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064 귀환
오늘은 재희가 헤븐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브론즈 게임이라도 평균적으로 약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야지만 끝이 난다는 말과는 다르게 벌써부터 다음 게임의 날짜가 잡혀버렸다. 참고로 다음 게임은 인원이 충족된 브론즈 게임일 수도 있고, 실버 게임일 수도 있어서 공지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게임이 또 잡히자 헤븐에서는 논란이 일렀다. 이런 적이 아예 없지는 않은 데 있었던 적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노골적으로 길드끼리 동맹을 맺은 모습이 보이면 제재가 가해지기에 이제는 2주를 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재희가 참가한 게임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끝이 났다.
그로 인해 헤븐에 남아있던 민정이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들을 태운 배가 돌아올 때까지 누가 죽었는지, 또 누가 살았는지, 얼마나 다친 건지도 알 수가 없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재희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굳이 죽일 남자가 있을까. 게임이 끝난다면 자신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아까워서 죽이지 못할 거라 민정이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강간을 당했다는 의미인데. 설마 하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다.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괴롭히는데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재희라면 강간하려 달려드는 남자들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을 거라 확신했다. 확신을......
"언니! 조금 진정해!“
기쁘면서도 기쁘지 않은 이 미묘한 감정. 무슨 일을 당해 우울한 표정의 재희를 차마 해맑은 미소로 반겨줄 수야 있을지. 발을 동동거리며 부둣가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던 민정이를 향해 날이 곤두선 예림이가 버럭 소리를 쳤다.
"그치만... 그치만 걱정되는 걸 어떡하라구!“
재희의 곁에서 함께 목숨을 건 게임에 참가하는 것도 모자라서 서로의 애정을 더 쌓아가기 위해 하기로 한 훈련 때문에 온몸이 아파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 고통을 잊은 것마냥 민정이는 애타는 눈빛으로 부둣가 앞의 바닷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희 언니는 분명히 멀쩡한 상태로 돌아올 거야!“
분명 재희를 믿고는 있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기 마련. 예림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있는데 자신도 초조한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좀 진정해! 재희 언니가 보면 뭐라고 하겠어?“
"우으......“
"자. 이걸로 눈물을 좀 닦아.“
"알았어......“
언제 눈물까지 흘렸는지. 에림이는 한숨을 푹 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훌쩍거림이 여전히 멈추지 않고, 손수건을 받아든 민정이는 그걸로 축축한 눈가를 닦았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튜토리얼을 끝내자마자 금 등급을 받았을 정도로 게임 측에서 인정하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게임이 빨리 끝난 이유도 재희 씨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큰 사건사고가 생겼다기보다는 여러분을 빨리 만나고 싶어서 끝낸 걸 수도 있어요."
"그, 그렇죠... 아니, 맞아요. 그래요!“
"응...! 일리가 있어!"
이번 게임이 끝났다는 의미가 되는 다음 게임이 잡혔다는 공지를 알려주자마자 곧장 부둣가로 나온 둘의 모습에 자기가 생각하는 추측에서 MSG를 팍팍 뿌리며 말해 주었다. 정말로 재희가 이 둘을 그리워해서 게임을 이렇게나 빠르게 끝냈을 리는 없을 거다. 그러려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으로 무모한 짓을 하는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그런데 이 둘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장인성의 말에 긍정했다. 참 쉬운 여자들 같다. 그래도 얼굴은 예쁘니 이것마저 순진한 미녀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참 예쁜 외모는 너무 무섭다. 자신이 이랬다면 구박만 더 받지 않았을까. 하아... 망할 외모지상주의의 세상. 자기 자신도 외모보다는 속마음과 성격이라 말하는데 실제로는 외모밖에 보지 않는 장인성은 불합리한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재희는 멀쩡하겠죠?“
"그, 그렇겠죠?“
"멀쩡하죠? 네?“
"멀쩡하죠. 네. 그럼요.“
"헤헷!“
모르지. 어떨지는. 아카데미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본 것 가지고는 뭐라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튜토리얼 게임 한 번으로 금 등급을 받았다고 한들,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나 게임에 참가한 전적을 모르니까. 그래도 무사하다는 말을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듯이 민정이가 몰아붙이자 장인성은 얼떨결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무사하지 않더라도 죽지는 않았을 거다. 미쳤다고 여자를, 그것도 엄청난 미녀를 죽일까.
