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9화 〉109 휴가 (109/140)



〈 109화 〉109 휴가

"저... 고객님. 010-****-**** 번호는 이미 사용 중으로 나와서 그러는데, 다른 번호는 없으신가요?”


지금 재희가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휴대폰 매장이었다. 레이건 박사가 여자로서 바깥세상을 살아가기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여 두었다고 하는데 당연하게도 재희의 정보까지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전화  쓸 수 있을까요?“
"네. 쓰세요.“

지연이에게 껄떡대던 남자에게 말한 번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좋을 테지만 있어도 아주 상관없었다. 쓰려는 번호가 이미 있는 번호라 할지라도 재희는 당황하는 것 없이 휴대폰 매장 직원에게 스마트폰을 빌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 레이건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잠시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고.


딸깍.


[재희냐?]

어찌 바로 아는 걸까. 레이건 박사 또한, 처음 보는 아무 사람의 스마트폰을 빌려서 전화를 거는 건데.

[이런 말 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마땅히 전화 올 때가 없어서 말이지.]

납득했다.

"010-****-****. 번호 비워주세요.“
[뭐...? 다짜고짜?]
"네. 부탁드립니다.“


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사용할  있을 때는 마음껏 사용해야지 않을까.

[뭐, 알았다.]

뚝. 전화가 끊어지고. 잠시 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용... 가능한 번호입니다.“


무슨 수를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 근데 이걸 어쩌나 재희도 모르는데. 협박을 했거나 잘 구슬렸거나 둥 중 하나이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간에 노인네의 입장에선 재희의 편의를 최대한 봐야 하는 상황이다. 갑은 재희, 을이 레이건 박사라는 거다. 그리고 간단한 부탁이니 빠르게 처리를 해 준 거고.

"그 번호로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  통으로 전화번호를 뺏다니. 사심이 없던 건 아니라 조금 있다가 한 번 들이댈 생각이었던 직원은 자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마음을 접었다. 그러나 어찌나 저렇게 아름다운지. 자꾸만 시선이 다리를 꼬고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재희에게로 향했다. 잠시 뒤.


"개설되었습니다. 바로 사용할 수 있......“


어차피 일주일만 쓰고 안 쓸 거. 그리고 블랙카드를  것으로 보아 돈도 많을  분명하니 최신 폰 풀옵션으로 맞췄다. 일주일만 쓰고 버릴 용도로는 너무 아깝긴 해도 아무래도 좋다. 재희의 돈이 아니니까. 직원은 바로  수 있도록 설정해 둔 스마트폰을 재희에게 꺼내주려다가 곧장 전화가 걸려와 말을 멈추었다.


"감사합니다.“

허공에서 멈춘 손. 그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받아든 재희는 곧장 매장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저기. 진짜 학교 앞에서 본 사람이 아니라고요?]

재희가 간 뒤로 곧장 여러 번 전화를 걸었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받았지만,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전화를  것으로 보인다. 병신같이.

"맞습니다.“
[아!  목소리!]

"네. 학교 앞에서 본 사람입니다. 전화번호를 이것으로 바꿀 생각이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전 다른 사람이 받아서 퇴짜를 맞은 줄 알았다니까요.]


살짝 이상하긴 했다.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부족해서 무턱대고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는가. 재희의 아름다운 외모라면 자신보다 더 잘생긴 남자를 수도 없이 만나다가 버릴 수 있는데.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앞에 아려오는 재희의 모습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 보람이 있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나요?]
"없습니다.“

대신 애인이 있지. 그것도 여러 명이. 남자가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그럼.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이 말만을 기다렸다. 재희는 입꼬리를 귀에 건 채로 매혹적으로 웃어버렸다. 그러자 거리를 걷고 있던 남자나 여자들은 모두 하나 되어 사랑에 빠지는 불상사를 낳았다.


"어디서 만날까요?“


*


집과 가까운 근처 동네이긴 해도 학교, 집, 아르바이트 장소. 이 세 곳만 돌아다닌 탓에 지리를 잘 모르며, 알아두면 유용한 공공시설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기계의 발달로  작은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목적지를 찾아올 수가 있었다.

"아...! 여기요.“

남자가 정한 곳은 근처의 한 카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이제  카페에 들어선 재희에게 시선이 옮겨지며 눈이 졸졸 따라왔다. 그중에 유독 눈에 익는  남자. 그는 해맑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고, 재희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하하. 안녕하세요.“

실례가 안 되게 얼굴을 보려고 하지만 눈은 계속 커다란 가슴으로 향한다.

