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065 귀환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희의 발걸음에 맞춰서 재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저 메이드 복을 입은 여자는 대체 누굴까. 이질적인 복장에 단순히 게임 측 인물이라 착각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꿀에 사랑을 퐁당 빠트린 눈으로 재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민정이가 곁에 없는 사이 저 여자와 재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분명히... 저 시발년이 재희에게 꼬리를 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직접 물어보지 않는다면 저년이 누구인지, 재희에게 어떤 여자인지, 그리고 재희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하나 같이 모두가 자신보다 못한 저 여자를 재희가 굳이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그 때문에 결론은 저 시발년이 재희의 외모에 홀려 꼬리를 치고 있다. 착한 재희는 그녀를 강하게 내치지 못하는 거고.
"재희야......"
애달픈 목소리로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흑......!"
나라는 여자가 있는데, 어디에 내놓더라도 얼굴과 몸매로 먹고살 자신이 있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바람을 피우는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럴 일은 없다고, 저 여자가 노골적으로 착한 재희에게 꼬리를 치고 있다고 결론을 짓고 생각을 마무리하려는데도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내가 필요 없어진 거야...? 나 보다 저 여자가 좋은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그래. 재희는 아무 잘못도 없다. 모든 건 저 여자가 잘못한 거다. 못된 년......!
'주, 죽일 거야!‘
자신에게서 재희를 빼앗아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고 말 것이며, 뺏으려던 인간들까지 모두 잔혹하게 죽여버릴 거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메이드 복을 입은 지나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재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띄워 보이며 입을 열었다.
"민정아. 다녀왔어.“
화악.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응! 다녀왔어요? 재희야!“
웃어주며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왜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까. 앞서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와서는 아무것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울고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응... 맞아요. 걱정 안 했어요. 근데 오랜만에 보니까 기뻐서 나는 거예요.“거짓말. 걱정이란 걱정은 정말 수도 없이 했는데 민정이는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자신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고 있는 재희를 올려다보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아. 좋다.“차가운 땅바닥이 아니라 이젠 따뜻한 방 안에 있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다는 생각이 기뻤다.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여자까지 곁에 있으니. 행복은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다가왔다. 그래서 재희는 이제 정말로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민정이를 끌어안았다.
"헿.“
"......“
마찬가지로 행복한 표정으로 재희의 어깨에 얼굴을 놓아둔 민정이는 무궁무진한 의미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지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주인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이며, 저 행동이 마치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재희야. 저 싫어진 거 아니죠?“"무슨 소리를. 내가 왜 갑자기 이유도 없이 너를 싫어하겠어?“"그렇죠? 절 싫어하지 않죠?“"그럼. 그럼.“"절 가장 사랑하는 거죠?“"맞아. 민정아.“"헿"
"......“
대놓고 들으라는 듯, 민정이는 굳이 물을 것도 없는 질문을 다 들으라는 것처럼 툭툭 던져대자 재희는 뭘 새삼스럽게. 그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확실히... 예쁘네.‘
재희와는 비교는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예쁘기는 하다고 지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몸을 팔면서 배운 테크닉으로 승부를 보는 것밖에 없어 보인다. 이대로 물러날 지나가 아니었으니.
"어서 오세요. 재희 씨.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언니이이!“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는데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애써 감정을 추스른 채로 사쿠라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예림이는 민정이와 같이 달려들어 재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두 명의 여자를 안은 채로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길드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근데... 뭔 바람이 불었길래 마중을 온 거지? 바쁠 텐데 말이다. 그 증거로 사쿠라의 옆에 서 있는 비서 겸 호위인 세라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눅들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재희야. 재희야.“"응. 왜?“"저 여자랑은 아는 사이야?“
정말로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재희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지나의 모습에 인상을 확 구기며 물었다.
