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056 첫 게임
몸에는 따스함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는 숨을 쉬지 않는 주아연의 몸을 품에서 떨어뜨리고선 바닥에 내팽개쳤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어제 제대로 성욕을 풀지 못해 오늘 이렇게 무고한 여자를 범하고선 죽여버렸다. 실험의 여파로 죄책감 같은 하찮은 감각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적일 뿐인데. 목숨을 잃을 걸 각오하고 게임에 참가하는 곳이라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는 게 좋은 건데도 자꾸만 재희의 시선은 눈물과 콧물, 침 범벅으로 잔뜩 망가진 상태지만 이상하게도 웃고 있는 주아연의 얼굴로 향했다. 뭐가 그리 기쁜지, 행복한지, 참으로 이질적이다. 이렇게 만든 건 모두 재희다. 미치게 만든 것도 재희였다.
"하아......“
잠시 이성을 잃은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성욕을 해소할 겸. 주아연을 범한 뒤에 죽여도 됐는데 이 망할 년은 굳이 주아연을 미치게 만들어서 범하고 희망을 철저하게 짓밟아 죽여버렸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았으면서도 저항하지 않는다니. 죽음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면 인간인 이상 잠시 주저했을 텐데, 죽이고 난 뒤에 죄책감이 들어와도 전혀 이상함이 없어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네.“
어지간히 사랑하지도 않는 처음 본 여자에게 고작 다리를 물고 빨리고, 만져졌다는 사실만으로 자존심에 금이 가버려 당하는 것보다는 괴롭히는 쪽을 좋아하는 거라며 충동적으로 이상한 짓을 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악마... 흔히들 이런 싸이코패스를 보고 악마 같은 놈이라고 하는데. 재희 자신이 진짜 악마라도 됐는지 살인을 저질러도 잔인한 시체를 봐도 평소와 별로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예쁜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적이라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죽일 것만 같은 자신. 그렇기에 애써 이 사실을 모른 채 숨기기로, 아니 외면하기로 하며 주아연을 포함한 남자들의 가방을 모아와서는 안을 살펴본다. 역시 하룻밤이 지난 탓에 물과 식량의 양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는데 이마저도 큰 수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데리고 있는 유지나에게도 나눠줘도 큰 타격이 없을 정도로 많은 득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를 제외하고.
재희는 고개를 돌리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몸을 돌렸다. 당연한 거다. 여기서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거나 죽을 위험에 짜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여 이겨낸다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로 살아나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어보며 주인이 된 재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동굴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아직 밤이 찾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냥 이만하고 쉬기로 한다. 그렇게 동굴로 돌아가자.
"아... 주, 주인님. 어서 오세요.“
재희가 없는 지금. 언제 적이라 해도 무방할 다른 참가자들이 올지 몰라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밖을 끊임없이 살펴보던 유지나는 기쁜 발걸음으로 그녀를 마중을 나갔었다.
"그래.“
대답은 차가웠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
조심스럽게 유지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이는 재희에게 물음을 툭 던져보았다. 그러자 불편함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마저 아름다움에 빛이 마구 발하자 멍하니 주인님을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
"죄송합니다.“
"아... 쯧.“
곧장 사과하는 유지나. 그 모습에 자신이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유지나의 잘못이 아닌데. 그저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이상한 짓을 벌인 자신이 잘못되었는데도 사과하는 사람이 잘못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모를 듯한 잔혹한 재희. 이게 정말 실험의 여파로 생긴 잘못된 생각인지, 인격인지 정말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겉모습을 제외하고 속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 들면서도 뭔가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어온다. 사실상 숨겨진 본성일지. 아니면 새로 생겨난 것일지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지나에게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여기서 노예에게 사과를 할 수 없는 노릇. 잘못하다간 유지나까지도 자신에게 빠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도 현실성이 있었다. 여자로 변해버린 외모는 재희 자신이 보아도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몸에 품고 있었다. 이러니 남자는 물론이고 같은 여자들까지도 유혹되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주아연처럼 죽음을 코 앞에 두어도.
"하아......“
유지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쓰러지듯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차가운 감촉이 밀려와 빠르게 몸의 온도를 낮춰갔다. 그런 재희의 모습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야. 분명히!‘
유지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 처음 보았음에도 여자의 감으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점심이 되기도 전에 돌아온 자신의 주인님은 그 짧은 시간에 역변할 정도로 큰일을 겪은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확신하면 무얼 할까. 유지나라면 몰라도 재희는 유지나에게 정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이니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눈치가 보이는데.
오히려 말을 걸었다가 참을 수 있는 폭력이 가해지면 정말 좋겠지만 왠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최악의 상황에 그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버려지거나 하는 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괴로워지는 유지나는 먼저 다가가기보다는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로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맑은 하늘과 울창한 숲.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하게 불어와 유지나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멀리서 커다란 비명소리가 귓가를 강타한다.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비는 비명소리지만 이내, 그 소리를 잦아들며 완전히 꺼져버렸다. 죽었거나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거나. 둘 중에 하나.
힐끔.
다시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재희의 모습을 보고 안도한다. 유지나의 생각대로 비명이 들린 곳으로부터 여기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되어 보이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주인님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뢰하고 믿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주인님. 오늘은 나가시지 않는 게 어떤가요?"
