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101 이벤트 게임
현대 문물이란 주위를 눈을 씻고 아무리 둘러보더라도 찾아볼 수가 없는 이곳 무인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성별이 어떻게 되던 아무런 관계없이 모두 적이며 살기 위해선 당하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장소 그 자체,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한 여성, 이지원은 손에 들린 단검을 휙휙 돌리며 겁은커녕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발년... 처음 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오야마 히카루.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이 넘어가는 시간 전에 있었던 게임에서 만난 악연이었다.
"죽일거야... 반드시 네년을 죽이고 말 거야! 씨발년아!“
똑같이 단 검을 들었고, 심지어는 히카루가 단검을 하나 더 들고 있는데 싸움에서 지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는 히카루는 여전히 증오를 풀지 않은 채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향해 손에 들린 검을 휘둘렀다.
"그 정도로 날 죽일 수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무 한심한데?“
싸움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판단이었다. 과연 자신이 눈앞의 상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유심히 살펴본 뒤에 판단을 내리고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히카루는 오직 증오에 눈이 뻗쳐 실력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금 덤벼들었다.
"으아아아!“
왜... 왜 맞질 않는 거야?! 온 힘을 다해서 휘두르고 있는데 반격은커녕 그저 피하기만 하는 저년의 몸에 대체 왜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이쯤이면 자신이 이기질 못할 강한 상대라고 확신을 얻어야만 하는데 히카루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뒤져어어어!“
우연... 그래. 천운이 따라주니 피할 수가 있는 거다. 실력 차이? 저 여자와 안 날 게 분명한데 천운 때문에 아직까지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라 혼자 납득을 하며 더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무턱대고 감행했다.
"어흑!“
그러나 피하기가 힘든 공격이라 할지라도 그 공격을 하기 위해선 몸이 무방비상태가 되기 마련. 이지원은 태연하게 그녀의 배에다가 발을 올려 강하게 밀어버렸다. 또다시 한심하게 넘어지는 히카루.
"너무 약하다 너.“
같은 연약한 여자의 신체라서 그런지 저번에 싸웠던 근육질의 남자와 비교하면 너무 쉬운 상대였다. 살갗을 베면 곧장 뼈에 닿으며 치명상이라 그런지 잘못하다간 죽여버릴 것만 같아 이지원은 조심하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내가 죽이면 안 되지. 암.‘
재희가 여자들을 두고 두 번째 게임을 하러 간 사이 이지원은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비쓰온 게임에 대해, 헤븐에 대해, 게임 진행 방식과 반드시 숙지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을 꼼꼼하게 설명받은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하나의 사실. 헤븐에서의 살인은 무조건 금지되며 처벌도 사형에 가까웠다.
그래도 살인을 저지르려면 가능이야 하지만 아무리 꼬리를 숨기고 방패막을 세워 본들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실행범과 사주범은 게임 측에 잡힐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재희가 게임에 참가하여 곁에 없는 아주 좋은 상황임에도 그런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으며, 세 번째 게임에 들어온 지금에 와서야 그토록 기다리고 준비해왔던 일을 실행에 옮길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아오루 아키라, 아오야마 히카루, 김이연이라는 자위기구들을 죽이는 것. 마침 동성애를 갈망하는 재희의 곁엔 오직 자신. 이지원만 있으면 충분하다.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좋지, 능력도 괜찮지. 이런 여자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나 있을까. 당연히 재희는 자신에게만 푹 빠져야만 하며, 다른 여자들은 필요가 없었다.
"빨리 다른 년들도 죽여야 하는데."
그녀는 게임 측의 배려로 특별히 재희와 같은 골드 등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여버리려면 당연히 게임 안에서 죽여야만 하는데. 기존에 있던 재희의 애인들로 보이는 이민정과 김예림, 그리고 사쿠라와 유지나는 죽일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등급은 고작 브론즈에 해당한다.
