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7화 〉107 휴가 (107/140)



〈 107화 〉107 휴가

1년 365일 따뜻했었던 비쓰온 게임 내의 헤븐과 무인도는 확실히 동북아시아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야 그럴 것이 거의 1년 만에 비쓰온 게임에서 벗어난 재희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동남아 특유의 피부색을 가진 이들뿐이었으니까.

"휴가라......“

한 번 비쓰온 게임에 들어간다면 빚을 모두 다 갚기 전까지는 빠져나올 수가 없지만, 재희는 지금 밖에 나와있는 상태였다. 빚을 다 갚지도 못했는데. 그럼 꿈일까?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처음 보는 광경이 주위에 펼쳐져 있다. 꿈은 대체로 기억에 있는 장소가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도 아닌 머나먼 이국 땅이 굳이 꿈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충격적인 민정이의 말을 들었고, 그다음 날에 마침 깨어났다는 것처럼 연기했던 재희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건 박사가 찾아왔다. 망할 노인네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했다. 휴가를 주겠다고. 잠시 밖에 나가서 마음 편히 쉬고 오라는 말을.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지만 그 이유에 대해 들으니 이해할 만......


"이해는 지랄. 시발.“


세 개의 게임에 연속으로, 또, 강제적으로 참가한 거로도 모자라 흥미진진하게 재희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악명높은 사형수, 수감자들을 몰래 빼  재희가 참가한 게임에 잔뜩 넣었다고 했다. 그러니 골드 등급 게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미친 듯이 상승한 거겠지.

이지원은 아픈 재희를 대신하여 싸우느라 정말 죽을 뻔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아우성을 치었을 정도였다. 사람 목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시간이 지난다면 등급이 올라감에 따라 강자들이랑 싸워야 할 텐데. 고작 그 몇 년을 기다리지 못해 이런 병신 같은 짓을 벌인 후원자들을 찾아가서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레이건 박사는 그런 재희의 심정을 이해하고, 생각까지도 예상했는지. 후원자들은 하나 같이 세계를 휘어잡을  있는 대기업의 회장들, 권력가들이라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휴가를 받아 바깥에 나온 재희는 후원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따지거나 죽일 수가 없었다.

"일단... 한국에나 갈까?“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휴가를 여기서 헛되이 보내고 싶지도 않으니 일단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참고로 휴가를  정확한 이유는 너무 힘든 나머지 재희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째라는 식으로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애인들이 있긴 하여도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미쳐서 애인들을 생각하지 않고  째라는 수도.


솔직히 지들 멋대로 석 달 연속으로 무인도에 보내지 않나. 전 세계에서 유명한 악질 범죄자들을 데려와 싸우게 만들지 않나. 만약 휴가를 주지 않았으면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받았으니. 이해하고... 이해... 그래. 이해해야 하는데. 시발. 이해는 무슨. 어떻게든 장난으로 넘기려고 해도 목숨이 오락가락했는데 도저히 이해 못 한다.


그리고 휴가를 받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명. 재희만 가능했고, 만약 도망가는 즉시 애인들을 성처리 변소로 만들어 버린다는 협박을 받아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들을 비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고, 그 무엇보다 돌아갈 집, 그런 집에 있을 가족들에 대한 정보도 알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칠 자신도 없었다.

비쓰온 게임이라는 곳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모른다. 하지만 헤븐이라는 커다란 섬에 수많은 사람을 모아둘 능력이 되었고, 총 6개의 대륙을 본다면 규모를 대충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었고, 레이건 말처럼  세계를 휘어잡는 권력가들이 후원하고 있다면 우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 이 기회에 푹 쉬고 돌아가기로 한다.

"먼저. 집에 갔다가. 민정이 가족들, 예림이 가족들, 마지막으로 유지나네 어머니를 보면 되겠지?“

자신을 팔아넘긴 예림이는 가족들은 꼴도 보기 싫다지만 그래도 딸을 팔아 넘기고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 알고 싶다며 예림이는 한 번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와 다른 의미로 가족들, 어머니가 걱정된 민정이와 유지나는 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하고. 이지원은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하며, 사쿠라는 가족들에 대해 궁금하긴 하지만 고작 일주일의 휴가. 다른 여자들의 가족 사정까지 아는 데에만 시간이 걸리는데 일본까지 가게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빠르면 이틀, 늦으면 약 3일 안이면 충분히 다 돌아볼  있지 않을까. 재희는 판단하였고, 나머지 4일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의문이었다. 사쿠라가 집주소를 알려주었으면 일본에 가보기라도 할 텐데. 왠지 이럴 것같다며 알려주지 않아 헛짓거리를 하러 일본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쩝.“


