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070 귀환 (70/140)



〈 70화 〉070 귀환

아아. 어찌 저 푸른 하늘이은  이렇게나 어둡게만 보이는 걸까. 재희는 자신의 인생에 한탄하며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0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1조라니... 천문학적인  금액의 밑에 처음으로 갱신하여 브론즈 게임에서 벌어들인 돈을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가 있었다. 생존 상금 300만 원에  9명을 죽여서 얻은 270만 원. 그리고 어제 옷을 사느라 –가 붙어서 약 500만 원 정도가 찍혀 있었다.

처음으로 카드를 갱신하면 그제서야 벌어들인 수입을 포함한 현재의 소지금이 찍히고, 그 소지금을 빚을 갚는 데 쓰려면 아까와 같이 정산소에 가서 얼마까지 빚을 갚는  쓰겠다 하면 금액이 줄어드는 방식이다. 재희의 카드에는 소지금만 줄어들 뿐이지 빚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만 같다. 몇백만 원을 갚는 곳에 쓰면 뭐하나. 그만큼 빠져나가는 돈이 더 많은데. 아이고야. 인생이  고달프다.

"하아......“

역시 포기가 답이다. 500을 넣으면 999,995,000,000원만 더 갚으면 된다는 생각에 포기가 재희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


재희의 번호를 정산소 직원이 부르기 전만 해도 재희에게 말을 걸어왔던 남자가 정산소 밖까지 끈질기게 따라 나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한숨을 보고 의문을 품게 되어 물음을 던져보았다.

"알 것 없어요.“
"맞아요. 알 건 없죠. 근데 궁금해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나 아리따운 미녀분께서 한숨을  쉬어서 안달이 난 건지 말이죠.“
"개인 사정이니 제발 파고들지 말아 주세요.“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았어요.“

미치도록 혼자 있고 싶다고 재희는 생각했다. 지금은 민정이나 예림이 조차 곁에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심란한데 처음 보는 남자가, 그것도 얼굴과 몸매를 보고 음흉한 생각으로 다가왔을 게 분명한 남자가 계속 말을 걸어오니 자신과 다르게 능글거리는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어 보였다.


"근데 지금 어디 가세요?“


아니다. 착각이네.

"하아... 누군데요. 당신.“
"네? 제 이름이 궁금하신가요?“


뭐 하는 인간이고, 재희 한 명쯤은 지독하게 괴롭힐 힘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누구냐고 물었는데 남자는 잘 못 해석하여 드디어 이 아리따운 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생긴  알고선 히죽거렸다.

"정말 궁금해요?“

아아. 골치가 아프다. 하필이면 벌레가 꼬여도 이런 정신 나간 벌레가 꼬이다니.

"궁금하시면 알려줄 수는 있어요. 제가 조금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 이름도 말하기 조금 그렇거든요.“

그래서 알려 주겠다는 건지 알려주지 않겠다는 건지.

"그래서요.“
"음. 조금 힘들긴 하다만 원하시면 알려드릴 수가 있어요!“

돌겠네. 그래서 누구냐고.


"아니. 그냥 모를래요.“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심지어는 이름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아졌다. 괴롭힐 거면 괴롭히라지. 게임 안에서 재희의 앞을 막아서는 것만으로 모자라서 강간하려 들면 자비를 주지 않고 철저하게 짓밟으면 되었다. 그게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뒤 일은 미래의 재희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재희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아! 어, 어디 가요?!“


갑자기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에 당황한 남자는 황급히 재희를 따라 걸었다.


"물어봐 놓고 듣지도 않은 채로 어디 가려는 거예요?“
"하 씨... 스트레스 쌓이게.“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그래도 기분이 우울한 사람을 붙잡아 둔 것도 모자라서 말을  것처럼 하면서 말을 하지 않는데. 화가 나지 않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재희는 주위의 시선을 모으게 만드는 아름다운 은색의 머리칼을 박박 긁어대며 자신을 따라 걸음을 멈춘 남잘 고개를 쳐올려 바라보았다.


"알 필요 없어졌으니. 그냥 꺼져.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네?"


