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092 이벤트 게임
총 네 명. 뭣도 모르고 겁도 없이 재희에게 다가온 남자 참가자들 수였다.
"쩝......“
하루 만에 800만 원을 벌었다. 레이피어를 든 손으로 스스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슈컹슈컹 찌른 것밖에 없는데. 알바 할 때 벌던 약 다섯 달 월급과 비슷한 수준이라 기쁠 법한데도 재희의 감정은 우울했다. 첫 번째 이유는 몸을 숨길 만한 은신처 같은 곳을 찾지 못하여 대충 몸을 숨겨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잠을 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가 가장 중요했다. 성욕... 그래. 망할 성욕이 전신을 감싸면서 흥분시키니 정신적으로 피곤한 재희가 곧장 잠에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숨은 평소보다 살짝 걸치어지며, 손가락은 금단 현상이라도 온 것처럼 꼼지락. 꼼지락, 부드러운 여체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최소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는데 헤븐에 있을 당시 하루에 몇 번씩이나 여체를 품에 안다가 보니 이젠 하루조차 참기 힘들었다.
"자자. 자면 돼. 자면......!“
눈을 꾹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해본다. 예상컨대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밤이라 마음처럼 잠을 잘 수가 있을까.
"으으으......“
사계절이 없는 따뜻한 곳인지. 밤바람은 따뜻했는데 자는 환경이랑 성욕이 기껏 오는 수마를 도리어 내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비싸고 맛대가리는 없지만 미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먹는 술과 달리 그보다도 심하게 맛은 없고, 식감도 영 아닌 영양가만 높은 빵을 질겅질겅 씹어 배를 채워서 포만감을 느끼려 해도 그저 구토만 유발했다. 물도 없이 다 상한 건빵만 먹는 느낌이랄까.
"시발. 나도 그냥 가게나 차릴까.“
애인들의 빚을 다 갚아주고 헤븐에서 내보낸 뒤에 홀로 남으면 불편함을 감수하고까지 돈을 벌 생각 자체를 버리고 그냥 안에서 가게를 차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1조라는 빚과 50%에 해당하는 이자를 다 갚기는커녕 갚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편안하게 가게를 차리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이자가 빚을 넘어가려면 딱 세 번의 이자가 추가되면 그만이네. 유예 기간은 짧으면 석 달. 길면 몇 년까지 준다고 하니 다 포기한 듯, 유예 기간 동안 하고 싶은 걸 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돈을 못 갚으면 어디 끌려간다는데 여길 또 올 바에는 그냥 성노예나 실험체로 살겠다. 말만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되기 전에 자살하고 삶을 마치고 만다.
"에휴... 인생.“
어떤 선택을 해도 최악의 상황만 펼쳐지니 인생이 참 한탄스럽다. 모두 다 아버지라는 그 쓰레기 새끼 때문에... 집을 나가서 두 번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면 최소한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제기랄! 재희를 절망적인 현실의 늪에 빠뜨린 아버지를 생각하자 분노가 치솟아 다시금 조금씩 밀려오던 졸음이 깜짝 놀라 달아나 버렸다.
"언젠가는 잠이 오겠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고르게 내뱉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자겠지. 내일 6시쯤에 활동을 시작한다 치면 아직 10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은 많다. 잠을 설쳐도 한두 시간뿐이지. 그럼 여덟 시간을 잔다는 말인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과하니까.
* * *
"쩝.“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이 끊임없이 귀를 강타하며 눈을 뜬 재희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피곤하네.“
헤븐에서는 아직 이른 시간인 6시라 제때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몸은 기억하고 있어서 저절로 잠이 깬 것 같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어느 정도는 밝아진 푸른 하늘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어제 약 한 시간 정도 뒤척였을 뿐인데 왜 이리 피곤한지.
