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8화 〉108 휴가 (108/140)



〈 108화 〉108 휴가

"웨얼아유고잉!“

택시 뒷좌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기사님은 순간 멈칫하며 백미러로 재희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리곤 뒤늦게 목적지를 물었고. 재희는 태연하게 한국말로 목적지를 말했다.

"하, 하하. 한국말 잘하네?“


누가 보더라도 꽃다운 20대로 보이는 재희의 어린 외모. 그러나 기사의 얼굴은 못해도 40대 이상으로만 보인다. 그렇기에 기사는 편하게 반말로 입을 열었다.

끄덕끄덕.

늙긴 했어도 남자는 남자인 모양. 그의 시선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재희의 커다란 가슴으로 향해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옷 위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가슴으로 인해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하고 불쾌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 시선. 재희는 물어놓고 가슴을 보고 있냐며 따지지 않고 대답해줄 가치를 잃어버려 고개만 끄덕였다.

"누구 보러 온 거야?“
"......“

이거. 운전 똑바로 안 하네. 계속해서 백미러를 보며 말을 거는 게. 택시를 운전할 자격이 없는 듯하다. 이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재희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앞에서 들려오는 물음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에 가려져 느껴지지는 않지만 찬바람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바깥 풍경. 그리고 한국어로 가득한 간판들. 예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관심도 없었겠는데 지금 보니 꽤 재밌지 않은가.

'오오. 외제차.'

헤븐은 큰 섬이긴 해도 자동차는 없었다. 애초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라 바빠서 사소한 취미나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딱 봐도 비싸보이는 외제차가 눈에 밟히자 무척 신기했다. 마치, 자동차를 좋아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랄까.


"한국은 어떻게 알게 됐어?“
"뭐 때문에 온 거야?"
"혼자서 여행 올 정도로 치안이 좋긴 하지. 후후.“

대답을  주지 않는데도 아저씨는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으며 혼자 국뽕에 차올랐다.


"여기요.“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재희는 블랙카드를 내밀었다. 이렇게 검은 카드가 세상에 다 있는지. 신기하듯 바라보는 아저씨. 이내, 카드를 내민 재희의 손을 노골적으로 잡으며 카드를 가져갔다.

"......“


시발? 기분 역겹네. 누가 보더라도 실수가 아닌 고의였다.


"자. 계산 끝났어.“

이번에도 그냥 카드만 내밀면 될 것을 굳이 재희의 손을 끌어다가 손바닥을 펼치게 만든 후에 카드를 쥐여주었다.

"혹시 한국을 모르면 내가 안내해  수 있......“

쾅.


살인은 안 돼... 여긴 비쓰온 게임이란 곳이 아니야. 재희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항의하듯 차 문을 강하게 닫았다.


"야! 미쳤어? 그렇게 세  닿는  누구한테 배운 거야?!“

그걸 빌미로 재희를 따라 차에서 내린 아저씨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 배상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쩔래?“


미친놈. 문 좀 세 개 닿았다고 배상이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하는 행동을 보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들 상대로 등을 좀 처먹은 듯한 노련한 모습이다.

"아......“


이런 새끼는 콩밥  먹어 봐야 한다고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왔어도 몸은 기억하는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다가 손을 찔러넣어 연락 수단을 찾지만. 아...! 폰이 없다. 요즘 세대에 폰이 없는  말이 안 되었고, 스마트폰이 아니더라도 2g폰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없다.


"꽤 많이 나올 건데. 어쩔 거야?!“


입꼬리는 점점 올라가고, 그의 눈은 노골적으로 재희의 가슴과 바지로 둘러싸인 허벅지로 향해 있다.

"그냥 우리끼리 해결할래. 아니면 경찰 부를까?“
"부르세요.“
"어......?“
"경찰 부르라고요.“

잘못한 게 없는데 경찰 앞에서 쫄 게  있나. 재희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당황하기 시작하고.


"그, 그럴 거야! 한 번 큰코다쳐봐야 알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지만, 재희의 눈치만 살피지 막상 10개의 숫자 중에 정확히 112란 세 개의 숫자를 누르지 못했다.

