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091 이벤트 게임
짹짹. 호로롱. 호로롱. 삐뤼이잉. 삐약삐약. 뭔가 이상한 새소리가 하나 껴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지금 재희의 귓가를 간질이는 새와 곤충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왔네.“
"다시.“
"여길.“
"시발."
자연스럽게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며 욕이 입에 담겼다. 시발. 시발. 시바아알. 브론즈 등급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참가자들의 수준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재희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 그야 그럴 것이 실험의 여파로 무난하게 다이아몬드 등급까지는 동료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히 올라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울 건 하나 없는데... 다른 문제점이 재희를 괴롭혔다. 그건 바로 굶주림을 해소해줄 식량, 땀과 떼, 그리고 여러 가지의 외부 요소들로 더럽혀진 몸을 씻질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이다. 휴지도 없어 대소변을 보는 게 두려울 정도. 다행인 건 식량을 적게 먹으면 한 달간은 소변은 나올지언정. 대변은 나오질 않는다는 걸까.
"아아악! 침대가 벌써부터 그리워어어!“
다시 또 돌 부스러기가 널린 울퉁불퉁한 흙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니. 말도 안 돼. 지금이라도 당장 헤엄을 쳐서라도 현대 문명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에휴......“
여기서 편안함을 추구할 방법은 아예 없다. 그냥 여자 한 명을 얻어서 그년에게 성욕을 풀며 킬 수를 높이는 게 심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편안함이 아닐까. 재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서 게임 측에게 빌린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그냥 나오지. 어차피 계속 숨어있을 생각은 아니잖아?“
정적. 재희의 말에 응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골드 등급의 게임이라는 건가.“
오감이 평범한 인간과 달리 무척 뛰어나게 됐는데 설마 눈에 띄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귀찮게 숨바꼭질을 할 바엔 그냥 나와서 재희를 강간하든, 죽이려 하든 모습을 드러내 달려들어 줬으면 좋겠건만. 어느 정도는 베테랑이라 해도 되는 신중한 골드 등급의 참가자들은 자신의 존재가 들통이 났으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모습을 계속 감추고 있었다.
"하아... 귀찮게.“
혼잣말과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인기척은 느꼈어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방심하는 척, 예쁜 여자의 몸으로 어떤 존재가 나오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건데. 이러면 한심하고 어이없어서 모습을 드러낼 법했다. 여기서 그랬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직접 몸으로 알려준다며 자만심에 찌든 새끼가.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생각처럼 되지 않네. 지금 재희 근처에 있는 참가자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 연약한 미녀라도 신중에 또 신중을 거듭하는 목숨을 아낄 줄 아는 보기 드문 참가자일 수도 있었다. 그럼 운이 나쁜 거지. 이대로 우연히 다른 참가자를 만나 실력이 노출되는 순간 도망을 선택하지 않을까.
50만 원이? 아니지. 이벤트 중이니까 2배의 2배, 200만 원이 말이다. 그러니 재희는 한 명이라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이번 이벤트에서 제대로 뽕을 뽑고 끝내겠노라 다짐하며 눈을 살며시 감으며 귀를 귀울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재희 외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희미하게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익.
"거기 있었네.“
쥐새끼가.
"......?!“
숨어서 재희를 보고 있던 참가자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당황한 표정을 띄웠다.
'뭐야? 설마 내가 있는 곳을 아는 거야?‘
어떻게? 어떻게 안 거란 말이지? 실수를 하지 않으면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게 분명한 은신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재희는 성큼성큼 숨어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무언갈 만지거나 밟거나 부딪쳐서 어떠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는데. 참가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라고.
조금이라도 소리가 새어나갈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얼핏 보았던 그녀의 외모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는데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온몸이 공포에 떨려오고 있었다. 운 좋게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예쁜 여자를 성노예로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고 기뻐했던 감정은 한순간에 사라져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제발... 제발 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듯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연이라고 치부하며 그녀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숨어있었다. 주위에 누군가 있는 걸 알아차렸어도 정확히 어딘지 몰라 일단 막 찍어 그곳으로 걸어가다 보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 도망을 치거나 달려드는 걸 노린 행동이라 생각하며.
'소리가 안 나?'
어느새 발소리는 멈춰있었다. 이상하다. 이쪽으로 다가왔으면 되돌아가는 발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이 가득한 남자는 딱딱 끊어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아......"
