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066 귀환
(65화 수정 했습니다)
길드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피로에 찌든 몸을 푹신한 침대에 맡긴 채로 잠에 빠졌던 재희는 여전히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아침에 일어날 필요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눈은 자동으로 떠졌다.
"끄응.....!“
오래간만에 푹 잤다. 튜토리얼을 할 때랑 헤븐에 들어서고 곧장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브론즈 게임이 잡혀 있어 그걸 준비하느라 매일같이 훈련하기 위해 남들이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떠서 그런지 이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것이다. 몸을 살며시 일으키며 양팔을 하늘 위로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 위를 살펴보았다.
"애내들은 언제 이렇게 친해졌다냐.“
어제 자기 전만 하더라도 홀로 누워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세 명의 여자가 불편하게 딱 달라붙어서는 새근새근. 일정한 숨을 내뱉으며 덩달아 누워있었다. 1인용 침대에 네 명이 자다니. 이래서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진 게 아닐까. 잠꼬대하는지는 잘 모르는데 아무튼, 잠꼬대하다가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지지 않고 턱턱 가로막혀서 답답함에 일어나게 된 걸 수도 있었다.
"하아... 굳이 왜 여기서 자는 건지 원."
예쁜 여자들이 좋아해 주는 건 좋다. 자는 사이에 몰래 들어와 동침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근데 왜 꼭 좁은 침대 위에 전부 드러누워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한다고는 해도 이런 사소한 불편함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재희는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막상 아침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뭘 해야 할까. 다음 게임은 플래티넘 등급이라 재희가 참여할 수가 없기에 한동안은 나태해져도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나는 훈련 빼고는 마땅히 해야 할 게 생각나지 않아서 길드 건물의 아래층에 있는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훈련장.
역시나. 날은 밝아왔는데 해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라 훈련장엔 아침부터 단련하는 길드원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게 나았다. 사쿠라 길드는 굳이 따지자면 대형 길드에 속하지는 않는데 중형 길드보다는 큰 편이라 길드원들의 머릿수는 많았다. 당연하게 남자들이 태반이었고. 그 때문에 훈련장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자라는 뜻이다.
재희 자신이 거울을 봐도, 주위 사람들이나 같은 여자들이 보아도 단순히 예쁘다는 말조차 부족한 외모를 가진 여자인데. 같은 길드원이긴 한데 그 이전에 남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귀찮게 굴 게 안 봐도 뻔했다. 브론즈 게임에 참가하기 전만 해도 등급이 실버라고, 골드라고 자신의 등급을 과시하며 훈련을 도와주겠다는 남자들이 여럿 있었으니 그저 귀찮을 따름이었다.
뭐, 어쨌든 그들 덕에 게임 등급에 따른 실력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어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재희가 생각하기로는 지금 이 상태라면 플래티넘 등급까지는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개인 실력으로 따지면 이보다 위겠는데 여자이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재희를 범하기 위해 배신과 여럿이서 공격해오는 걸 고려한다면 플래티넘 등급이 적절한 선이었다.
그러나 믿을 만한 동료가 붙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등을 맡길 정도의 실력을.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실력만 갖추고 있다면은 색깔 등급까지 충분히 올라가고도 많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헤븐엔 존재하지 않고 다른 섬에는 한 명씩. 비쓰온 게임 내에 총 5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흰색 등급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섯 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라 하던데. 어떨지. 한번 보고 싶었다.
"음... 대검이라.“
무기 창고에 도착한 재희는 전시된 수많은 무기를 보며 고민했다. 게임에 참가하기 직전이라면 다른 것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구석에 박혀 누군가 잡아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레이피어를 집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게임에 참가할 것도 아닌 훈련일 뿐. 이 몸뚱어리로 비교적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면서 가냘픈 팔의 근육을 단련할 수가 있을지.
재희는 레이피어가 아니라 딱 봐도 무거울 게 뻔한 대검을 보고 있었다. 직접 부딪쳐 봐야 아는 것. 헤븐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레이건 박사에게 물어보지 않을 걸 후회하며 재희는 벽에 기대어 세워진 대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별로 무겁지는 않네.“
생각 외로 가벼웠다. 평범한 남자가 한 손으로 든다면 휘두르지도 못할 수도 있는데 두 손이라면 충분히 휘두르고도 남을 것이다. 대검을 들고 무기 창고를 나와서는 곧장 휘둘러 보았다. 날의 크기가 거대한 탓에 가벼운 모기 날갯짓 소리와 비슷하던 레이피어와 달리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며 내는 소리가 비교적 무거웠다.
