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116 휴가
울음이 머지는가 싶더니 재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졌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금 차올라 아람이의 고운 얼굴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당연히 그녀의 고용인인 경호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예전의 얼굴이 전혀 남아있지 않게 성별까지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
확신은 아니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재한이라는 이름을 담는 모습에 덩달아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여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거나 재한이란 낌새도 보이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지금 모습으로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본 것일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람아......“
그러나 현재 재희로서는 잃어버린 본래의 자신을 기억해주며, 그리워하고, 또, 100퍼센트가 뒤바뀌어도 알아 봐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저 여동생의 친구, 자신보다 나이 어린 소꿉친구로밖에 생각되지 않던 아람이가 다시 보이게 되었다. 그렇기에 재희는 울음이 잔뜩 섞인 어투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아니... 몰라. 모른다고!“
저 말을 들으니 더더욱 재한이 확실해지자 아람이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그야 그럴 것이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고, 약 1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더니 그녀가 사랑했던 잘생긴 얼굴은 대체 어디 가고 여신이 실존한다면 그 여신조차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부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었다.
염색이라도 한 건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은색의 머리카락을 허리 부근까지 늘어뜨리고, 손바닥만한 작은 얼굴에, 루비처럼 영롱하여 보석처럼 보이는 적색의 눈, 오뚝한 콧날, 틴트를 바른 듯, 새빨간 입술까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같은 여자가 보아도 질투는커녕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람아......“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눈앞의 여자가 재한일 리가 없다고,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거라며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자. 재희는 애달픈 목소리 다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흐윽... 흑. 나쁜 놈. 나쁜노노오옴!“
무슨 언질이라도 해 주고 떠나지. 떠난 이유가 성별을 바꾸려는 목적이었다고 귀띔이라도 해 주었으면 아람이를 좋아한다고 졸졸졸 따라다니며 고백을 해 오던 수많은 남자들 중 한 명과 사귀었을 것 아닌가. 그래서 모태솔로라는 타이틀을 치워버리고 행복한 생활을... 생활을 했을 텐데. 아람이는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부정하고 부정을 해 보아도 같은 사람,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얼굴과 분위기, 몸매는 다 다른데 아람이의 몸은, 머리는 재한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속하였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여자가 됨으로써 포기할 때가 되었는데 왠지... 아무래도 좋았다. 동성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듯. 아람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가 되었다는 절망감보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돌아와서.
"왜... 여자가 된 거야?“
여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잘생긴 외모 덕에 끊임없이 받아오던 여자들의 고백을 찬 이유가 알고 보니 그가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이어서 성전환을 한 걸까. 아니면 그냥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그러나 그런 말을 바로 털어둘 수는 없는 노릇.
"......“
재희는 자신에게 시선을 가져오는 경호원들과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듣는 귀가 많다. 아람이가 부자인 건 알아도 비쓰온 게임 측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게 분명하니 굳이 정보가 새어나갔다간 괜한 추궁만 받을 것이다.
"카페로 가자."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아람이는 카페로 가자고 말하며 재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걸음을 옮겼고, 그녀의 뒤를 재희는 따라갔으며, 그렇게 카페에 도착하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 보았다. 보석처럼 붉게 빛나는 눈이 아람이에게 고정되었고, 앞을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얼굴이 보여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며 숨소리는 사뭇 거칠어졌다. 이것은 흥분......
"이제... 말해 봐.“
아무리 앞의 여자가 원래 짝사랑을 해 오던 재한이라 해도 이젠 여자인데. 품고 있던 감정을 벗어 던져야만 하는데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 아람이는 보석처럼 붉게 빛나는 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말 안 해 줄...! 거야.....?“
말해보라는데 말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쳐올렸지만, 이내, 버럭 소리를 치던 목소리는 바닥을 기었다.
"하아......“
괜히 아람이가 나섰다가 큰코다칠 것 같아서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저 반응을 보니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야만 했다. 절대 어머니와 지연이의 귓가에 재희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타당한 말을.
"나... 원해서 여자가 된 거 아니야.“
"어......?“
"다 말해줄 수는 없는데. 일단은 그래.“
재희는 알고 있었다. 아람이가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선은 바로 믿어주지는 않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래야만 비밀을 지켜줄 것만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납치를 당했다가 눈을 떠 보니 이 모습이었달까?“
"오빠는 모르고 있었다고?“
"응. 정말이야.“
"알았어... 믿어 볼게.“
미심쩍긴 한데 거짓말을 잘 하지 않던 재희라 그런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뒤늦게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가야 해.“
"다시 가야 한다니. 또 연락을 다 끊는다는 말이야?“
"그렇지.“
"싫어.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어떻게 오빠를 기다... 아니... 지연이가 얼마나 오빠를 기다렸는지나 알아? 아냐고! 그런데 무책임하게 왜 그러는 거야?“"미안해. 하지만 가야 한다는 것만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네.“
그래... 그냥 다 털어두자. 숨긴다고 아람이가 순순히 이해해 줄 리가 없으니까. 말로 잘 구슬려서 설득해 본다면 그만이었다.
"왜?“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차피 우주로 나가지 않는 이상에야 도망칠 곳은 없고, 싸운다는 선택지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걱정하지 마. 빨리 끝내고 돌아올 거니까.“
"그럼 잠깐 지연이랑 아주머니를 만나러 나온 거야?“
"그래.“
"참... 나빠. 지연이랑 아주머니가 오빠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고 그리워하는데 얼굴조차 비치지 않고 간다는 거야?“
"너도 보고 있잖아. 이 모습으로 어떻게 봐?“
"그, 그건 그래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아는데 어쩔 수 없어.“
"하...! 다 말해 봐. 내가 해결해 줄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안 되면 할아버지에게 부탁해서라도 해결해 줄 테니까 다시 가지 마. 알았지?“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아람아. 나 좋아하지?“
".....!“
뜬금없는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람이는 당황했다.