"언니! 진정 좀 하라니까?“
"헤헤. 미안해. 미안.“
무사할 거라는 장인성의 말에 헤실헤실 얼굴이 완전히 풀어헤쳐 진 민정이처럼 마찬가지로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예림이가 다시금 그녀를 말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다시 쉬운 여자들이라 장인성은 생각했다.
"너무 긴 시간이었어.“
그렇게 진정한 민정이는 예림이와 장인성의 말에 따라 게임 도중에 무슨 일을 당했을 거라는 전제를 완전히 옆으로 밀어둔 채 중얼거렸다. 재희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 벌써 일주일이나 넘게 흘러갔다. 언제 죽을지도 범해질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은 헤븐이라는 안전한 도시 안에서 너무 편하게 지내왔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훈련하고야 있지만, 훈련과 실제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무인도에 갇힌 사람들은 전부가 다 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정을 갈구했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파졌다. 자신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외롭지 않았을 텐데.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나갔을 재희를 생각하니 또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한쪽 구석으로 치워두었던 걱정이 다시 민정이를 반기며 다가온다. 무사해야 할 텐데.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튜토리얼 때 뚱뚱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었던 이력이 있던 민정이라 얼마나 무서우면서 화가 나고, 절망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여자인 재희라도 별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온다. 오래 알고 지내오지는 않았는데도 재희에 대해서라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꼼지락. 꼼지락.
차마 손과 발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괜히 소식을 듣자마자 부둣가로 나온 걸까. 그냥 길드 안에서 시간이 빨리 가는 고된 훈련이나 더 받으면서 재희가 돌아오길 기다릴걸. 민정이는 뒤늦게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만약 그랬다면 배에서 내린 재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슬퍼할지도 모르니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문제가 생겼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좀 올 거면 빨리 올 것이지. 왜 이렇게 배가 늦게 오는지 원. 헤븐의 근처에 게임을 섬을 요 근처에 만들거나 사 놓으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민정이는 애꿎은 배와 게임 측을 원망했다.
"진정하라니까.“
진정하라는 말을 하는데 오히려 예림이가 더 진정해야 할 판이다. 민정이가 뭐만 한다면 그게 다 신경이 쓰여서 버럭 하고 화를 내는 판이구만.
"만약에... 만에 하나 재희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면 난 곧장 바다에 뛰어들 거야.“
재희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몸이 되었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어차피 재희 없인 삶의 의욕을 찾아볼 수가 없어 헤븐에서 빚을 다 갚아 집으로 돌아갈 수야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으며,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거나 강간을 당할 바에는 그냥 재희를 따라 죽고 마는 게 훨씬 나았다. 이러면 죽어서 운이 좋다면 재희와 만나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근데 죽기는 싫어! 근데 재희가 없는 삶은 더 싫어어!“
이제 22살인 아주 젊은 나이에 죽다니. 그건 싫었다. 하지만 재희 없이 남은 인생을 사는 것도 무척 싫으니 곤란했다.
"쯧......“
왜 계속 불안한 생각이 들 말만 골라서 하는지. 예림이는 입술을 굳게 닫으며 불만이 가득한 불안한 표정으로 민정이에게서 눈을 부라렸다.
"저... 두 분? 너무 앞으로 나가셨는데 뒤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응? 앗....?!"
언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질 정도로 부둣가의 끝으로 와 있었을까. 장인성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것만 같았다. 순간 빠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예림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고, 민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슴 앞에 깍지를 끼고, 눈은 배의 모습이 보일 수평선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요. 뭘... 하하.“
예림이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현했다. 그러자 미소녀에게 감사를 다 받아본 장인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로 인해 때달아 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예쁜 편이었지?'
