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120 엄마
'그게 말이다... 네 몸에서 추출한 샘플들로 한 번 인공 생명체를 창조해보려고 했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시도인지라 실패만 거듭할 무렵. 운이 좋게도 성공하였네. 그런데 아까 말했다시피 재희. 너의 몸에서 추출한 샘플들이라 너와 비슷한... 아니, 지금 너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의 외형을 가진 아이가 만들어졌다네. 뭐 이 정도는 예상한 범위였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성인이 아니라 4~5살 정도의 유아 체형과 일반적인 수준의 아이의 두뇌는 아니지만 천재도 아닌 두뇌, 그리고 본능적으로 굳이 따지자면 아이 엄마가 되는 널 엄마로 인식학 있다네.'
이게 무슨 말인가. 간단히 말한다면 DNA가 완전히 일치하는 어린 재희가 탄생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 다음. 레이건 박사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래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구만. 그저 조금 똑똑하고 예쁜 외모를 지닌 평범한 여자아이에 다를 바가 없었네. 그래서 우린 결정했네. 어차피 이 아이도 제 엄마를 애타게 찾으니 재희. 네게 보내는 게 좋을 거라는 것을! 참고로 플레티넘 등급으로 승급했다네. 축하하네!'
그렇다고 한다. 등급이 올랐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으며, 나쁘게 말한다면 실패작이었고, 심지어 얻을 것도 하나 없는 어린 애를 데리고 있어 봤자 득은 없고 귀찮기만 하니 차라리 생물학적으로 엄마가 되는 재희에게 보낸다는 의견을 모았으며 이렇게......
"음냐... 엄마... 헤헤. 사랑해요.“
재희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잠에 빠진 아이를 데리고 헤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아... 귀엽긴 더럽게 귀엽네.“
애초에 인간을 초월한 외모를 지닌 재희의 유전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예쁘고 귀엽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라서 딱히 모성애는 없는데 이 아이는 이미 재희를 엄마로 생각하고 있으며, 재희가 거두어주지 않으면 고작 4살짜리 아이가 험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소아성애자에게 팔려나가 끔찍한 일을 죽을 때까지 당한다거나 레이건 박사의 실험체가 되어 고통만이 가득한 나날을 보낸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을. 그러다 보니 이 아이를 두고 떠나가는 레이건 박사를 붙잡아 도저히 못 키운다고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죄의 뜻으로 준 1억을 보니 포기란 선택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하아......“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푸른 하늘과 접해있는 푸른 바다의 모습. 수평선이 길게 늘어섰고,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파도가 잠잠한 것도 있는데 배도 비싼 것이라 흔들거림 없이 편안함만 가득했다.
"그녀들이 뭐라 할지... 그리고 아람이에게 뭐라고 할지 고민이네. 지연이랑 어머니에게도.“
아이라니. 그것도 유전자가 동일한 친딸이라니. 겉모습만 보아도 유전자 검사를 할 필요도 없이 이 아이는 재희의 아이가 맞다는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 우연히 눈에 띈 고아를 데려다가 입양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과연 믿어나 줄지 모르겠다. 게임 측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장난질하다 태어난 인조 생명체라는 걸. 유지나와 이지원은 믿어줄 수도 있는데 다른 여자들은......
결국은, 유지나와 이지원의 힘을 얻어서 믿게 만드는 수밖에. 그러면 아람이와 어머니, 그리고 지연이는 어떻게?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비쓰온 게임이라는 걸 모르는 그녀들로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밖에 들려올 뿐이다. 아아. 머리가 아파져 온다. 고민하고 또 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자. 끝내 여기서 탈출하게 된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며 머리를 털어냈다.
"그나저나 이름은 있어야겠지?“
딸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면 이름이 있어야겠지. 레이건 박사는 이 아이를 실험체 BG – 59로 부르고 있었다. 엄마가 된 재희까지 딸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윤... 윤... 음... 윤지희?“
윤재희에서 재만 지로 바꾼 이름이다. 꽤 여자아이 같고 괜찮지 않은가? 응응. 이걸로 하자. 윤지희. 입에도 착착 감기는 게 좋은 이름 같아 보였다. 그렇게 이름을 정하고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서는 잠에 빠져 일정한 숨을 토해내는 지희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던 재희는 어느새 배의 속도가 줄어든 것을 느꼈다. 다 왔나 보다.