이지원과 만날 수 있는 게임에 참가하려면 골드 등급까지 올라와야 하는데 아무리 짧게 잡아도 족히 일 년은 충분히 넘겨야만 하며, 그동안 이지원은 여기서 정체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마침 재희와 같은 등급인 데다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지간한 남자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도 전혀지지 않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기에 펫처럼 재희를 졸졸 따라 수많은 게임에 참가할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지금도 이렇게 같은 게임에 참가한 게 아닌가. 그러니 브론즈 등급에서 차차 게임에 참가하여 등급을 올리기 시작하는 그녀들을 따라 이지원과 재희 또한, 등급이 올라갈 것이다. 심지어는 빚이 1조라는 사실에 등급이 높음에 따라 인원이 부족하여 잘 잡히지 않는 게임이라도 잠시의 여유조차 갖지 않고 급하게 돈을 벌려고 무작정 게임에 참가할 것이 분명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은 가능한 게임에 신청서를 마구잡이로 써넣어 인원이 꽉 차여 게임이 잡히길 애타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미친년... 다 죽이게?“
이지원의 중얼거림을 들은 히카루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아. 들었어? 응. 다 죽일 거야. 재희에게 붙은 여자들 전부를.“
"하하. 병신이. 그게 될 것 같아?“
"음... 힘들겠지? 그래도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세 명을 죽여야만 했다. 히카루가 눈앞에 있으니 남은 건 두 명. 아키라와 김이연. 솔직히 말해서는 헤븐에 있을 여자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참으로 의문이다. 그걸 아는 히카루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어차피 죽을 거 조금이나마 증오하는 대상인 이지원의 화를 부추기려 했다.
"불가능할 거다. 미친년아.“
"아아. 왠지 그럴 것 같아. 알고 있으니까. 그만해.“
만나기로 한 장소를 미리 정해 두었기에 재희가 두 명의 여자랑 먼저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만 이지원은 지금 발목을 붙잡혔다. 왜냐하면,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지금 히카루를 죽였다가 나중에 재희가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상함을 느끼면 어떡할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한데 똑똑한 재희라면 왠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쓰읍... 뭐로 죽이지?“
배 위에서 단검을 들고 있던 사람은 이지원과 히카루. 단 둘뿐이었다. 물론, 못 본 사람이 존재할 수야 있겠는데 굳이 보지 못했을 대상을 경계하기보다는 히카루의 몸에 단검으로 생긴 상처를 보고 바로 이지원을 의심하는 게 일방적이었다. 어차피 알고 지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어떠한 갈등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교도소에서 수감 된 이유는 보면 오래된 친분, 혹은 가족을 죽여서 잡혀 들어온 이가 여럿 있었다.
"목을 졸라?“
목을 조르면 모르지 않을까. 그런데 재희가 왜 괜히 무기가 있는데 목을 졸라 죽였다고 의심하지 않을지.
"사고사?“
발을 헛디뎌서 죽은 것처럼 만들까. 어떻게? 사고사로 죽으려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할 텐데 찾아본다면 절벽과 같이 충분히 사고사로 죽을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아까 말했다시피 시간은 촉박하기에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아아. 곤란한데. 곤란해."
교도소로 오기 전에 하던 짓이라곤 cctv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사람을 납치해 집으로 데려오거나 춤을 추며 평범한 인기 아이돌 행세를 할 뿐이었던 이지원에게는 너무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뒤지면 곤란하지 않을 거야! 시발년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이지원을 향해 히카루가 달려들었다.
"아 시발. 좀!“
푹.
"아......?“
자고로 단검을 쓰는 암살자는 빠르게 목표물을 죽이기 위하여 급소를 효과적으로 찔러 죽이는 방법은 연마한다. 그걸 익힌 사람이 스승님이었고, 그녀의 제자가 바로 이지원이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뛰어난 재희 때문에 생각이 많아져 짜증이 나는데 그런 이지원에게 갑자기 달려드는 히카루의 모습에 화가 나서 무의식적으로 목을 베어버렸다.
"커헉... 컥.“
피가 줄줄 흐르는 목을 부여잡으며 히카루는 무릎을 꿇었다.
"아... 씨. 좆됐다.“
히카루는 어떠한 이유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무방비하게 단검을 휘둘렀지만 그게 큰 역효과로 낳게 됐다.
"주, 주기 시러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적을 죽이거나 붙잡혀서 모든 걸 다 하는 성노예로 살아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바보 같은 행동. 그냥 고민하는 이지원을 두고 도망쳐야 했는데 재희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가 머릿속에 떠올려지니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무턱대고 움직였다가 몸이 서서히 죽어가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재, 재희야......“
환영이 눈에 보인다. 은발과 적안을 지닌 예쁜 재희가 다가오는 모습이.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며 나무밖에 없는 숲속을 보며 애초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카루는 끝내 숨을 멈추었다.