그러자 눈에 보인 아름답다는 말로도 모자란 미모를 자랑하는 재희의 얼굴을 보였기에 남자는 감탄을 넘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 이곳에 오기 전 바깥세상에 있을 당시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맨 살갗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얇은 긴 팔에 긴 바지를 입고 있지만, 그 위로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비쳤다. 보기 드문 커다란 가슴과 잘록한 허리, 커다란 엉덩이는 자연스럽게 침이 꼴깍 삼켜졌다.
눈은 또 어찌나 루비처럼 예쁜 빨간색인지. 흥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건만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 붙어있는 막대기가 부풀어 올라 바지 위로 존재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재희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골드 등급쯤의 참가자들은 브론즈 등급에서 자주 보았던 한심한 참가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커흑?!“
곧장 레이피어로 목을 꿰뚫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며 넋을 놓았던 정신을 되찾아와 뒷걸음을 쳤다.
"새액! 색!"
스르륵. 목을 꿰뚫었던 레이피어가 뽑혀 나오자마자 피가 튀었다. 새된 바람 소리만 나올 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이 정확히 급소에 해당하는 부위에 다친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지, 믿을 수가 없는지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린 손을 가져가 목을 만져보았다.
"하아아아악!“
손에 자옥하게 묻은 피, 비명을 내지르지 않고서야 참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자 뒤늦게 괴로워하며 남자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옷을 끌어 올려서는 피가 줄줄 새는 게 확연하게 느껴지는 목을 감싸 어떻게든 피를 막아보려고 애를 써댔다. 그런다고 나아질까. 쓰러지지도 않고, 의식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도에 구멍이 난 거로 보이는데.
"사, 사아... 러저......!“
주르륵.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술과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자신이 봐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는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재희를 향해 손을 뻗으며 힘겹게 말을 했다.
"내가 왜?“
"제... 제바아아.“
비록 썩은 줄밖에 없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거라도 잡고 도움을 요청해야 했기에 남자는 애원했다. 그러나 200만 원짜리를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재희는 칼날에 피가 묻어있는 레이피어를 다시 들었다.
"아데...! 아데에!“
썩은 줄이 아니라 줄처럼 생긴 뱀이었다. 그 뱀은 독을 품은 송곳니를 내비치며 다시금 남자에게 향하자 그는 뒷걸음을 치다 다리가 걸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뒤로 기어보지만.
"끄윽.....!“
레이피어의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에 박혔다. 이젠... 정말 끝이다. 무척 큰 대학 병원에 가더라도 살 확률은 제로. 의식이 멀어지며 남자의 상체는 뒤로 넘어갔다. 본격적인 싸움을 한 게 아니라 수준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왜냐하면, 기분은 정말 나쁜데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 200만 원이 넝쿨째 굴러오니 말이다.
"괜찮네 이거.“
단순히 50만 원 선에서 그쳤다면 정말 역겨워 스트레스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할 상황. 그러나 그 4배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동가 홍상이라고 어차피 외모에 홀려 다가올 거. 그냥 속옷 차림으로... 아니, 발가벗고 다녀볼까. 수치심은 물론이고 역겨운 남자들의 시선과 말까지도 꾹 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다.“
여러 애인이 있는 몸으로 치녀 행세라니. 치녀인 척 참가자들을 끌어모으는 모습을 본 다른 참가자들을 차마 다 죽이지 못한다면 헤븐에 어떤 소문이 돌지 뻔했다. 거기다가 눈에 띄는 은발과 적안이며 예쁘기까지 한데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굳이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헤헤. 와. 오늘 운 개좋네? 돈도 벌고 이런 미인도 품어보고.“
"알아서들 오니까.“
홀로 있는 재희를 보고 음흉한 표정을 그린채 다가오는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역시 이 남자가 조심성이 많은 거지. 정상적인 남자라면 여자인 재희를 무시하면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게 멍청한 짓인질 모르고.
