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081 이벤트 게임
천장에 달린 오직 하나의 전등만을 의지한 채로 어둠이 찾아온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런 방 안에서 한 여성이 책상 위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사각사각.
적막만이 가득한 곳에서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피로에 눈이 감기는 듯하면서도 아직 할 일이 많을 거기 때문에 밀려오는 수마에 어떻게든 저항하며 책상 옆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랬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매끈한 책상의 감촉밖에 없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아... 끝났다.“
오늘 해야 할 업무가 끝이 났다. 원래 이보다도 더 빨리 끝나야 하는데 중간중간에 재희를 보고 싶은 생각으로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을뿐더러 한 번만 보고 오자며 도중에 집무실을 나가 아름다움 그 자체인 재희를 찾아다녔다. 근데 길드 곳곳을 싸돌아다녀도 발견할 수가 없어 잔뜩 실망한 모습으로 집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당연히 원하던 걸 이루지 못했는데 아까보다 일이 더 손에 잡힐 리가 없을 노릇. 그래서 딴짓과 딴생각을 여러 번 하다가 이내, 밤이 찾아왔다. 그녀의 호위인 세라가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녀는 차라리 오늘 빨리 업무를 마저 끝내고 내일에 있을 일도 빠르게 끝을 낸 뒤에 다시 재희를 찾아 나서는 게 좋을 것만 같아 거부했던 것이다.
"11시네. 벌써.“
시계를 보니 짧은 바늘이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드의 크기가 대형에 가깝기는 해도 업무량이 밤까지 이어질 정도로 많은 건 아닌데. 오늘은 집중을 못해도 너무 못한 것 같다. 아니, 어제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고, 그냥 재희를 본 이후로 매 비슷한 상태였다.
"하아... 주무시려나?“
기지개를 쭉쭉 켠 다음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집무실을 나온 그녀는 곧장 재희의 방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한 달간 무인도에서 지냈으니 조만간 계속 피곤할 법해 늦은 시간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이라 하기에도 어색한 11시란 시간쯤이면 자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안 자고 있더라도 자신을 만나주기나 할까. 그녀는 이미 여러 여자들이 곁에 있었는데.
"......“
옮기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래. 괜한 참견이겠지. 애초에 관심도 없던 것 같은데. 헤븐 제일의 미녀면 뭐하나. 인생의 두 번째로 느낀 사랑을 직접 쟁취하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일 뿐인데. 사쿠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달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일본의 도시와 거의 다르지 않은 현대 문물의 모습. 그 어떤 이가 이곳이 지옥이라 해도 무방한 곳이라 생각할까.
"방에 가서 잠이나 자자.“
피곤하다. 오늘 하루 전부를 일하는 데 쓰지 않긴 했어도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던 것 때문에 무척 피곤했다. 몸도 뻐근하고. 그래서 사쿠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저벅. 저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누군가 복도를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긴 사쿠라가 있는 층이며, 사쿠라의 집무실, 숙소 등이 있어서 개인적인 용무로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 늦은 밤이면 더더욱. 당연히 사쿠라는 세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 재희 씨?“
세라라 생각했거늘. 예상외의 인물이 보이자 사쿠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피곤할 텐데 왜 굳이 밤늦은 시간에 복도를 거니는 걸지. 의문이 들었지만 얼마 안 가 이 의문은 어느 날 밤의 꾸었던 꿈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야 그럴 것이 원래 은색을 띠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을 내는 건 물론이고, 그녀의 곁에 있던 여자들에게 곧잘 지어주던 미소가 얼굴에 걸려있었으니.
"음......?“
사쿠라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자신 외에 누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재희는 뒤늦게 사쿠라를 바라보았다.
"술 드셨어요?“
달빛만으로 술을 먹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러나 재희의 피부는 무척 새하얀 탓에 술기운에 조금이라도 얼굴이 붉어지면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아아. 좀 먹었어.“
그것도 무척 도수 높은 걸로다가. 처음에는 조금 그랬는데 계속 먹다보니 맛있어서 더 사서 먹었다. 그로 인해 지갑은 개털이 되어버렸는데 이 이야기를 사쿠라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어보여 그냥 웃었다. 아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술기운에 웃음이 자꾸만 밀려오고 있다.
