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068 귀환
어김없이 다음날은 찾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일찍 눈이 떠진 재희는 마땅히 할 게 없어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역시 재희보다 미리 와서 훈련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중검. 어제는 대검을 사용해 봤으니까 오늘은 중검을 사용해보기로 하며 무기 창고에서 중검을 골라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오면서 어제처럼 까먹지 않고 허리 부근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땀이 나면 피부에 붙지 않도록 막아주는 머리끈을 가지고 왔다. 재희는 잠시 바닥에 중검을 내려둔 채로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내 입에 물고선 긴 머리카락을 뒤로 모았다. 어느 정도 모였을 때, 한 손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꽉 잡으며 입에 잠시 맡겨 두었던 머리끈을 가지고 머리를 묶었다.
포니테일이라 하던가. 기본적이고 가장 간단하면서도 편하기까지 한 스타일로 묶은 재희는 다시 허리를 숙여 중검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자세를 잡고... 휘둘렀다.
후웅...! 훙!
어제 들었던 대검을 휘둘렀을 때와는 다르게 작아진 바람을 가르는 소리. 확실히 대검보다는 중검이 더 나았다. 무인도에서 사용하기도 더 적절해 보일 정도로 적당한 날의 길이, 크기까지. 대각선을 그리며 아래로 휘둘렀던 검은 더는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
'그래도 레이피어가 가장 낫네.‘
뭐니 뭐니 해도 레이피어가 가장 나아 보인다. 중검도 꽤 괜찮은데 움직임을 방해하는 요소가 상당히 많은 무인도에서는 휘두르는 것보다는 찌르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나중에 게임 환경이 달라지면 레이피어를 버릴 수도 있다. 그전까지는 레이피어 외에 다른 무기들은 실전에서 쓸 일은 아예 없을 것만 같았다.
"와아!“짝짝짝짝.
"......?“
갑자기 들려오는 감탄사와 박수 소리, 재희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면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사쿠라가 서 있었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사쿠라님. 언제부터 있으셨나요?“
"방금 왔어요.“
"왔으면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아니요. 어차피 지나가던 일이었고,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어 보였어요.“
사쿠라는 차마 재희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훈련하는 모습... 너무 예쁘다! 여태까지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훈련하는 모습을 질리도록 봤던 사쿠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재의 자신이었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 좋은 점만이 보여 지적하느라 바빴는데 재희에겐 달랐다.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완벽 그 자체. 얼굴은 그 이상이었다.
그 때문에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하던 재희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피리를 부는 사나이의 뒤를 졸졸 쫓아가던 아이처럼 다가와 넋을 놓고 감탄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내, 검의 움직임이 멈추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박수친 게 아닌가. 부끄러웠다. 너무나도.
"그런가요?“
"네. 그래요.“
평소처럼 행동하기 위해 온화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런 표정과는 달리 사쿠라의 눈은 재희의 목덜미로 향해 있었다.
'땀... 땀... 핥고 싶어.‘
꿀꺽.
저 새하얗고 아름다운 목덜미에 입을 처박아 혀를 내밀어 맨 살갗을 핥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썸이라 할만한 상황따윈 여태까지 없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핥고 싶다고 생각을 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희의 앞에만 서게 되면 음란한 생각만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애인들의 앞에 서면 질투에 눈 앞을 가렸다.
"아침 일찍부터 훈련이라니. 재희는 부지런하시네요.“
"그건 사쿠라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네? 아니요. 오늘은 우연히 눈을 뜬 것뿐이에요.“
사실은 어제 아침 일찍부터 재희가 훈련하고 있다는 말을 얼핏 엿들어서 일부러 오늘은 일찍 일어나 호위인 세라도 없이 곧장 훈련장으로 나왔었다. 다행이게도 정말로 재희가 있어서 얼마나 기쁘던지. 몸을 괴롭히던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재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난 사쿠라를 칭찬한 것이다.
"더 하실 건가요?“
"......“
조심스러운 물음.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재희는 유심히 사쿠라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나온 결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화악.