"영화 찍어?“
혼자 뭐해. 죽으면 그냥 곱게 뒤지지. 황당할 따름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떡하지?! 어떡해!“
실수로 단검으로 죽여버렸다. 최소한은 다른 무기로 죽이든가 해야 의심을 안 받을 텐데. 묻어...?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게 묻어야 하나? 그러면 다른 두 년을 죽일 시간이 촉박해지는데? 만나기 쉬운 산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나무에 새겨놓기로 하여 만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단축하기로 했었다.
"아아. 돌겠네. 진짜.“
어쩌면 하루 만에 김이연과 아키라가 재희와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함이 다가오자 머리를 감쌌다. 그러던 그때.
"히카루?“
히카루가 나무에 새겨놓은 표시를 따라 걷다 보니 발견한 건 이지원과 그녀의 발밑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히카루의 모습에 김이연은 사고를 멈추었다. 언니 동생 하는 사이로서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아 이젠 정말 피가 이어진 각별한 자매 사이라 해도 무방한데. 그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아니야. 아니야. 히, 히카루. 히카루우우!“
현실을 부정하며 그녀를 죽인 이지원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히카루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시체가 된 히카루를 안아 들어 몸을 흔들어 보지만 반응하는 건 목에 새겨진 커다란 상처로부터 흘러나오는 피의 존재뿐이었다.
"아아아아!“
고개를 세차게 저어보고 이건 히카루가 아니라고 최면을 걸어보아도 여전히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있는 히카루가 보여왔다.
"너지...? 너지이이이!“
이지원의 단검에 피가 묻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지원밖에 없었다. 그러면 범인은?
"죽일 거야... 죽일 거야아아!“
근접전에서는 국궁을 쓰는 김이연이 가장 약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걸 김이연 자신도 충분히 깨닫고 있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랄은.“
국궁을 꺼내고 가방 옆에 달린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꺄윽!“
손쉽게 국궁을 쳐내고 뺨을 찰싹 때리자 김이연은 연약한 소녀처럼 옆으로 풀썩 엎어졌다.
"이년은 또 어떻게 죽이지“
히카루 다음에 바로 김이연이라니. 정말 운이 좋긴 한데 어떻게 죽여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숲속에서 죽일 거리는 많은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로 죽이는 게 너무 이상할 따름이었다.
"개새끼... 개새끼이이이!“
죽인 히카루가 떨어뜨린 단검을 들고 다리를 향해 휘두른다.
"귀찮게 하네.“
기습할 거면 눈에 띄지 않게 해야지. 대놓고 단검을 집으러 몸을 움직인 거로도 모자라서 욕까지 하며 나 기습한다? 말해주는데 어찌 못 피할까.
"아윽!“
이번에도 발로 뺨을 차 주자 아까와 다르지 않게 옆으로 엎어졌다.
"후유~! 여자다.“
소리를 꽥꽥 지르는 김이연 덕에 남자 두 명이 찾아왔다. 이지원이라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자의 모습에 감탄하며 한 명도 아닌 두 명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야. 이년 가져가. 바로 죽이든지, 범하든지 알아서 해. 그 대신에 나중엔 꼭 죽여야 해.“
잠시 의식을 잃은 김이연의 팔을 잡아 남자들에게 내어준다. 참 좋은 생각이 아닐 수가 없네. 이 두 년은 저 남자들에게 죽은 거다. 이지원은 씩. 웃으며 히카루의 단검 하나를 여전히 피가 줄줄 새고 있는 히카루의 목에다가 가져갔다가 곧바로 떨어뜨렸다. 이러면 이거에 목이 베였다고 생각하겠지. 피가 묻은 자신의 단검을 닦아대며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려고 이지원은 발길을 돌렸다.
"커흑......“
".....?“
그랬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의문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니 기껏 김이연을 주었건만. 남자들은 그녀를 죽였다.
"앤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될 것 같네."
충분히 예쁘긴 한데 이지원을 더 원하는 남자들의 욕심은 과했다.
"병신들이 진짜.“
인간은 너무 욕심이 과해요. 그 욕심은 때론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