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069 귀환
도망친 사쿠라를 내버려 두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온 재희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한 뒤에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안 일어났네.“
음냐음냐.
어제 대체 자기들끼리 뭘 한 건지. 오늘도 셋은 사이좋은 자매처럼 여전히 좁디좁은 재희의 침대 위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오래도 잔다.“
이제 9시가 넘어가는 시각. 일어날 사람은 거의 다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여자들은 태평하게 자고 있을 뿐.
"왜 아직도 나오지 않는 겁니까?!“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강하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설마! 아직도 자는 겁니까?! 어제 특별히 한 번 훈련에서 빼주었다고 이렇게나 풀어지다니!“훈련? 무슨 소리지.
"우으으... 가기 싫어어.“
"조그마아아......“
"으......!“
문의 두들김은 끝이 없었다. 결국, 잠에서 깬 셋은 이불 안으로 머리를 숨기거나 손으로 귀를 막거나 하는 단순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고작 그걸로 저 우렁찬 목소리와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없앨 수나 있을지. 재희는 애벌레처럼 축 늘어진 귀여운 모습에 풋.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제야 여는 건... 아... 재희 씨. 오늘은 훈련장에 가지 않으셨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가지고 있던 여자의 얼굴은 어느샌가 이제 막 사랑을 알기 시작한 소녀처럼 얌전해지며 붉어졌다.
"훈련이라니요?“
"아... 그게. 민정이와 예림이가 강해지고 싶다 해서요. 훈련을 시키는 중이었습니다. 재희 씨가 브론즈 게임에 참가하고 나서 결정한 사안이라 모를 수도 있었겠네요. 어제는 드디어 기다렸던 재희 씨가 돌아온다고 하루 빼주었는데.“
희미하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참.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냥 편하게 재희가 빚과 돌아가서 쓸 돈을 벌어주기만을 기다리지. 굳이 강해지려고 훈련하니 기특하기도 했다. 그래서 게임에 참가하기 전만 하더라도 매일같이 섹스하자고 조르던 그녀들이 요 이틀간 얌전 했었던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훈련으로 인해서 몸과 정신이 힘드니까.
"하는 김에 지나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 성노... 유지나 씨요?“
"네... 부탁드릴게요.“
"뭐,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 그러도록 할게요.“
순간 성노예라는 말을 할뻔한 그녀는 재희의 눈치를 살피며 곧장 말을 바꿔 이름을 입에 담았고,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고생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일어나아아!“
재희랑 얘기할 때와 완전히 달라진 험악한 표정과 목소리로 방에 들어오며, 침대 위에 널부러진 그녀들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어우... 우렁차네.‘
굳게 닫힌 문의 넘어로도 그렇게 큰 목소리였는데. 이렇듯 바로 옆에서 들으니 더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으! 교, 교관니임......!“
"일어나! 이미 훈련이 시작됐을 시간인 9시가 훌쩍 넘었잖아!“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아니, 오늘 하루만 더 쉬면.....!“
"그래가지고 어떻게 강해지려는 거야! 강해지고 싶다고 날 찾아온 거 아니야? 훈련시켜 달라고 한 거 아니냐고! 그럼 그냥 일어나란 말이야! 당장!“
"맞아요. 그냥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서 나가시라고요. 제 잠까지 방해하시지 마시고요.“
시끄러움에 찌푸려진 표정인데 눈은 감겨있는 상태로 지나가 말했다. 그런 지나에게 여자가 시선을 가져다주며.
"유지나. 너도 일어나.“
"네에....? 저, 저도요?“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계속 닫히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지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네 주인님께서 나한테 직접 부탁하셨으니까 잔말 말고 일어나!“
"히잉......“
재희의 말이 그렇다면 어쩔 수가 있을까. 지나는 두 여자와 다르게 곧장 몸을 일으키며 방문에 등을 기대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재희를 발견했다.