"어제 안 풀어서 그런가.“
늘 제때 풀어주는 거로도 모자라 과분할 정도로 풀어주던 성욕을 어제 하루 갑자기 풀지 않으니 바로 다음 날 반응이 왔다. 머리가 살며시 아프며, 눈이 잔뜩 풀어졌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보니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돌겠네. 진짜.“
이마를 덮은 부스스한 앞머리를 짚으며 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망할 놈의 성욕. 성욕이란 부작용은 여자가 없으면 해소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자해라는 위험천만한 부작용을 더 반겨버릴 정도로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다. 레이건 박사한테 부탁하면 성욕을 저지해줄 약을 줄까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에 만난다면 반드시 부탁해 보기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 세무 새를 정돈하며 허리춤에 걸린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날도 밝아왔고, 돈도 벌어야 하기에 여기 계속 허탈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성욕의 리미트이니 어떻게든지 성욕을 풀 여자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무인도를 싸돌아다니는 수밖에. 재희는 핑 도는 눈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제야 좀 낫네.“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이 완전히 달아나게 되었는지 모르게 흐릿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재희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록 무작정 걸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잘 보이던 참가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루 만에 참가자들의 숫자가 줄어든 건가? 아주 작은 인위적인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너무나. 여기에 있던 참가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텅 비어있을 확률이 무척 높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 있다고. 재희는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부스럭. 부스럭.
그토록 기다렸던 발소리, 짐승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무게 있는 소리에 재희는 순간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가 귀를 기울였다.
'뒤쪽......‘
재희의 뒤에서 들리며, 그 발소리의 주인은 재희를 발견했는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바로 뒤에까지 도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몸을 돌려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
그러자 재희의 뒤에 있던 남자는 다급하게 상체를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레이피어의 칼날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목에는 가느다란 선이 그려졌고, 그 선에서 새빨간 핏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음...? 배에서 봤던 그 남자?“
이걸 피하다니. 상당한 강자라 생각하며 다음 공격을 이어나가려던 찰나에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본 재희는 일면식이 있는 얼굴에 의문을 품었다.
"감각이 꽤 좋군.“
처음으로 남자이면서 여자인 재희를 대상으로 욕정을 품지 않은 남자는 감탄하며 재희를 칭찬했다.
"......“
뭐지. 왜 아무 말도 없이 뒤를 밟은 걸까. 재희를 아군으로 생각했다면 남들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언질이라도 줄 수 있을 텐데. 음. 역시... 적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다만. 지금은 날 의심하지 말아라.“
"이유는?“
"간단하다. 이 근처에 미친년이 있는 것 같으니.“
"미친년?“
여자가 있다는 말인가. 그거 좋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쁜 외모와는 달리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도 없다. 심지어는 즐거워하더군.“
그거... 왠지 재희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예쁜 외모와 달리 200만 원이나 하는 걸어 다니는 돈다발을 거리낌도 없이 죽이고, 차곡차곡 상금이 쌓여가니 즐거워하는 게. 딱 들어맞지 않는가. 일부러 재희를 겨냥해서 돌려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 듯싶다. 내 실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더군.“
"강하다는 뜻?“
"그렇다. 정말 강하더군. 그녀를 범하려고 남자들이 연합해 덮쳤지만 손수 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나라도 그렇게 여럿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못할 텐데 말이지.“
재희와 비슷한 수준을 지닌 실력자가 있다고? 심지어는 실력자가 여자라는 사실에, 예쁜 여자라는 사실에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달려나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브론즈랑 실버 등급과 달리 베테랑이 여럿 있는 골드 등급 게임에서 목숨이 걸린 마당에 무모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혼자서 다수랑 한꺼번에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재희와 같이 실험체라면 또 모르지.
"어디로 갈 거지?“
"따라와라. 그녀가 향한 곳과 반대편으로 간다.“
성욕이 중요하긴 한데 목숨보다는 아니었다. 상대방의 전력을 이 남자를 통해 들은 것뿐이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면 조심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재희는 그를 따라 도망을 선택하기로 한다.
"근데. 이름은 뭐지?“
먼저 반말을 한 건 이놈이라 확실히 재희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도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걸 아는지,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지 남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지만.
"알 필요 없다. 어차피 우린 이 게임 안에서만 동맹 관계일 뿐이지. 다음은 없다. 그러니 나중에 적이 될 내 이름 따윈 기억해 보았자다.“
참... 이상한 놈일세. 재희는 이 남자가 게이가 아닐까. 의심이 들어왔다. 솔직히 자신이 보아도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외모에 이성인 남자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혹시 얼굴이 남자였을 당시의 얼굴로 돌아간 건가? 그러면 배 위에 있을 때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이 말이 안 되었다.
