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046 첫 번째 게임
"으음... 이게 좋겠네.“
낮은 등급의 참가자들은 돈이 없어 자신에게 맞는 전용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게임이 진행되는 곳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이렇게 주최 측에서 빌려주는 무기를 골라 사용한다. 재희는 다른 참가자들과 같이 대여소에 들러 레이피어 코너에서 일일이 휘둘러보며 그제야 손에 잘 맞는 무기를 찾은 듯 중얼거렸다.
칼날이 무척 얇아서 제대로 사용할 수나 있을지. 무인도에서 사는 데 불편함이 많이 생기지나 않을지, 좋은 부분보다는 나쁜 부분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 레이피어는 재희를 제외하고 선택한 이는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뭐, 이 게임의 등급은 브론즈, 거의 초심자와 다름없기에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없어서 여유롭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로 할게요.“
손에 들린 레이피어의 바로 옆에 놓여 있던 검집 안에 넣고 허리춤에 차며 말했다.
"네. 윤재희 님. F - NO. 25를 선택하셨습니다. 무기는 대여한 거니 흠집이 나거나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을 시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로 빚에 청구할 테니 조심히 다뤄주시길 바랍니다.“
역시... 어서 빨리 개인 무기를 장만해야만 했다. 무기인 이상 당연히 흠집 정도는 나오겠지. 청구 비용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게임에 참가할 때마다 비용이 청구되면 뼈아픈 지출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것보다는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하아... 그냥 가지 말 걸 그랬나?“
대여소를 나오며 한탄했다. 민정이와 예림이의 말처럼 조금 더 쉬고, 훈련하다가 늦게나마 게임에 참가할 것을. 너무 급하게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제... 어쩌지?“
사쿠라 길드의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해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계약해서 사쿠라 길드에 속하자마자 얼마 뒤에 재희가 참가할 수 있는 게임이 잡힌다는 말에 무턱대고 참가 신청서를 넣어버렸다. 당연히 둘은 미친 듯이 말렸고, 그런 재희를 말릴 수가 없게 되자 급기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재희의 설득 끝에 떨어뜨리고 혼자 왔다.
근데... 그녀들을 설득하느라 바빠서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게 아닌가. 이 망할 몸뚱어리가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걸 어찌 해결한다는 말인지. 이럴 거면 함께 갈 여자를 사쿠라에게 말해서 데려왔어야만 했다.
"하아.“
이미 지나간 일. 배에 올라탔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하는 수 없이 게임 안에서 예쁜 여자를... 아니, 예쁜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외모가 어떻든 아무 여자라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기로 한다. 우연히 만나는 여자를 강간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배의 선수 쪽의 난간에 팔을 걸쳐 오직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접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거대한 도끼라.“
대여소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황당한 무기들이 즐비한 코너에 무기 몇 개가 비어 있었다. 그 말은 누가 가져갔다는 말인데.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성욕에 대한 고민을 잊어먹을 정도였다.
"여기가 컴퓨터 게임의 안인 줄 아는 거 아냐?“
현실 배틀로얄에 끝내 이성을 잃고 자신이 게임 속 인물이 된 줄 알고 휘두르기조차 벅찰 정도의 거대하고 무거울 무기를 집어간 이는 대체 뭐 하는 놈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설명란에는 분명 중2병 같은 이름을 가진 거대한 도끼로 보이는 설명이 적혀져 있었으니 정말 들고 휘두를 수 있는 건지, 못 들어도 멋 때문에 든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죽을 생각인지 의문이었다. 어떤 이유더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미친놈.
"혼자서 뭐해?“
히죽이죽. 이유나는 헤븐에 두고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 김필상이 음흉한 얼굴과 함께 재희에게 다가와 묻는다. 굳이 멍때리고 있다고 알려줄 필요도 없고 알려주지 않더라도 대충 알 수 있는 사실이니. 그냥 무시한다.
"같이 팀이나 짤까? 우리?"
"팀.....?“
"그래. 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여럿이면 버겁거든. 그리고 다른 새끼들은 이미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좋은 생각 같은데?“
김필상의 말에 재희는 시선을 돌려 갑판 위에 있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미 게임을 함께할 사람을 모아 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살아남는 게 목표가 아닌 듯, 재희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 역겹기도 하여 몸이 부르르 떨린다. 공포...? 공포라는 감정은 아니다. 저런 쓰레기들에게 저런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역겨우면서도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니 분노만 치밀어 오를 뿐.