 대로 되라지. 먼저 시비를 건 건 이쪽이다. 재희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은 없는데 애인들까지 위험해지는 순간, 이 몸뚱어리쯤이야 지존 길드의 길드장. 피를 부르는 사나이에게 팔아서라도 지키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그러자 너무 당돌하게 나올 줄을 정말 예상조차  했다는 듯, 남자는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시발. 아까처럼 계속 지랄해 보지. 어?“

지, 지랄.....?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자꾸 귀찮게 굴어?“
"어... 그... 죄송합니다?“
"참. 사과도 빠르다 시발. 그냥 꺼져.“
"저 그냥 꺼져요?“
"두  말하게 하네. 꺼지라니까?“
"어... 음. 네... 알겠어요. 꺼, 꺼질게요.“

꺼진다면서 발은 지면에서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로 잔뜩 일그러진 재희의 얼굴로 향한 남자의 눈도 마찬가지. 결국, 재희는 다시 한번 더 남자를 내버려 둔 채 걸었다. 이젠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야 했는데. 괜히 화풀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는데 먼저 화풀이를 하게 만들 정도로 짜증 나게 한 사람은 저 남자이니 인과응보였다.


"......“

그렇게 재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남자. 진도열은 멍하니 자신에게 소리친 것도 모자라서 무시한 채로 갈 길을 가던 재희의 아름다운 뒤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임이 없었다.


"하......“

지금. 나한테 소리친 거야?

"하하......“


아무리 얼굴을 감추고 돌아다녔더라도 정말 잘생긴 외모 탓에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최대한 정중히 거절하거나 하는  없다는 듯이 진도열에게 안겨 왔다. 그런데 비쓰온 게임 역사상 처음으로 튜토리얼에서 금 등급을 받아 정착지에 발을 들인 여자. 윤재희만은 달랐다.


"처음부터 나한테 관심이 없었어.“

여자라면 다 똑같았다. 잘생긴 외모에 호감을 품은 뒤에 진도열이 외모 말고 좋은 배경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직접 대화를 풀어 알아보는데 그녀만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진도열을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바깥세상에서도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기 전만 하더라도 어떤 여자들에게 이런 퇴짜를 맞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난생처음으로 퇴짜를 맞았다.  진도열이 말이다. 그는 미친놈처럼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처음에는 단순히 믿기지 않는 소문에 흥미를 품었을 뿐, 두 번째는 전 세계 그 어떤 여자들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외모를 지녔다는 사실에 관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사쿠라보다 아름답다는 그 여자. 진도열은 이제 막 첫 번째 정식 게임을 끝냈으니 조만간 정산소에서 카드를 갱신하러  것을 예상하여 미리 부하를 정산소 앞에 배치해 두었다.

브론즈 게임에서 돌아온 배가 선착장에 장착하여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내린 바로 다음 날에도 정산소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번째 날이 되자 재희는 그제서야 정산소를 찾아와 카드를 갱신하려고 한다는 말에 곧장 길드를 뛰쳐 나왔구만. 생각보다  예쁘면서도 당돌한 게 딱 진도열의 이상형이었다. 자신의 여자가 되려면 외모나 배경같이 물질만 보면  되었다.

당연히 예쁜 것도 물론인데 개인적으로 능력을 갖춘 상태로 이리저리 끌려만 다니는 멍청한 여자여도 안 되었다. 이렇게. 재희처럼 처음엔 진도열의 배경이 어떨지 모르니 조심하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올라 앞뒤 생각 안 하고 달려드는 그 무식함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쓰온 게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믿을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식한 용기뿐이니까.

"좋네. 윤재희.“


진도열은 그녀가 사라진 길에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가지고 만다.“헤븐 랭킹 2위. 진도열은 처음으로 반드시 가지는 것만으로 모자라서 평생을 함께할 반려로 재희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


"뭐. 저런 놈이  있냐? 어후.“

 꼬이는 놈마다 저런 남자뿐인지 모르겠다.  번쯤은 정상인 남자가 호감을 품어도 될 터인데. 물론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올 정도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약육강식인 이곳에서 착한 사람이라도 본성을 되찾아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아......“


어디 헤븐 안에서 1조를 들고 있는 부호가 없을까. 있다면 꽃뱀 짓을 해서라도 돈을 훔쳐 1조라는 빚을 대신 갚은 다음에 재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데 말이다. 재희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왠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쓰읍... 이름이 뭐였더라?‘


적색의 눈이 닿은 곳. 그곳에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어린 소년이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예림이와 같이 차인원의 무리에서 처음 만났으며, 이번 브론즈 게임에서 거대한 도끼를 든 남자에게 몸을 희롱당하고 있을  도움을 받았던 아이였다. 근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안녕?“
"아, 안녕하세요.“

소년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인상하자 소년은 급속도로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얼굴을 아래로 툭 떨구며 말했다.