"네. 안녕하세요.“


여자와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인 것처럼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남자는 머뭇거림을 멈추지 않더니 이내, 다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하나입니다.“
"제가 오빠네요.  스물다섯입니다. 한국대학교 3학년이죠.“

대한민국에서 유명하며,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는 한국대학교 학생. 자신에 대한 매력을 조금이라도 어필하여 점수를 딸 생각으로 다니고 있는 학교를 입에 담은 듯 보인다.  관심이 없는데. 재희 또한, 그 학교 휴학생이니.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곤잘레스.“
"에...? 고, 곤잘레스요?“
"그런데요? 이상한가요?“
"아, 아니요. 트, 특이한 이름이라. 하, 하하.“


이름 따위 알려줄 가치가 없는 새끼라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남자는 진짜 믿는 건지. 아니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건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름을 알 방도가 없었고, 알려주기 싫어 보이는데 진짜 이름을 되묻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라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다.  점에서 마이너스 4800을 찍고 있던 호감도가 4900으로 줄었다.

"남자친구가 없으시다고 했으니... 저 어떠세요?“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재희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번 맞춰보라는 식으로 매력적인 미소를 띄워 보인다.


"영화 보러 가실래요?!“

긍정적인 반응으로 판단한 그는 다짜고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음... 영화관이라. 기억이 희미한 어렸을 적을 제외하곤 최근에 발도 들이지 않은 곳이 아닌가.

"그러죠.“

거부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영화관에 들러 좌석을 예매하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영화 제목은 기생충수. 한국에서 만든 영화이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유명하고 재밌다는 영화였다. 어찌나 재미있는지 개봉한 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극장에서 재개봉을 했고, 한번 보고 싶었던 재희는 이걸 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미 봤음에도 남자는 자신도 못 봤다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재밌네.‘


영화가 끝이 나고.


"재밌네요. 배우들의 연기도 엄청 잘 하고요.  그래요?“


그런데 옆에 이 남자 때문에 영화가 재밌어서 좋아진 기분이 곧장 땅바닥으로 내리꽂히다 못해 지면을 뚫고 맨틀을 지나 내핵에 닿았다.

"벌써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네요. 혹시 좋아하시는 음식 있으신가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럼...  고깃집 가실래요?“


라면 하나로 오늘  끼를 때워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그러니 재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고시집으로 향했고, 남자는 찰나의 그 순간을 캐치하여 오늘 저녁으론 고기를 먹자는 제안을 해 왔다. 나쁘지 않은 남자가 아닌가. 눈치도 좋고, 적당한 거짓말로 배려할 줄도 알고, 예쁜 여자라면 사정을  쓰는 어장 관리 쓰레기가 아니었다면 지연이의 남자친구 후보로 남겨두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제가 다 구을게요. 곤잘... 으음. 숙녀분께서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되요.“

기억력이 좋네. 곤잘레스를 아직도 기억하다니. 뭐, 기억할 수밖에 없이 임팩트가 큰 이름이었으니 기억할 만하겠지만. 자진해서 고기를 굽는 노예가 된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는 재희는 정말로 구워주는 고기를 족족히 먹어치웠다. 조신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배속에 거지라도 들었나. 쌈도 싸 먹지 않고 먹어치우는 모습에 남자는 다시금 반해버렸다.


'매, 매력 있어!‘


얼굴이 예쁘면 무슨 짓을 하든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는 그 말처럼. 고기를 굽는 자신의 노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는  매력 그 자체였다. 제대로 콩깍지가 씌어버린 그는 부자도 아니면서 꽃등심을 하나 더 시켰다.

"어머어머. 아가씨가 보기와 달리 복스럽게  먹네. 후후후. 남자친구가 부러워~!“
"아닙니다. 하하하하!“

남자친구라는 말에 호구가 된 것도 모르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는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꽃등심을 비워진 그릴에 올렸다.

'씁... 살짝 미안해지는데.‘


커피값, 영화와 팝콘, 그리고 콜라, 마지막으로 고기까지. 전부 남자가 사 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려는 속셈이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지연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얼굴과 몸만 보고 달려든 남자에게 복수를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살짝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여기서만 몇십이 깨질 게 분명한데 하루 동안, 그것도 자신이 아닌 버림받게  여자에게 몇십만 원을 쓰는 가난한 대학생이라... 아니지. 아니야. 먼저 지연이에게 못된 짓을 할 생각으로 가득  쓰레기였으며, 이렇게 예쁜 여자가 하루 동안 데이트를  주는 것만으로도 몇백도 부족한데 몇십으로 해 주는  감사해야 했다. 응응.