"언제부터.....?“
"꽤 됐어. 아무튼, 아람아. 비밀로 해줘. 일 다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면 내가 지연이랑 어머니께, 그리고 너한테도 다 설명해 줄 테니까. 나 믿고 기다려줄 수 없을까?“
지금껏 빚을 천천히 갚아오는 것처럼 완만하게 해결하면 될 텐데. 재희를 걱정한 나머지 아람이가 괜히 여러 곳을 들쑤시면서 비쓰온 게임 측과 후원자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절대 안 되었다.
"결혼하자.“
"에...? 에에엣?!“
"돌아오면 결혼하자.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 줘.“
"자, 잠깐만!“
"싫어?“
"아니... 시, 싫은 건 아닌데. 오빠 지금 여자잖아? 그러니까 결혼이 안 되잖아?"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좋기만 했다. 벌써부터 아람이의 망상에서 결혼은 이미 남편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운 여자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다름 아닌 재희의 얼굴로.
"그래서. 싫어?“
"......“
싫을 리가.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런데 싫은 남자였을 때의 재희보다 지금 여자의 보습의 재희로 인해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이름은 윤재희야. 재한이란 이름은 쓸 수가 없어서 윤재희란 이름을 쓰고 있어. 그러니까 재희나 언니라고 불러."
"알았어.......“
"어디 한 번 불러봐. 재희 언니라고.“
"......“
"왜. 장래를 약속했는데 싫어? 나 좋아하는 게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재, 재희 언니.....!“
마지못해 아람이는 입을 열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생각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내, 아무래도 좋은지 재희는 미소를 지었다.
"응. 아람아.“
화악. 미소와 더불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쁘면서 행복했고, 한시라도 빨리 결혼에 골인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찼다.
'시간이 지난다면 잊겠지. 뭐.‘
휴가가 끝나 게임 안으로 들어간다면 재희는 레이건 박사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보내거나 해서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고,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연락도 못 하니 애정이 줄어들기 마련. 그 때문에 언젠가는 아람이가 재희가 아닌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그게 될까. 재희는 자신의 외모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야 자기 얼굴이라 거울이 없으면 자주 보지 못하니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언제 돌아가는 거야?“
"6일 뒤에.“
"꽤 많네?“
"엉. 휴가거든.“
"풉... 납치당했는데 휴가를 받는다고? 웃기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납치되어서 생체실험까지 당했는데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게 웃기긴 했다.
"안전한 건 맞지?“
"어. 안전해. 나 봐. 다친 곳 하나 없잖아?“
전혀 안전하지는 않은데 다친 곳이 하나 없으니 믿게 만들기엔 충분하였다. 거기다 이 몸뚱어리는 엄청나게 약해도 회복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커다란 상처는 입지 않아서 모르는데 자잘한 상처는 미세한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러네... 응. 믿어 볼게.“
이것도 미심쩍은데 결혼이라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어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당사자가 딱히 말해주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굳이 추궁하며 따져 물었다가는 약속한 결혼까지 날아갈 가능성이 존재하여 입을 꾹 닫은 아람이었다.
"오빠... 아니, 언니는 6일 동안 뭘 할 거야?“
"어... 딱히. 없는데? 그냥 피시방이나 갈까 하는데.“
"피시방?“
"어.......“
막상 휴가를 즐기라며 강제로 내쫓겨졌으니 뭐라도 해야 하는데 마땅히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겠는지 모르는 재희는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 문화. 피시방에서 접해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람이는 겨우 한다는 게 고작 피시방이라는 말에 어이없어하며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을 켜서 시간을 보았다.
"나쁘지 않네. 언니. 밥 먹고 클럽 가자.“
"뭐...? 크, 클럽?“
"응. 재밌어. 아마 피시방보다 더 재미있을 거야.“
"그렇다면 뭐... 알았어.“
표정을 보아하니 거절을 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 재희를 클럽에 데려가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하였다. 그래서 어차피 가게 될 것만 같으니 간다고 말한 것이다.
"밥부터 먹을까? 언니 뭐 먹을래!“
밖으로 나오자. 아까 보였던 어색함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아람이는 듬직한 남자친구의 팔을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불편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재희처럼 불편하지 않은지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여 차마 떨어지라는 말을 못해 내버려 두고는 있는데 계속 이렇게 걸으니까 힘들진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누가 보아도 꿀이 쏟아지는 표정과 눈빛으로 재희를 보는데. 신기하고 흥미로운 광경에 관심이 안 갈 수야 있을까.
"아무거나......“
"우으. 아무거나가 젤 어려운 문제라고. 한 가지만 딱 집어서 말해줘.“
얘... 왜 이래? 방금 걔가 맞아? 재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는지 색다른 사람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사실은 여자가 된 재희에게 또다시 반해 혼란스러웠던 성 정체성을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로 끝나버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행동들과 억눌러놓은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고기 먹자......“
"고기? 알았어! 내가 맛있는 데 알아. 거기 가자!“
생각나는 거라곤 고기뿐. 사람이 굶주리면 가장 먹고 싶은 건 간단한 밥상이었고, 두 번째가 냄새로나 맛으로 사로잡아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바로 고기가 아닐지. 무인도에서 한 달간이나 갇혀 지내게 되면 당연지사 고기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먹을 게 생각나지 않는 날엔 그냥 고기를 먹어치웠었다. 아람이는 고기를 먹자는 말에 재희의 팔을 이끌고 가는 아람이. 재희는 저항도 없이 순순히 끌려가 밥을 먹은 뒤에 클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