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042 사쿠라 길드
보기보다 길게 느껴졌던 아카데미에서의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가 졸업식의 날이 찾아왔다. 고작 일주일간의 교육을 받은 탓에 굳이 수료식과 같은 행사를 할 필요가 없었는지 졸업하는 날임에도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남자들의 시선과 여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느끼며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가 있었다. 그건 바로 곧 있으면 다가올 시간에 맞춰서 급하게 밥을 먹거나 고된 교육을 방지한 훈련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때문에 정말 오랜만이라 생각되는 여유를 가지며 여전히 아픈 몸으로 식당에서 식사를 끝마치고 교육생들은 강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헤븐에 처음 도착하여 배에서 내렸을 때 보았던 각 길드의 섭외하는 사람들이 교육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 정확하게는 강당으로 들어오는 재희를 보며 눈을 집중시켰다. 여기서 우선순위는 당연히 재희.
외모면 외모고, 능력 또한, 튜토리얼이란 게임밖에 하지 않았음에도 특별히 주최 측에서 금 등급을 주어 공식적으로 인정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당연히 재희를 우선순위에 두고 섭외를 해야만 했다. 거기에 더해 그녀에게 흥미를 품은 몇몇 고위 간부들과 길드장까지 이곳에 온 것을 보면 정말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을 안 봐도 뻔했다. 늘 당당하던 교관들까지 잔뜩 긴장한 채로 교육생들을 맞이한다.
"모두 모였군. 할 말은 별거 없다. 졸업을 축하한다. 교관들에게 카드를 건네주면 졸업 표시를 찍어 줄 테니 걱정말고 넘기도록.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강당의 한쪽 옆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교관.
"나머지는 너희의 선택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더 할 말이 남지 않았다는 듯이 돌아서지만, 눈에 밟히는 정말 예쁜 여자. 재희를 힐끔거리면서 아쉬움에 한숨을 내쉰다. 이젠 정말 어떤 접점을 만들 수도 없게 되었고, 뭘 해보기도 전에 랭커들의 눈에 들어와 그녀를 노리고 다가서는 순간 어떤 결말을 맞으며 죽어버릴지 대충 짐작이 가능 상황이다.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도망치듯 강당을 빠져나온다.
교관의 큰 우려와는 달리 재희를 눈에 담고 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길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 명의 랭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심지어 랭커들까지도. 현대의 복장과 너무 거리낌이 드는 중세, 혹은 고대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창작물에서 나오는 저승사자라고 할까. 검은 천 옷에 검은색 갓, 요괴의 입을 보는 듯한 마스크에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커다란 낫은 그야말로 중2병의 결정체란 생각이 들어올 정도였다.
'저 남자가 피를 부르는 사나이인가?‘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헤븐의 랭커들도 보이는데 그들까지도 낫을 든 남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만큼 강한 존재라는 건데. 그런 존재는 재희가 생각하기로는 지존 길드의 길드장 피를 부르는 사나이가 맞는 듯 보인다. '어떤 이조차 그의 이름을 들을 수가 없었고, 이름을 들은 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니.' 란 말이 들려올 정도로 반드시 만나면 피해야 하며 머리를 먼저 깊이 숙여야 하는 헤븐의 정점에 우뚝 서 있는 최강자가.
'중2병......‘
피를 부르는 사나이의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중2병 이단죄를 포함한 다른 지존 길드의 사람들까지 전부가 중2병 그 자체였다. 한 명은 중세시대의 갑옷을 입은 기사 복장을 하고 있으며 다른 이는 떠돌리 무사와 같은 모습, 그리고 저건 닌자인가? 아무튼, 절대로 현실에도 보지 못할 복장을 가지고 있어 자연스럽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며 고운 미간을 찌푸린다.
저 남자와 데이트와 비슷한 걸 해야 한다니. 아무리 그래도 남자와 함께 데이트랑 비스름한 걸 해야 할 수밖에 없을 상황에는 외모와 관계없이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그 한 번의 만남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이유도 없으니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외모는 크게 따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여자도 아닌 남자의 외모가 뭐가 중요한가.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되......
