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054 첫 게임
"시발. 이 년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무기 버려.“
이하늘 때문에 김지헌에게서 잠깐 눈을 뗀 사이 저 인간말종 새끼는 어느새 재희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힉.....?!“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외마디의 비명을 내지른 윤재희는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듯한 눈으로 주아연을 바라본다.
"무기 버리라고 시발 것들아!“
앞으로 뻗었던 검을 거둬들여 가냘픈 재희의 목에다 가져간다. 차가운 감촉에 더더욱 겁에 질리고, 몸은 쉴 새 없이 떨어댔다.
"미친놈아! 재희는 관계없잖아?! 개새끼야!“
"하... 그래. 관계는 없지. 오히려 피해자일 뿐이지. 근데... 나 애 포기하고 싶지 않아.“
주아연의 소리침에 낄낄 웃으며 김지헌은 자신의 품에 안긴 재희의 머리칼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는다.
"내가 죽으면 애도 같이 뒤지는 거고, 내가 살면 애도 나랑 같이 살아서 나한테 범해지는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는 없어.“
"시발새끼......“
"하하! 그래. 나 시발새끼 맞아. 근데 저 박기아는 나보다 더한 놈이잖아? 너도 알고 있지 않았어. 주아연? 그런 쓰레기라도 잘생겼으니까 너도 계속 만난 거잖아?“
"......“
"이하늘. 너도 알고 있으니까 네 손으로 직접 죽인 거잖아?“
이하늘은 침묵했다.
"그리고 나 알아. 이하늘. 네가 좋아하던 년이 저 새끼한테 따먹힌걸.“
"......!“
오직 김지헌만이 알던 사실. 이하늘이 남몰래 좋아하던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친절함에, 그녀의 다정함에, 그녀의 관심에 무뚝뚝한 이하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솔직히 김지헌은 둘 사이가 좋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니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하늘이 좋아했던 그녀는 박기아에게 따먹혔었다.
"그걸... 어떻게?“
"하하. 뭐 솔직히 미심쩍었는데 계속 보니까 확신이 서더라고. 네가 그 년을 좋아한다고. 근데 그 년은 널 남자로 보지 않던데? 그리고 네 친구라고 생각했던 박기아. 저 새끼한테 몸을 대주던데?“
부들부들.
김지헌의 말처럼 사랑했던 그녀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던 이하늘이였다. 하지만 그걸 전제로 친구라 생각했던 쓰레기를 잘만 이용한다면 실연을 당해 슬픔에 젖은 그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돌진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박기아. 그 시발새끼가 대체 뭐라고 꼬드겼는지 그녀는 단단히 박기아에게 꽂혀서는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끊임없이 그녀를 웃게 해 주려고 노력을 해 보아도 가진 거라곤 잘생긴 얼굴밖에 없는 박기아에게서 빼앗을 수 없어 애써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포기했었는데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한 이하늘이다. 그 증거로 박기아를 정당한 이유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자마자 몸은 이미 움직였었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이 손으로 가져갈 수 있어서 큰 쾌감이 들어온다.
"우리 둘 다 박기아 때문에 실연을 당했어.“
김지헌도 그랬으니 지금 이하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박기아 여친도 죽이고 이 년을 같이 따먹자고.“
혼자서 윤재희의 목숨까지 지켜서 안전하게 헤븐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지헌은 이하늘을 꼬드기기로 했다.
"야... 시발. 설마 저 미친 소리에 고민하는 거야?“
그럴 리는 없다고 주아연은 황급히 김지헌으로 향해있던 석궁을 돌려 이하늘을 조준했다.
"그, 그럴 리가.“
윤재희... 사랑했던 그녀를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다. 이미... 그녀... 아니, 외모만을 보는 걸레 새끼를 이젠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저 여자만 있다면. 그래서 김지헌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지만 여지서 곧장 그러겠다고 하는 순간 몸 어딘가에 활이 꽂혀버리니 고개를 젓는다.
"지랄......“
남자들은 다 똑같다. 여자에 관한 욕망이면 무슨 짓이든 하는 쓰레기들이라고. 주아연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기울어진 상황에 침음했다.
'재희... 재희야......‘
분명 저 셋이서 무슨 짓을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지켜준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니...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난 것도 모자라서 이제 몇십 분 되었을 뿐인데 왜 재희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도 아니고 자기 자신인데도.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은 어느새 윤재희에게 잔뜩 빠져있었다고.