"학교에서 봤던 예쁜 여자는 누구예요?“

고기를 먹다 말고 재희는 뜬금없이. 오늘 처음으로 남자에게 물음을 툭 던졌다.

"누구... 아. 지연이 말하는 건가?“

뒷말은 중얼거렸지만 실험의 여파로 청각이 좋아져서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하하. 그냥 저희 과의 신입생이라 이제야 막 친해지려는 사이거든요.“

그럴 리가. 누가 보아도 노골적으로 들이대던데. 그래서 곁에 있던 다른 남자들이 지연이에게 들이대던 남자를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던걸. 재희를 호구로 보는 걸까. 뻔한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질투하시는 건가요?“

이게 무슨. 어장관리를 하는 남자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황당한 질문이다.  만남에 이런 질문이라니. 재희의 외모가 예쁘긴 정말 예쁜가 보다. 노련한 바람둥이가 제정신을 잃을 정도이니.

"그렇다면 어떡하시게요?“
".....!“

역공을 펼치자 당황한  남자였다. 뒤늦게 의미를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그는 입이 서서히 벌어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졸리는데 어디  곳 없을까요?“

어지간한 술고래도 재희의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할 터. 그런데 고작 한 병도  다 마시지도 않고 재희는 취한 것처럼 눈을 살짝 풀어버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물론 있죠! 어서 갈까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이젠 대놓고 가슴을 보기 시작했다.

"좋죠.“

아직 굽지 않은 고기가 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남자는 계산을 끝마치고 재희를 부축하며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들어오면서 얼핏 본  대여 요금이  비싸던데. 방으로 들어와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둔 재희는 무지무지 푹신할 것만 같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그런 재희를 보며 입맛을 다시며 주머니에서 작은 박스. 콘돔을 꺼내고 겉옷을 벗으며 다가왔다.


"먼저 씻을래요?“


섹스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재희는 할 생각이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겉옷을 벗어 던진 남자에게 다가간 재희는 팔을 살며시 잡아 꺾으며 바닥에 내팽개쳤다.

"끄아아악!“


자비 없이 고통을 느끼도록 팔을 꺾으며 바닥에 엎드린 그의 위에 올라탔다. 모텔이라 방음이 잘 되어 있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을 터.

"야. 지연이에게 걸쩍거리면 죽인다.“
"뭐, 뭐?! 무슨 소리예요! 곤잘......“
"닥치고. 걸쩍거리면 죽인다고.“
"이이이익!“

설마 자신에게 호감이 있던  아니라 고작 지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다가온 거라고...? 남자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분노했다.


"시발년이! 어서 비켜! 내 위에서 꺼지라고!“


꺼지면 뭐하게. 반격하게? 해도 안  텐데.


"니새끼 매장할 거야.  팔로워가 얼마나 많은데. 네년 한 명을 매장하는  힘들 것 같아?! 걸레 년이. 시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어서 나오라고오오!“

시선을 끌어모으는 외모를 지닌 재희, 그리고 특이한 은색의 머리카락 색과 적색의 눈을 그대로 내놓고 밖을 돌아다녀서 이 남자가 SNS에 거짓 선동을 한다면 믿는 사람이 여럿 생겨 소문이 부풀려질 수도 있어 의외로 먹힐 수도 있는 협박을 멋없게 제압당한 상태에서 발버둥을 치며 했다.

"그래. 해 봐. 괜찮으면.“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의 눈에  들어오도록 블랙카드를  던져주었다.

"......“


곧바로 발버둥이 멈춰서고. 저 카드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그는 공포에 몸을 떨기 시작한다.


"누가 이길까?“

답은 나와 있다.

"죄송합니다......“

무얼 해도 이길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본다고 할지라도 블랙 카드를 가지고 있는 상대를 어쩐단 말인가. 선동을 해도 바로 권력에 의해 막혀버릴 거. 남자는 현실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사과할 필욘 없고. 지연이 건들면 죽인다. 아니, 그걸로 끝나지 않아. 그러니까 꺼져.“

남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자 뭘 할 생각이 없는지 순순히 겉옷을 챙겨 방을 나갔다. 그래서 모텔 방에 혼자 남게 된 재희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여 스마트폰의 검은 액정에 환한 불빛으로 물들여 보았다.

"SNS......“


심심한데. 그거라도 해 볼까 하고 SNS를 다운 받아 회원가입을 끝마쳤다. 그리고 보았다.


"섹스나 할까?“


조건만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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