"아... 주인님이당.“
아침부터 사기적인 얼굴을 보니 피곤함은 싹 달아나는 것처럼 지나는 행복감에 젖어 실실 웃었다.
'고생해.‘
알아들을 수나 있을지. 재희는 입 모양으로 힘내라는 말을 전했다. 다행히도 하고자 한 말을 잘 알아들은 지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재희는 방을 나섰다. 되도록 그녀들을 어떻게 훈련하는지, 고되게, 아프게 하는 게 아닐까 의심과 불안한 생각이 들어오기는 한다만 아까 본 훈련 교관인 모습으론 그런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가 않았음에도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그녀들의 곁에 있으면 평소보다 풀어지다 못해 아예 훈련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다 날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어차피 할 일도 있어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재희는 길드에서 나와 분주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헤븐 주민들의 시선과 그들의 옆을 지나쳐 정산소에 도착했다. 정산소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지금 눈에 들어오는 사람만 하더라도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하... 자리가 없네.‘
자리가 다 차버려 서 있는 사람이 태반.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아 든 재희는 허탈하게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대기 번호는 96번. 앞에 대기 인원은 60명이 넘는다. 오늘 이곳에 처음 온 탓에 한 명당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9시에 문을 여는 정산소의 앞에 미리 와서 대기할걸. 아니지. 이런 생각을 재희만 할 리는 없을 테니까 별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안녕하세요.“
"......“
역시나. 이 망할 놈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자를 가만히 둘 리는 없나. 길드 안에서든 정산소에서든 말이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재희를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는데 그냥 무시했다.
"주무시나요?“
초월적인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두 눈을 감은 채로 화보 같은 자세를 취하던 재희에게 한동안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자 그것도 잠시였다. 귀찮다. 그냥 남자들 모두가. 그냥.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저기요?“
급기야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깨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무시하려고 해도 불쾌함은 완전히 지울 수 없어 아무런 표정도 띄우고 있지 않았던 얼굴이 점차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하아......“
직접 말로 하지 않아서는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재희는 눈을 뜨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뭔가요?“
"아...! 안 자고 있었네요? 다행이다."
비꼬듯 말하는 것 같은데 표정을 보면 순수함이 내비쳐지니 나빠진 기분은 더더욱 나빠지지는 않았다.
"이렇게나 아름다우신 분을 전 여태까지 들어본 적이 없네요. 혹시 이번에 오신 뉴비분 이세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 알리듯,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평범한 여자라면 보고만 있어도 웃음꽃이 필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다. 그런데. 그게 뭐.
"......“
이 남자는 누굴까... 단순하게 능력은 없는데 얼굴만 잘생긴 제비 같은 놈이면 얼마나 좋을까. 뒷일을 전혀 상관없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일 텐데. 만약 권력을 지닌 자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괜히 건드렸다가 노려지면 골치가 아픈 건 재희일 뿐이니. 헤븐 안에서는 어떠한 범죄도 용납하지 못해서 빽이 없다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심스러울밖에. 재희는 유심히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말을 건넸을까. 정말 얼굴을 믿는 걸까. 아니면 얼굴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자신의 권력, 빽을 믿고 있는 걸까. 능글능글한 표정으로는 단번에 알아차리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주위를 힐끔 살펴보았다.
'쓰읍... 모르겠네.‘
이 남자를 아는 사람은 없는지, 남자들은 재희의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에 감탄하며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 기회를 만든 이 남자를 질투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그런 재희를 부러워하면서도 질투, 이상한 감정을 든 채로 얼굴을 붉히고 있다. 한 명쯤은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봐서 얼굴을 알고 있는 누구누구가 저 예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헛된 희망이었다. 그러나 신은 있는지.
[띵동~!]
"96번 고객님.“
96번은 재희였다. 재희는 일부러 번호표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남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슬쩍 보여준 후 걸음을 옮겼다.
