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17 휴가
개장시간까지 시간에 여유가 있어도 너무 널찍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재희와 아람이는 정말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재희가 없던 1년 동안 그녀와 지연이,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 듣기도 하며, 사랑이 가득한 애정표현도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럼없이 했었다. 물론 아람이의 주도하에.
아무튼, 그렇게 클럽 개장시간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으로 향하였고, 클럽 주인과 아는 사이인지, 아니면 단순히 문지기와 아는 사이인지 길게 늘어선 옆의 줄을 무시한 채, VIP 느낌으로 바로 통과되었다. 당연히 예쁜 여자 둘이 들어가겠다는 굳이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우선순위로 들여보내 주었겠지만.
'소란스럽네.'
그렇게 클럽에 들어와서 든 생각은 이러했다.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우며 눈이 아플 정도로 다양한 색의 불빛들이 깜깜한 어둠 속을 밝혔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혼자 오셨어요?“
들끓는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재희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이곳의 남자들은 바깥의 남자들과 달리 평범한 얼굴로 자신이 있는지 어울리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재희를 어떻게 해 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하아... 내가 여기 왜 온다고 했을까."
재밌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뭐가 재밌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람이가 말하길. 클럽은 춤만 추러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새로운 만남을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만남... 아니, 역겨운 생각과 시선을 가지고 다가오는 새끼들을 보니 더더욱 클럽에 대한 이미지가 확연하게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네?“
재희의 중얼거림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지만.
"애인 있으니 가.“
"하하. 저도 애인 있습니다.“
그런 놈이 처음 본 이성에게 다가와 불순한 생각을 한다고? 참. 저 발정 난 새끼의 애인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놈의 여자친구를 찾아가 이런 짓을 하고 다닌다고 알려주고 싶은데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 귀찮게 그럴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 꺼져.“
"에이. 튕기지 마세요. 저 이래 봬도 괜찮은 남자랍니다?“
썩 잘생긴 게 아니라는 걸 자신도 아는지 그는 씩 웃으면서 노골적으로 손목을 걷어 살을 만져대면서 자연스럽게 차고 있던 비싼 시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굳이 따지자면 재희의 연봉은 1억이 넘는데. 그리고 시간이 지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건데. 애초에 아람이가 부자라서 비싼 시계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친구. 그 정도로 뭘 하려고?“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서 먼저 재희를 꼬시려 들던 남자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물었다.
"이거 안......“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이니 얼굴이 찌푸려지기 마련. 화를 내려던 그는 자신의 어깨에 팔을 올린 남자의 얼굴과 덩치를 보고 말을 멈추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또 이상한 게 꼬이네. 하.‘
어디선가 많이 봐서 익숙한 건달의 모습. 금목걸이와 풍성해야 할 머리가 텅 비어있는 것까지. 완벽한 건달들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재희는 귀찮은 게 꼬였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안 어울리니까 다른 사람 찾아봐. 응?“
"네... 네.“
"그래그래.“
말은 잘 구슬려서 보낸 것처럼 보이는데 얼굴을 보면 좋게 말을 하기야 하는데 그냥 협박으로 보였다. 이것만으로 저 남자는 돈이 썩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돈이 많으면 한낱 건달 따위에게 쫄 리가 있을까. 돈이 전부인 세계에서 말이다.
"이쁜이. 이름 뭐야?“
건달은 자연스럽게 재희의 옆에 앉으며 어깨에 팔을 걸치려고 하자.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년은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아람이는 여기가 자신의 명의로 된 클럽이라 했다. 그리고 이곳에 좋은 술이 있다며 그걸 가지러 갔는데 아람이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건지. 이러다가 재희 하나 때문에 싸움까지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자신을 얻기 위해 수컷들이 싸움을 벌인다는 생각에 흐뭇하겠는데 원래 남자였다가 지금도 여자를 좋아하는 재희로서는 나쁜 경험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잠깐. 어디 가게? 날 무시하면서?“
"......“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재희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면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흐음... 나 잘못 걸린 것 같네.‘
아주 적은 불빛만을 의지하는 클럽 안이었는데 재희의 초월적인 미모 덕에 어두워도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에 춤을 추면서, 술을 마시면서 재희를 힐끔 쳐다보던 사람들은 지금 재희의 어깨를 붙잡은 건달을 불편해하는데 막상 재희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잘못 걸린 게 확실해 보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건달이라니. 건달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 황당하여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있어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판을 치고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건달을 만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경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지, 보기보다 법과 경찰은 허점이 많아 되도록 건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사실을. 그래서 탐이 나도 너무 나는 재희를 두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이라.
