기고, 적팀에게도 화이트 등급은 화이트 등급만의 게임이 있어 잘 참가하지 않아 각 팀의 지도자는 블랙 등급이 되었으며, 헤븐의 최강자인 피를 부르는 사나이와 2인자 진도열이 재희가 속한 팀의 공동 대장이 되었다.
"몰라. 지켜보잔다.“
그게 맞긴 하지. 무모한 싸움은 피만 흘릴 뿐.
"어디에 있을 것 같냐. 박스가.“
"몰라 시발. 그놈의 박스. 박스!“
박스라는 건 작은 상자로 되어 있는 단체전 전용 물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핵심. 깃발 뺏기 게임에서의 깃발이 박스와 같은 의미가 있다. 단체전이라도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조금이나마 희생을 줄이고자 게임 측에서 만든 물건이다. 그래서 박스를 부순다면 그대로 게임은 끝이고 부순 쪽이 승리를 하게 되는 룰이다.
"어딘지 몰라.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 시발. 정찰 임무를 할 때마다 허탕치고 돌아오는 내게 그런 걸 계속 물어보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고!“
몇 명은 박스를 부셔서 단독 보상을 받기 위해 일부러 상대측의 박스가 어디 있는지 알아도 모른 척, 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진짜 그런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게 되면 같은 대륙인으로서 도망갈 곳도 없고, 도시 안에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저 쓰레기는 탐욕 때문에 수많은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마라는 듯이.
"어우. 화내는 거 봐. 그러니까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지네.“
그래서 그는 힘들게 정찰을 끝내고 와도 잘했다는 말보다 먼저 추궁을 받으니 빡쳐 있는 상태이며, 이번에는 재희가 공격할 차례이니. 평범한 얼굴이긴 해도 재희가 곁에 있으면 당연지사 오징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그에게 팩트를 꽂아 넣었다.
"큭.....!“
크리티컬! 강 헌은 외마디의 신음을 토해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 정도면 평범한 거라고. 아내가 살아있었을 적에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이라는 말을 자주 해 주었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재희의 외모가 너무 넘사벽이라 반박조차 못하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발. 개같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나이 많은 늙은 사람이든 조건에 얾 메이지 않고 누구든지 반할 만한 외모를 보니 기분이 저 개같이 변해갔다.
'생각하자. 생각. 나도 할 말이 있을 거야!‘
뭐가 있을까. 재희를 까내릴 말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게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며 재희도 인정하는지 놀림거리가 되지 않는다. 애처가이며 여러 여자를 곁에 둔 것도 그냥 한 말이지 아내가 있는데, 두 번 다시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조차 부러울 정도로 하나같이 예쁜 애인들이라 부러움에 하는 소리였다. 그녀도 애인들이 예쁜 걸 아는지 그리 기분 나빠하지는 않지만.
'지희 얘기로도 까내리기는 뭐한데.‘
재희의 딸인 윤지희. 나이는 이제 6살. 그녀의 나이가 스물세 살인 것에 비해 너무 큰 아이였다. 그 말인즉슨 고등학교 초기에 사고를 치고 낳았다는 뜻인데... 강 헌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자신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지희라는 소재를 꺼낼 수도 없으며, 애초에 지희가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사고 쳐서 낳은 아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먼저 외모를 까내린 건 윤재희다. 그렇지. 먼저 시비를 건 건 저 년이라고.
"빚은 다 갚아가?“
흠칫.
미소가 걸려있던 재희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 즉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야. 이자율이 70%인 사람도 2년이면 그때까지 쌓인 이자를 거의 다 갚았을 건데. 넌 유예기간이 5년이었지. 아마?“
1조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50%라는 말도 안 되는 이자까지. 게임 상금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주어지니 당연히 재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아...! 레드 등급에 오르면서 3년으로 줄어서 이제 1년 남았네?“
"......“
여태껏 모은 돈은 약 50억 정도. 쓸 건 다 쓰고 낼 건 다 내고 남은 돈이었다. 이 정도면 헤븐에 갇혀 지내는 사람 여러 명을 구제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지만 1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음... 우리가 이기면 평균 10억을 받으니까. 1000번 더 하면 다 갚겠네. 그치?“
시익. 입꼬리가 올라가며 속으로 외쳤다. 이겼다고.
"근데 나갈 곳이 많지 않아?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나가잖아? 거기다가 지희 유치원에도 계속 보내야 하고. 킥킥.“
헤븐에도 유치원이 있고, 초등학교도 있었다. 당연히 중 고등학교는 물론, 심지어는 대학까지도 존재했다. 사람에게는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이 활발하게 움직이니 헤븐이라는 지옥에서도 사랑이 싹트고 새로운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아이의 사교성을 길러주기 위하여 유치원이나 학교를 원하게 되고.
선생으로 있다가 빚을 지고 이곳으로 끌려온 자들이 게임에 도저히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직업적 특성을 살려 아이들을 교육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헤븐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은 어느 기업의 소유였다. 그리고 그 기업은 헤븐에 법칙만을 만들었지. 개입하지 않다 보니 유치원 비용 등은 사업자가 직접 정하였다.
반발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빼앗아가 운영할 수도 있는 노릇, 그렇다고 너무 적게 하게 된다면 자신의 앞으로 오는 비용은 줄어들게 된다. 안 그래도 빚을 지어 이곳에 왔으면서 학교를 짓는다고 또 돈을 빌렸는데 바로 파산하게 되면서 정부 지원도 없어서 꽤 비쌌다. 뭐, 그래도 애인들, 아니, 이제 아내들이 이곳에 있는 명목으로 주는 돈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그럼 뭐해. 빚이 1조인데. 시발.‘
달에 10억씩 벌어들이면 뭐하나. 빚이 어마 무시한데.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지희에게 뭐든지 다 사주고 먹여주고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사줘야지. 그래. 사줘야 하는 거지.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지희가 문제다. 그리 사랑스러우니 엄마의 돈을 다 털어가는 거다!
"하아.......“
...... 어... 너무 심하게 공격했나 보다. 급격하게 나빠진 표정으로 재희가 고개를 떨어뜨리자 그제서야 미안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 미안?“
"꺼져.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래.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장난 삼아... 아니다. 아냐.“
먼저 재희가 장난삼아 얼굴을 놀리지 않았나. 그래도 이건 조금 심한가. 강 헌은 장난삼아 한 말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이곳에 오기 전에 질리도록 보았던 학교폭력이란 뉴스가 떠올랐다. 분명히 괴롭힌 자들은 장난에 불과하다며, 죽은 애가 이상한 거라고 했었다.
"미안.“
강 헌은 그런 재희를 두고 천막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