'날 보고 웃어줬어... 너무 예뻐.‘
달빛을 받은 아름다운 머리카락 색과 외모에 더해 술기운으로 풀어진 얼굴은 평소와 색다른 아름다움이라 사쿠라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넋을 놓은 채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네.“
"네?“
밑도 끝도 없이 예쁘다는 말을 하는 재희. 순간 잘 못 들었나 싶어 사쿠라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사쿠라. 너 예쁘다고.“
"아...? 아아?!“
왜, 웬걸! 갑자기 예쁘다고 말하다니. 잘 못 들은 것도, 잘못 말한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금 예쁘다는 말을 하자 사쿠라는 어쩔 줄 몰라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버린 양 볼에 손을 얹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저벅저벅.
기쁨에 몸서리를 치느라 재희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얼굴에다가 가져온 재희의 손의 감촉에 몸을 흠칫 떨었다.
"우리 할까?“
"네? 뭐, 뭐를 하자는 건가요?“
"하자는 게 그거밖에 더 있나?“
"그, 그거라니요?“
뭔가 예상이 가지면 정말 그게 맞을지 확신할 수가 없는 사쿠라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재희는 피식. 웃으며 다짜고짜 얼굴을 가져와 입을 맞춰왔다.
"흡?!“
말캉한 감촉이 입술로부터 느껴지고 사쿠라는 너무나 믿기 힘든 갑작스러운 현실에 숨을 멈췄다가 굳게 닫힌 자신의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재희의 혀로 인해 그제서야 숨을 쉬며 두 눈이 천천히 크게 떠졌다.
'키, 키스...? 내, 내가 재희 씨랑 키스를 하는 거야? 지금?‘
거짓말. 무슨 이유로 키스하는 걸까. 술기운에 자신을 다른 이들로 투영해서 보고 있는 거라 하기에는 아까전에 재희가 사쿠라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었다. 착각하고 있지 않다는 게 증명된 상황. 근데... 근데 사적인 대화는 서의 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직장 상사와 같은 입장이 아니었나? 언제 재희가 자신에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는지 의문이었다.
"아으......“
흥분으로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희는 사쿠라의 혀를 빼내어 빨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키스, 아니, 애초에 부모님 외에 다른 사람이 이토록 몸을 가까인 한 적이 없었을 게 분명했던지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 어떡해야 하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둘러버린 재희처럼 그녀의 몸을 확 끌어안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가만히만 있지 말고 그녀처럼 적극적으로 키스를 이어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상태였다.
"하읏.....?!“
슬그머니 올라온 재희의 손이 사쿠라의 가슴에 닿자 곧바로 신음소리로 반응해버렸다.
"하악... 하악... 재, 재희 씨......!“
계속 이대로 끝까지 이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사쿠라는 어떻게든 가냘픈 팔로 그녀의 몸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왜? 나랑 하기 싫어?“
"아, 아니요! 하고 싶어요! 앗?!“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그럼 왜?“
"저, 저도 좋긴 한데... 여긴 복도예요.“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요! 누가 볼 수도 있다고요! 세라나. 민정 씨나 예림 씨 그리고 유지나 씨 같은 분들이요. 아니면 지금 저를 만나러 오는 길드원이 있을 수도 있고오......“
출입이 통제된 층이 아닌지라 누가 어디서 튀어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그러니 재희와의 끈적한 몸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인데 누군가에게 몸을 섞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면 되지?“
"네......?“
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왜. 싫어?“
"아, 아니요. 아니, 싫어요. 나, 남들에게 벗은 모습을 보이다니. 그건 정말 아니에요!“
남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였고, 여자들 쪽도 별로 탐탁지 않았다. 왜냐하면, 함께 목욕하러 갔을 때 여자 대부분이 너무 예쁜 몸이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만져보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후로는 절대 남들과 같이 몸을 씻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 그래서 헤븐에서 길드를 세운 것이다. 혼자 목욕할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라는 소소한 바람으로.
"재, 재희 씨라면 괜찮지만.......“
욕망이 가득 담긴 게 다른 여자들의 시선보다 더 불쾌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사쿠라는 그녀의 시선이 너무 좋았다. 보는 것만으로 아래쪽이 축축하게 젖어올 정도로 흥분이 될 정도였으니.
"남들에게 보여주긴 싫어요.“
"그래? 그럼 기쁜데?“
"저, 정말인가요?“
"그럼. 지금 네 말은 넌 내 거라는 거잖아?“
"아......“
이걸 그렇게도 해석할 수가 있구나.
