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118 휴가
춤을 추며 흥을 가라앉힌 아람이는 자리로 돌아와 재희에게 차례대로 다가가는 남자들을 모두 다 쫓아내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포기하지 않는지 계속해서 들이대었고, 끝내 호텔 방을 하나 잡은 뒤에 남은 술을 가져와 둘이서 마음껏 마셔댔었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깨어있으면서 술을 마셨던 아람이가 먼저 곯아떨어지고, 그녀를 침대에 옮겨 푹 자게 만든 다음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했던 재희는 익숙하게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방 한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짧은 바늘이 9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얼마 자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밤에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생각되지 않게 머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옆에 누워있는 아람이에겐 해당하지 않는 조건인지. 잔뜩 풀어헤쳐 진 옷을 입은 상태로 떡 진 머리, 그리고 숙취를 느끼는지 일그러진 얼굴로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자신도 모르게 행해진 실험이 또 고맙기는 하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취해보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멀쩡해지는 몸이. 그런데 이렇듯. 같이 먹었으면 평소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잠을 깨다 보니 혼자서 마땅히 할 게 없는 것 같다.
"4시쯤에 잤으니까 빠르면 12시에 일어나겠네.“
4시쯤에 아람이는 술에 잔뜩 취해 주사를 부리다가 이내 곯아떨어졌었다.
"그때 동안 뭘 해야 하나.“
요즘 한국은 대통령부터 불편함을 너무 느끼며 남을 깎아내리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어서 TV에서 하는 방송프로그램들은 하나 같이 재미가 없었으며, 애초에 TV를 볼 형편이 아니었기에 재희는 딱히 TV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까 말했다시피 할 게 없으니 재희는 TV를 켰고 아람이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낮추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피시방이나 갈까?“
역시 재미없네. 오히려 1년 전보다 더 재미가 없어진 이 느낌은 뭘까. 무료함을 덜어보고자 재희는 게임이나 하러 피시방으로 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아람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피시방에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씁... 전화번호를 모르네.“
재희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아람이의 스마트폰을 들고 켜 보았다. 예상대로 잠겨져 있어서 전화를 걸 수도,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없다. 깨우기는 미안하고. 하는 수 없이 종이와 볼펜을 찾아와 피시방에 간다는 말과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다.
"근데 오늘 평일 아닌가?“
생각해보니 오늘은 평일일 텐데. 얘는 대학을 안 가는 건가? 대체로 휴일을 만들려면 월요일이나 금요일로 잡아둘 텐데. 목요일인 지금 어중간하게 휴일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뭐, 알아서 하겠......
♯♭♬♪♩ᕷ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람이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전화를 건 상대방은 다름 아닌 윤지연. 재희의 여동생이었다. 아마도 왜 학교에 오지 않는 건지. 교수님이 이미 도착을 했는데 왜 아직도 오지 않았냐는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 전화한 게 아닐지. 막상 지연이의 전화가 걸려오자 그 전화를 자신이 받고 싶어졌다. 목소리... 여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손이 뻗어져도 물건에 닿지는 않았다.
"하아... 돌겠네.“
1조라는 빚에, 50%에 해당하는 이자를 보아서는 빚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지연이를 보고 나니 성공할 확률이 0에 수렴하더라도 발버둥을 치고 싶게 만드는 욕망이 가슴을 찔러오니 답답할 노릇이다.
"아람아. 일어나. 학교 안 가?“
"우으응.“
"아람아. 전화온다. 받아.“
"시러어어......“
이거. 안 되겠네.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늦게 잠과 동시에 몇 병이나 되는 술을 먹어치웠으니 당연한가?
"알아서 하겠지. 뭐.“
어차피 그녀는 부잣집 딸래미인 데다가 이미 아람이의 명의로 여러 개의 가게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건물까지 소유했다. 굳이 대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먹고 사는 데 문제없고, 오히려 사치를 부리며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는데. 깨우는 건 괜한 참견이려나. 어느새 전화가 끊기고, 다시금 지연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 적당히 하다가 포기할 터. 재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람이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니 비쓰온 게임 안에서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탁한 공기가 가득하였다. 실험의 여파로 후각도 좋아진 덕분에 퀴퀴한 냄새가 불쾌하여 고운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런데도 발길을 돌려 아람이가 자고 있을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도 앱을 보며 피시방을 찾아다녔다. 그런 와중에 당연히 출근길이지만 재희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시방 간판을 찾았고 재희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허업!“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며 카운터에 앉아있던 알바생은 힐끔 눈길만 가져가려 했는데 막상 눈을 가져가니 초월적인 미모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 그렇기에 알바생을 무시하고 널널하게 자리가 많은 피시방 내부를 훑어보았다. 이 넓은 곳에 손님은 총 두 세명. 당연히 평일 이른 오전이니 당연했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누군가 자꾸 자신을 바라보면 신경이 쓰이는 것이. 그래서 알바생을 피해서, 나중에 들어올 손님들을 피해서 구석진 자리로 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어두운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다.