"칫. 한 번만 봐 준다.“

전화를 하려 해도 꼬리를 내리지 않는 모습에 잘못 걸렸다고 판단한 그는 아쉬움에 화를 더 내며 차에 올라타 택시를 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별 병신 같은 새끼가.“

화가 나지만 그보다 중요한  해야 하니. 넘어가기로 하고, 재희는 곧장 가족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에 도착하고, 허름한 빌라에 들어서 어느 철문 앞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없네.“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은  비어있는 듯 보여 재희는 도어락을 풀어  안으로 들어갔다.


"......“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립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눈가가 축축해졌다.

"바보 같긴......“


어머니와 여동생의 것으로 생각되는 신발이 현관 앞에 놓여 있는데 그것 외에도 재희가 남자였을 때 신고 다녔던 운동화와 눈에 보인다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아버지의 신발이 아직도 현관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가족 때문에 둔 것이라... 재희는 이마를 짚으며 더러울법한 현관 앞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깨끗하네... 재희가 알기로는 이렇게나 깨끗한 신발이 아니었거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며 신발을 깨끗이 빨아둔 것처럼 보인다. 어찌나 깨끗하게, 여러 번 빨아두었는지 중고시장에 새 상품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흐윽... 흑. 어, 어머니.“


지금 당장 어머니를 보고 싶었다. 품에 끌어안은 신발을 가지런히 내려두고 재희는 집을 뛰쳐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어머니의 직장으로 향했다.

"하아... 하아... 어디있으시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본다. 어머니가 하는 일은 아파트 청소부. 청소부로 버는 돈은 정말 적어 혼자서도 먹고 살기 힘든데 식구  명을 먹여 살려야 했다. 당연히 부족할 노릇. 그래서 재희까지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나. 아무튼, 재희는   크기를 자랑하는 아파트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았다.

"아......“

그리곤 발견했다. 1년 전보다 더 쇠약해지고 폭삭 늙은 모습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오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장 어머니를 끌어안고 자신이 당신의 자식이라고, 아들이라고 소리치며 믿어달라 말하고 싶지만. 다리는 못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발......“


눈앞에 어머니를 두고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니. 여태까지 아들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음 조차 들어줄 수 없는 이 불효자... 불효녀인 자신이 무슨 낯짝으로 어머니의 앞에 설 수가 있겠는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욕을 입에 담으며 재희는 돌아섰다.

"5만 원입니다.“

아파트 편의점에 들러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과자나 음료, 음식들을 잔뜩 구매한 뒤에 레이건 박사가  블랙카드로 계산을 끝마치고선 아파트 청소부들이 쉬는 곳으로 향했다. 쉬는 시간이 아닌지라 역시 휴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희는 빵빵한 비닐봉지에 포스트잇을 붙여 고생한다고, 이걸 먹고 힘내 달라는 제삼자가 주는 것처럼 글을 쓴 뒤에 아파트부지를 나왔다.


이젠 여동생인 지연에게 향해야 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걸으면 발걸음은 멈춰서 몸은 뒤로 돌아가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는 아파트가 눈에 담기고, 눈을  감은 채로 돌아서서 한 걸음 걸으며 되풀이 표처럼 다시금 몸이 뒤로 돌아가 아파트로 향했다.

"하... 포기하려고 했는데.“


1조라는 어마 무시한 빚을 갚는 걸 포기하려고 했거늘. 어머니를 보는 순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르게 빚을 갚은 뒤에 당당히 어머니와 지연이의 앞에 서고 싶은 마음으로 굴뚝같았다. 비록 아들이었던 자신이 여자가, 딸이, 언니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비참하게 몰래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이걸 노렸나......“


휴가를 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레이건 박사가 노린 실질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게 아니었나. 재희는 생각했다. 진짜 악랄하네. 레이건 박사는 재희에게 좋은 것들과 조언 등을 해줘서 그런지 착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역시 지옥 같은 비쓰온 게임 측 사람이었다. 빚을 갚으려는 욕망을 쿡쿡 찌르는 것. 민정이와 예림이, 유지나와 사쿠라, 그리고 이지원까지. 그녀들의 빛을 다 갚아 바깥으로 내보내는 즉시 가게를 차려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무인도에서 한 달이라니. 그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니. 불가능.
이야. 돈이 급한 지금이라면 이를 악물고 하고는 있어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때문에 1조라는 빚을 제외한 나머지 빚을 갚는 즉시 헤븐에서 할만한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했구만, 레이건 박사나 게임 측에서는 이러한 재희의 생각을 예상이라도 한 듯, 휴가를 턱 준 것 같다.