"내가 쓰기에는 별로네.“
딱히 무겁지는 않은데 피부가 약해서 손바닥에 무리가 간다. 이것 봐라. 얼마나 휘둘렀다고 벌써부터 손바닥의 피부가 까져서 피가 흐르는 것을. 대검의 손잡이가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겨우 이 정도로 피부가 까질 정도면 정말 약한 육체가 아닌가. 속은 강한데 겉은 바사삭.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뭐, 아픈 것 치고는 휘두르는 게 꽤 재밌지 않은가.
후웅! 훙! 휘웅! 훙!
대검을 머리 뒤로 넘겼다가 내려찍기도 해 보고, 옆으로 일자로 허공을 가르기도 하며, 대각선으로 상하로도 움직여 보았다. 그 움직임에 따라 50 초반의 몸무게를 가진 재희의 몸이 살짝씩 들려왔다.
"동작이 커져. 대비책은?“
동작이 너무 크다. 이래서는 상대방의 공격을 예측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거리를 내주어 당할 게 분명했다. 그럼 이를 보완할 방법은? 동작은 어쩔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작을 작게 하여 최소한의 공격을 해 본다 한들. 검의 크기가 있어서 움직임에 제약이 따르면 상처를 주되, 움직임을 방해할 유효한 타격은 주기 힘들어진다.
최소한의 공격으로 안전하게 모험할 바엔 차라리 그냥 동작을 크게 하여 피해를 주는 게 더 낫다. 그러므로 몸이 약한 재희에겐 가장 안 맞는 무기가 아닐까 싶다. 그 어떤 작은 손해라도 입는 순간은 패배. 비쓰온 게임 내에서는 패배라는 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패배는 곧 죽임이라 대검은 실전에서 절대 쓰지 않기로 한다.
"후우......“
여러 방법으로 검을 휘둘러 보고 영 안 맞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직접 몸으로 깨우친 재희는 흙바닥에 검을 내려 꽃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 숨을 고르면서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과 목덜미에 붙어버렸다는 사실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하아. 머리끈이... 아. 놓고 왔네.“
예쁜 머리카락이라며 자르지도 못하게 하는 탓에 불편함은 오로지 재희에게만 다가오고 있었다. 최소한은 단발머리라도 가능하게 해 주지. 자기 머리카락도 아닌데 절대로 날카로운 걸 가져가게 해 주지 않는다는 그녀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훈련 도중 땀이 나면 늘 그렇듯이 머리카락이 붙어 버려 이런저런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 바라보던 사쿠라가 선물로 머리끈을 주었다.
꽤 유용했다. 안 그래도 빚밖에 남지 않은 재희가 또 이자가 높은 빚을 게임 측이나 사채업자에게 빌릴 수도 없는 노릇. 한 푼도 없는 그런 재희를 위해 사쿠라가 싼값에 구매한 머리끈을 그냥 선물로 주었었다. 덕분에 브론즈 게임에 참가하기 전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할 수가 있어서 정말 고마웠었다. 마침 이번 게임에서 상금 삼백에 킬 당 30만 원을 추가로 받았었다.
굳이 주지 않아도 된다며 애써 거부하던 사쿠라의 손에 숙소와 훈련장과 무기 대여비, 마지막으로 식비까지 지불했어도 돈은 아직 남아 있었다. 언제 또 게임에 참가하여 살아남아 상금을 탈지 모르는 상황. 최대한 돈은 아끼지 말고 모아두어야만 했다. 빚의 원금을 다 갚아도 이자는 따로 또 갚아야 하니까. 아... 그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다.
"시발... 1조에 이자라니.“
게임 측에서는 튜토리얼의 과정을 지켜보다 심사를 한다. 이자를 얼마나 붙일지를. 아무도 죽이지 않고 숨어만 있다가 운 좋게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으면 돈을 갚을 때까지 시간이 무척 걸릴 거라 판단하고 낮은 퍼센트로 이자를 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능력이 뛰어나 빠르게 등급을 올릴 수 있을 거라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높은 퍼센트로 이자를 받는다.
