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047 첫 게임
천으로 눈이 완전히 가려진 채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얼마나 이끌려 걸었을까. 이제는 바다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고 오로지 풀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퍼석한 땅을 밟는 느낌으로도 배가 장착해 있을 해변과 동떨어진 곳이라 추측해 볼 수가 있었다.
'음... 어림잡았을 때, 대략 200명 정도였는데.‘
게임에 참가하는 인원은 대량 200명 정도. 튜토리얼에서는 몇 명에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30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 이번에도 대략 30명, 아니면 4분의 1인 50명 정도로 예상해 볼 수 있는데 확실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뭐, 그 많은 인원을 모두 죽일 생각도 없으니 성욕을 풀어줄 여자를 찾는 직후 설렁설렁 눈에 보이는 적만 찾아 죽여보기로 한다.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얻은 1조라는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한들. 최소한 남아있는 인간이라는 자존심을 모조리 내치면서까지 살인귀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때문에 적대적인 적만을... 그게 가능할까. 솔직히 재희 자신이 보아도 욕정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 외모인데 평범한 남자들이, 그것도 살인은 물론이고 강간도 허락되는 이곳에서 절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윤재희 씨는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재희의 몸에서 남자들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눈을 가리던 안대까지 떨어져 나갔다. 역시나 숲 한복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무나 풀, 그리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징그러운 벌레들의 모습까지. 무인도 그 자체라는 사실에 한숨을 토해낸다. 여기서 또 게임이 끝날 때까지 굶주림에 식량을 아껴 먹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자야만 한다니. 한숨이 도저히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그 말을 남긴 채, 서로 양 갈래로 찢어져 재희를 두고 떠나갔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지 못하도록 찢어진 것이라. 따라가봤자 온갖 힘을 써서라도 재희를 따돌릴 게 분명했다. 이곳 지리를 잘 아니까 저렇게 태연하게 걸어서 떠나가니. 그래도... 따라가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동 등급의 게임이라 무턱대고 참가 의사를 밝혔을 참가자들이 있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모두 한곳에 모일 수밖에 없으니 따라간다면 조금이라도 다른 참가자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예를 들면 여자라든가... 또, 여자라든가.
응. 그래. 따라가......
사삭!
"......“
따라갈 생각을 하자마자 남자들은 황급히 몸을 숨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 탓에 뒤늦게 그들을 따라간다 해도 뒤를 잡을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도 점점 멀어졌을 테니.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다. 신중한 건 좋긴 한데. 어떨 때는 지금처럼 생각이 많으면 좋지 못한 점이 이렇듯 빠르고, 눈에 띄게 나타나니. 자책하게 되었다.
"하아... 그냥 무작정 따라갈 걸 그랬나.“
아니지. 따라 잡힐 거였으면 애초에 안대를 쓰게 만들고 무인도 어딘가로 참가자들을 혼자 두지 않았지 않았겠지.
"먹을 거부터 찾아보자."
튜토리얼과 같은 점이라면 초기 물품이 담긴 가방일까.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하늘하늘하는 원피스가 아니라 움직이기 편한 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허리춤에 레이피어라는 무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가방의 무게를 보았을 때는 튜토리얼에서 받았던 것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여 대충 물 두 병과 소량의 식량이 들어있을 테니, 우선하여 식량을 구하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판단한다.
아니, 여자... 그래. 여자가 더 중요하네. 이 망할 몸뚱어리는 성욕을 풀지 못하면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할뿐더러 앞까지 보이지도 않으니 지금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버텨보며 식량보다는 여자부터 찾기로 한다. 그래서 혼자 남아 불안해할 여자가 갈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이 섬까지 데려온 주최 측 남자들, 그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두 명 중에 재희를 알고 있어 보이던 남자의 뒤를 캐 보기로 한다.
"이쪽이었지?“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겁에 잔뜩 질려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며 걸음을 옮기면 긴장의 끈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무기는 근접 무기만 있는 게 아닌 활과 석궁, 그리고 새총 등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니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여자인 재희를 굳이 다치게 할 필요까지 있을지. 오히려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 범하려고 달려들겠지만 그래도 조심한다.
