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115 휴가
먼저 민정이네에 들린 재희는 평일 이른 오후에 집에 있을 리 만무한 민정이의 부모님을 찾아 회사로 찾아갔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부모님 두 분 모두가 직장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있을 거라 했고, 찾아가니 천만다행이게도 얼굴은 무척 어둡지만 삶은 포기하지 않은 듯,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장인, 장모님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무사해 보이네."
민정이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사진을 보고 왔으니 얼굴을 잘 못 보는 불상산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언젠가는 사랑하는 외동딸이 반드시 집에 돌아와 예전처럼 엄마하고, 아빠하고 반겨줄 것이라 굳게 믿으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듯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재희는 그런 두 분을 뒤로 한 채, 다시 민정이의 집으로 돌아가 그녀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쓴 편지를 두고 이번엔 예림이의 집을 찾아갔지만 이사 가고 없다고 하여 바로 유지나의 어머니가 계셨던 병원을 찾아갔다.
"그분이라면 꽤 오래전에 퇴원하신 거로 나옵니다."
힐끔힐끔. 재희의 얼굴에 눈길을 끊임없이 주며 간호사는 유지나의 어머니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사는 갔나요?“
"그것까지는 알아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입원 중이라면 몰라도 오래전에 퇴원한 환자의 정보를 갱신하지 않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건 이상하였다. 재희는 돌아서며 유지나가 알려주었던 그녀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유지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한때, 살았던 허름한 빌라의 어느 호수의 문에 귀를 가져다 대자 안에서 인위적으로 나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실험의 여파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재희의 청각이라면 숨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텐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그 말인즉슨 안에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당신 누구... 아......“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도둑질을 하기 전,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사전 조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재희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이내, 재희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기 사는 사람과 아는 사이인가요?“
"......“
"저기요?“
"핫.....?!“
"여기 사는 사람과 아는 사이인가요?“
"아, 아아. 알고는 있다만... 누, 누구세요?“
운 좋네. 알고 있다니.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아줌마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홀린 듯 술술 불어버렸다.
'맞네. 유지나가 말한 이름이.‘
아줌마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유지나에게서 들었던 이름과 같아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고, 아줌마는 또다시 초월적인 외모에 넋을 잃고 장을 보고 돌아오는지. 채소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분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 저기요?“
"핫...?! 네, 네? 뭐라고 하셨죠?“
"하아... 그분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냐고요.“
"그거야 쉽지만. 누구시죠?“
"그분 따님의 친구예요.“
사실은 성노예가 된 딸의 주인님이지만.
"그 친구는 피치 못 할 사정 때문에 저한테 대신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딸이 한 명 있기는 한데. 이름을 아시나요?“
"유지나. 아닌가요?“
"맞아요. 그럼 친구가 맞겟죠."
딸의 이름만 안다고 친구라 판단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겠지만 아줌마의 입장에선 굳이 자신을 속여서라도 이 집주인에 대해서 재희가 무언가 알아내려는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딸이 돈을 주고 사라졌기는 해도 그 돈을 노린 거라면 보이스 피싱이 제일 적합한 방법인데 이렇게 얼굴을 다 들어낼 필요가 있을까.
"지나는 괜찮아요?“
"네. 무사해요.“
"다행이네요.“
유지나의 어머니와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녀의 딸인 유지나와는 그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그래도 친한 친구의 딸이라 그런지. 딸 같은 마음에 갑자기 사라진 유지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없지 않았다.
"그녀도 괜찮아요. 처음에는 죄책감에 죽으려고 했는데 제가 잘 설득해서 지금까지 무사히 지나를 기다리고 있오요. 그런데. 지나는 언제 돌아오나요?“
"확답을... 드리기 힘들지만. 제가 반드시 집에 돌려보내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거.“
재희는 품에서 편지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나가 쓴 편지예요. 지나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네. 꼭 전해 드릴게요.“
자신의 딸도 아닌데 지나의 편지를 건네받은 그녀는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꼬옥 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윤재희.“
"재희 씨... 이름이 참 예쁘네요. 분명 부모님께서 엄청나게 고민하셔서 지은 이름일 거예요.“
아닌데. 여자가 되고 나서 재희가 스스로 지은 이름인데.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하세요. 지나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렇게 편지를 전해주어 헤어진 재희는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쩝.