"지희야. 지희야. 일어나 이제 가야지.“
"우웅... 지희.....?"
"지희의 이름이야. 엄마의 이름은 윤재희. 너는 윤지희. 어때? 괜찮아?"
"윤재희...! 윤지희...! 응! 엄마! 이름 좋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실험체 BG – 59로 불리다가 사람 같은 이름을 얻으니 지희는 순순하게 기뻐하며 품에 안겨들었다.
'아... 미친. 너무 귀여워! 귀여워 죽을 것 같아!‘
너무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아닌가?! 이게 바로 심쿵사할 위기라는 건가. 재희는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기쁨에 조소를 흘리고 있는 지희를 보니 입꼬리가 쉴 새 없이 흔들거리며 귓가에 걸렸다.
"이만 가자. 지희야. 내려야 해.“
배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춰서고. 창밖을 보니 헤븐의 부둣가의 모습이 보여왔다.
"네! 엄마!“
아우! 착하다! 내 딸!
*
"......“
"......“
"......“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다 못해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잡아둘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무리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재희는 따가운 눈초리를 모두 다 받아내지 못하고 눈을 떨어뜨렸다.
'왜지. 잘못한 건 없는데 잘못했다고 빌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은.‘
"언니... 언니 결혼하셨어요? 언제? 대체 언제?! 아니, 아이가 있으셨어요? 그것도 이렇게 큰 딸을... 보니까 한 고등학교 때 사고를 쳐서 낳은 것 같은데. 휴가를 받고 나가서 데려온 거예요?"
"재희야. 거짓말은 나빠요. 그래서 전 재희에게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배신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재희야. 어떻게 딸이 있을 수가 있어?"
예림이와 민정이는 배신감에 눈물을 흘렸고,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쿠라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에게 범해져 아이까지 있다는 생각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누구에요?“
그런 그녀들이 무서운지. 사랑스러운 생명체인 지희는 재희의 뒤에 숨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오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귀여워......“
"귀엽네... 엄청.“
"하아. 화를 낼 수도 없잖아? 이러면.“
생김새가 어떻든 아이가 곁에 있으면 화를 내기 껄끄러운 상황인데. 재희의 외모를 쏙 빼닮은 예쁘고 귀여운 아이가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지켜주고 싶은 모습을 보이자. 화를 내려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있었다.
"엄마...? 아이? 어떻게?“
재희가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던 유지나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당황한 모습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비밀을 아는 이지원은.
"꺄아아! 귀여워! 너무 귀엽잖아! 재희를 닮아서 그런지 미치도록 귀여워!“
게임 안에서는 살인귀가 되어버리는 이지원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지희의 귀여움에 매료되었다. 그녀도 재희가 원래 남자였는데 어찌 저렇게 큰딸을 데리고 있는 건지. 남자였을 적의 외모와 지금의 외모는 완전히 달라져서 남자일 때, 애를 낳았다면 겉모습이 달라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이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뭐! 어때! 귀여우면 됐지!‘
일단 사랑하는 재희의 딸이라는 것과 거의 동일한 외모, 그리고 사랑스러움까지 포함되니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그녀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욕망을 이렇게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거리며 지희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쯧... 역시였나.“
휴가를 끝내는 재희를 마중 나놨던 사쿠라의 뒤를 따라온 세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왠지 저렇게 문란한 생활을 밖에서 했을 것만 같았는데 정말이었다는 증거를 가져오니 한심할 따름이어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사쿠라는 저 여자를 포기할 거야.‘
족히 4~5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왔으니 임신한 시기를 대충 어림잡으면 한 고등학교 1학년쯤이었다. 문란한 것으로 모자라 대책도 없이 학생 때 사고까지 치다니. 보기와는 달리 책임감은 있어 보이지만 단지 그것뿐. 애초에 책임질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심지어 책임을 지려 해도 아이를 이런 지옥에 데려온 것만으로 욕을 먹어야 할 터.