공항에 들러 한국행 비행기티켓을 끊은 재희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4일... 4일이라.  게 없는데. 취미도 없고, 친구도 없고, 있더라도 여자가  몸으로 만날 수야 있을까. 그리고 집에 들어갈 수도 없다. 아들이 잠시 실종되었다가 1년 만에 돌아오니 딸이 되었다고. 약 4일 만에 이해시킨 뒤 떠나는 게 과연 가능이야 할까.

그리웠던 따뜻한 온정이 가득한 집에서 다시 지옥 같은 헤븐으로 돌아가고 싶을 마음은  사라질  분명하고,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재희를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의미 없는 도망을 준비할 수도 있다. 재희라도 자식이 그런 곳에서 있었다고 하면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발악할 테니까. 뭐, 이건 사실을 털어두었을 때의 일이고, 재희가 걱정하는 건 전자였다.

"게임이나  볼까?“

헤븐에서 인터넷 사용은 불가다. 인터넷을 이용해 정보를 퍼뜨리며 살려달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크고, 후원자들이 있더라도 일반인들에게 소문이 퍼지면 곤란할 노릇. 그러니 게임에 푹 빠져있던 사람들, 예림이가 게임을 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나중에 피시방이나 들러보기로 했다.


"돈은 많으니까.“


레이건 박사가 카드를 하나 주었다. 한도를 걱정하지 않고 막 써도 되지만. 뽑을 수 있는 돈은 딱 천만 원. 그래서 몇억을 뽑아 집에 두고 나오지는 못하지만, 카드로만 쓰면 한도 걱정이 없었다. 아니, 걱정하는 게 이상한가. 고작 피시방인데. 비싸 보았자 얼마나 한다고.

"hello?“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상태로 다리를 꼬며 고민에 빠져있던 재희에게 두 남자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

동양보다는 서구적인 느낌이 강한 재희라 그런지 당연히 유럽 아니면 아메리카에서 온 사람으로 판단한 두 남자. 동남아 원주민은 누가 보더라도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를 음흉하게 훑고 있었다.

"!#$##@!%“


뭐라 말하고 있다. 재희가 알기로는 동남아 국가들 대부분이 영어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나라는 그렇지 않은지, 듬성듬성 영어를 섞어서 무어라 말하고는 있긴 하지만 알아듣기가 매우 힘들었다.

"ah?“


조금씩 들리는 바로는 뻔하기 뻔한 작업을 거는 말이다. 굳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으며 마침 타이밍 맞게 비행기 시간이 되었으니 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아름다운 뒤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뒤를 밟아 어깨를 잡는다.


"Hey!“

그 때문에 걸음이 멈추고.


"귀찮게. 진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어깨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잡아 비틀었다. 그대로 몸까지 비틀어지며 남자는 다급히 재희에게 놓아달라는 영어 같지 않은 영어를 구사하다가 이내, 옆에 있던 자신의 친구를 향해 소리쳤다.

"!#@!$“

자국어를 쓰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재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재희의 몸에 닿기도 전에 시야가 반전되며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Get lost, mother fucker.(대충 꺼져 새끼야. 라는 뜻.)"
"......“
"......“

욕이라는 건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어 보이는 저 곱디고운 외모와 입술에서 밑도 끝도 없이 욕이 튀어나오자 그들을 넋을 놓고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재희의 외모에 홀린  시선을 고정시킨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소란스러움에 눈길을 가져온 사람들까지 전부가 말이다.

"쯧... 기분만 잡쳤네.“

당연히 기분이 좋아야 하는 휴가 가는 날에 벌레들이 꼬이다 못해 옷에까지 닿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여기가 게임 안이었다면 이미 레이피어에 목이 꿰뚫어 죽어있을 게 분명한 두 남자를 두고 재희는 빵빵한 캐리어를 끌고 아까 가다가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비행기 탑승구에 도착하고 앞에  있는 승무원에게 표를 건네자.