"얼마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나 봐? 날 모르는 것을 보니?“
처음에는 눈이 빠질 정도로 예쁜 외모에 홀려서 관심이 생겼는데. 자신을 모르는 듯한 반응에 더 흥미가 솟구쳤다.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순백의 도화지를 자신만의 색으로 칠하는 재미를. 순진무구한 여인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 타락시키려는 그런 목적을.
"굳이 알아야 할까?“
"알면 좋지. 그래야 여기서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귀찮은데. 그냥 너도 꺼지면 안 되려나?“
"그건 안 되지. 너를 가지고 싶어졌으니까. 바로 결혼할까 우리?“
"지랄......“
비쓰온 게임 안에서 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신이 나가 있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낮에는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다 밤에 미쳐버린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뭐, 밤늦게까지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재희는 수차례 진상들을 만나 이미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욕하는 모습도 예쁘네. 정말로 마음에 들어. 너만 좋다면 여자들을 다 정리하고, 두 번 다시 널 제외한 여자는 쳐다도 보지 않을게. 어때?“
무슨 자신감일까. 벌써부터 재희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듯이 말하는 게 황당할 따름이다.
'혹시 아람이보다 잘 나가는 놈일까?'
재희는 고개를 돌려 불안한 눈동자로 건달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네.'
영 아니었다. 그저 경찰과 법 쪽에 아는 지인이 있어서 승승장구한 느낌. 간단하게 말해서는 인맥이 꽤 넓은 단순한 건달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겁도 없이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
"언니! 내가 많이 늦었지! 그런데... 이건 뭐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술을 양손에 쥔 채로 해맑게 다가온 아람이는 급격히 표정이 변화하며 건달을 바라보았다.
"결혼하자네.“
"아.....?“
사실을 간략하게 털어놓자 그녀의 예쁜 얼굴은 건달의 얼굴보다 험악해지며.
"죽고 싶다는 말이네?“
감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게 결혼을 제안하다니. 아람이는 살면서 가장 화나는 순간이 지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분노하였다.
"신아람.....?“
건달은 살짝 당황한 모습으로 아람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전부 네 세상 같지? 개새끼가. 주인이 까라는 대로 까는 거지. 이젠 내 사람까지 노리네? 시발놈이?"
순수한 동생의 친구 이미지가 강했는데. 언제 이렇게나 격변했는지 찰지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뒤지기 싫으면 내 눈앞에서 당장 꺼져.“
"......“
"두 번 말 안 해.“
"후우... 시발.“
탐이 나는 여자인데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니.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깊은숨을 토해내며 돌아섰다.
"언니가 나쁜 거야. 너무 예쁘니까 벌레들이 너무 꼬이는 거 아니야?“
그것보다 벌레들이 들끓는 이곳에 데려온 아람이가 잘못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재희였다.
"일단은 춤이나 추자. 이렇게 기분 나빠졌을 때 몸을 흔들다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나 춤출 줄 모르는데?“
"괜찮아. 솔직히 나도 춤을 출 줄 몰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냥 분위기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막 흔들면 그게 춤이 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자자. 어서 가자!“
"그래. 그러지 뭐.“
귀찮은데. 그냥 앉아서 술이나 퍼마시고 싶은데. 싫은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을 감추고 아람이의 손에 이끌려서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한 대 모여 춤을 추고 있는 곳에 발을 들였다.
"......“
아람이는 바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얼굴 표정이 무척 밝은 게 정말 재밌어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뿐.
"쯧......“
오히려 더 기분이 나쁘다고나 할까. 무턱대고 결혼을 약속했다고는 하나. 아람이의 근처에 남자들이 들러붙어 몸을 비비려는 것 때문에 나빴던 기분은 더욱 나빠지고, 아람이처럼 재희에게 다가와 몸을 비비려는 남자들도 존재하여 펴져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주먹이 쥐어졌다.
