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053 첫 게임
먼저 움직인 건 김지헌이었다. 박기아가 들고 있던 장검보다는 길이가 짧아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을 가벼움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몸을 살짝 숙인 상태로 옆구리를 한 번에 베어버릴 듯이 강하게 휘두르지만 주아연보다 약할 뿐이지 그래도 다른 브론즈 등급의 참가자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날 박기아이기에 그 공격을 막을 수가 있었다.
"읏.....!“
그런 기습에 대항하고자 박기아는 다급히 장검을 1자로 세웠다. 손잡이와 칼날, 양쪽에 손을 가져다 대어 충격을 분산시키지만 완전하질 않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미약한 신음성을 내뱉으며 집중한다. 다음 공격은 어디로 올 것인가. 하고.
"뒤져어어!“
장검을 든 이상 중검을 든 상대방에게 거리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했다. 그야 그럴 것이 움직임이 더 큰 차이가 있어 불리하니까. 그 때문에 김지헌에게 거리를 허용해 버린 박기아는 일방적인 공격에 시달리며 방어하는 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이어지는 공격. 박기아의 눈이 오로지 검으로 향해 있다는 허점을 찾아낸 김지헌은 검의 손잡이로 가 있던 손을 떼어내어 주먹을 날렸다.
"커헉.“
헤븐에 있을 당시. 길드 안에서는 실전을 가장한 대전을 주로 펼쳤다. 그러나 검과 죽음의 문턱에서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함이기에 이렇듯. 싸움 도중에 주먹을 사용한 적이 얼마 없었으니 손쉽게 유효타를 먹일 수가 있었다.
"개, 개새끼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부엌칼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둘이었다. 하지만 헤븐에서 길드에 가입하고 빚을,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을 거듭한 덕에 고작 주먹 한 방에 배를 부여잡으며 움츠러들 한심한 인간이 아니었다. 박기아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욕을 입에 담으며 무릎을 쳐올렸다.
어떻게 보면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당연히 먹혀들지 않았다. 김지헌은 이미 무릎이 닿지 못할 정도로 거리를 벌려둔 상태이니까. 허무하게 박기아의 무릎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솟아오르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지헌은 다시 중검을 휘두르기 위한 자세를 잡으며 검을 거둬들였다.
"아아악!“
이대로 있으면 계속해서 김지헌의 공격을 허용할 터.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인드로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중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검을 높이 쳐올려 아래로 내려찍는다.
"뭐, 뭣?!“
"윽!"
김지헌의 공격에 어깨에 커다란 상처를 새로 생겨났다. 이처럼 김지헌도 이 공격에 피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개같은 것. 같은 길드에서 비슷한 나이 때, 비슷한 등급이라 친하게 지내 줬더니만 이렇게 기어오르다니. 이 녀석도 윤재희를 노리는 것 같아 나중에 방해되지 않도록 그냥 편하게 여기서 죽여주기로 한다. 이런 생각으로 멎을 줄 모르는 장검이 김지헌의 머리를 향해 내려찍으려던 찰나.
"시발! 뭐해에!“
빠른 속도로 화살이 날아와 김지헌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던 장검과 부딪쳐 옆으로 비겨갔다. 아쉽게도 팔 한 짝을 가져가지 못한 상황. 날카로운 칼날이 김지헌의 옷과 팔의 살을 베어내며 땅바닥에 내려 꽂혔다.
"끄아아악!“
"허억... 허억......“
실제로 칼에 베여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둘은 그제서야 베인 부위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시발... 시발. 니들 대체 뭐 하는 거야? 야 박기아! 내가 주저하지 않고 활을 쏴서 운 좋게 맞췄으니 망정이지 이 새끼 진짜 뒤질 뻔했다고!“
잔뜩 화나 있는 주아연, 기껏 은신처로 사용할 수 있는 동굴을 찾아 돌아와 보니 동료라고 생각했던 두 남자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도저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대체 왜 니들끼리 처 싸우는 건데? 어?“
"끄윽... 끅......“
"하아...! 하아.....!“
주아연의 물음에도 신음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말해 주지 않을 듯 보인다.