"이제 뭐 하지?“
할 게 없네. 피시방이라도 갈까...? 그 전에.
"지연이 보러 가야지.“
한 번 만 더 가족들을 눈에 담고 싶었다.
*
"지연아... 지연아!“
"우으으......“
잠에 깊게 빠진 지연이는 강의가 다 끝났음에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절친이자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인 신아람은 지연이의 몸을 살며시 흔들며 깨우기 시작하였다.
"일어나. 강의 다 끝났어. 그리고 너 오늘 알바 있잖아. 어서 가야지 않아?“
아파트 청소부로 일하시는 어머니가 벌어들인 돈으로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 대신에 오빠인 재한이 기껏 입학한 좋은 대학을 한 번도 다니지 않고 휴학을 낸 뒤에 알바를 하러 다녔기에 여동생인 지연이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들고 가장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는데 자신 때문에 고생한 오빠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걸까... 벌써 1년 가까이 지났고, 그 1년 동안 여전히 오빠의 빈자리는 커도 너무 커다랬다. 지금 집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한이 있을 것만 같고, 힘들게 알바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재한을 만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지만 역시. 헛된 바람이었다.
"아아... 알바 있지. 오늘도... 끄으으응!“
피로가 전신을 괴롭혀서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알바가 있으니 그것도 마음대로 못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즐거움이 가득한 캠퍼스 생활을 마음껏 만끽하려고 해도 그놈의 돈... 돈이 문제였다. 만약 소꿉친구이자 여태까지 절친으로 남아있는 신아람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어머니와 함께 거기로 내쫓아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몸을 팔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고마워. 아람아.“
"뭐가. 고맙다는 거야. 우리 사이에. 그나저나 계속 내 도움 안 받을 거야?“
"응... 미안해. 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돈 문제로 얽히고 싶지 않아.“
"하아. 진짜. 한심하네 너도.“
신아람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럴 것이 자신의 집은 부자이며, 두 명의 삶을 평생 짊어져도 무리 없는 돈이 아람이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연이가 원한다면 집이든, 생활비든, 용돈이든 살아가는데 아무런 걱정도 들지 않도록 많이 줄 수 있는데 이 바보 같은 모녀는 끝까지 거절했다.
친구인 지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만의 힘으로 이 가난함을 이겨낸다며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서 한시코 거절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전에... 그녀의 오빠가 실종되기 전만 해도 재한에게 마찬가지로 말했었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공부에 집중하도록 도움을 준다고. 근데 가족은 가족인지 재한까지도 거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매에게 시급 높은 알바 자리까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괜찮다 해도 그러네. 호의를 받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받아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응... 알지. 알긴 아는데 한두 푼도 아닌 걸 어떡해.“
대학을 졸업하여 번듯한 직장을 가지기져서 돈을 벌기까지 아직도 4년이나 남아있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을 바로 얻을 수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람이의 회사에 취직하면 되니 구직생활은 생각 외로 빠르게 끝이 날 것이다. 그럼에도 4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녀를 먹여 살리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겠는가. 그래서 거절한 것이다.