'귀엽네.‘

요즘 고등학생은커녕 초등학생들도 알 건 다 알면서 쓰레기들이 넘쳐나는데 이 소녀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귀여움을 잘 간직한 순수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래. 이런 남자들이 꼬이면 뭐라 하지 않는다. 남자인 이상 여자가 된 재희의 몸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도 더 큰 부끄러움이 찾아와 얼굴조차 들지 못하니 귀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름이... 뭐였지? 누나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서 말이야.“
"배, 백윤현이예요.“
"아... 그래. 맞다. 백윤현. 윤현아. 오랜만이야.“
"네, 네. 누, 누나.“

아, 이거 정말 좋네. 누나라 스스로 칭하고 불려도 입꼬리가 슬그머니 귓가에 걸렸다. 이상한 남자들만 대거 봐 왔고, 도움도 받은 탓에 백윤현에 대한 호감도가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바빠?“
"아, 아니요.“
"지금 할 것 없다는 거지?“
"그건... 왜요?“
"누나랑 같이 술이나 먹을래?“
".....?!“

이곳에 오기 전에는 거의 사 먹지 못했던 술. 갑자기 그런 술이 땡겨 왔다. 아니, 지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면 정말 미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아직 점심도 오지 않은 오전인데도 말이다. 당연히 학생인 데다가 술을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순수한 아이, 백윤현은 뜬금없이 술을 마시자는 재희의 말에 당황했다.

"딱히 먹고 싶지 않으면 그냥 자리만 지켜줘.“
"그, 그런 거라면요.“


백윤현의 부모님이 입이 닳도록 말했다. 담배는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술은 상황에 따라서 먹되 자주 접하지 말라고. 그 무엇보다도 미성년자인 지금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절대 술을 먹지 말라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는데 백윤현은 첫사랑인 재희를 위해서 선을 넘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리만 지켜도 된다는 말에 안심하며 재빨리 긍정했다.

"갈까?“
"네, 네!“

손을 내밀자. 덥석 붙잡았다.


'훈련을 열심히 하나 보네.‘

백윤현의 손을 잡은 재희는 꽤 감탄했다. 이 어린 손이 상처투성이였으니.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텐데 꾹. 참으며 훈련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재희의 그녀들과 함께 훈련을 시킨다면 좋은 촉진제가 될 것 같은데. 재희는 자신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백윤현을 바라보았다. 백윤현은 아까 전부터 계속 재희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고개가 자신 쪽으로 돌아오자 재빨리 앞으로 눈을 돌렸다.


"윤현이는 훈련 열심히 해?“
"네. 여,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

원래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강해지려는 이유가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재희를 자신의 힘으로 지켜주고 싶다는 욕망 때문으로. 두 번 다시 지켜주지 못해 강간을 당하는 상황까지 가게 해 주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위험한 게임에도 참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바람을 실현하려면 강해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그래서 강해지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요.“

이러한 사실들을 다 털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래? 평범하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해지거나 돈을 벌려는 목적이 있단 것을.


"누나는요?“


"음... 나는 딱히 없네.“


1조라는 말도 안 되는 빚을 갚는  포기해서 딱히 강해지려는 목적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나의 애... 친구들을 여기서 내보내기 위해랄까 나?“

아직 어린 애한테 동성애를 접할 필요가 있을까. 재희는 순간적으로 나오려던 애인이라는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집어 삼키며 친구라고 말을 정정했다.

"누나는요?“

왜 재희 우선 순위가 자신이 아니라 친구들일까. 백윤현은 여기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여기 들어갈까? 한산해서 그런지 좋을 것 같네.“

어느새 눈에 보인 술집. 오전이기도 해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백윤현의 물음을 무시한 채로 여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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