그들의 노림수에 그대로 넘어간 듯한 기분에 재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된 거, 한 달간 보지도, 소식도 듣지 못한 가족들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재희가 게임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외통수였다. 그들의 계략에 사로잡혀 생각대로 움직여준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재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지연이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그녀, 여동생인 지연이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을까. 납치되기 전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녀였다. 지금이 4월이니까 아마도 대학교에 입학하여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한 캠퍼스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어떤 학교에 입학했는지는 모르지만 재희가 집에 있었을 당시 지연이는 공부를 무척 잘하였고, 재희가 입학했던 학교를 노리고 있었기에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대충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머뭇거림 없이 택시에 올라타 재희가 입학만 하고 곧장 휴학을 내어 단 한 번도 눈에 담지도, 발로 밟아 보지도 못했던 대학교로 향했다.


"와... 연예인이야?“
"존나 예쁘네. 번호 물어볼까?“
"신입생...?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학교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 학교를 빠져나오고 있던 새내기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서서히 고여지기 시작하는 대학생들, 마지막으로 취업이란 문턱을 앞에  고민 많은 고인물들까지 은발과 적 안을 가진 초월적인 미녀 재희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과가... 있었지?‘

고등학교에도 이과랑 문과가 있었는데  틀이라 학교 안에서 사람을 찾는다면 무척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는 고등학교랑 달리 과가 손가락으로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이곳 대학교는 한국 제일의 학교이기 때문에 다른 학교랑 비교되도록 학생 수, 그리고 과의 수도 많았다.

무턱대고 지연이를 보러 찾아오긴 했지만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이미 캠버스를 벗어나 새로 사귄 친구들이랑 놀러 나갔을 수도 있고, 아직 학교 안에 남아있을 수도 있지만 찾으러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엇갈릴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캠퍼스의 크기가 말도 아닌데.

"아, 안녕하세요?“


잘생긴 외모라 자신의 외모에 자신있는 한 남자가 다가와 재희에게 다짜고짜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신입생?“


신입생이라면 이렇게 예쁜 여자를 보지 못했거나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학생이 아니라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자는 신입생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각또각.

남자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자 신고 있던 구두는 요란하게 소리를 흘렸다. 걸음 소리는 오직 하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전부가 재희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소리는 없었다.


'찾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여동생 지연이가... 학교를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동생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여자와 처음 보는 여자들, 그리고 그녀들 중에 가장 예쁜 외모인 지연이를 노리는 듯한 늑대 같은 남자들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다행이네......‘


다행이게도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도 있는데 그래도 어두운 표정으로 새로운 친구조차 사귀지 못하고 홀로 다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재희의 적색의 눈이 번쩍였다. 그야 그럴 것이 지연이에게 다가와 노골적으로 신체접촉을 하려 하는 한 남자 때문에. 지연이도 그가 좋은 듯한 반응이면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라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아......“

자신을 바라보는 재희의 시선을 느끼고, 지연이는 발걸음을 멈추고선 눈앞의 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를 따라 지연이의 친구들까지도 시선이 고정되고.

"안녕하세요?“

지연이가 싫어하던 신체접촉을 하던 남자가 선뜻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뒤지려고.‘


동생의 연애 사정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는데 지연이를 노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그녀보다 더 예쁜 여자를 발견하는 순간 돌아서는 게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

"너무 제 스타일이라 그러는데 전화번호를 좀... 아. 한국어 가능하세요? 음... 헬로우?“
"010-****-****“
"네? 다, 다시 불러주시겠어요?“
"010-****-****“
"감사합니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란다고 바로 알려줄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현실이 믿기지 않아 넋을 놓았다. 재희는 마지막으로 지연이의 얼굴을 눈에 담은 뒤에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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