바스락. 바스락.
떨어진 마른 잎사귀들을 밟으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튜토리얼 때와 마찬가지란 말인가.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처럼 먹을 수 있는 희귀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한다지만 대체로 독이 있는 것들뿐이라 했다. 그리고 독성이 있는 것들은 꼼꼼히 외워둔 재희는 현재 눈에 들어오는 열매, 식물, 그리고 버섯들의 모습에 참 주최 측은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는 숨어서 다른 참가자들이 치고받고 싸우다가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겠지.
이 무인도의 크기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재희는 생각보다 섬이 너무 고요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가진다. 이러면 둘 중 하나. 아직 게임 초반이라 몸을 사리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아카데미에서 알려준 것처럼 다른 참가자들에게 비명소리를 들려줘 위치를 발각되지 않게 조심히 입을 틀어막아 죽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것마저 아니라면 운이 나쁘게, 운이 좋게 200명 되는 인원 중에 적을 만난 사람이 없거나.
"......“
재희의 것이 아닌 발소리가 들려오자 곧장 몸을 낮추고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왼쪽.‘
다시금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는 발소리가 들리자 이번에는 왼쪽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래서 왼쪽에서 볼 때, 재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에 몸을 숨기고 언제든 레이피어로 급소를 찌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서서히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이거... 운이 좋네."
최대한 살육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막상 눈앞에 손도 채 대지 않았을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눈이 핑 돌아버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와 동생의 자랑스러운 가장으로 남아야 하는데 이미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손쉽게 끝날 싸움. 잔뜩 겁에 질린 발소리와 언제 누가 튀어나올지 몰라 겁먹은 느린 움직임. 아쉽지만 여자라 하기에는 덩치가 있는 듯하다.
'음...? 저거 뭐야?‘
너무나 밝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한곳에 모은 상태로 머리를 빼꼼, 남자의 모습을 찾아보자 설마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야 그럴 것이 주최 측에서 철저하게 몸 검사를 끝마친 데다가 가방은 눈이 가려진 상태로 배급되니 절대 그 순간에 무언갈 따로 챙겨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희의 눈에 보이는 남자는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아카데미 당시 교관이 말했다. 아주 가끔. 정말 희박할 확률로 무인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건 독성이 있는 것들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는 공용 해독제와 상처 난 부위를 치료할 때 사용이 가능한 약과 솜, 붕대 등의 의료용품, 그리고 처음 공통으로 받는 식량이 아닌, 맛있는 추가 식량, 마지막으로 섬의 세세한 정보가 담긴 지도까지.
전부 무인도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지도는 섬의 세세한 정보가 담겨있다 해도 그저 섬의 지형과 호수 같은 것만 나타나 있어 지도를 먼저 얻어 다른 물품들을 찾으러 갈 수는 없다. 그래도 좋은 은신처를 곧장 찾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고, 의료용품은 싸우고 난 뒤에 세균 감염을 예방, 식량은 말 그대로 식량, 해독제는 독의 걱정이 없으니 하나 같이 있으면 다 좋은 것들뿐이다. 그런 건데.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지고, 정말 다행이게도 남자는 서서히 재희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니 노골적으로 몸을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드시 얻어야만 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게 빼앗기 위해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이 가능할 정도의 거리가 되면 박차고 달려나갈 생각이다.
"조금만 더......“
대체 왜 게임에 참가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느린 발걸음, 답답함에 그냥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그래도 꾹꾹 참았고, 그렇게... 지금.
"으엇?!"
"움직이지 마.“
남자가 재희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무기에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남자의 목덜미에 레이피어의 칼날을 가져다 대었다.
"아, 아으으흑!“
"......?“
"사, 살려...! 히끅! 흐헝헝헝!"