"꺼져.“
"왜 이래? 우리 둘이면 나쁘지 않잖아?“
동료가 있으면 김필상의 말처럼 나쁘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 큰 무인도에서 동맹을 맺었다고 함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최 측에서 직접 나서서 참가자들의 눈을 가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만드니까. 배에서 동맹을 맺더라도 반드시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믿을 만한 팀도 아니었다. 김필상처럼.
"꺼지라니까?“
"......“
날을 세워 말을 하니 그제야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김필상은 바다에다가 침을 퉤 뱉었다.
"시발년. 비싸게 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만나기만 해봐라.“
허... 참. 별거도 아닌 게. 주최 측이 정한 룰이 무서워서 갑판에 침도 못 뱉는 새끼가 뭘 그리 잘났다고 저러는 건지. 오히려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사람은 재희가 아니라 김필상이었다.
"저희랑 같이 다니실래요?“
김필상과 다름없는 눈빛과 얼굴을 한 남자들이 재희에게 다가와 묻는다. 이것들은 또 뭔지.
"아까 그 남자가 그쪽을 노릴 것 같은데.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지키긴 누굴 지켜. 그것보다 김필상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재희의 몸을 노리고 있는 주제에 뻔뻔하기 그지없다.
"꺼져. 되도 안 되는 수작을 벌이지 말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쪽이 걱정돼서 손을 내민 것뿐인데요.“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잖아? 다시 한번 말할게. 꺼져.“
"하... 시발. 병신 같은 년이. 우리를 저 새끼랑 동급으로 생각하지 마. 우린 곧 은 등급으로 올라갈 놈들이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어쩔래?“
은이라... 풉. 이거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장인성이 말하길. 브론즈와 은 등급의 수준은 정말 낮아서 튜토리얼에서 금 등급을 받은 재희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잘 때 기습, 그리고 여럿이서 덮쳐오는 것만 제외하면 문제없다고는 하지만 만약이란 게 있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그래도 이 남자 셋이면 문제없을 것 같던 재희는.
"협박하는 거야?“
"음... 그럴 수도 있지.“
이미 재희를 얻은 것마냥 그들은 노골적으로 몸매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야. 좋게좋게 끝낼 좋은 기회라고?“
그 기회가 너희한테 순순히 강간당한다는 게 아닐까. 말을 똑바로 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는 이유는 뭘까. 그냥 말해도 괜찮을 텐데. 어차피 여기서는 협박을 당했다고 알려도 도움을 주는 이는 없을 것만 같은데. 그야 그럴 것이 예쁜 외모를 지닌 여자인 재희에게는 모두가 적이었다. 남자라면 전부가.
"거절할게.“
지금 재희의 등급이 금이라고 할지라도 얼굴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거다. 소문도 마찬가지로. 그만큼 아카데미나 길드들이 재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정보를 철저하게 숨긴 것이라 모를 테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재희가 누구이고, 등급은 또 어떤지까지 모를 게 분명했다.
"하...? 시발. 그래. 나중에 보자. 시발년아.“
뭐지. 아까부터 꺼져라는 말을 하면서 거절을 하긴 했는데 애초부터 잘못한 건 재희였다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욕을 토해내며 떠나간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은 등급으로 올라간다는 말과 다르게 그들의 몸은 여전히 운동량이 적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왜소했다. 그런 몸으로 욕을 하다못해 나중에 또 보자고? 차라리 김필상을 저 셋보다 더 무서워할 듯싶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재희 씨는.“
또 뭐야. 혼자 있고 싶은데 다시 재희를 향해 물어오는 남자 목소리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면식이 있지는 않을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잘생긴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어... 애 이름이 뭐였더라?‘
아카데미의 동기이면서 아카데미 식당에서 김필상이 창녀라고, 교관에 몸을 팔아 오후 교육을 뺐다고 말하며 원나잇을 요구할 때, 도움 같지 않은 도움을 준 남자였다. 근데 이름을 주의 깊게 기억하지 않아 누구인지 당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애초에 이름을 들은 적이 있으려나?