'하아... 미치겠네.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도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심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저건 싫었다. 너무나. 재희는 무인도에서 튜토리얼밖에 한 적이 없어 어떻게 게임이 진행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튜토리얼과 다름없이 무인도일 수도 있었고 무인도가 아닌 1대1로 하는 결투장. 1대 다수로 하는 결투 방식 등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매일 주최 측에서 제멋대로 바꾼다고 하니 굳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체험하는 게 빠르고 이해하기 쉽다며 교관들은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부분 낮은 등급의 게임에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역전의 그림도 나와야 후원자들이 정말 재밌어한다며 튜토리얼과 같은 무인도라고 하지만 높은 등급의 게임은 그렇지 않는지. 나무가 많아 크게 움직이기 불편할 게 분명한 무인도에서 사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대한 낫을 드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불편함과 목숨을 걸고서라도 멋을 강조하는 게 중2병이라던데. 지존 길드의 길드원이라던 칭해지던데.
움찔.
일주일간의 교육으로 인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남자 교육생들 몇 명은 이제야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 헤븐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저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정적만이 흐르던 상황 속에서 피를 부르는 사나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재희의 팔을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그를 보던 민정이의 몸이 한차례 크게 움찔거렸다.
터벅. 터벅.
헤븐의 안에서는 안전이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위협하는 자가 허튼 수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거대한 낫을 그대로 든 채로 재희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온다.
"네가 윤재희인가......?“
바로 앞에 서서는 유심히 고운 재희의 얼굴을 한동안 살피다가 입을 열었고.
'어우... 애도 말투가 왜 이래?‘
본능이 피를 부르는 사나이와 싸우는 즉시 패배를 확신하고 있어 신중을 거듭하여 말과 행동을 하려 하지만 막상 이단죄와 같이 중2병의 말투가 튀어나오자 무심코 다시금 얼굴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소름이 끼친다. 창피하지도 않은 걸까. 굳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 따름이다.
"그렇습니다.“
"흐음......“
남자의 별칭처럼 게임에서 만나게 된다면 피를 낭자한 섬뜩한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살육에 미쳐버린 남자라 불리지만 그도 남자 이긴 남자인 모양인지 재희의 아름다운 외모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그냥 대놓고 감상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 곳곳을 살펴보다가 이내 눈을 천천히 내려 가슴과 몸매를 보니 잘못하다가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쁘지 않군. 우리 길드로 올 생각이 있느냐?“
"......“
있느냐... 있느냐... '있어', 있어요?', '있으신가요' 등등 대체가 가능한 단어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이상한 단어를 고집해 선택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중에 빚을 다 갚고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을 어떻게 볼 생각인지. 아니지. 이 정도의 등급의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이미 빚을 다 갚고도 남았을 수도 있었다. 그냥 이곳이 좋아서 계속 남아 있어도 주최 측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니.
"다시 한번 묻도록 하지. 지존 길드에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미 생각해둔 길드가 있었다. 되도록 지존 길드는 무조건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피를 부르는 사나이의 신경에 거슬리게 거절을 하게 된다면재희에게 어떤 피해가 들이닥칠지 안 봐도 뻔했다.
"그......“
"피를 부르는 사나이시여. 너무 강압적으로 묻는 게 아닙니까?“
"흐음...? 강압적이라.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야 무기를 든 상태로 단답형으로 물으니 대체 누가 선택지를 주는 권유를 한 것으로 보겠습니까?“
"일리가 있구나.“
전에 봤던 사쿠라 길드에서 나온 장인성이 입에서 내뱉는 말과 다르게 심각할 정도로 몸을 벌벌 떨어대며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게도 피를 부르는 사나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미안하구나.“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긴 한데 그 말투를 어떻게 해 줬으면 상당히 좋을 것만 같았다.
"강요는 하지 않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추궁하지 않을 거이니 잘 생각해 보거라.“
장인성 덕분에 말투는 그대로지만 제안은 그럴사하게 괜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지만은 않았다. 그런 재희의 생각을 읽은 장인성은.