정답이었는지 사쿠라의 표정은 한 춤 더 밝아졌다. 이것으로 꼬신 적도 없는 미녀가 재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조차 외모로 꼬셔버리는 재희에게 노골적으로 음흉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도 모자라서 조금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저랑... 차, 차나 한잔하실래요?“
"차요?“
"네. 근처 카페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열지 않았겠지만 제가 차를 좋아해서요. 집무실에 다양한 찻잎이 있답니다. 어떠신가요?“
"음... 좋아요.“
"아... 네!"
거절하면 어쩌지 하고, 두려워하며 가슴 앞으로 모은 손을 꼼지락대는 게 정말 귀여웠다. 재희는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고 사랑하는 그녀들이 깨어날 시간까지도 많이 남아 할 게 훈련밖에 더 없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말하며 웃었다. 사쿠라는 재희의 아름다운 미소를 본 순간 저 미소는 가식적인 게 아닌 진실된 미소를 자신에게 지어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서 가요.“
한시라도 빨리 집무실에 들어가 직접 차를 타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어떤 스타일의 여자가 좋은지, 이왕이면 여자 한 명 더 늘릴 생각이 없는지에 대해서.
'꺄아~ 너무 대담해! 사쿠라 진정해!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성급하면 오히려 재희가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천천히 가자!‘
속으로 이런 말을 되새기지만, 자신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있을 재희를 생각하면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항하는 것처럼.
"사쿠라님.“
"네? 왜요?“
왜 부를까. 집무실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불안한 생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제가 땀을 흘려서요. 씻고 가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괜히 걱정했다. 씻는 것뿐이니까. 씻는 거... 화끈. 사쿠라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사쿠라!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이 변태! 땀! 그래. 땀이 나서 씻는다는 것뿐인데 왜 너는 그 말에 침대부터 떠올리는 거야?! 재희의 알몸을 상상하는 거냐고!‘
호위인 세라와 함께 목욕을 자주 했었다. 지금도 꾸준히 함께 목욕하고 있었다. 세라와 씻을 때는 그녀의 알몸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눈앞에서 왜 갑자기 그러냐고 묻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려서 은색의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재희가 씻는다는 말 한마디에 함께 몸을 씻고 싶었다. 그녀의 알몸을 엿보고 싶었다. 된다면 만지기까지......!
'보기보다 상당한 변태인 것 같네.‘
그것도 망상으로. 원래 외모에 자신 없는 애들이 망상에 빠져서 혼자 실실거리는데. 사쿠라가 그러니 그냥 화보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한심하다는 생각까지는 예쁜 외모로 완전히 커버할 수 없었지만.
싱긋.
재희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욕망에 따라주겠다고.
"같이 씻으실래요?“
".....?!“
두 눈이 번쩍 뜨이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표정에 다 들어났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믿기지 않았다. 먼저 씻자니...! 사쿠라 자신이 먼저 말을 해야 할 판에 재희가 먼저 함께 씻자 하니 사고가 정지되었다. 대, 대답해야 하는데! 늦기 전에 대답해야만 하는데!
"싫으시면 저 혼자 씻을게요.“
"아, 아니요! 가, 같이 씻어요.“
말했다아아아!
"네. 사쿠라님.“화끈.
저 미소... 너무 사기다. 계속 보다가는 얼굴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얼떨결에 함께 씻기로 하며 목욕탕 탈의실에 재희를 따라 들어온 사쿠라.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사쿠라님?“
"네, 네넷!“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무, 무슨 말이에요. 긴장이라니요. 하, 하하핫!“
누가 봐도 긴장했다. 다 들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하니. 귀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가요?“
재희는 일부러 모르는 척. 속아주기로 한다.
"으으으음!“".....?“
목욕탕 탈의실에는 정해놓은 캐비닛에 미리 갈아입을 옷을 넣어둔다. 그 때문에 귀찮게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방에 돌아갈 필요가 없어 옷을 벗기 위해 재희는 곧장 상의의 끝자락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몰래 엿보던 사쿠라는 동그랗게 떠진 두 눈으로 기기괴괴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이상한 소리에 재희의 시선이 닿고.
휙!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근두근.