"최제훈입니다. 재희 씨. 되도록 이름은 기억해 주실 수 없으신가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최제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애는 또 무슨 이유인지. 먼저 다녀간 남자들처럼 거의 협박하듯이 함께 다니자고 하지 않을까.
"재희 씨. 저랑 함께 다시실래요? 지켜드릴게요.“
역시나. 금 등급을 받은 것만 알지. 튜토리얼에서 재희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모르는 백치인 최제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같이 다닌다고, 또 지켜드린다고 말을 한다.
"괜찮아요.“
다른 남자들처럼 재희를 노리고는 있는데 그래도 그들과는 다르게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호감을 끌어내려는 속셈일 뿐이라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언젠가는 동료를 만들어야 할 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로 인해 앞선 남자들과는 다르게 정중히 거절한다.
"혼자선 위험할 텐데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손에 더럽혀질 유려가 있으니 최제훈은 걱정한다.
"정말 괜찮아요.“
호의에는 호의로. 재희는 싱긋 웃어주며 다시 또 거절을 하자. 최제훈은 잘생긴 얼굴이 아깝게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재희를 바라본다.
"아, 알겠습니다! 그, 그래도 만나면 다시 생각해 주세요!“
그리곤 도망치듯 달아나고. 그 모습이 처음으로 남자임에도 귀엽다고 느껴지자 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눈에 보이기 시작한 섬. 저곳이 게임이 시작될 곳인가.
"꽤 크네.“
얼핏 본 튜토리얼의 섬의 크기와 비슷할 정도가 아닐까. 위로가 아니라 앞에서만 본 감상으로는 그러했다.
"윤재희 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이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주최 측 남자들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재희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 곧 게임이 시작될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재희 씨의 눈을 가려 둔 상태로 정해둔 곳으로 향할 겁니다.“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대로 눈을 가리고 배에서 내려 이동한다. 교관이 말하기를 몰래 안대를 흘러내리게 만들어 이들 몰래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메라에 찍히면 현 빚의 총금액의 20%의 벌금이 부과되므로 최대한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저항을 했다가도 경찰처럼 공무집행 방해로 벌금이 부과되니.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들이 다가와도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시죠.“
아직 배 안이라 눈을 가릴 필요가 없어 남자들의 안내에 갑판에서 밑으로 내려간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참가자가 주최 측 사람과 함께 있었다.
"제가 이 섬에 얼마나 있을 것 같나요?"
"재희 씨가요? 음... 길면 한 달, 짧으면 그 안이겠군요.“
"한 달이 평균 인가보죠?“
"네. 거의 모든 게임은 한 달 안에 끝납니다. 굶어 죽거나 같은 참가자한테 살해당하거나 해서 말이죠.“
재희는 이 물음으로 현 참가자들의 전력을 살펴볼 속셈이었다. 빨리 끝난다고 하면 이곳에 있을 실력이 아닌 재희나 다른 위험인물이 있다는 의미가 되니까. 그러나 이 남자는 예상이라도 한 듯 잘 빠져나갔다. 얼떨결에 빨리 끝날 것 같다고 해도 이상함은 전혀 없을 텐데.
"재희 씨라면 이보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겠죠.“
주최 측 직원 모두가 실험체였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자 꽤 높은 직위를 가진 게 아닌가 의심이 들어온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방심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한재영은 알고 있었다. 재희가 지금 자신을 너무 믿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는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무리 낮은 등급의 게임이라도, 나중에 가면 스스로 깨달으실 겁니다만. 지금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여기 모인 참가자 중에 방심하면 안 되는 참가자가 한 명 있으니까요.“
성욕을 해소시켜 줄 여자도 없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게임을 할 수나 있을까. 예상치도 못한 너무 무모한 행동에 한재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주최 측이라도 헤븐 내의 상황까지는 카메라로 다 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일은 말단들이 하는데 직접 나와 충고까지 한다. 관찰 결과 성욕이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 같았으니까. 일부러 재희의 근처에 여자를 둘 생각이지만.
"네. 방심하지 않도록 노력하죠.“
목숨이 달린 일. 이 남자의 말대로 방심은 금물이라 생각하며 안일했던 자신을 비난한다. 그리고 성욕을 해결할 방법부터 물색하기로 하며, 위험인물이라 말하는 존재, 대여소에서 없어진 무기를 들고 있을 참가자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가리겠습니다.“
눈이 가려질 동안 찾지 못하고 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