"시발... 시발......!"
상황이 기울여져도 너무 기울어진 상태인데 몸과 마음은 차마 재희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지...? 대체 왜. 혼자 도망을 치지 않는 거야? 아는 사이도 아닌데, 가족도 아닌데 대체 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은발과 적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헤. 그냥 혼자 도망치지? 굳이 싸우게?“
김지헌은 이때다 싶어 말했다. 굳이 주아연과 싸운다면 이하늘이 죽을 수도, 자신이 죽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살긴 하는데 여기서 살아갈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되도록 싸움만은 피하는 게 상책. 그러니 잘 구슬려서 주아연이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은 채로 떠나가게 만들어야만 했다.
"이 년이 뭐라고. 그냥 꺼져. 주아연.“
길드에 돌아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아연을 죽여야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물러나 만반의 상태로 주아연의 앞에 서야지. 지금 싸웠다가는 오직 실만 얻게 되니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이 사실을 아는 이하늘은 입을 꾹 닫고, 둘의 대화에 집중한다.
"가. 지금 가면 건드리지 않을게.“
강렬한 눈빛으로 김지헌을 바라보다가 사로잡힌 애인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김지헌의 품에 있는 재희를 바라본다.
"재희를... 풀어줘.“
"엉...? 시발. 내가 왜? 이 년을 따먹으려고 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풀어 준다고? 미쳤어?“
"제발... 재희를 풀어줘.“
"시발. 너 왜 그래? 애랑 아는 사이야? 무슨 사이길래 그 지랄이냐? 그냥 꺼지라고 짜증나게 하지 말고.“
"풀어줘.“
"하... 돌겠네. 미친년. 박기아가 뒤지니까 정신을 놨나?“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주아연은 생각한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박기아가 죽으니까 정신을 놓은 걸지도. 그의 대신에 재희를 갈구하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황을 인지하고 석궁을 들었던 손이 내려갔었는데 다시금 그 손은 올라와 김지헌을 향한다. 그 모습에 겁을 먹으며 재희의 뒤로 몸을 숨긴다.
'어차피 나 혼자서는 이곳을 살아나갈 순 없을 거야.‘
현 브론즈 등급에서 가장 위험인물로 지정되어 있는 주아연. 과할 싶을 정도로 세간의 집중이 되어 있다. 만약 남자였다면은 다른 길드의 참가자들과 함께 다닐 수도 있을 거다. 아니, 굳이 남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한데 게임 안에서의 여성 비율은 정말 극악, 그 자체이니 살인은 물론이고 강간도 허용하는 이곳에서 여자인 주아연을 가만히 내버려 둘 남자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안 그래도 헤븐 안에 있는 창녀촌에 가려면 돈도 엄청나게 깨져서 여자를 안을 생각조차 못 하는데. 어쨌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이다. 재희를 버리고 간다면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 재희가 저 둘에게 끊임없이 강간을 당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 한들 그녀를 구해보자니 방법도 없었다.
'그냥... 죽자.‘
아무 힘도 없는 재희가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정말 착한 사람들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이상. 그렇지 않다면 주아연의 팀처럼 분열되어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겠지. 고대 중국 역사에서 여러 황제들이 미녀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던데. 그게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닐까. 비유가 알맞지 않은가.
"시발... 그거 안 치워?“
"......“
재희에게도 좋은 선택일 거다. 차라리 죽는 게. 여자로서 강간을 당하는 삶은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고 고통만이 가득할 테니 그냥 이대로 자신과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그러니 도박을 해 보기로 한다. 아까 멍청하게 김지헌을 향해 내려찍는 박기아의 장검을 우연히 석궁으로 맞췄을 때처럼 행운이 따라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눈을 감고. 손잡이게 검지를 올렸다.
'재희야... 미안해.‘
언니가. 지켜주지 못해서.
사과의 말을 속으로 담으며 쏘려던 그때.
"하... 계획대로 왜 움직이질 않냐?“
주아연, 박기아, 김지헌, 그리고 이하늘의 목소리도 아닌 제5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것이었다. 의문을 잔뜩 가지며 주아연은 석궁을 쏘려던 것을 멈추고 눈을 뜬다. 그러자 고통스러움과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두려움, 그리고 공포에 물들어 있던 표정이 아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희의 모습이 보인다.