"개새끼들. 진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결국 사고를 치네. 뭐, 딱 봐도 같잖은 일로 지랄했겠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그래도 함께 훈련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고생하며 살아왔던 탓에 김지헌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서로 이용하기만 했을 뿐인 박기아도 정이 꽤 많이 들었는지 어깨에 깊게 베여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시발. 이번 게임 개잣됐네.“
이를 악물며 싸운다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세균에 감염되지 않을까. 이 고통을 참을 수나 있을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온다. 일단은 박기아는 완전히 전투 불능으로 보인다.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깊어 보여서 되도록 싸움은 금물이다. 다음은 김지헌, 그는 다행이게도 주로 쓰는 쪽이 아닌 왼팔이 얇게 썰려있어서 고통을 참는다면 전투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온전한 상태가 아닌 두 명, 그리고 짐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재희 한 명까지. 넷이서 함께 힘을 합쳐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 보장이 되지 않는 상황인데 부상자가 내전으로 인해 생겨버렸다. 아무리 주아연이 금 등급까지는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실력으로 칭찬을 받는다지만 셋의 안전을 책임지면서까지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안 그래도 견제하는 길드들이 몇 있을 텐데. 딱 노려지기 좋은 상태이다.
"하... 시발... 진짜 개 같네.“
대체 왜 서로 싸움질을 처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 게임의 다른 참가자들을, 주아연을 위험인물로 인식하고 될 수 있다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길드 참가자들의 수를 줄인 것도 아닌데 팀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주아연은 다급히 가방에서 붕대로 쓸 만한 걸 꺼내서는 박기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왜 싸운 거냐고? 씨발 새끼들아. 힘을 합쳐서 여기서 살아나가야 할 판에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말해 봐. 벙어리야?"
"끄윽... 미, 미안......“
"이게... 미안하면 다야?“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싸움부터 멈춰봤어야지.
"야. 김지헌. 넌 괜찮냐?“
어깨 너머로 김지헌을 향해 주아연은 소리쳤다.
"......“
어느새 고통이 익숙해져 참을만해 졌는지 김지헌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둘을 향해 다가온다.
"야... 시발. 너 왜 그래?“
밀려오는 불안감. 주아연은 다급히 박기아의 붕대를 감아 주다 말고 다급한 마음에 바닥에 떨어뜨렸던 석궁을 가지러 갔다. 그러나. 이미 김지헌은 박기아의 등 뒤로 검을 깊숙이 박아 넣은 상태였다.
"끄아아악!“
얼마나 강하게 무방비한 박기아의 검을 꽂아 넣었는지 등으로 들어갔던 칼날이 가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아으윽......!“
엄청난 고통이 밀려온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등에 꽂힌 칼이 가슴으로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고통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며 핏물이 타고 흐르는 칼날을 바라본다.
"아, 아아......“
관통... 치료할 방법이 딱히 없는 이곳에선 이내 죽음이라는 의미. 살 희망이 있더라도 하필이면 의학 지식이 있다고 하는 김지헌이 적인 상태였다.
"미, 미친 새끼가아아아!“
석궁을 집자마자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주아연의 눈에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자 격하게 흥분하며 소리를 내지른다.
"닥쳐라. 시발년아.“
아무리 주아연이 어지간한 남자들과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하다고 한들, 남자친구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는데 제대로 된 싸움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자고로 크게 흥분하면 본 실력을 모두 다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길드 내의 훈련 교관이 그랬으니 확실할 터, 김지헌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도 같이 보내 줄게."
주르륵. 뚝뚝.
박기아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자 칼날에 잔뜩 맺힌 핏방울이 주르륵 칼날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서 석궁을 들고 있는 주아연의 모습 때문에 아직 숨이 붙어있는 박기아의 몸을 방패로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개새끼가. 어떻게... 어떻게 시발.“
"어떻게 긴. 이렇게지.“
같은 길드면 식구가 아닌가. 주아연은 그 생각으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함께 팀을 짜고 게임에 참가했거늘, 김지헌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과 죽음을 코 앞에 둔 박기아의 모습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분노가 피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오히려 죽는 것이 좋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여주고 싶었지만 박기아의 숨통이 여전히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 움직임이 머뭇거려진다.
왜 얼굴은 더럽게 잘생겼는지, 그리고 남자친구, 여자친구의 행세를 하면서 헤븐 내에 데이트 명소들을 들러 보거나 진짜 연인인 척,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알콩달콩한 짓을 자주 해서 그런지 보기보다 정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시발. 붙자고. 정정당당하게 붙자고 개새끼야!“
김지헌이 다가올수록, 주아연은 그 걸음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등에 나무가 닿자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눈을 잠깐 떼는 순간 공격을 할지 모르니까. 방심은 절대 하면 안 되었고, 눈도 돌려서는 안 되었다.
