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097 이벤트 게임
"네가 말한 미친년이 저거야?“
"그래. 맞다.“
재희의 물음에 남자는 무기를 들어 경계를 갖추기 시작하며 긍정했다.
'음... 예쁘네?‘
피와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먹어 더러워진 옷과 먼지 범벅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녀의 외모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더러워 매력이 뚝뚝 떨어질만한데 사쿠라 못지않은 엄청난 미녀라는 사실만으로 호감도가 급속도로 상승했건만. 그녀의 발에 밟혀있는 남자를 보면 확실히 미친년처럼 보이긴 했다. 그래도 뭐 재희만 할까. 재희도 정말 어지간히 미쳐있었으니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데?‘
그 증거로 재희는 잔혹해 보이긴 해도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곁에 두기 정말 괜찮은 여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예쁜 외모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야?“
"나?“
"응. 이름이 뭐야. 궁금해.“
양 허벅지와 팔 한쪽이 단검에 찔려 피가 줄줄 새고 있는 남자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재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조심해라.“
순수하게 이름을 묻고 있는데 남자는 더 이상 다가오면 베어버린다는 듯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헤에...? 너 신기해.“
재희를 보는 눈빛처럼 그녀 또한, 여자가 아닌, 적 그 자체로 보고 있자 신기했다.
"나 안 예뻐?“
"......“
"알려줘. 나 예쁘지 않아? 혹시 못생겼어?“
이런 적은 처음이라 몹시 궁금했다. 남자들이라면 하나 같이 전부 음흉한 눈빛으로 몸을 훑어보는데 그는 그렇지 않아서 호기심에 질문을 던져보았다.
"안 예쁘구나?“
예쁘게 보이기야 하겠지. 그러나 그의 옆에 서 있는 재희를 보니 굳이 말할 가치가 없어 보이긴 했다. 이렇게나 예쁜 여자가 곁에 있는데 그녀의 외모가 눈에 들어올까.
"이름이 뭐야?“
"윤재희.“
"아...! 윤재희! 이름 정말 예쁘다! 나는나는. 이지원이야. 나이는 몇 살이야? 보기에는 언니 같은데!“
뭐지 애... 양 허벅지와 팔이 칼에 찔린 자국이 보이면서 엎어져 있는 남자를 보아서는 사람을 죽이는데 껄끄러움이 없는 살인마였는데.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순수한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물하나.“
"와! 어려! 난 스물다섯이야. 너보다 내가 네 살 더 많아! 자. 나한테 언니라고 해 봐!“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언니라 해보라니. 적인 사이인데. 뭐이리 겁이 없는지. 급기야 황당함이 찾아와 손을 흔들었다.
"싫다면?“
"우우, 언니라 해줘어. 나보다 예쁜 동생한테 언니란 소리 듣고 싶어어!“
이젠 떼까지 쓰다니. 스물다섯이면 알건 다 알고, 머리도 성장할 만큼 다 해서 자괴감이 들법한데도 불과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동동거리며 떼를 썼다.
"그럼. 싫어.“
"......“
다시금 싫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이지원은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싫으면 말아. 근데... 계속 싫어할 수 있을까?"
"......!“
그 말을 끝으로 이지원은 곧장 남자에게 다가가 단검을 휘둘렀다.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자세를 잡고 있었으면서도 힘겹게 그녀의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을 한 번 피했다고 여유를 찾을 리가 없는 노릇. 계속 이어지는 공격이 그에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오... 만만치 않은데?‘
둘이 편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함께 나온 여자 셋과 거리를 벌린 재희는 둘의 싸움을 관전하며 전력을 계산했다.
'저게 본 실력이라면 대단하긴 한데. 그래도 내가 못 이길 정도는 아니야.'
이지원의 실력을 등급으로 따진다면 충분히 색깔 등급에 올라도 전혀 이상함이 없었다. 그 정도로 타고난 센스가 재희의 승부 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한번 싸워보고 싶을뿐더러 갖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아!“
작고 커다란 상처가 몸에 점점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재희는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고, 이 상태로 막기에 급급하면 언젠가는 죽을 게 분명하여 남자는 반격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내찔러지는 칼날을 무시한 채, 커다란 피해와 확실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도록 가로로 대검을 휘둘렀다.
"무식하게 힘만 세구나? 그래도 뭐, 여태까지 만난 애들 중에서 네가 가장 강한 것 같아.“
힘은 정말 세서 잡히는 순간 그대로 이지원의 패배가 분명해져서 신중히 공격에 임하고 있었다. 만약 이판사판으로 달려든다면 그도 죽고, 이지원도 마찬가지로 죽을 게 분명했으니. 조심해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치명상은 주지 못해도 자잘한 상처를 주는 공격을 이어나가면서 반격을 할 것 같으니 곧바로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유히 뒷걸음을 치며 가로로 휘둘러진 대검을 피한 그녀는 감탄한 듯 박수를 쳤다.