"닥치고 가방이나 잘 지키고 있어.“
"주인님. 제가 더 잘할 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가지 마세요."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이 지나가고 총 7번의 밤이 지나 아침이 찾아왔다. 그 시간 동안 재희는 점점 더 끌어 오르기 시작하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끝내 유지나를 범하거나 그녀의 손에 몸을 살짝 맡겼다. 그래도. 그래도 처음 느꼈을 때보다 부족함이 없지 않아 있었다. 더 큰 쾌감을 느낄 게 필요한 나머지. 재희는 동굴을 나서고 나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지나를 내버려 두고 밖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역시나 오늘도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동굴을 나서려고 하자 그런 재희를 눈물이 눈가에 송골송골 맺힌 상태로 유지나는 말렸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어제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이는 모습이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그런 말을 하며 말려보는데 날카롭고 강압적인 말투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젠 너로 만족할 수가 없어."
동굴에서 나온 재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유지나가 걱정하는 것처럼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처음 유지나의 테크닉에 못 죽어서 안달이 난 몸뚱어리라 성욕을 참지 못하고 한 번 그녀에게 몸을 살짝 맡겨 보았었다. 그러나 이젠 만족은커녕 부족함이 느껴졌다. 주아연... 그 여자를 괴롭히며 범했을 때와 비교가 될 정도로.
총 두 명. 그 일이 있고 난 후로부터 2일째, 4일째가 되던 날에 운 좋게 여자를 발견해 강간한 다음 잔혹하게 죽여버렸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쾌감을 주면서 살갗을 베어 고통을 준다든지. 애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다음 그의 앞에서 커다랗고 날카로움이 묻어나오는 나뭇가지로 질을 거칠게 쑤셔 넣으며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범한 뒤에 죽여도 보았다.
민정이나 예림이가 알면 기겁할만한 짓거리. 근데... 근데 이게 대체 왜 이리 재미있는 건지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여자를 범하지 못한 지 이제 3일째가 되던 지금. 어느새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틀 동안 성욕을 참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사흘이 되니 더는 참지 못할 것만 같아 도망치듯 유지나가 있는 동굴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도 잔인하게 범한 다음 죽여버릴까 봐.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말로만 듣던 진짜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설마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증상을 가진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는 있는데, 성욕을 해결해야 하면 단순히 해소만 하고 죽여도 되는데 굳이 여자가 절망할 정도로 범해봐야 성욕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성노예가 된 그녀를 차마 범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아... 하아......“
어느새 동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비틀거리는 걸음을 멈춰 서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조라는 어마 무시한 빚을 다 갚은 뒤에 벌써부터 그리워 미치겠는 집으로,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애초에 아들 하나, 딸 하나밖에 없던 집안에 무작정 찾아가 아들이 딸로 변했다고 하면 과연 믿어나 주련지.
거기다가 이 망할 몸뚱어리는 엄마가, 여동생이 여자라는 사실에 이상한 감정을 품지 않을까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때쯤 다시 고민해 보자고 했는데 막상 점점 잔인해지며 이상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멀리 밀어 두어 보관하고 있던 그 고민거리를 다시 가져오고야 말았다.
지금 고민할 게 아닌데... 자꾸만 빚을 다 갚아도 막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만으로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이토록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을 품에 안고 싶은데. 그 꿈을 포기해야만 할 것만 같다. 달라진 겉과 속으로 인해서. 이래서는 헤븐으로 돌아가는 것도 걱정이 된다. 재희의 여자친구인 민정이와 예림이에게도 이런 짓을 벌일까 봐.
"......“
재희는 고개를 떨어뜨려 예쁘게 변해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남자였을 때는 오직 공부만 한다고 펜을 잡았던 터라 엄지와 검지가 살짝 비틀려 있었는데 지금은 멀쩡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치거나 데인 자국도 완전히 사라진 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집 안에서 보호만 받고 산 공주님 같은 예쁜 손이었다. 그리고 이 손이 원래 남자였던 자의 손이라니.
풋......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라면 여기서 살아남을 것만 생각하여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이 정신 나간 비쓰온 게임이라는 곳으로 오게 했던 건지.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몸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은 것도 모자라 살인에 익숙해지게 만든 건지. 아버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후우.“
고개를 쳐올려 수많은 나뭇잎 사이로 가려져 틈으로밖에 볼 수밖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발... 개 같은 아버지.“
만약 그 남자들이 재희에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어머니나 여동생 중에 한 명이 갔겠지. 어머니는 마음이 무척 여리고 그런 분이시라 튜토리얼에서 강간을 당하고 죽었으면 죽었지. 재희처럼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남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럼 여동생은? 피차일반. 그녀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했을 게 분명하다. 다른 점은 어머니와 달리 젊고 예쁜 어린 애이기에 죽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오오... 여, 여자다.“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던 재희의 눈앞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고선 욕정을 품기 시작한다. 게임 안의 말도 안 되는 성비 비율을 뚫고 운 좋게 여자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희를 발견한 그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곧장 흥분하며 가랑이 사이가 볼록하게 만들었다.
"헤헤. 운 존나 좋네. 킥킥“
이미 재희를 범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는 낄낄 웃음을 터뜨린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만 있으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
위로 향했던 고개가 내려오고 그를 바라보는 재희의 얼굴에는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