'밤사이에 삭은 건가?‘
손으로 볼을 툭툭 건드려 본다. 촉감으로는 피부가 변했는지 얼굴이 달라졌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냥 고자 같은데.‘
게이들도 남자에게 성욕을 품긴 하는데 덩달아 예쁜 여자에게도 성욕이 피워지기 마련. 근데 이 남자는 고자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고자냐고 대놓고 물을 수도 없으니 조용히 입 닥치고 그의 뒤를 계속 따랐다.
"이쯤이면 괜찮을 것 같군.“
얼마나 걸었을까. 남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소매로 쓸어 닦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물과 식량을 꽤 많이 얻은 것처럼 보이는군.“
그는 자신과 달리 무언가 많이 들어 빵빵한 재희의 가방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어떻게 얻었지?“
설마 정정당당하게 참가자들을 죽여서 얻었을 거란 추측을 완전히 배제한 상황.
"알아서들 오길래 죽이고 옮겨 담았는데?“
"죽였다고? 네가? 골드 등급의 참가자들을?“
"왜.“
"말이 안 되는군.“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올라온 베테랑들이 고작 이깟 여잘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줄줄이 죽어 나갔다는 말을 믿을 수 없던 남자는 재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몸으로 유혹했나? 그런 부류가 종종 있지.“
"몸?“
"모르는 척을 해도 뻔하니 더는 하지 않는 걸 권장하지.“
뭔 개소리래. 어제 재희를 본 남자들도 그런 말을 하던데. 설마 몸으로 유혹하여 방심하게 만든 뒤에 기습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허미. 염병.
"네 알아서 생각해. 입만 아프지.“
보면 나쁜 마음을 먹은 거로 보이지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욕망에 사로잡힌 행동을 보였더라면 바로 손절을 할 텐데.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 남자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골드 등급쯤 되면 밤에도 활동하는 미친놈들이 있을 수가 있으니 보험으로 데리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솔직히 남자 한 명이랑 연약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잠에 빠져 있으면 당연지사 남자를 먼저 죽인 뒤에 여자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재희는 한동안 이 남자랑 함께 다니기로 한다. 물론, 의심이 갈 만한 행동을 보이는 순간 레이피어로 근육질의 몸을 꿰뚫어버릴 테지만.
"넌 꽤 모았냐?“
"뭘 말이지?“
"당연히 물과 식량이지. 이것 말고 더 있을까?“
"내가 참가자를 발견했을 땐 이미 미친년을 제압하려고 무리를 이루어서 얻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도움 안 되는 새끼네 이거. 나중에 재희의 식량을 받아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쥐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언제 죽여도 괜찮아. 어차피 식량은 알아서들 다가오잖아?‘
이점이라면 이점이라 할 수 있는 예쁜 외모는 길 가던 야생 참가자들을 불러들이기에 어차피 너무 많아 다 먹지도 못할 걸 인심 써서 나눠주기로 한다. 밥값을 한다면야.
"도망친 건가?“
"음... 애매하군. 무리가 날 발견했을 땐 그들은 날 죽이려 들지 않고 동맹을 맺자고 말하더군.“
"미친년을 잡으려고?“
"그렇다. 그래서 괜히 힘을 빼지 않고 살려주었다."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그 미친년이라는 여자는. 일단 죽이려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핸디캡을 주고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 핸디캡도 많은 인원수에 가로막히다 못해 불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했다.
'되도록이면 피해야겠네.‘
미친년과 싸움은 피해야 할 것만 같다. 아까 남자가 한 말에 따르면 여럿이 덮쳐들었어도 패배했다는 건데. 아마도 그녀는 실력 하나만으로 색깔 등급까지 도달할 정도로 강자가 확실해 보였다. 헤븐에서 우연히 보았던 색깔 등급 참가자들은 하나 같이 괴물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재희가 압도할 자들이 몇몇 있지만 전투에 치우친 자들은 승리를 보장할 수가 없었을 정도이니.
"준비해라.“
"응? 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는데 남자는 갑자기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재희는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며 레이피어를 들었다.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