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051 첫 게임
어젯밤. 어느 의미로 유지나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었던 재희는 어두 컴컴했던 하늘이 다시 밝은 푸른 빛으로 색을 되찾아가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혼자 동굴에서 나왔다. 어제 그 하찮은 남자를 상대로 패배를 만끽한 유지나가 재희 없이 홀로 이곳에서 살아가기란 무리가 존재했다. 이러한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둘의 유일한 식량과 물이 들어있는 가방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두고 나온 상태이다.
"조용하네.“
200명이나 될 정도의 많은 사람이 이 무인도에 갇혀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거나 욕망에 따라 움직일 텐데도 주위에선 새의 지저귐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소리만 가득했다. 마치, 재희를 제외한 아무도 없는 것처럼. 뭐, 당연한 거겠지. 아침인 데다가 여긴 튜토리얼 게임이 아닌, 브론즈 게임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일만한 무기와 기술을 상대방도 들고 있으니.
모니터 너머의 목숨이 여러 개인 게임도 아니기에 잘못하다간 단 한 번의 방심으로 영영 세계와 손절을 당할 게 분명하여 무작정 식량과 물을 얻으려고 살상을 벌일 일은 만무하다. 어제 남자를 죽이고 얻은 지도를 찾를 발견한 것처럼 다른 것들을 찾기 위해 섬을 돌아다니는 재희가 이상할 터. 평범한 사람이라면 덫을 깔아두고 기다리지 않을까. 식량이 될 만한 짐승이나 되도록 사람이 걸리길 간절히 빌면서.
"......“
그렇게 생각하니 꽤 위험한 게 아닌가. 배에서 무기를 고를 때, 덫이 될 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가방 안에는 작은 나이프와 밧줄 등이 있으니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면 덫을 어찌어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휘몰아친다. 재희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아래를 살핀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나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일 걸까.
덫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되는 어색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재희가 참가한 이 브론즈 게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발밑을 조심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급조할 수 있는 덫 대부분이 밧줄이 발에 걸리게 되면 작동하는 원리일 테니까.
부스럭. 부스럭.
조심히 험악한 산지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재희의 귀를 간지럽히는 재희의 것과 다른 발소리. 어제 만났던 그 남자와는 달리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한 명도 아니라 최소 둘 이상이라 긴장이 될 법한데도 불구하고 재희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왜일까. 왜 웃음이 나는 걸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실제 목숨을 걸고 게임을 진행하는 이곳에서 방심이 가득한 저런 발걸음을 가진 사람을 죽이는 건 무엇보다 쉬워 보이니까.
"힉.....?!“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정이와 예림이가 들었다면 경악할 만한 미약한 비명이 재희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미친......“
"우와......“
"......!“
서로의 거리에 어색함이 존재하지 않아 보이는 남자 세 명에, 여자 한 명은 눈앞에서 나무 뒤에 숨어 오돌오돌 떠는 모습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재희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안녕하세요."
넋을 놓고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들이었지만 그러한 상황을 여자가 먼저 제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재희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꽤... 나쁘지는 않네.‘
지금쯤 동굴에 있을 유지나와 달리 이 여자는 재희의 외모에 현혹되지 않고 언제든 무기를 휘둘러 목숨을 앗아갈 수 있도록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상태였다. 아까전의 발걸음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 그렇기에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외모는 아쉽게도 유지나보다 못하지만.
"......“
"저기요. 괜찮으세요?“
"오, 오지 마요......!“
웃고는 있는데 손의 위치로 볼 때, 거짓된 표정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곳으로 오던 배에서 만났던 게임 측의 남자의 말.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실력에 너무 자만하지 않고 우선은 여자라는 성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이들을 염탐하기로 한다. 그 때문에 한 걸음. 여자가 다가오자 재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소리쳤다.
"괜찮아요. 해치지 않아요.“
그제서야 해가 될 인물이 아니라 판단한 여자는 허리춤에 달린 무기로 가 있던 손을 떨어뜨리고 양손을 재희에게 보여준다.