"하아... 하아......“
그러나 그 박수를 받으며 칭찬의 말에도 기뻐할 여유를 부리지 못하는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새로히 상처가 생겨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쯧... 역시 무리인가.‘
그도 역시 여자는 남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단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죽을 위기에 처하니 생전 처음으로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언제 어디서 또 들어올지도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재희를 힐끔 바라보자 재희는 알아서 잘해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소를 흘렸다.
'시발년.‘
재희를 동료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희도 그랬는지 자신을 도와줄 생각하지 않자 업보임에도 이를 강하게 갈아버렸다. 그래도 남자는 목숨을 빚진 사쿠라의 부탁 때문에 이번 게임에 한해서 재희를 무조건 도울 생각으로 가득 했구만. 도움은 필요없다는 듯이 재희는 외면했다.
"이번에도 내가 갈까?“
단검을 붕붕 돌리며 이지원이 물었다.
"와라.“
피할 수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면 죽더라도 맞서 싸울 뿐이다.
"으아아아!“
이지원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남자는 대검을 쳐올린 뒤에 내려찍으려 했다.
"힘은 센데. 너무 느리다.“
대부분의 남자가 이러했다. 힘은 정말 세긴 한데 무식하게 그 힘을 믿고 싸우려는 게. 자고로 싸움은 힘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힘이 중요하긴 한데 그와 비슷하게 중요한 게 판단과 스피드라고 이지원의 스승님은 말했다. 대각선을 그리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찍히는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이지원의 나풀나풀하는 머리카락 몇 가닥 베여 아래로 떨어졌다.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그에게 지금 치명상을 입히려 한다면 도리어 이지원이 배로 당할 수가 있었다. 가장 위험한 적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어차피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미친놈들이니까. 그로 인해 일단은 치명상보단 작은 상처들을 늘리는 게 중요했다.
서걱.
"큭!“
팔뚝을 감싸던 옷은 깔끔하게 찢어지고, 찢어진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크아아아!“
얼마나 상처를 입던 지금은 무조건 딱 한 방이라 맞추는 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허공을 가르고 땅에 처박힌 대검을 순수한 힘만을 이용해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오우! 위험해!“
역시 위험하다.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달리 속으로는 잘못하다간 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음... 무기 차이가 심하네.‘
단검과 대검의 차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신체 구조적 차이가 정말 크게 작용했다. 주로 쓰는 무기가 단검이긴 해도 대검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 단검을 쓰는 이유는 좁은 지형이나 기습을 할 때 사용해야 가지고 있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 아니니 당연히 힘을 모조리 다 쏟아낼 수가 없는 노릇. 심지어는 상대방이 칼날이 긴 대검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힘들어진다.
'어떡할까?‘
이지원은 고민했다. 스승님의 말에 따르면 싸움 재능은 엄청난데 힘은 약해서 아무리 근력을 길러보더라도 한계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되도록 속도에 몰방했는데 지금 상대는 빠른 속도가 통할지언정. 무지막지하게 단련한 근육들이 방패 역할을 하니 효과적인 피해를 주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먼저 지쳐 쓰러지는 건 이지원이 되지 않을까.
'저거 반칙이야! 솔직히 단검이라면 몰라도 대검을 쓰는 게 어딨어?!‘
21세기에서 단검은 군과 암살자들, 더 가보면 일반인들까지도 쉽게 쓰는데 대검은 사용하는 사람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러니 대검과 싸우는 법을 숙지했을 리 없는 이지원은 답답함에 땅을 강하게 박찼다.
"싸워 볼 만하네.“
방법을 물색하고 있던 이지원의 귓가에 계속 들어도 질릴 리가 없던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이제 필요 없어.“
푹.
약 10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을 죽여오면서 이지원과 같이 단검을 쓰는 참가자들이 몇몇 있었다. 재희가 생각하기로는 다른 무기들은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쓰는 걸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게임 측에 대여한 무기나 개인 무기를 가져다주면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아두었고, 단검은 레이피어와 같이 허리춤에 항상 꼽고 다녔었다. 이렇듯. 사용할 일이 많을 테니까.