"내가 왜? 굳이? 너랑 1대1로 싸워야 하는 건데? 질 게 뻔한데.“
"남자새끼가. 여자한테 쫄면 안 쪽팔리냐?“
"쪽팔릴 이유가 뭐 있냐? 어찌 되었든 1대1을 하면 내가 뒤질 게 뻔한데. 그리고 지금 1대1을 하려는데 도망치는 건 너잖아? 난 그저 방패를 하나 더 들고 있을 뿐이라고?“"시발 새끼......“방패가 박기아라는 게 큰 문제인데. 김지헌은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빨리 저 더러운 면상에 화살을 꽂아 넣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주아연의 눈에 김지헌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이하늘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죽여. 그냥 죽여 이하늘!‘
이 새끼는 이제 필요 없다. 이미 동료를 배신한 몸. 한번 용서를 해 준다고 다시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으니 그냥 죽여버리는 게 나았다.
"미안하다!“
김지헌과 마찬가지로 단검보단 길고 무겁지만, 장검보단 짧고 가벼운 중검을 이하늘이 기습적으로 휘둘렀다.
"......!“
언제 이하늘이 돌아올지 몰라 최대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었다. 그렇다고 도중에 이하늘이 난입할 수 있으니 주위를 기울였구만 이렇게 될 줄은. 김지헌은 당황하며 방패로 삼았던 박기아를 놓쳐버리며 황급히 거리를 벌린다.
"쯧......“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옆구리가 가볍게 베여있다. 따끔할 정도의 고통.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시발... 이제 뒤졌다. 니새끼.“
"......."
어떡하지. 체크메이트다. 주아연의 석궁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도망친다 해도 이하늘이 뒤를 쫒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걸까. 김지헌은 주아연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부 무시하며 머리를 굴려본다.
"뭔 생각해? 개새끼야.“
활이 쏘아지고, 김지헌의 허벅지에 박힌다.
"끄윽!“
박히자마자 힘이 빠져나가며 화살이 박힌 다리는 굽혀져 땅바닥에 닿았다.
"야. 왜 그랬어? 이유나 좀 알자. 시발아."
슬프지만 갑자기 둘이 싸운 이유를 알고 있는 당사자 중 한 명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여기서 마땅히 치료할 방법은 아무래도 없어 보이는 모양인지라 김지헌을 죽이기 직전 주아연은 그 이유라도 알고자 싸운 이유에 관해서 물었다.
"이유? 별거 아니야. 이 새끼가 재희를 강간하려고 하더라고?“
"뭐......?“
재, 재희를? 애가 왜?
"그래서 욕 좀 했더니 먼저 검을 들이밀어서 싸운 것뿐이라고?“
저 말이 모두 사실일까. 솔직히 김지헌보다 박기아가 더 여자에 미친 놈이란 걸 알고 있는 주아연인지라 저 말이 헛소리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지헌의 행동으로는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는 노릇.
"지랄 말고.“
애초에 공식적으로 여자친구인 주아연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안전도 확실하지 않은 이곳에서 아무리 재희가 아름답다 할지라도 무턱대고 강간할 멍청한 놈은 아닐 텐데. 주아연은 여전히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는 박기아를 내려다보았다.
"쯧......“
이젠 정말 글렀다. 조만간 죽을 게 뻔했다.
"주아연... 박기아는 가망이 없는 것 같다.“
"그래. 그래 보여.“
여태까지 쌓아온 정이란 게 있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동료라 생각했던 김지헌에게 죽는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니.“
푹.
이하늘은 갑자기 자신의 검을 박기아의 목에다가 밀어 넣었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해하지 못한 주아연.
"어차피 죽을 거, 그리고 저 녀석도 같이 죽을 거, 내가 그냥 죽이지.“
이곳에서는 세 명을 죽인 참가자가 있으면, 그 남자를 죽였다고 해도 자신에게 세 명을 죽였다는 판정이 되질 않는다. 그냥 몇 명을 죽인 살인귀를 죽였더라도 무조건 한 명이 되는 상황. 이하늘은 그럴 바에는 박기아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을 했다.
"너... 지, 지금 뭐한 거야?“
"보시다시피.“
어안이 벙벙하다. 팀이었는데, 동료였는데 이렇게 쉽게 죽인다고? 잠시 김지헌에게서 눈을 뗀 사이 그는 재빨리 알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는 윤재희를 품에 안고 칼을 쥔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시발. 이 년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무기 버려.“
이판사판. 목숨을 포기하기도 싫고, 윤재희도 포기하기 싫으니 선택한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