"아......“
무기가 없다고 한들. 언제라도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손이 있는데 방심하면 안 되지만. 뭘 모르는 여자인 것마냥 재희는 안심한 듯 잠시 멈췄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저, 정말이죠......?“
"네. 정말이에요.“
그 말에 여자는 고개를 살짝 틀어 까딱거리자 뒤의 남자들은 하하 웃으며 마찬가지로 손을 보여준다. 역시나 살 색의 손바닥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혼자세요?“
"네......“
"혼자서 여긴 왜 오신 건가요?“
"그... 아는 사람이 뭘 쓰라고 해서 썼는데 그게 알고 보니 게임 참가서더라고요. 뒤늦게 알아서 취소하려고 해 보니 안 된다고 해서 결국에... 흑!“
"아... 괜찮아요.“
설정은 이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여자인 재희는 이곳에서 만난 남자에게서 얼떨결에 게임 참가서에 이름을 넣고 접수까지 끝마쳤다. 그게 게임 참가서인지 모르고. 그 정도로 멍청한 설정이다. 이렇게 말을 하니 예상대로 여자는 그 남자가 재희를 강제로 범하기 위해 이곳으로 불러들였다고 판단하며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그럼에도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는 재희에게 괜찮다며 안쓰럽다는 얼굴로 다가와 살포시 안아준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토닥토닥. 작은 등을 토닥여주며 여자는 말한다.
"흐윽... 흑......“
아무리 멍청해도 그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참가하게 했는지 짐작을 한 비운의 여자처럼 서럽게 그녀의 품에서 울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아니요. 그냥 품 좀 빌려준 것뿐인데요 뭐. 하하.“
진짜로 눈물이 나올 줄은 몰랐던 재희는 살짝 당황했지만 애써 괜찮은 것처럼 웃으며 말한다. 이 모습에 여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얼마 안 가 살짝 홍조가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랑 같이 다니실래요?“
"......“
조심스러운 물음. 재희는 슬그머니 눈을 돌려 세 명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무뚝뚝해 보이고, 한 명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고, 한 명은 재희의 시선이 닿자 주아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저것들한테 무슨 짓을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당한다 해도 제가 지켜드릴게요.“
"네......“
꽤 괜찮아 보이는 여자. 일단 이 여자부터 공략하기 위해 의지하는 척 몸을 살짝 기대며 대답했다. 그러나 썩 나쁘지 않는 듯.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윤재희에요. 이제 스물 한살이에요?“
"네...? 아. 이름이요? 근데 스물 한살이라니. 정말 어리시네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래 보여요. 아무튼, 전 주아연이예요. 나이는 29살. 편하게 언니라 불러요.“
"네. 언니.“
"후으으. 예쁜 애한테 언니라 불리니까 좋긴 하네. 반말해도 되지?"
여자가 같은 여자에게 지어주기엔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주아연이 반말을 해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젤 잘생긴 남자의 이름이 박기아야.“
"안녕하세요. 윤재희 씨.“
"네... 안녕하세요."
그 뭐냐. 최제훈이었나. 아무튼, 걔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아연의 말처럼 준수한 외모를 가진 편이었다.
"그 옆에 있는 애가 이하늘.“
묵묵한 편으로 보이는 남자.
"남은 애의 이름은 김지헌.“
마지막 남자의 이름은 김지헌이라고 한다. 그는 재희의 눈 몰래 재희의 몸을 감상하고 있는 이하늘과 달리 그냥 대놓고 몸매를 감상하며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남자였다.
"야. 김지헌. 어딜 보는 거야?“
"응? 가슴. 그리고 엉덩이.“
"뭐.....?“
"왜? 개지리네. 좀 볼 수 있지. 안 그래?“
"......“
주아연의 말에 태연하게 말하는 김지헌. 그 모습에 주아연의 얼굴에 분노라는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지헌아. 처음 보는데 그런 말을 굳이 해야 할까?“
"내가 왜? 너도 보잖아?“
"무,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연아.“
박기아가 그런 김지헌을 향해 말한다. 재희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김지헌의 말에 뒤늦게 재희에게서 눈을 돌리고 주아연을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음... 둘 사이에 뭔가 있네.‘
주아연과 박기아.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닐까. 고작 몸을 조금 봤다가 저렇게 변명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질적이다. 남매라면 더더욱. 그러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 이상. 부부라는 건데. 헤븐에 오래 갇혀 있다 보면 결혼도 하고 그러니 주아연과 박기아의 왼쪽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아 부부까지는 아닌 듯 보인다.