"와... 엄청 예쁘... 아, 아니. 어서 오세요.“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미모에 감탄하다가 이내, 곧장 풀어진 표정을 바로 한 채로 고객 맞이용 미소를 띄워 보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카드 갱신.“
"그럼 카드를 주시겠어요?“
정산소에 올 때는 무조건 지참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카드.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헤븐으로 향하는 배에서 모두가 받았던 개인정보는 물론이고, 갚아야 할 빚의 금액이 표시된 그 카드를 말이다. 재희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네. 윤재희 씨. 카드를 받았... 어...? 이게 다 얼마야? 일십백천... 1, 1조?“
직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아있는 고객님을 바라보았다.
"하, 하하. 조, 조금 빚이 많네요. 곧바로 갱신해 드리겠습니다."
부끄럽네. 너무나... 빚이 1조라니. 이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나올 수 있는 빚인지. 재희도 그렇고 재희의 카드를 본 직원도 궁금해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대로 그걸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1조라는 빚을 진 재희를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직원은 뒤늦게 애써 침착함을 보이며 곧바로 자신이 할 일인 기계에 카드를 꽂아 넣었다.
"헐... 이, 이자가 50%라니.“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힐끔. 재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걸 똑똑하게 들은 재희의 얼굴엔 어둠이 자옥하게 깔렸다.
'5, 50%....? 헤븐에 들어오고 난 뒤에 석 달 뒤부터 이자가 붙으니 약 두 달 뒤엔 빚이 1조 5천억이 된다는 거야?‘
허미... 인생 시발. 하루아침에 빚을 1조를 얻은 것도 모자라서 석 달 만에 이자가 5천억이나 더 붙다니.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걸까. 갚을 수나 있을지. 산 덤이 같은 빚과 불어나는 이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마를 부여잡은 재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천문학적인 빚에 갚는 걸 포기했다고는 해도 완전히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는데 그 희망마저 철저하게 짓밟아버리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아니, 괜찮을... 거예요.“
말만이라도 괜찮은 척을 해 보는데 직원이 볼 때는 얼굴에 그대로 지금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드러나기에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후우... 혹시. 다른 사람의 걸 대신 볼 수 있을까요?“
"조건이 있어요. 그 사람의 카드를 가지고 계시면서 기간제 위임장에 카드 주인의 지장을 찍어오면요. 참고로 위임장은 저쪽에 있어요.“
위임장이 있는 위치. 정산소의 한쪽에 있는 테이블을 직원이 가르켰다.
"절 봐서라도 오늘만 카드랑 위임장 없이 확인해 주실 수 없나요?“
"네...? 그, 그건 규정상 불가능한데요.“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그녀들의 빚의 이자가 적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야 아픈 머리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 주게.“
"지점장님?“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일세. 해도 된다네.“
재희가 누구이고, 뭐 하는 사람인지 들은 것도 모자라서 되도록 배려를 해 달라는 부탁을 레이건 박사나 강 팀장 등, 게임 측에서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이 입이 닳도록 말한 그녀가 정산소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내, 다가와서는 특별히 허락해 준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점장님의 말. 거부할 수가 없다.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이민정, 김예림, 그리고 유지나.“
"세 분이시군요. 보자아... 이민정 고객님은 빚이 15억. 이자는 4%입니다. 김예림 고객님은 빚이 20억. 이자는 3%고요. 마지막으로 유지나 고객님은 빚이 5억. 이자는 5%입니다.“
깔끔하게 3, 4, 5% 이자율이었다. 셋 다 합치면 재희의 이자율보다 몇 배나 낮다는 것이. 이 정도면 빠르면 1년 안에, 길면 그 이상의 시간이면 충분히 갚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여자이면서 슬프게도 빚을 갚을 능력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심사로 인해 이자율이 낮다는 게.
"감사... 합니다.“
"여기. 카드 갱신 완료했습니다. 고생하세요. 윤재희 고객님.“
재희는 힘없이 일어나 몸을 돌렸고, 남자도 아닌 여린 여자의 몸으로 1조라는 빚덩이를 어깨에 둔 걸 안쓰러운 눈빛으로 직원은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