"뭐...? 뭐라는 거야. 이 시발녀어... 크흑?!“
주아연처럼 재희도 정신을 놨냐고 생각하려던 김지헌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허리의 고통에 표정을 마구 찌푸렸다.
"역겹네.“
연약한 여자라고 착각한 탓에 너무 안일한 김지헌이다. 그로 인해 재희는 편하게 팔꿈치로 김지헌의 허리를 강하게 찍었다.
"꺼져.“
목숨을 위협하던 중검이 목에서 떨어져 나가자 김지헌의 품에서 나온 재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아 들어 김지헌의 목과 심장에다가 꽂았다가 빼내었다.
"아.....?“
언제 급소가 꿰뚫리는지도 모른 채, 김지헌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으로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 급기야 쓰러졌다.
"재, 재희야?“
믿기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주아연은 레이피어의 칼날에 피가 조금 묻었다는 사실에 불쾌해하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 언니. 왜 나까지 죽이려고 그래? 나 살아야 하는데.“
"......
"그냥 날 버리고 갔으면 편하지 않았어? 굳이 왜 나까지 죽여서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건 전부 널 위한 거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주아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방은 이미 메지 않은 상태니 도망갔다면 살려줄 의향도 있었는데.“
먼저 호의를 베풀어준 상대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미 계획이 틀어진 마당인 데다가 박기아와 김지헌이 싸우는 모습에 이딴 헛짓거리를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에 그냥 모두 다 죽이기로 했다. 그중에 유일하게 주아연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재밌는 체험이기도 했으니 살려줄 가치가 있었는데 왜 재희를 죽이려 드는지.
"잘 봤어. 허접한 싸움.“
바닥에 쓰러져서는 끈질긴 목숨을 여전히 연명하고 있는 김지헌의 뒤통수에 검을 내리꽂았다.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와 함께. 몸을 크게 떨던 그는 이내 곧, 숨이 꺼졌다.
"흠... 되도록 머리는 찌르지 말아야겠네.“
피는 괜찮았지만 피 외의 것이 칼날이 묻어있으니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역겹고도 냄새도 역한 것이 두 번 다시 머리를 찌르지 말겠다고 다짐하며 재희는 고개를 들어 이하늘을 바라본다. 그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 재희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싱긋. 웃는 재희는 몸을 살짝 낮췄다. 그 자세가 자신에게 달려들 준비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이하늘은 생각지도 못한 복병에, 그리고 몸의 감각이 위험하다가 아우성인 재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렸으나.
"늦었네?“
"아으읏!“
이미 등으로 들어간 칼날이 가슴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으아아아!“
아직 남아있는 힘을 이용해 무식할 정도로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른다."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봐.“
너무 형편없었다. 배에서 내리기 직전에 방심하지 말라는 게임 측, 관계자의 말에 이런 계획을 짜서 전력을 염탐했구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냥 튜토리얼 때처럼 무쌍을 찍어도 아무래도 좋았을걸. 굳이 시간만 낭비하고 역겨운 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픽. 내쉬었다.
"잘 가.“
검을 휘두르면서 돌려진 몸, 그리고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하늘의 목. 재희는 레이피어의 끝날로 목을 베어버렸다.
"꺼흑... 꺽.“
깊게 베인 탓에 살이 파인 부근에서 피가 주르륵. 홍수처럼 흘러내린다. 이하늘은 무릎을 꿇으며 캑캑. 거리면서 목을 부여잡아 어떻게든 틈을 막아보고자 애를 쓰는데 고작 그런 거로 응급 처치가 될지.
쿠웅.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쇼크로 먼저 생을 마감해버린 이하늘의 몸은 옆으로 기울어지며 땅으로 처박혔다. 모래 먼지가 풀풀 일으켜지고, 땅에 처박히면서 나는 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다. 이제 남은 건 주아연.
"재, 재희야?“
순식간에 두 명을 죽여버린 미녀인 재희. 브론즈 등급에서 가장 위협적이라 여겨지는 자신도 저렇게 깔끔하게 저 둘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김지헌과 이하늘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건데. 그 둘을 죽인 재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주아연은 여신의 몸에 악마가 깃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자.
"응. 언니.“
해맑은 표정으로 재희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