이래야만 헤븐 내에서 이자가 빚을 넘는 경우를 방지할 수도 있고, 빚을 빨리 갚아 나가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막을 수가 있었다. 너무 불합리하다. 그런데... 뭘 어쩔까. 갑은 게임 측이고 을은... 아니, 을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의 인간들은 갑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처지니. 어쩔 수가 없다. 근데.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금 등급의 특전...? 푸하하.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원금에 최대 이자가 70%도 있다는데 그럼 재희는 대체 몇 프로란 말인가. 80%? 90%? 아니면 100%? 풉.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1억을 쉽게 갚으려면 초보자 구간인 금 등급을 넘어서 촤소 플래티넘 등급에 올라서야 하는데 그 전에 빚이 원금을 넘다 못해 천문학적인 금액에 도달할 가능성은 상당히 컸다. 이자율이 높은 사람에겐 특별히 이자가 원금을 넘어도 유예기간을 많이 준다고는 하다만 1조라는 빚의 높은 이자라니.
"아... 스트레스 받어.“
색깔 등급에 도달하면 한 게임당 1억은 우습게 번다는데 그래도 1조는 너무 큰 돈이다. 어떻게든 컴컴한 어둠 속을 헤쳐나가 밝은 빛이 가득한 바깥세상으로 사랑하는 그녀들과 함께 나가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빚을 다 갚을 수야 있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미친 듯이 아파져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긴 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훈련하기 싫어졌네.“
몸에 따닥따닥 달라붙어 버린 머리카락의 존재만으로 상당히 거슬려 짜증 나는데 빚과 이자를 생각하니 아침 훈련을 하기가 싫어졌다. 어차피 급하게 몸을 단련할 필요도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재희는 바닥에 꽂혀있는 대검을 쑥 뽑아내고선 질질 끌어 무기 창고로 향했다. 그리곤 원래 있었던 장소에 둔 채로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훈련장에서 얼마나 대검을 휘두르며 고민했는지. 어느새 길드 안에는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여왔다, 편한 복장에 개인 무기를 들고 조금 전까지 재희가 있었던 훈련장으로 향하던 참가자 신분을 가진 길드원이나 사무직인 길드원이나. 여유롭기도 하고, 바쁘기도 한 그들의 옆을 지나쳐간다. 그러나
."벌써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거야?“
"......“
기분도 우울한데 반드시 건드는 이는 있기 마련. 걸음을 옮기고 있던 재희의 팔을 낚아채서 강제로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남자의 행동에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놔 주시겠어요?“
그래도 같은 길드원이다. 언젠가는 등을 맡겨야 할 때도 있는 동료이다. 억지로 미소를 지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재희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던졌다.
"아아. 그건 문제없지. 근데 재희가 날 무시하고 가던 길을 마저 갈 거 아니야?“
정답이다. 멍청한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뭘 그리 놀란 표정을 지어. 뭔가 이상하게 쑥스럽네."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나 보다. 재희는 곧장 표정을 바로 했다. 다른 길드원이면 몰라도 같은 길드원과 사이가 나빠져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기에 다시 웃는 표정인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같이 훈련할까. 내가 자세를 봐 줄 수 있는데. 어때?“
평범한 여자였다면 잘된 일이라며 감사하겠는데, 재희의 입장에서 이 남자는 고작 플래티넘 등급, 심지어는 플래티넘 등급의 밑바닥과 같은 하찮은 놈에게서 배울 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재희가 가르쳐줘야 할 판. 간단하게 모의 대련을 해서 저 오뚝하게 솟아있는 코와 어깨를 낮춰주면 정말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을 채택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진 남자라. 그것도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내고, 게임 하나밖에 참여하지 않은 그런 여자에게 지면.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꽤 골치가 아파진다. 차라리 게임 측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남들 몰래 죽이는 게 낫지. 괜히 실력의 차이를 보여줘서 증오심만 불태우게 만들어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죄송해요. 훈련을 더 하려고 했는데 역시 아직 피곤하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막 게임을 치루고 돌아왔는데 너무 피곤하다는 듯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팔팔했지만.
"그래...? 아쉽네.“
남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오히려 하루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훈련하러 걸음을 옮긴 재희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푹 쉬어.“
"네. 고생하세요.“
그렇게 그는 떠나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음... 씻을까?“
아침 샤워만큼 기분 좋은 건 더 없다. 거기다가 일본인이면서 목욕을 좋아하는 사쿠라라 길드 내에 욕탕이 정말 잘 되어 있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좋을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이기도 하니 귀찮게 목욕하는 사람 도왔기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으니 더더욱. 결정했다. 목욕하기로. 재희는 목욕할 생각에 살짝 좋아진 기분으로 욕탕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