"아.....?“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싸움에 끼어든 거로 모자라 이지원이 아니라 남자 자신을 향해 단검을 던져 목을 맞췄다는 사실에 두 눈이 부릅떠졌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동료처럼 함께 무인도에서 생활한 자신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이는 걸까. 죽여도 거의 마지막 날이 될 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에 기습을 하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확히 목에 꽃힌 단검. 심지어 깊숙이 박힌 탓에 반대편으로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거의 즉사에 가까운 일격. 그로 인해 남자의 몸은 기울어졌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그는 죽어서도 자신을 죽인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동료 아니었어?“
"동료라니. 내 200만 원한테.“
이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차피 돈으로 바꿀 새끼였고, 이지원과 계속 싸우게 두면 괜히 이지원의 손에 죽어버려 200만 원이 증발할 수가 있으니 그녀에게 죽기 전에 재희가 선두를 쳐서 직접 죽인 것이다.
"와... 매력적이다.“
이지원은 또 다시 재희에게 반해버렸다. 왠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쓰레기인 것 같아 호감이 더 들어오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희야. 너 내거 해.“
"응...? 내가.“
"응. 나 정말 잘해줄게.“
거짓말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본 자신 외의 타인에게 향하고 있는 이 사랑은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서로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도록 이지원은 정말 재희를 잘 대해줄 생각이다.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면 아쉬워도 평생을 꾹 참을 거고, 원하는 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루어주고 싶었다.
"가능은 하지. 다만 네가 내 거라는 것이고. 뭐 아무튼 우리 일단 한 번만 싸워보자.“
"재희의 것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근데... 싸워보자고? 재희야. 다칠 건데?“
"다치면 다치는 거고. 근데. 난 다칠 것 같지 않아.“
"......“
이지원은 아까 자신이 남자를 거의 일방적으로 농락하는 모습을 모두 다 지켜보았으면서 허리춤에 걸린 레이피어를 꺼내 드는 재희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진심이구나?“
다 봤는데도 싸우자는 걸 보면 진심일 테지. 이지원은 저 아름다운 피부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은데 실수로라도 상처를 입힐까 봐 걱정이었다.
"재희가 원한다면 싸워줄게. 그런데. 조심해. 그리고 내가 그만하자고 하면 바로 그만둬야 해. 알았지?“
"엉냐.“
제대로 듣긴 한 건지. 대답은 무척이나 성의가 없었다.
"먼저 와도 돼.“
핸디캡으로 우선으로 공격할 권리를 주었다. 그랬더니.
"......!“
스피드에 올인한 자신보다 한 단계 더 빠른 듯한 속도로 레이피어를 찌르자 경악했다.
"읏?!“
가까스로 고개를 옆으로 꺾어 피하긴 했는데 아직 시작의 불가했는지 재희의 왼손이 구멍이 뚫릴 뻔했던 얼굴로 빠르게 다가왔다. 여자의 주먹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묵직해 보이는 그녀의 주먹에 저걸 맞았다가는 바로 게임 끝이라 판단하고 황급히 무릎을 쳐들었지만 재희의 몸에 닿기도 전에 주먹을 거둬드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애 대체 뭐냐고?!‘
거리를 벌리자마자 이지원의 빈틈을 찾아 눈을 이리저리 움직인 뒤에 가장 효과적인 피해와 공격 가능성이 높은 부위를 향해 레이피어를 다시금 찔러오자 이지원은 방어는커녕 피하기에 급급했다. 최강의 여자라 일컬어지는 스승님을 뛰어넘는 게 정말 힘들었고, 그게 마지막 관문이라 생각했거늘.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옆구리!‘
재희의 눈과 레이피어의 칼날의 방향을 보아서는 옆구리를 노리고 있어 보여 빠르게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미끼였고 이번에도 본 공격은 왼손 주먹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주먹을 휘두를 때, 팔과 마찬가지로 어깨 또한, 몸의 뒤로 넘어가는데 재희는 일부러 레이피어라는 치명적인 무기에 시선을 집중시킨 이지원을 예상한 것이다. 설마 또 무기를 두고 주먹질을 할 줄 몰랐던 이지원은.
"......“
오른쪽 귀가에 바람 소리가 들리며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아쉽네.“
거의 모든 싸움은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같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상대방이 어딜 공격할지 알거나 공격의 효과가 미미해야만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질질 끌리겠는데 무기와 같이 주먹까지도 한 방 한 방이 크다면 싸움은 대거 30초를 넘기는 게 드물었다.
"동체 시력은 좋은데 허점이 많네.“
1대1의 싸움에서도 바둑과 같이 수많은 수가 난무한다. 공격하면서 상대방은 어떻게 막고, 반격할지, 그 반격에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을 해 둬야 하는데 이지원은 그런 것 없이 오직 동체 시력만을 믿고 그때그때 방어하기에 바빴다. 그게 패배의 요인이다. 무기를 든 싸움에서 굳이 주먹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또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아... 멋져.‘
이지원은 훈수를 두는 재희가 더더욱 멋져 보여 호감이 100%를 넘어서 120%까지 돌파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