"어차피 나 오빠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나 재한 오빠랑 결혼할 거라니까?“
"응. 알지.“
"근데 왜 거절을... 하이씨. 짜증나.“
어렸을 적 신아람은 TV에서 볼법한 자만심이 가득한 나쁜 부잣집 자녀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람을 겁내는 소심한 아이였다. 그러나 윤씨 남매를 만나고 성격이 개화됨에 따라 평범한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재한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용기를 내어 사랑을 고백하려던 찰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 사라졌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언제나 웃고 있던 남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황 속에서 고백할 정도로 몰상식한 아람이가 아니었기에 일부러 그런 감정을 꾹꾹 감추면서 둘의 곁을 꿋꿋하게 지켰었다. 안 그래도 잘생기고 예쁜 남매로 소문이 나서 수많은 고백들과 적극적인 들이댐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말이다.
질투가 안 날 수가 있을까. 재한에게 다가가는 여자들을 진짜로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질투가 났었다. 지연이에게는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재한에게는 달리 다가오는 여자들은. 심지어 선생님까지도 질투의 대상이 되었지만 재한은 연애에 관심을 끊고 공부에만 집중하였다. 그런데 십 년간 숨겨왔던 감정을 재한에게 다시 토로하기도 마음 먹었는데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찰에 신고를 넣어 보고, 아람이가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사람을 풀어 보아도 땅으로 꺼진 건지, 아니면 하늘로 승천한 건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흔적도 남지 않은 실종이었다. 그렇게 지연이와 함께 슬픔에 잠겨있다가 끝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재한을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서로 껴안은 채 밤새도록 울었었다.
"오빠는 돌아올 거야. 아니, 내가 찾을 거야. 그러니까. 받으라면 좀 받아! 이 망할 년아!“
10년의 짝사랑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다른 남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기억 속에 남아서는 자신을 부르며 웃는 재한의 얼굴만이 보였으니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찾아서 꼭 결혼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 아람이 인지라 지금이라도 지연이랑 가족이 되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데.
"으으으윽! 어지러워어!“
이 망할 년은 가족이 주는 호의조차 거절하는 바보 중의 바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아람이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던 지연이의 양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지연이의 고개는 힘없이 흔들거리며 어지러움에 예쁜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하아... 하아... 진짜. 돌아버릴... 응?“
그녀의 몸을 흔들 만큼 흔들어버리고 난 뒤에 아람이는 고른 숨을 토해내며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여자... 오늘도 왔네?‘
소름 돋을 정도로 예쁜 여자. 아람이가 살면서 보았던 여자 중에 가장 예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은발과 적 안을 가진 여자가 캠버스 출구에 서 있었다.
"왜 그래? 아람아?“
"아니야. 아무것도.“
이상하다. 어제 지연이에게 껄떡대던 남자를 데리고 어디 가서 당연히 그와 연관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그게 아니었나? 무슨 이유로 또 학교를 찾아와서 아람이도 아닌 지연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건지 모르겠다.
"먼저 가 봐. 나 할 게 있어서.“
"할 거라니? 뭘?“
"있으니까. 알바나 하러 가. 늦으면 시급 줄여버린다?“
"힉...! 아, 알았어!“
참고로 지연이가 알바하고 있는 가게의 주인은 아람이었다. 즉, 지연이의 시급을 줄이든 말든 아람이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지연이는 저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람이의 협박에 다급하게 뛰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맞네. 지연이를 보고 있어.‘
지연이의 움직임에 따라 눈과 고개가 돌아가는 게 확실했다. 아람이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경호팀에 연락하여 무슨 이유에선가 지연이를 지켜보던 여자를 잡아둘 것을 명령했다. 얼마 뒤... 그녀의 곁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다가갔고, 그제서야 아람이는 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에 섰다.
"당신. 누군데 내 친구를 보고 있는 거죠?“
기억에 없는 얼굴. 솔직히 저렇게 예쁜 여자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지연이랑 아는 사이었다면 이렇게 숨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아람이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뭐, 뭐야...? 왜 눈물이 나지?"
처음 보는 사람이 확실한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오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구야... 흑... 대체. 대체. 누구냐고?“
분명히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나 눈물이 나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 왜 자꾸 재한이 생각나는 걸까.
"재, 재한...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