펑!
만약 만화였다면 머리 위에 여기가 터져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가자.“
"네? 어딜요?“
"어딜 가긴. 섹스할 곳에 가야지.“
"......!“
세, 섹스라니! 어찌 그런 말을 같은 여자의 앞에서 태연하게 하는 걸까. 부끄럽지도 않은지 재희는 사쿠라의 팔을 억지로 끌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단단히 콩깍지가 껴 버린 탓에 자신의 기분과 의사는 들어보지도 않고, 누구도 찾지 않는 곳으로 강제로 끌고 가서는 강간을 하려는 듯한 박력 있는 모습에 다시금 반해버렸다. 반할 요소라곤 어디에도 없는데.
"여기가 좋겠네.“
11시가 될 때까지 사쿠라가 업무를 보았던 집무실을 발견한 재희는 곧장 집무실의 문을 덜컥. 열었다.
"여, 여기서요?“
"왜. 싫어? 나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혹시 싫으면 다른 곳을 찾아보고.“
"싫... 지 않아요.“
조금만 더 가면 사쿠라의 방이 나오는데 얼마나 자신을 범하고 싶은 거면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하자는 걸까. 더더욱 반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만큼 원하고 있는 거지. 사쿠라의 몸을.
"......“
늘 업무만 보던 곳인데 지금은 재희랑 함께 있으니 뭔가 색다르게만 보인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빙 둘려 있는 푹신한 의자들이나 업무를 보는 책상, 그리고 졸음이 쏟아질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준비실 같은 곳까지. 이 하나하나 전부가 음란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우읍?!“
철컥. 문을 잠그자마자 아까처럼 재희는 바로 입을 맞춰왔다.
"후으응...! 읏.....!“
그러면서 커다란 가슴을 한 손 가득 넣어둔 채로 주무르기 시작하자 사쿠라의 등이 문에 닿자 덜컹덜컹하며 문은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아... 기분 좋아.‘
맨 살갗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 위로 가슴을 움켜쥐며 주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과 손 사이에는 브래지어와 옷 하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쾌감은 사정없이 사쿠라에게 쏟아져 내렸다.
"하악!“
맞추었던 입술이 떨어지고 재희의 입과 혀는 목을 훑었다. 분명히 목은 성감대가 되기엔 힘들어 보일 텐데. 목을 입으로 쪽쪽 빨아대거나 핥는 것만으로 몹시 기분이 좋아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재희 씨. 좋아요!“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대체 어디 갔는지, 자신의 목덜미에 처박힌 재희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품에 꼭 안았다.
"하읏... 하아앙!“
어느새 입술은 목에서 떨어져 쇄골로 이동했고, 쇄골에서도 만족할 만큼 탐한 뒤에야 가슴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원수 같은 옷이 재희의 움직임을 방해하자 재희는 사쿠라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려 들었다.
"제, 제가... 벗을게요.“
누군가가 옷을 벗겨 주다니. 벗겨 주는 사람이 재희라면 여한 날이 없을 정도로 행복할 테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벗겠다고 말하며 사쿠라는 천천히 옷을 벗어갔다.
'보, 보고 있어......‘
벗는 시간 동안 딴 걸 할 것도 없으니 재희는 사쿠라가 옷을 벗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혼자서 더 흥분되었다.
사락.
상의를 벗자 뽀얀 속살이 보여지며, 잔뜩 화가 난 듯 발기한 유두를 아프게 만드는 브래지어도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읏!“
살포시 가슴에 손이 얹히며 엄지와 검지로 핑크빛을 띠는 유두를 살짝 꼬집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했다.
"아... 재희 씨... 사랑해요.“
"그래?“
"네... 저 이상하죠? 남자도 아닌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별로. 내 얘기 못 들었어? 나도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들었어요. 길드 안에서 유명한 얘기잖아요.“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모두 다 아는 사실. 윤재희는 레즈란 것을. 애초에 사쿠라의 소문도 한 번 풀리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 자신보다도 예쁜 재희라면 어떨까.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똑같은 취향임에도 사쿠라는 부끄러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친하지도 않던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걸로도 모자라서 곧장 몸까지 내주다니.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천박한 년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불안한데. 그 불안함을 해소해주듯. 재희는 입을 맞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