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085 이벤트 게임
사쿠라를 범할 만큼 범한 뒤에 그녀의 업무를 위해 길드를 나온 재희는 곧장 술집으로 향해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저번에 그 무지막지하게 비싼 술을 사 먹은 탓에 지금은 돈이 부족하여 가장 싸면서 가장 인기 많은 술 세 병만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그런 재희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협박의 말을 대신 전하러 왔던 심부름꾼이 자연스럽게 앞에 앉자 재희는 말했다.
"이러면 참가할 수밖에 없지 않나?“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죠.“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취소나 수정이 안 되는 게임 참가 서에 자기들 멋대로 그녀의 이름을 적어 접수까지 끝마쳤으니. 강제가 아니라면 대체 뭐겠는가. 도망을 칠 수도 있겠는데 헤븐 안에서 도망쳐봤자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한 잔 주시겠어요?“
"......“
오면서 잔을 가지고 왔기에 남자는 손에 들린 빈 새 잔을 재희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다가 재희는 아무 말 없이 술을 또르르 따라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브론즈 게임에 두 번 참여한 게 전부인데.“
"몰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지금이라도 참가할 게임 등급보다 낮은 곳으로 옮길 수도 없으니 말해 봤자지.“
불평불만을 토로해 보았자 미래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걸 잘 아는 남자는 안쓰럽게 재희를 바라보았다.
'불쌍하네.‘
말단이며 심부름꾼인 남자는 말의 의미를 알아도 어떤 방법을 쓸지는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연속으로 세 번이나 참가하게 된 거야. 그것도 하나는 플래티넘 등급이던데.‘
인원수가 부족하여 금 등급을 모두 다 잡아도 시간이 남자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한 단계 높은 플래티넘 등급으로 참가시킨 것이다. 이번 이벤트는 헤븐에서만 열린다. 첫날에 잡고 마지막 날에 잡아 중간에 쉬려는 참가잔 있어도 세 번 연속으로 참가하는 사람은 재희가 유일했다. 아무리 색깔 등급의 랭커들이라도 브론즈 등급의 게임을 연속으로 참가할 수 없는 노릇.
상처는 하나 없어도 무엇보다 중요한 정신력, 그리고 한 달간의 무인도 노숙으로 인해 몸은 지칠 대로 지쳐버리기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모를 자신의 망할 높으신 분들 때문에 위험이 도사리고, 힘들 수밖에 없는 무인도에 갇히게 된 재희가 불쌍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크으... 좋네요. 이거.“
재희의 기분을 박박 긁어대던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의 남자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즐겼다. 맛있네. 자기 전에 한 잔씩 하던 술과 같은 종류인데 왜 다를까. 당연히 앞에 앉아있는 초월적인 미녀 때문이라 확신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
자신의 술잔과 마찬가지로 원샷을 때려버려 비워진 재희의 술잔을 직접 따라주고 싶어 살며시 물음을 던져보았지만, 대답을 기다리던 남자를 무시한 채 스스로 술을 따라 들이켰다.
"이번엔 제가 따라드릴......“
얄짤없다. 술을 빼앗으려던 남자의 손을 피하곤 다시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제 가.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술을 주면 조용히 받아먹기만 할 것이지. 왜 굳이 귀찮게 해서 꺼지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건지.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가만히만 있어도 절반은 간다고.
"음... 따라주고 싶은데. 싫으신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이건 어떠세요?“
".....!“
"괜찮나요?“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남자. 그는 재희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앉기 전에 새 술잔을 가지고 온 것으로 모자라 저번에 두 병이나 사서 여기에 두고 갔던 무지막지하게 비싼 그 술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거 보기보다 중독성 있지 않아요?“
있어. 엄청나게 있어. 담배는 비싸고, 해보고는 싶어도 여유가 없어서 입에 대보지 못해 니코틴이라는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술은 맛대가리는 전혀 없는데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쓸 데가 이 술 사는 것밖에 없네요. 숙소나 밥은 회사에서 다 공짜로 주니까요. 어때요. 한잔할래요?“
끄덕끄덕.
공짜로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재희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직 뜯지 않아 겉에 물방울을 자옥하게 만들어 놓은 술을 바라보았다.