"어어... 이거 어떻게 켜는 거야?"
생전 처음 와보는 피시방. 아니, 계산대 외에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이라 켜는 방법을 알 수 없어서 순간 당황해했지만, 모니터의 밑에 붙어있는 전원 버튼을 찾고 꾹 눌렀다.
팟!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맞는 듯.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근데 원래 이렇게나 빨리 켜지는 건가? 신기했다. 그렇게 컴퓨터가 켜지고 뭔가가 잔뜩 떠 있는 바탕화면이 나왔는데 그것도 잠시. 로그인 창으로 넘어가 버렸다. 피시방에 처음 와보는 것이기에 로그인 창이 나왔으면 당연히 회원가입을 해야 할 터.
재희는 로그인 창의 근처에 있는 회원가입이란 작은 글씨를 클릭하여 회원가입을 끝마쳤다. 하지만 아직 미지 문명의 세계에 재희를 들여보내 주지 않으련지. 시간이 없다고 충천을 하라 한다. 귀찮게시리.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흠칫!
왜인지 모르게 멀리서 재희를 보고 있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시간을 어떻게 넣나요?“
"카운터 앞에 있는 기계에 아이디를 치고, 시간을 정한 다음 정해진 금액을 넣으면 됩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 정도의 호의는 받아도 충분할 텐데. 그의 눈이 얼굴에 닿았다가 가슴과 허벅지로 향하는 것을 보고 알바생을 무시한 채, 지나쳐 카운터로 향했다.
"여기. 아이디를 입력하시면 돼요.“
굳이 따라와서는 알 것 같은데 알려주려고 하자. 귀찮음을 넘어 짜증이 밀려왔다.
"하아... 알았으니까. 신경 꺼 주시겠어요?“
"네? 아... 죄, 죄송합니다.“
눈치는 있는지... 아니, 눈치가 있었다면 애초에 다가오지도 않았지 않을까. 아무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알바생은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음... 시간이라.‘
아이디를 입력하자 곧장 결제 칸이 나왔다. 50분부터, 10시간까지. 다양한데 재희는 고민할 것 없이 10시간을 꾹 눌러 옆에 있는 카드 단말기에 레이건 박사의 블랙카드를 꽂아 넣었다. 어차피 많아도 3시간만 하고 갈 거면서 말이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쓰읍. 한 번만 더 넣을까?‘
블랙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돈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과연 만 원으로 타격을 입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화를 내라는 뜻에서 재희는 다시 만 원을 충전하여 총 20시간을 아이디에 넣었다.
"그렇게나 많이? 자주 오시려고요?“
만약 그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바 시간을 오전부터 오후까지로 바꾸리라 생각하며 알바생은 조심스럽게 재희에게 질문했다. 근데 알려줄 필요성을 못 느낀 재희는 아까와 똑같이 무시하며 자리로 돌아가 쓸데없이 20시간이나 들어가 있는 아이디로 로그인을 끝마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게임을 해 보려 하는데... 어... 뭘 해야 할지 몰라 다시금 멀뚱멀뚱 바탕화면을 바라보았다.
FPS, 롤플레잉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아이콘들이 있었지만, 뭐가 재밌으며 또, 뭐가 재미가 없는지 몰라 창의 띄웠다가 닫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띤 먹거리 주문.
"일단 뭐라도 먹을까?“
실험체로서 모든 신체 능력이 가파르게 향상됐어도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무언가를 먹어야만 했다. 마침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와서 배도 조금 출출한데 뭘 먹으면서 천천히 할 게임을 찾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계산은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는데 블랙카드가 알아서 해 줄 게 분명할 터. 그래서 마음 편히.