예림이는 사실 예쁜 편이다. 아니 무척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하다니. 사람은 자신이 예쁘거나 잘생겼다는 걸 절대로 모를 수가 없었는데 이 말과 반대되게 예림이는 깜박했다. 그야 그럴 것이 옆에는 민정이라는 성숙한 외모를 지닌 미녀가 있었고, 그보다도 더한 신이 한 땀 한 땀 빚어낸 재희까지 있으니 학교에 있었을 당시 받아오던 시선은 99%가 재희에게로 향했다. 그중에 작고 빈약한 신체를 가진 예림이는 1%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외모가 예쁘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그런 둘과 함께 다니는 우월감에 어깨가 으쓱거렸다. 예림이의 친구들도 예림이와 함께 다닐 때 이런 시선들에 질투를 느꼈을까. 우월감을 느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드시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여기 나온 거야?“
부둣가에는 민정이와 예림이, 그리고 장인성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양한 길드에서 자신의 길드원들을 마중하러 나온 것도 있고, 사쿠라 길드에 가입한 재희를 빼내 오기 위해 계략을 펼칠 생각으로 가득 한 다른 길드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지존 길드가. 그런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한 여자. 바로 예림이가 속해 있는 길드의 길드장. 사쿠라였다.
"사쿠라님.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습니다.“
"네... 알아요. 세라."
"그러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셔서 밀린 업무를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싫어요!“
"사, 사쿠라님!“"빼앗기기 싫어요! 그... 뭐냐. 다른 길드에 인재를 빼앗기기 싫다는 말이에요.“
다른 의미가 담겨있었는지 사쿠라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업무가 밀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쿠라를 부둣가에 마중을 나오게 윤재희라는 여자가 정말 싫었다. 처음 봤을 때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넋을 놓고 바라봐도 전혀 이상함이 없을 정도로 사쿠라보다 예쁜 여자였다는 건 인정하는데 거대 길드의 길드장을 골드 등급의 게임도 아니고 고작 브론즈 등급의 게임에 참가한 뒤로 돌아오는 걸 마중하게 만드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다가 빼앗기기 싫다는 말 뒤에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말을 덧붙이는 게 화를 더 끌어 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정착한다!“
어느새 그토록 기다리던 배가 콩알만 하게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두 눈으로 모두 담기 힘들게 모습이 커진 배가 속도를 낮추며 부둣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설렘 반 그리고 불안한 반이 섞인 눈으로 육지와 맞닿은 다리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재희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어왔다. 예림이는 물론 민정이, 그리고 사쿠라까지.
"아아...! 재희야! 재희야아!"
민정이는 참지 못하고 배와 연결된 다리 앞으로 뛰어갔다.
'재희야! 너무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제발 멀쩡한 모습으로 나와서 날 보고 웃어줘! 웃어줬으면 좋겠어! 얼마나 거기서 고생했을까. 그래도 웃어줘! 몸도 많이 더러워졌을 거야. 그 몸을 내가 길드로 돌아가면 깨끗하게 씻겨줄게!'
"히... 히힛!“
추악한 욕망이 가득 담긴 민정이. 자신의 주위로 몰려들어 배에서 내리는 이들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배 안에서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재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점점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렇게 잠시 뒤에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은색을 띠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민정이의 표정은 밝아지다 못해 빛이 나고 있었다.
"재희다아! 재희야! 어서 와! 많이 힘들었... 지......?"
재희가 확실했다. 그 때문에 민정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몇 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것처럼 다리에 올라타 내리고 있는 참가자들을 지나쳤다. 그러다가 이내, 서서히 걸음이 멈추고, 웃음꽃이 활짝 피웠던 얼굴은 어두워졌다. 원래라면 끌어안은 상태로 입을 맞추고 온갖 애교를 부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행복이었는데 그 행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재희야... 저 시발년은 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