"이거 너가 그런 거야?“
친한 사이처럼 반말을 내뱉는 그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시체를 보며 의문을 가졌다.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목에 새겨진 구멍 하나, 그런 구멍의 크기에 알맞은 재희의 레이피어. 딱 보니 이 시체는 재희가 만든 것이라. 확신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가능이야 할까. 아무리 입고 있는 옷 때문에 근육량을 확인할 수가 없더라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몸으로 유혹했나 보군.‘
몸으로 유혹하는 분류는 꽤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홀려 방심하게 만든 뒤에 기습하여 죽이는 여자들이. 그래서 절대로 이 등급에 있을 실력이 아닌데도 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 예가 재희라 남자는 웃음을 지었다. 기습에 실패하면 그 즉시 성노예 행. 남자는 멍청하게 미모에 홀려 기습을 당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지만 가까이서 재희를 보니 알고 있어도 기습을 당할 것만 같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대체 뭘 했다고 가랑이 사이 막대긴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있었다.
"나한텐 안 통하니까. 그거 내려놔.“
"......?“
"좋게 말할 때 내려놓는 게 좋아.“
검을 들고선 경고한다. 몸으로 유혹하는 여자 따위가 감히 경계하는 자신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육체에 작은 상처라도 내고 싶지 않아 순순히 투항할 것을 요구하는데 재희는 뭐가 안 통한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헙......!‘
고개가 기울어지며 은색의 머리카락이 중력에 의해 머리 옆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에 남자는 미의 여신이 강림을 보는 것처럼 숨을 멈췄다.
'시발. 반드시 내 몸종으로 만든다!‘
그리곤 다짐한다. 저년을 반드시 자신이 없으면 못 사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뭐가 안 통해?“
"하... 뻔뻔하기까지 하네.“
정말 모르는데 남자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고 있다 억측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서 버려. 너도 다치는 건 싫잖아?“
그렇긴 하지. 그 누가 상처를 입는 걸 좋아할까. 근데 왜 재희가 다치겠다는 전제로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상처가 하나 없이 시체를 죽인 걸 보면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이상하네. 시체에 뚫린 구멍이 전부 급소라 누가 보더라도 이 시체를 만들어낸 자는 꽤 강한 상대라고 판단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지. 재희는 보기보다 골드 등급이 더 만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만만해?“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싸움이 있어도 압도적인 승리뿐이지. 길드에 있을 때 길드원들이 재희를 어떻게 해 보려고 대전 상대가 되어 주었지만 전부 하찮게만 느껴졌다. 그 때문에 어느샌가 여자에게 졌다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는 재희의 대전 상대가 되어 주지 않아 결국, 홀로 상상으로 가상의 적을 만들어 싸워왔다.
"그건 모르지?"
목숨을 위협받는 싸움. 대충 색깔 등급에 있는 자들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서는 다르다.
"헤에? 한 번 해봐.“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표정과 말투, 그리고 자세까지 풀어놓은 게 재희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뭘?“
"뭐긴. 덤벼 보라고.“
"하! 미쳤냐?“
"미쳤냐고? 음... 미치긴 했겠네. 눈앞에 200만 원이 걸어 다니는데.“
"200만 원? 50에 두 배면 100만 원인데 외모는 존나 예쁜데 대가리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멩... 윽?!“
그에게는 100만 원이지만 재희에겐 200만 원이다. 그걸 모르는 그는 황당한 말에 비웃으려던 그때, 재희는 움직였다. 목이 꿰뚫려 죽어있는 시체를 보건데 목을 노리는 거라 판단하고 상체를 옆으로 움직였다.
"오. 괜찮네? 근데 아쉽네.“
"컥?!“
레이피어를 들고 있던 오른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왼손을 보지 못했다. 여자라 하기에는 무척 강한 주먹이 남자의 배를 강타하고. 그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배를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고작 이걸로 끝이야?“
꽤 세게 치긴 했다만 고작 이 주먹으로 이런 반응이다니. 황당하네. 적어도 아픔을 꾹 참고 거리를 벌리거나 반격해야 할 텐데.
"시, 시발!“
"늦었어.“
바로 죽이려고 했다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었을 터. 일부러 기회를 줬는데 실망감만 안겨주니 뒤늦게 반격을 하려던 남자의 심장에 레이피어를 꽂아 넣었다.
"차, 창년이... 아니었나......“
잘못 짚었다. 이 여자는 몸으로 유혹해 참가자들을 죽여나가는 창년이 아니었다는 것을. 죽음을 코앞에 두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남자는 재희를 무시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