"알았으니까. 닥쳐.“
"으응......“
"재희야. 무시해. 신경도 쓰지 말고. 이 언니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돼. 만약 떨어지더라도 저 김지헌이라는 새끼의 근처에는 절대 가지 말고. 알았지?“
"네. 언니.“
"좋아. 그럼 갈까?“
계속 이곳에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도움은 전혀 되지 않을 것만 같지만 보고만 있어도 눈의 피로는 물론이고, 없던 힘까지 생겨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한 윤재희가 무리에 추가로 들어왔으니 조금 바쁘게 움직여서라도 식량을 구해야만 했다. 이대로면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었으니. 한 명분의 몫이 늘어난 것만으로 급해져야 하는 게 바로 비쓰온 게임이라는 곳이었다.
"와... 시발. 존나 예쁘네.“
주아연과 그녀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김지헌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어떻게 저리 예쁠 수가 있을까. 몸매도 어찌 저렇게 환상적일까. 여태까지 봤던 여자 중에 미모의 순위로는 당연 1위로 올라설 정도였다. 그렇기에 여자라면 환장하는 김지헌은 어서 빨리 저년을 이곳에서 따먹고 싶었지만, 자신보다 강한 주아연이 옆을 지키기고 서 있으니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입은 닫고 감상하지?“
"개소리는. 그걸 어떻게 입을 닫아? 보고만 있어도 입이 자동으로 열리는데. 그나저나 너도 노리고 있냐?“
"......“
"하... 이 새끼. 주아연과 사귀는 사이 아니냐? 진짜 나보다 더한 쓰레기네. 이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김지헌의 옆에서 걷고 있던 남자. 박기아는 잘생긴 외모와 달리 생각 외로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김지헌은 평범한 외모 탓에 한 여자를 따먹으려면 온갖 수발은 물론이고, 기분, 선물 공세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여자 한 명을 침대로 끌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박기아라는 쓰레기는 잘생긴 외모로 쉴 틈 없이 여자를 꼬셔댄다.
자기 말로는 튜토리얼에서 운 좋게 발견한 여자를 따먹다가 게임이 끝났다는 방송이 섬 전체에 울려 퍼지자 나중에 있을 평판을 대비해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놈이었다. 그만큼 쓰레기 그 자체인 인간. 그러니 능력은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뛰어난 주아연의 친구들과 얼굴도 몰랐던 여자와 바람이 나도 둘이 싸우기는 하지만 깨지지 않고 여태까지 날파리 같은 목숨을 연명하며 빚을 차근차근 갚아 나갈 수 있었던 거겠지.
부럽다. 부러워. 김지헌보다 더한 놈이었는데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들이 먼저 다가와 원나잇을 신청한다.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도, 그리고 그 여자는 사귀는 남자가 바람을 펴도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도 해 준다. 부럽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그로 인해 오늘 이곳에서 처음 만난 윤재희라는 여자도 노린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김지헌은 하게 되었다.
'시발놈. 이젠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다.'
김지헌이 노리던 여자들은 매일같이 자신보다 훨씬 잘생긴 박기아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러면서 익숙하듯 주아연에게 잘못을 비는 모습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여자들은 이딴 쓰레기를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
"개새끼야. 주아연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뭘 어떡하게?“
"음... 모르겠네. 하. 이래서는 헤븐으로 돌아가서 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냐?“
헤븐이라... 게임이 끝나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나 그래도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그 시간이 관건이라 김지헌은 확신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고 그 시간 안에 윤재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리라 다짐하며 여전히 고정되어 있는 윤재희의 뒷태를 감상한다. 잘록한 허리, 커다란 엉덩이, 만지면 무척 부드러울 허벅지까지.
츠읍.
침이 새어 나온다. 얼른 그 침을 도로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