이곳에서 당연한 짓을 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쓰레기가 된 기분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뒤에서 칼을 들이민 탓에 재희가 여자란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목소리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느다란 여자의 것이란 것도 눈치채지 못한 남자는 신중하게 움직였던 재희의 행동이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연기...? 연기인가?‘
연기가 아닐까? 방심하게 만들기 위함이. 그러나 너무 무모했다. 목에 레이피어의 칼날이 닿아 피가 조금 났으니 고통이 느껴졌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도박을 선택하며 주저앉았을 리가 없다. 거기에 여긴 가장 낮은 등급인 브론즈 게임. 그런 지능적인 존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흙바닥을 적시는 모습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너 왜 참가한 거냐?“
"흐윽... 흑...? 여, 여자?“
"닥치고, 왜 참가한 거냐고?“
"으윽?! 도, 돈이 필요해서요!“
뒤늦게 여자라는 사실을 알차리지만 목에 다시금 차가운 칼날이 닿자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다급히 말한다.
"비, 빚을 빨리 갚고 나가고 싶었어요! 그, 그래서 참가하긴 했는데... 제, 제발 살려주세요!"
보잘것없는 이유다.
"이건 어디서 났어?“
"네...? 그거요?“
"그래."
덩그러니 홀로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나, 나무에 그냥 걸려있었어요.“
자신을 기습한 존재가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사실에 살짝 안도하며 술술 털어놓는다.
'걸려 있다라.‘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라 대놓고 걸려있다니.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남자의 말이 사실이면 여유를 부리고 숨어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다른 참가자들보다 이 비닐봉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저... 이거 좀 치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가 왜?“
"위, 위험해요!“
"그렇지. 위험하지.“
"그러니까. 치워주실 수 있으신......“
더 들을 가치도 없다. 이제 필요 없어진 남자. 재희는 레이피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목에 박아 넣는다.
"커, 커헉.....?!“
의문이 가득 찬 표정. 여자가 스스럼없이 살인을 저지를 줄을 몰랐던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째서......?“
남자는 자신의 목을 뚫고 들어간 칼날이 반대편으로 나온 걸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만져서 알게 되자 재희에게 물었다. 어째서냐고. 왜 죽이는 거냐고.
"누가 그랬거든, 방심하지 말라고.“
안 그래도 여자인 재희인 데다가 눈에 띄는 밝은 머리카락 색과 아름다운 외모는 괜히 살려줬다가 적을 불러올 수 있었다. 어차피 조심스러운 게 아니라 겁에 질린 것도 모자라서 여자라고 안심하는 남자로서는 절대로 이곳에서 살아나가기 힘들 게 분명하니 그냥 죽인 것이다. 이것으로 한 명. 추가 보상이 생겼을 터.
"여자라고 안심하지 마. 여기는 남자든 여자든 악마가 되는 곳이니까.“
단순히 여자라고 사람을 못 죽일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무기력하게 도망치는 여자나 저항 없이 강간을 당하는 여자나. 브론즈 등급에는 멋도 모르고 참가했을 여자가 태반이겠지만 재희가 생각하기로는 조금만 등급이 올라가면 몸을 내주면서까지 한 명을 죽일 악질이 많을 거라 확신한다.
"뭐, 알려줘 봤자지. 이젠?“
"아, 아아."
이제라도 알면 된다는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해당하지 않는다. 모르면 죽어야지. 그게 비쓰온 게임의 법칙이 아닐까. 목이 관통당해서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한 남자는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레이피어를 든 손에 무게가 실리자 천천히 칼날을 뽑아냈다. 온기가 잔뜩 남아있는 혈흔이 칼날에 잔뜩 묻어있었다. 그래서 시체가 되어있는 남자의 옷을 이용해 대충 피를 닦은 뒤에 비닐봉지를 확인한다.
"지도인가."
안에는 종이로 이루어진 지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움직여 볼까.“
굳이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재희의 손으로 남잘 죽였다는 증거가 담아졌을 것이니 굳이 표시해 두지 않은 상태로 몸을 일으켜 다시 움직이기로 한다. 이번에는 제발 여자가 눈에 보이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