'사쿠라! 욕해! 욕하는 거야!‘
저 변태 여자의 어장관리에 속한 소꿉친구를 향해 무언의 말을 내뱉었다. 현실을 깨닫고 저 망할 여자를 버리는 거야.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야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거나. 아니면 여전히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비언이라 멀리서 새 사랑을 찾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자신을 선택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재촉하듯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사쿠라는 세라의 열정적인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딸...? 결혼 한 거였어?“
"애가 커 보이는데. 윤재희는 스물두 살 아니었나? 딱 보니 사고 쳐서 데려온 것 같은데.“
"맞네. 맞아. 근데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데려온 건지. 또 어떻게 데려온 건지."
"유부녀라... 하악하악. 오히려 더 좋은데?!“
"가능...! 씹가능! 어린 유부녀에 예쁜 딸까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사로잡힌 주위의 사람들은 외모나 능력으로 헤븐에서 소문이 자자한 재희가 사실은 유부녀였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환호하였는데 그들과 달리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다.
"지나야.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으음... 맞아요. 말이 안 되는데. 지금 눈으로 보니 이성적인 판단과 생각이 안 들어요.“
이런.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이라 유지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길드로 가자. 설명해 줄 테니까.“
"언니. 여기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응... 안 돼. 그러니까 길드로 가자.“
"하아. 알았어요.“
실험의 여파로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는 비밀을 듣는 이가 많은 이곳에서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예림이의 물음에 재희는 단호하게 길드에 가서 설명해 준다고 말을 하였다. 그렇게 사쿠라의 집무실에 도착하였다.
"재희야. 해 봐요.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잘 해 보란 말이에요.“
아이는 죄가 없다. 있다면 아이를 가진 재희가 문제지. 민정이는 화가 솟구치지만 겁을 먹은 듯한 아이에게 더 겁을 먹일 수 없으니 최대한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 전에. 세라 씨?“
"뭐지?“
조심스럽게 사쿠라의 소꿉친구이자 호위인 세라를 부르자. 그녀는 벌벌 떨고 있는 작은 소동물같이 아기자기한 지희에게 시선을 떼어내지 않은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희를 데리고 길드를 구경시켜 줄 수 있을까요?“
"갑자기......?“
"부탁드립니다.“
뜬금없이 지희에게 길드를 구경시켜달라는 말. 그제서야 세라의 눈은 지희에게서 떨어져 나가 재희의 아름다운 얼굴에 닿았다.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같은 길드이고 애인의 소꿉친구라도 재희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라이니 어떠한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고민을 해 보고 또 해 보아도 답은 도출되지 않고, 오히려 이 간단한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세라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판단은 사쿠라가 할 몫. 세라가 옆에서 조언을 주어도 그녀가 결단을 확고하게 내리지 않는 이상에야 쓸데없는 짓이었다. 거기다가 지희라니는 귀여운 아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쁨이 몰아쳤다. 그래도 재희에게 좋은 짓거리는 하고 싶지는 않아 탐탁지 않다는 느낌을 풀풀 풍겼다.
"지희야. 저 언니랑 잠깐만 놀고 있을래?“
"엄마......“
"아주 잠깐만. 여기 언니들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부탁할게. 지희야.“
"응... 알았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의 부탁. 착한 아이로 남아있으려면 싫어도 그래야만 한다. 마음 같아서는 싫다고, 계속 엄마 곁에 있고 싶다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오구오구. 착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어두웠던 얼굴은 다시금 밝아졌다.
"지희야. 얘기 다 끝나고 갈 테니까. 조금만 놀고 있어.“
"응! 알았어!“
"그래그래.“
"자! 가요!“
"어, 어어.“
칭찬받았다. 히힛. 기쁨에 통통 튀는 걸음으로 세라의 팔을 붙잡고 방을 나가려고 하자. 저항한다면 충분히 저항이 가능하지만 세라는 지희에게 이끌려 함께 방을 나갔다. 그래서 재희를 포함한 여섯 명만 남게 되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과 레이건 박사라는 노망난 박사에 의해 지희가 태어났다는 것까지. 전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