사랑하는 사람... 그것도 여자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상의를 벗고 있었다.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리곤 절대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저장해서 시간 날 때마다 들여보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 차마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힐끔.
사쿠라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앗?!“
"음...? 사쿠라님?“
"네, 네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하하하 나, 날씨가 정말 좋네요!"
눈에 보인 건. 브래지어를 벗은 상태로 바지를 내려 팬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재희의 모습. 아까보다 더더욱 붉어진 얼굴로 사쿠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네. 좋았죠. 근데. 사쿠라 님은 벗지 않을 건가요?“"아니요. 버, 벗어야죠.“
벗긴 해야 하는데 벗기가 힘들다. 분명 동성의 여자인데, 여기서는 남자가 엿볼 수 없으니까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외모는 물론이고 몸매도 마찬가지로 자신 있는 사쿠라는 이상하게도 옷을 벗기가 부끄러워 미칠 노릇이었다.
"혼자 옷을 벗기 힘드신가요?“
"네?“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네에에엣?!“
"자자. 가만히 있으세요. 사쿠라님.“"아, 아아아!“
하필이면 단추가 있는 옷을 입고 나왔다고 사쿠라는 막 잠에서 깨어나 옷을 갈아입는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다, 닿았어어......!‘
재희의 맨 가슴이 사쿠라의 등에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리고 어느 부근만 유일하게 딱딱한 감촉이 등으로부터 느껴졌다.
툭.
단추 하나가 풀렸다. 왜, 왜 이렇게 단추를 풀어주는 걸까. 편하게 앞에 서서 풀어주면 될 터. 단추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게 사쿠라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푸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쿠라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행복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윽......!“
눈에 보이지 않는 단추를 찾아 나서는 재희의 손가락은 사쿠라의 배를 살며시 쓸어가며 올라갔다.
툭.
그렇게 발견한 단추를 또 하나 풀었다.
"읏......!“
다시 사쿠라의 몸을 훑으며 올라갔다.
툭.
"하앗......!“
이번에는 가슴 부근이라 지금 내서는 어색하게만 만드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고작 단추를 풀어주는 것뿐인데. 사쿠라는 황급히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보내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사쿠라님. 가슴이 부드럽네요.“
"자, 잠깐! 지, 지금 뭐하는......?!“
단추를 풀다 말고 재희는 가슴이 부드럽다는 말과 함께 가슴 위로 살며시 손바닥을 내려놓았다.
"싫어요?“
싫다니? 그럴 리가. 그것보다는 그냥 부끄러워 미칠 것 같은데. 이러고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킨다면 어떡하라는 말인가.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 길드장이라니. 재희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긴 하다만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그만... 으읏!“
이젠 대놓고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직 단추가 다 풀리지 않은 옷과 입고 있는 티셔츠 위로 가슴을 희롱하고 있었다. 옷 두 개가 사이에 있음에도 사쿠라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몰래 찾아간 재희의 방에서 여자의 신음소리가 약하게 들려올 때 처음으로 자위란 걸 해 보았던 사쿠라는 지금 당장 여기서 자위를... 아니, 재희의 손가락이 가슴 말고도 음부 사이를 파고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입은 그만해 달라고 말한다.
"싫으면 말해 주세요. 사쿠라님.“
혼자서 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쾌락.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가슴을 만지고 있는 것만으로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아, 아아...! 기, 기분 좋아아!‘
이대로... 이대로 끝까지. 끝까지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음부에 손이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재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
설마 저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 사쿠라는 그 표정을 보고 몸을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되도록 그녀들처럼 마구 신음성을 터뜨리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거부했다. 왜지...? 대체 왜?!
"죄, 죄송해요!“
이유를 모르는 사쿠라는 황급히 탈의실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너무 일렀나?“
어제는 정신적으로 피로해서 섹스를 하지 않고 잤더니 너무 급하게 나갔나 보다. 조금 신중히 사쿠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야 했는데. 뭐, 그래도 완전히 싫어했던 게 아니었으니 나중에 다시 공략하기로 하며 재희는 혼자 욕탕에 들어가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