"라면... 핫바, 쥐포도 있네. 그럼 이것도 하나 하고. 오. 오징어도. 음료도 있어야겠지? 와 김치볶음밥이나 카레도 있는 거야? 완전 음식점인데?“
간단한 식사를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메뉴가 정말 많아 보이자 재희는 이것저것 막 주문했다. 돈은 썩을 대로 많으니. 그렇게 일차적으로 주문을 끝마치고 다시 주문을 하는 재희. 잠시 뒤.
"라면 나왔습니다.“
알바생은 쟁반에 올려둔 라면을 가지고 다가왔다.
"결제는 카드로 하실 건가요? 아니면 현... 아. 브, 블랙카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블랙카드를 내미니 말로만 듣던 카드를 보고 놀란 듯한 반응. 그러나 본 적이 없고 말로만 들어왔기에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몰라서 그저 색만 검은 것일 수도 있다며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는 재희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뒤 라면을 옆 테이블에 두고 카드를 가져갔다.
♯♭♬♪♩ᕷ
총 주문한 것들 중에 약 30%가 나왔을 때,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스마트폰이 세차게 울어대기 시작하였다.
"일어났나 보네.“
시간을 보니 9시 53분. 아마도 수업을 끝낸 지연이가 전화를 걸어 깨운 게 아닌가 싶다.
"여보세......“
[언니 어디야! 어느 피시방인지 당장 말해! 바로 갈 테니까.]
어우. 귀 아프게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바로 앞에 있는 피시방이야. 이름이 ㅡㅡ이었나?“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당장 갈 테니까!]
"그래그래. 천천히 와.“
[아니! 빨리 갈 거니까 기다려!]
뚝.
뭐지. 애가 왜 이렇게 다급한 건지 모르겠다. 오늘을 포함해서 아직 휴가가 5일이나 남아 있다 해도. 말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한 건가? 그럴 리가. 말해 줬는데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심지어는 메모까지 하고 나오지 않았던가. 전화도 빠르게 받았고.
"언니이!“
설마설마했는데 정말이었는지 눈가가 촉촉한 아람이는 다짜고짜 재희에게 안겨들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참...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니겠네.
"근데. 왜 갑자기 피시방이야?“
"그냥. 할 게 없어서.“
"언니는 게임 안 해 봤자나. 할 게 있어?“
"......“
"으음... 나도 게임을 안 해서 같이 하자는 말을 못 하겠네.“
게임을 할 시간에 클럽가서 몸을 흔드는 걸 좋아하는 아람이로서는 피시방이란 공간 자체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피시방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한 발자국조차 들이지 않았는데.
"공기가 탁하다.“
밀폐된 공간이며, 흡연 부스가 있다 하더라도 담배 연기는 사방으로 퍼질 수밖에 없는 노릇. 거기다가.
"이거 언니가 다 시킨 거야?“
옆 테이블까지 침범해 있는 많은 음식들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본다.
"그냥. 먹고 싶어서.“
"허... 돈이라면 아끼려고 환장하던 윤 씨 집안의 장남이... 아니, 장녀가? 이걸 다 시켰다고?“
"내 돈 아니야.“
"그럼 누구 건데?“
재희를 납치하고 실험체로 쓰는 것으로 모자라 법과 질서가 무너진 무인도 안으로 집어넣어 살인을 강요하는 게임 측 인물이라고 털어놓는 조금 그랬다. 아마 아람이의 생각으로는 재희가 납치를 당한 조직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여기서 적인 조직에게서 블랙카드를 받았다는 말을 했다가는 추궁하지로 않기로 한 재희에 대해 알려달라 할 수 있었다.
"동료.“
"언니 동료?“
"응. 쉬라면서 넉넉하게 줬어.“
"......“
미심쩍은데. 동료 돈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건가? 아람이는 의심이 들었는데 자고로 부부라 하면 믿기 어려운 사실도 믿어줘야만 했다.
"나도 좀 먹어도 되지?“
"엉.“
"언제 갈 거야?“
"조금 있다가.“
"그럼 나도 해 봐야지.“
재희가 좋아하는 거라면 따라 해 주어야 이상적인 아내! 음식이 가득 올라와 있는 자리에 앉은 아람이는 최소한의 음식들만 남겨둔 채, 나머지는 옆자리로 옮겨 회원가입을 끝마치고 재희와 게임을 했다.
"재미없네.“
"응. 그러네.“
원래 그 게임에 익숙해져야지 재미를 느낄 텐데. 적응하기까지 기다림이 없는 재희는 결국, 18시간이나 남았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피시방을 나왔다. 그것도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