"그런 잔 주실래요? 엄연히 이건 제거니까 제가 따라드릴 겁니다.“
"......“
같이 마실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 사람이 말을 걸지 않고, 거슬리는 행동도 없이 따라주는 술만 잘 마셔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그래서 이왕이면 차라리 혼자 있고 싶지만, 저 매력적인 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스윽.
절반 가까이 남아있는 술병을 옆으로 치우며 재희는 빈 잔을 그의 앞에 가져갔다.
"자요.“
또르르. 알코올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르며 회색빛을 띠는 액체가 투명한 잔에 가득 채워졌다. 그래. 이 색과 향이야. 이걸 원했다고!
"짠?“
어느새 자신의 잔에도 따라놓고 술잔을 내밀자. 하는 수 없이 재희는 그가 내민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가져가 부딪쳤다.
"크으......!“
마시자마자 밀려오는 구토를 유발하는 정말 독한 맛. 단순히 알코올 농도만 높인 맛은 아니고, 향이나 맛을 좋게 하는 재료도 넣은 것으론 전혀 보이지 않는 역겨운 맛이 혀를 통해 전해졌다. 이게 왜 이렇게나 맛있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도 모르겠네.
"한 잔 더 하실래요?“
"응. 줘.“
"네. 자자. 어서 받으세요.“
주저할 것 없이 빈 잔을 내밀었다.
"저도 따라주실래요?“
물론이지. 그게 뭐 대수라고 하하. 이 비싼 술을 사와 같이 먹어주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술을 따라줄 수가 있었다.
"짠~!“
"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네. 미녀를 상대로 한 섹스와 일반적인 술로는 느낄 수 없었던 좋은 기분이 전신을 감싸오자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지기 시작했다.
"크아. 좋아. 좋아.“
고작 두 잔에 머리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원래 이렇게까지 취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 갑자기 이런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재희는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넘겨 이마를 그대로 노출시키며 숨을 크게 골랐다.
"벌써 취하셨나요?“
"아니. 안 취했어.“
"정말요? 더 마실 수 있나요?“
"......“
쓰읍. 애가 취하게 만든 뒤에 뭘 할 것 같지 않은데 고작 두 잔에 몸이 이렇게 되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면제인가? 아니면 고등학교에서 변태들이 자주 말하던 여자의 몸을 발정 난 상태로 만든다는 최음제인가?
'달아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잠이 온다기보단 어지러울 뿐이었고, 몸이 달아오른다기보다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분만 좋지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어서 의심은 얼마안가 털어졌다. 그저 취한 거라 생각하면서 재희는 입을 열었다.
"또 따라 봐.“
"그만 마시는 게 어떠세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따라.“
"음... 뭐,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알았어요. 자.“
뭐가 어찌 되었든 일단은 취하고 보자. 이벤트라는 이름을 지닌 지옥 같은 석 달을 생각하면 무조건 취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근데. 다 준비를 끝마쳐 둔 겁니까?“
"엉?“
어느새 술을 받는 것 없이 스스로 따르고 마시던 재희를 향해 남자가 질문을 툭 던졌다.
"플래티넘 등급 게임이 하나. 골드 등급 게임이 두 개, 이래서는 혼자서 살아남기 불가능합니다. 뭐, 윤재희 씨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동료를 만드는 게 좋을 듯 보이는데.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까?“
"......“
"설마. 아직인 건 아니죠?“
정답입니다. 강제로 참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당시에는 애인들의 기분을 맞춰주며 잘 구슬리는데 바빠서 결국은 팀원을 구해놓지 않았다. 같은 길드 안에 골드 등급과 플래티넘 등급의 참가자들이 있는데 전부 남자라서 팀을 짜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나 같이 전부 몸매를 훑어보는 것이 동료라기보다는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폭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등과 목숨을 맡길 만한 동료. 하필이면 자신이 봐도 아름답다 못해 종교까지 세운다면 홀린 듯이 사람들이 묻고 따지지도 않고 가입할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남자를 믿을 바엔 차라리 아무 능력도 없는 여자를 믿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도 둘 다 짐짝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지만. 남자는 적이 되는 마이너스, 여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이너스. 무얼 선택하더라도 다 마이너스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네.“
여자를 구해보려고 해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일단은 골드 등급과 플래티넘 등급의 여자 참가자의 수가 적다는 것도 한몫했으며, 남자였다면 예쁜 외모에 혹해 가만히만 있어도 함께 하자고 다가오겠지만 여자라면 예쁜 외모에 혹하다가 이내, 바로 인적사항을 둘러본다. 그러니 팀원을 구하는 곳에 올려두고 와도 연락 오는 건 전부 나쁜 생각하는 남자들뿐이었다.