"아아. 게임 안에서 만난 여자야. 이름은 유지나. 나이가 아마. 민정이보다 2살 많은 24살 언니일 거야. 맞지?“"네. 주인님.“"어...? 주, 주인님?“"아... 맞다.“
깜박하고 있었다. 주인님이라 계속 부르다 보니 익숙해진 상태라 헤븐 안에서는 주인님이 아니라 평범하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어야 하는데. 민정이는 뜬금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설명을 바라는 듯, 재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뭐냐.“
사실대로 성노예로 삼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노릇.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지나가 선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네. 처음뵙겠습니다. 이름은 유지나. 그리고 주인님의 성노예입니다.“"......“"......“"......“
민정이, 예림이, 그리고 사쿠라까지 침묵했다. 세라는 그럴 년인 줄 알았다면 헛웃음을 들이킨다..
"서, 성... 성노예? 재희야.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말 그대로입니다.“도대체 성노예 취급인데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지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재, 재희야! 필요하면 제가...! 제가 다 받아줄 수 있는데 왜 굳이 저리 못생긴 여자를 성노예로 삼는 거예요!“"자, 잠깐만... 민정아 진정하고!“"아니요! 진정할 수가 없다고요!“"맞아요! 재희 언니! 언니가 원하시면 메이드 복을 매일 입을 수도 있고, 저 여자처럼 성노예가 돼서 언니에게 꿀꿀 거리며 주인님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다고요!“
왠지 이렇게 될 것 같더니만. 유지나를 성노예로 삼은 이유는 단순히 헤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 두 여자를 위해서였다. 질투를 꽤 하는 것으로 보이니 둘과 같은 동일 선상에서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재희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둘이 지나와 같이 동일 선상에 놓여서 성노예도 되는 걸 원하고 있었다.
"마, 맞아요! 굳이 새로운 여자가 아니라도! 저 애들이 아니라도 저에게 부탁한다면 저도......!“
잔뜩 흥분해 버린 사쿠라는 무의식적으로 외쳐버렸다.
"사, 사쿠라님?“"아...! 아아아아아!“
어찌나 큰 소리로 외쳤는지 아름다운 미녀들의 모습에 눈을 호강하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사쿠라에게로 옮겨갔다. 그 때문에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얼른 손으로 가린 채로 도망치듯 부둣가를 나서기 시작했다.
"사쿠라님! 위험합니다! 뛰지 마세요!“그렇게 둘의 모습이 감춰지고.
"재희야...? 언제 사쿠라 씨를 꼬신 거예요?“"언니... 설명 좀 해 주세요.“"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유지나와 관련된 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쿠라라면 조금... 아니, 할 말은 무척 많았다. 그야 그럴 것이 사쿠라의 외모가 엄청 예쁘니 눈길이 자주 가긴 했었어도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고, 처음으로 브론즈 게임에 참가한다는 사실에 훈련에만 매진해 있었는데 꼬실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쿠라의 소리침에 당황스러운 건 재희가 아닐까.
"변명은 그게 끝인가요?“"아니. 잠깐만. 이건 진짜 억울해.“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사쿠라처럼 엄청 예쁜 여자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성노예도 자처한다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근데 지금 좋아한다면 곤란한 건 재희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걸 막아 세우며 추궁하듯 물어오는 민정이의 말에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아. 민정이 언니. 내가 봤을 때는 재희 언니가 뭘 한 것 같지 않아.“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깊게 내쉰 예림이는 말했다.
"우리가 맨날 재희 언니의 곁에서 떠나지 않아서 잘 알잖아. 둘이 대화를 나눈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그렇긴 해. 근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우리처럼 성노예도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그걸 모르겠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던 예림이는 이상한 점을 찾았다. 사쿠라 길드에 가입한 뒤로 재희가 훈련하거나 밥을 먹거나 씻거나 잠을 잘 때도 계속 붙어있었기에 사쿠라를 꼬실 시간은 거의 없었다. 게임과 헤븐에 관해 물을 때를 제외하곤 말조차 섞지 않은 둘인데 언제 꼬셨다는 걸까.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사쿠라 씨가 재희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데!“
지금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민정이조차 감탄할 정도인 미녀인 사쿠라가 재희에게 모든 걸 내줄 정도로 푹 빠져있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만약 재희가 사쿠라에게 푹 빠져서 자신을 더는 찾지 않게 된다면? 그로 인해 사랑도 점점 식어 간다면? 필요가 없어진 민정이를 버리게 된다면?