"저... 손님. 여기가 아닙니다.“
"아.....?“
"여기가 아니라 저쪽으로 쭉 가시다 보면 나와요.“
"가, 감사합니다.“


재희는 비행기가 처음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보지도 않았는데 어찌 외국 공항에서 길을 잘 찾을까. 재희는 애써 이곳이 복잡한 곳이라 납득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안 그래도 은발 때문에 얼굴을 숨겨도 따라붙는 시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창피함에 붉게 물든 얼굴을 가리며 제대로 된 탑승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하아... 좋네.“


좌석은 비즈니스도 아닌 퍼스트클래스. 꽤나 인심 써 준  아닌가. 좌석에 몸을 뉘우자 의자가 어찌나 푹신한지 노곤한 몸을 사로잡아 지금 당장이라도 잠에 빠뜨리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비행기는 달리다 말고 이륙했다. 창밖엔 서서히 지면의 모습이 사라지고 온통 푸른색 하늘만이 가득해졌다.

"쩝... 출출하네.“


비행기가 이륙한  얼마나 되었다고. 재희의 배는 꼬르륵. 밥 달라고 앙탈을 부렸다. 기내식. 퍼스트클래스는 기내식이 무제한 무료가 아닐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들은 정보로는 그러했는데. 때문에 티켓 가격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것이고. 뭐, 무료가 아니더라도 레이건 박사가 직접 손에 쥐어준 블랙카드가 있으니 걱정 없이 음식을 주문할 수가 있으니 재희는 마음 편히 앞에 놓인 스크린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푸아그라, 캐비어, 샥스핀 등등... 입에 대보기는커녕 눈으로 보기도 힘든 고급 요리들이 즐비하자 더욱 더 먹을 걸 고르기가 힘들었다. 간단하게 비빔밥 같은 게 있다면 곧장 그걸 시킬 텐데. 아무리 손가락으로 옆 페이지로 옮겨 보아도 나오는 건 가격이 붙어있었더라면 숫자가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게 분명한 고급 요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딱히... 먹어보고 싶지는 않네.


"아. 라면.“


저 조그만 것들로 배가 찰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먹을 만큼 여러 개를 주문했다가는 눈치가 보이기에 재희는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겨보았고, 드디어 익숙한 음식. 라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굶주린 배를 채우거나 특이 취향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메뉴. 라면. 바로 주문했다.


배불리 라면을 먹어 치우고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많아 남아 있기에 잠을 푹 자니 어느새 비행기는 한국 상공을 날고 있었다. 20년 간 살아온 한국이긴 해도 이질적인 모습인데 하늘에서 보니 아름답기만 한 광경.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레이건 박사가 재희에게 알맞은 겨울용 옷을 구해다 주었나 보네. 한국은 지금 추우니까.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질질 끌고 화장실로 향하였다. 그리고선 캐리어를 열어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벗은 옷은 캐리어에 넣었다.

"예쁘네.“

긴 팔, 긴바지, 코트에 예쁜 얼굴까지. 완벽함 그 자체였다. 솔직히 이 외모에다가 신문지로 이루어진 옷을 입혀 놓아도 예쁘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재희는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칼을 정리하며 자신의 외모에  빠져버렸다. 헤븐에 있었을 땐, 가벼운 옷만을 추구했지만 이렇게 차려입으니 얼굴은 평소보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


덜컥.

꽃단장을 끝마친 재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헙.....!“

같은 퍼스트클래스의 승객은 우연히 마주친 재희를 보고 숨을 멈추며 넋을 놓았고, 눈앞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몇 분 뒤에 정신을 차렸다.

"와......“


자리로 돌아가면서 예쁜 얼굴을 가진 스튜어디스는 재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녀의 반응에 흥미를 느낀 승객이나 다른 스튜어디스는 빼꼼 고개를 내밀어 재희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감탄하는 사람들. 이미 헤븐에서 익숙해질 정도인 반응들이라 아랑곳하지 않으며 재희는 자신의 자리로 가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봤자. 몸뚱이랑 캐리어뿐이었지만.


자리에 앉아서 비행기가 완전히 착륙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으며 비행기를 나와 공항에 들어섰다. 한국 특유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지만  대신에 한국인들의 시선은 엄청나게 느꼈다.

"어머니... 지연아.“


드디어 한국. 그리고 너무나 그리워했던 어머니랑 여동생. 지연이를 입에 담았다.

"지금 만나러 갈게.“

얼굴을 맞댈 수는 없겠지만 멀리서라도 얼굴을 봐야겠었다. 그래서 재희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공항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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