아... 아아....! 주, 주먹이 운다. 지금 당장이라도 조금씩 몸을 붙여오는 남자들을 향해 주먹을 내찌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여긴 게임 안도 아니라서 법이라는 것이 들어 올려지려던 팔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참아야 하는데.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일부러 때리라는 듯이 더 다가와 붙어대자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온다.
"춤 안 추세요? 추시는 법을 모르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급기야 귓가를 속삭이기까지.
"언니! 재미없어?"
아람이는 재희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기에 자신에게 남자들이 들러붙어도 민감한 부위만 터치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재희에게 그러니 참을 수가 없는 노릇. 이게 바로 내로남불인가. 자신의 마음은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안심이 되는데 재희는 그렇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알고 보니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말이 오갔다고는 하나.
그게 사실인지 모르며, 지루함을 달래보고자 한 번 보았던 TS 소설에서 여자가 된 남자가 원래 동성이었던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익숙하게 볼 수 있었다. 재희의 말에 따르면 정말 완전하게 여자가 되었다는데. 그게 사실일지. 그렇다면 다른 여자들처럼 남자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자신만의 것이어야 하는 그녀의 몸에 더러운 벌레들의 손길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리며, 아까 건달처럼 재희에게 결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해댈 수가 있으니 음악과 분위기에 홀려 춤을 추어야 하는 평소와 달리 현재로서는 재희에게 자꾸만 시선과 관심이 옮겨져 있었다.
그 때문에 재희에게 달라붙어서 귓가를 속삭이는 남자의 모습에 빡 돌아버려 추던 춤을 멈추고는 재희에게 다가와 들러붙은 남자들을 떼어내며 왜 춤을 추지 않는 건지. 자신과 달리 춤을 추는 게 정말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건지. 물어보았다.
"그러네. 별로네.“
"그래.....?“
그녀가 신경 쓰여 미치겠는데 클럽까지 와서 춤을 추며 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 앉아 있으라고 해도 불안하네.‘
더 놀고는 싶은데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온 몸이 근질거리고.
"나 앉아 있어도 될까?“
"앉아 있을래? 으음. 그러는 게 좋겠다.“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재희가 먼저 선수를 치고 앉아 있어도 되냐고 묻자 아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조금만 놀다가 바로 갈게.“
"엉. 천천히 놀다가 와.“
"남자들이 들러붙으면 정장을 입은 사람을 찾아서 내 친구라고 말하고는 남자들을 떨어뜨려 달라고 하면 돼. 알았지?“
"응. 알았어. 알았으니까 놀다가 와.“
흐흐. 아람이가 가져온 술이 계속 눈앞에 아려오던데. 드디어 맛볼 생각으로 재희는 기뻐했다.
"사랑해!“
"으응.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안으려고 하자. 순순히 안겨준 뒤에 아까까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곳으로 향했다. 혹시나 누가 훔쳐 갔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직 뜯지도 않은 술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그런 술의 뚜껑을 따자 향기로운 알코올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쪼르르르.
작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입에 가져갔다.
"오... 맛있네.“
아람이가 신경 써서 가져온 술이라 그런지 꽤 맛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먹던 맛 대가리는 하나도 없이 알코올 농도만 높은 술보다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기네.“
술을 입에 넣으니 갑자기 그게 생각나며 먹고 싶어진다. 근데 그 술은 게임 안에서만 파는 술이라 하니 여기서 구할 방법은 없어 보여 아쉬웠다. 된다면 레이건 박사가 준 블랙카드로 왕창 사드려 어디 숨겨두고 싶은데. 아까워라. 아까워.
"저기요. 안녕하세요?“
잔이 비워지고 다시금 술을 따르던 순간. 이제 막 클럽에 들어섰는지 멀리서 재희를 바라보던 사람들과 달리.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아... 귀찮아. 못생겨지고 싶네.‘
여자가 되었을 때, 못생기지 않은 외모라는 것에 안도했는데 이제는 못생겨지고 싶었다. 욕망에 충실한 벌레들이 자꾸만 꼬여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