"편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피를 부르는 사나이는 게임에서만 무서울 뿐이지 사실은 정말 좋으신 분이십니다.“
걱정할 거 전혀 없다는 듯이 장인성은 말한다. 그런 칭찬에 피를 부르는 사나이는 좋은지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려온다.
"어......“
어느 길드에 들어가야 할까. 굳이 길드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혼자서 게임에 참가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기에 동료라는 옆자리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그 동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길드였고. 그래서 이왕이면 길드에 들어가서 우연히 게임에서 마주치는 상대가 같은 길드원이라는 동료이며, 함께 게임이 끝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게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브론즈나 실버 등급에서의 동료는 재희의 발목만을 계속 잡아대는 방해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반면에 다른 길드에 속한 참가자들은 어느새 동료를 모아 재희를 겁탈하기 위해 달려들면 아무리 재희라도 모두 다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최소한은 동료가. 믿을만한 동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쓰읍... 어디 가야 하지?‘
문제는 어디에 가야 한다는 건데. 가고 싶은 곳은 이미 장인성이 속한 사쿠라 길드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굴뚝같았다. 왜냐하면, 장인성이라는 남자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 호감이 생겼고, 유일무이하게 헤븐의 거대 길드 중에 사쿠라 길드만이 길드장이 여자라 해서 흥미도 있었으니 말이다.
같은 여자라면 권력을 과시해서 재희나 민정이, 그리고 예림이의 몸을 노리지는 않겠지. 순전히 실력을 보고 다가왔을 확률이 높아 사쿠라 길드에 들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재희를 노리고 여기에 온 모든 길드의 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다짐한 표정으로 재희는 말한다.
"사쿠라 길드로 갈게요.“
결심이 서자 피를 부르는 사나이를 더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사쿠라 길드.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일 거다. 아무리 헤븐에서 가장 강한 지존 길드에 간다고 한들 자신이나 그녀들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할 수는 없기에 여자가 길드장으로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가. 알겠다.“
재희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아쉬움은 없었는지 피를 부르는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가자.“
"예. 마스터.“
포기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길드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빌미로 나중에 무슨 짓을 할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길드에 들어오든 말든 상관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윤재희 씨. 저래 보여도 피를 부르는 사나이는 정말 착하신 분이시거든요. 저번에 친하게 지내던 길드원이 죽었을 때, 3일 동안 장례식장에서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리고 방금 제 말투가 이상했죠? 지존 길드원들과 얘기할 때는 이렇게 말투를 맞추는 게 그들을 배려하는 거니까 기억해 두시면 좋습니다. 아무튼, 어서 오세요. 윤재희 씨.“
장인성은 꽤 유용한 정보들을 술술 내뱉은 뒤에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이겠지. 이제 동요가 되었는데 그깟 악수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재희는 장인성의 손을 맞잡기 위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아저씨. 언니랑 악수는 제 허락을 받으셨어요?“
"아...? 허, 허락?“
"네. 허락 받았어요?“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장인성은 예림이와 재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뭐, 언니랑은 악수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잘 부탁드려요.“
예림이는 갈 곳 없이 혼자 있는 장인성의 손을 재희보다 먼저 가로채 잡은 뒤에 두 번 흔들고선 더러운 거지만 어쩔 수 없이 만진 것처럼 황급히 떼어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알겠습니다.“
민정이도 경계가 가득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그 인사를 받는 장인성. 그는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재희를 길드에 받으면 그녀와 친분이 있는 그녀들 또한, 길드에 가입시켜야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악수에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터라 그녀들의 사이에서 뭔가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나도! 나도 갈래!“
"저도 넣어주세요!“
세 명의 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남자 교육생들은 장인성에게 달려들어길드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고, 재희를 사쿠라 길드에 빼앗긴 다른 길드들은 혀를 차며 강당을 나선다. 그렇게 일주일간 정도 들지 않은 아카데미와는 완전히 작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