'그건 싫어어!‘
그것만은 절대 안 되었다. 차라리 저 유지나라는 여자처럼 성노예,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보다도 못한 년이 돼도 좋았다. 재희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남자에게 몸을 팔라고 해도 기꺼이 팔 수 있었다. 재희가 원한다고 하면, 그래야만 곁에 있게 해 준다면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사람인 이상은 그런 취급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은데.
"안 되겠어요! 재희야. 어서 길드로 가요!“"어...? 갑자기?“"네. 가서 저 말고 다른 여자는 절대 보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그거 좋아요! 언니. 저도 도와드릴게요!“아니.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성욕도 풀었겠다 이제 좀 쉴까 했거늘. 민정이와 예림이에게 양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가던 재희는 아파오는 머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애들아. 나 피곤한데... 이제 돌아왔다고. 해도 내일 하면 안 될까?“"그렇죠. 재희는 이제 돌아왔으니까 피곤할 만해요.“"죄송해요... 질투가 나서 심한 짓을 할 뻔했어요.“다행이게도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둘은 아쉬운지 입술을 삐쭉 내민 표정으로 재희를 우선시해준다.
"내일... 내일 많이 하자. 오늘은 조금 일찍 자고 싶어.“"네. 알았어요. 재희가 그렇다면야 그래야죠.“
사쿠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재희를 자신의 매력에 퐁당 빠뜨려서 도저히 혼자만의 힘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계획이었지만 피곤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재희를 곧장 침대 위로 끌고가 덮친다니.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배려해도 모자랄 판에.
"아니야. 오늘만 그래. 아니, 게임을 끝내고 돌아오면 쉬게만 해 줘. 다음날부터는 원하는 걸 다 해 줄 테니까.“"네. 재희야. 그 약속 절대 잊으면 안 돼요.“"그래그래.“
슬퍼했다가 질투했다가 토라졌다가 미안해하다가. 참 표정과 감정이 너무 잘 드러나는 게 아닌가. 그게 민정이의 매력점이기도 해서. 풉. 하고 웃으며 허리에 팔을 감았다.
'참. 내가 뭐라고 이럴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도 있고 해서 해 준 거라곤 거의 없다시피 한데.
"언니. 저한테도요!“
"그래. 예림이한테도.“
어떤 뜻에서 자신에게도 해 달라는지. 재희는 어찌 되었든 알겠다는 말을 하며 예림이의 허리에도 팔을 두르며 긍정했다.
"이제 가자. 피곤하다.“
재희는 어서 길드로 돌아가기로 한다. 딱딱한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은 상태로 며칠을 버티고, 식량도 아끼고 그랬으니 몸이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튜토리얼이 막 끝났을 때처럼 아카데미에 입학할 필요도 없으니 어서 길드로 돌아가 이미 씻은 몸을 뒤로한 채. 침대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트, 특종이다...! 절벽 위의 꽃. 사쿠라 님은 사실 레즈였어!“
부둣가를 벗어나는 넷의 모습에 남겨진 사람들은 입을 떡하니 벌리며 놀랐다.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유명한 랭커나 갑부의 청혼에도 모조리 쳐내던 사쿠라 님께서 레즈였다니! 오히려 이게 더 좋아!“
어차피 가질 수 없는 여자. 같은 남자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눈이 호강 되게 미녀 둘이 찰싹 달라붙어 사랑하는 걸 지켜보는 게 차라리 더 좋은 게 아닌가.
"백합! 백합! 백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