이해는 한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 예쁜 여자를 범해 보고자 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굳이 여자가 따로 연락을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것도 이제 막 헤븐에 발을 들였고, 최근 전적이 전부 브론즈 등급 게임 두 번이 끝인데. 재희라도 말을 걸어줄지. 아무리 튜토리얼에서 금 등급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기선 가장 중요한 건 실전 경험이라 당연한 반응이다.
"그럼 혼자 가시게요?“
"그래야지 뭐.“
누가 게임에 참가하는 지까진 알 방도가 없었다. 유망주가 참가할 수도 있고, 악명으로 유명한 살인마가 참가할 수도 있고, 운이 정말 없다면 성욕을 풀어야 할 여자가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남자의 구멍이라도 따야 하나. 재희는 소름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모한데요. 그러다 정말 죽어요.“
그렇지. 죽겠지. 첫 게임이라면 몰라도. 지친 상태로 멀쩡한 인간들을 다시 한 달간 상대하고, 거기서도 살아남는다면 더더욱 지친 몸을 이끌고 여전히 멀쩡한 인간들과 목숨을 건 쟁탈전을 벌여야 하니.
"아직 시간은 있으니 어떻게든 구해보세요.“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근데 안 구해지는 걸 뭘 어쩌라고.“
"혹시 여자를 구하시나요?“
"엉.“
"......“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이리도 바보같이 여자에 목멘 사람이라니. 남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재희의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났다.
"왜, 왜요?“
"응? 간단해. 남자들은 믿을 게 안 되거든. 제대로 게임이나 할 수 있을지. 내 적이 안 되는 것만으로도 잘 고른 건데. 그런 이들조차 보이지 않아.“
브론즈 등급에선 몇몇 있는데 그들이 과연 골드 등급의 게임에 참가할지. 겁먹고 내뺄 게 분명하다. 예쁜 여자의 부탁이라도 들어줄 게 있고 없는 게 있는데.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호구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는 사람이 없어. 이 등급에선.“
헤븐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골드 등급에서 좋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겠는가. 있어도 전부 자신의 몸을 노리는 변태들뿐이지.
"그 말은 찾을 수 없으면 혼자라도 참가한다는 뜻이네요?“
"크아~ 암. 그렇지.“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남자는 산산이 조각나버린 이미지가 다시 맞춰지며 빛을 발했다. 그렇겠지.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비언이라 해도 저 외모를 남자들이 가만히 둘 리가 있을까. 자신도 성격은 개 거지 같은데 외모에 홀려 이렇게 비싼 술을 사들여 합석하여 술을 따라주거나 받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응응. 살인은 물론이고 강간이 허용되는 법과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재희를 따먹을 수만 있다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동료가 되길 원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일 텐데.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목숨이... 아니, 성적으로 몸이 위협받는데 동료에게까지 위협받을까 봐 눈치를 살피는 수고를 들일 바엔 차라리 홀로 참가하겠다는 뜻이었다.
"고생하세요.“
남자는 힐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때가 됐네. 아쉬워도 지금 일어나야 했다. 자영업자들이 주문한 것을 운송하는 배에 올라타 헤븐에 들어선 거라. 제때 가지 않는다면 운송하는 배를 놓치게 되어 헤븐에 고립된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가게?“
"네. 아쉽지만 시간이 없네요.“
비싼 술을 여러 번 산 탓으로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재희의 안에서 크게 높아졌다. 당연히 남자였던 재희에게 남자인 그가 연애감정으로 보일 리 만무. 그래서.
"갈 거면 술 한 병 더 사줄 수 있을까?“
"......“
호감도가 높은 호구로 자리잡혔다.
"이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테이블엔 두 병의 싼 술과 한 병의 비싼 술로 총 3병이 올라와 있는데 주량이 범상치 않은 재희로서는 부족할 노릇이었다.
"알겠... 습니다.“
호구라는 걸 알면서도 저 예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탁하니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아. 고마워.“
고맙다는 말에 불편했던 감정은 깡그리 사라졌다.
"사는 김에 닭발도 부탁할게.“
가능한 한 다 빼먹어야지.
"그러죠.“
결국, 남자는 병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