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041 아카데미
그냥 그대로 침대에서 둘을 재운 게 실수였었나 보다. 오전 훈련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묻게 된 흙먼지와 몸에서 흘러나온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데 그런 더러워진 몸을 전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눕혀 재웠기 때문인지 재희는 차마 민정이와 함께 쓰기로 한 방에서, 침대에서 두 번 다시는 잘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튜토리얼 당시 무인도에서는 살아남는 데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어서 자는 환경을 그리 고려하지 않았건만.
"쓰읍... 여기선 못 자겠네.“
굳이 매트릭스와 이불, 그리고 베개를 세탁하는 수고함을 들일 이유는 있을까? 안 그래도 여자의 수가 적어 남는 게 방인데. 그 때문에 이제부터는 남은 아카데미 교육이 끝날 때 동안 예림이의 방에서 자기로 한다. 둘은 다른 방을 얻거나 세탁하거나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로 음냐음냐. 거리는 그녀들의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우으응...! 조그마안... 조그마 더 잘래에......“
"언니이... 저 너무 졸려요. 5분만 누워있을 게요.“
"안 돼. 일어나."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일찍 잤을 둘일 텐데. 그리고 오후에도 추가로 잤던 둘일 텐데 뭐가 그리 피곤한지 그녀들은 조금만 더 자겠다고 앙탈을 부리자 재희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소리치며 반드시 깨우겠다는 다짐 하에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자금 시간은 교육생들이 저녁을 챙겨 먹어야 하는 시간인 오후 6시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7시가 되면 교육생들은 더는 식당을 이용할 수 없게 되니 아무리 피곤해도 나중에 밤이 되어 뒤늦게 배가 고파 무언갈 먹을 걸 찾으러 다니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을 깨워 식당으로 향해야만 했다. 점심 때 보니까 재희의 눈치를 살피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던데.
"밥 먹으러 가야지. 안 그래?“
"아... 밥... 배고파.“
"우응.“
밥이라는 말에 시계로 눈이 옮겨진다. 짧은바늘이 6으로 향했고, 긴 바늘은 5를 가리키는 모습에 안도가 되면서도 굶주려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면서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온다.
"알겠어요.“
밥은 먹어야지. 여긴 매점도 없어 식당이 닫는다면 배를 채울만한 곳이 없었으니 여전히 피곤함과 근육통에 시달리는 몸에 채찍질해서라도 방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흠...? 아무도 없네?“
이제 10분이 된 시간. 식당의 안에서는 다른 교육생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힘든 훈련이 있었어도 저녁을 무조건 먹기 위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이끌고 6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식당의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교육생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6시가 조금 지난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교육생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 교육이 매우 힘들었나 보네.‘
그렇지 않다면 말이 안 되었다. 오후 교육이 무척 힘이 들었으니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식당조차 찾아오질 못할 정도였지 않겠나. 재희는 오늘 쉬기 정말 잘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뭐, 애초에 재희에게는 별로 큰 문제 없이 받을 수 있을 교육 강도였겠지만.
*
다음날. 민정이와 예림이의 입장에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내일이 찾아오자 생전 처음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침대에서 벗어나기 싫었었다. 그래도 뭐 어쩔까. 졸업장은 무조건 따야 하는데. 그녀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을 나와 숙소의 앞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재희의 양팔을 각각 끌어안는다.
"왔어?“
"네에... 왔어요.“
"하아. 언니 냄새 좋아요.“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민정이와 다짜고짜 팔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는 변태 같은 모습의 예림이다.
"가자.“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식당에 도착하자 재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나 세 명의 미녀의 모습에 집중되는 남자 교육생들의 시선이었다. 식당에만 도착하면 늘 겪는 상황. 이젠 익숙하니 자연스럽게 식판을 들고 음식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게 밥을 먹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뭐야.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몸매만 좋지 얼굴은 완전히 박살이 난 여자가 다가와 노골적으로 재희를 향해 비꼬듯 말한다.
"음.....?“
뭘까. 애는 또. 왜 갑자기 안 걸던 시비를 거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고개가 자연스럽게 기울어진다.
"어제 오후에 교관들에게 몸을 열심히 파느라 못 나왔나 보네? 어때? 좋았어? 시발년들아?“
"......“
욕을 먹을 짓을 했었나. 정당하게 오후 수업을 뺐던 재희이기에 갑자기 음담패설과 함께 욕을 쥐어박는 황당한 행동을 취하자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뭐야?“
"하...? 뭐야? 뻔뻔하네. 누구한테 팔았길래 오후를 뺄 수 있었던 거야? 나도 알자 좀.“
"몸......?“
"그래. 딱 봐도 성형 티가 팍팍 나는 면상으로 여우처럼 꼬셨나 보지?“
음... 완전히 몸을 팔지 않았다고 부정하지 못한 재희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헤븐의 최강자인 피를 부르는 사나이라는 중2병의 수장과 만남을 가지기로 했으니. 그게 어떤 의미의 만남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어떤 성격을 가진 그인지 알 수가 없으니 간단히 밥만 먹고 끝낼지. 아니면 평범한 데이트를 할지. 과격하게 곧장 몸부터 요구할...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제 그렇게 힘들었나?‘
어제 오후만 뺏을 뿐인데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온다는 건 그냥 그녀들 존재 자체가 싫다는 건지. 아니면 오후 교육이 너무 힘들어 스트레스를 받아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애꿎은 재희들을 공격하는 건지. 둘 중에 하나였다.
"뭐...? 튜토리얼 금 등급? 온갖 지랄들을 다 떨더니 결국 몸 팔고 다니는 창녀에 불과했네?"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이 신경을 박박 긁기 위해 웃는 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통했는지.
"이, 이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민정이는 분노에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몸매 좋은 여자를 날카롭게 노려본다.
"뭐? 왜. 치게? 칠 거면 쳐봐. 창년아.“
저렇게 말하면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나. 누가 보더라도 자기가 몸 팔아서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걸 알 수가 있었는데. 대놓고 창녀라고 모욕을 주니 꽤 재미있는 여자가 아닌가.
"오늘 밤은 나도 되나?“
재희의 앞에 반찬과 밥이 가득한 식판을 내려두며 앉는 한 남자.
"자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더러운 년들과 하겠다는 거야?!“
"어. 그리고 자기는 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저것들보다 내가 더 잘한다고! 저 창년들이 나보다 얼굴이 조금 예쁠지만 그것뿐이라고!“
"그게 중요한 거다. 병신 같은 년아.“
자기라고 불린 남자. 그래. 배에서 재희의 몸을 노리고 다가왔던 남자이자. 배에서 내리자마자 짧은 시간 만에 금색 등급을 얻어낸 김태호와 시비가 붙었던 그 남자가 자신을 자기라고 부르는 얼굴이 박살이 난 여자를 불쾌하다는 듯이 노려보며 말한다.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이, 이 시발년들!“
괜히 재희에게 화풀이를 한다.
"무시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고 갑자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말하는 그.
"나라도 얼굴이 되는 여자였다면 교육을 피할 수만 있다면야 몸을 몇 번이라도 팔고 남았을걸?“
오히려 당연하다 듯이 말하는 모습에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걸 그제서야 깨닫는다.
"어떻게.....!“
'내가 좋다면서. 나만 있으면 된다면서!‘
처음에는 당연히 살기 위해 먼저 그를 유혹해 다가간 그녀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또 버려질 위기에 처하자 급기야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젠 정말로 진실한 사랑을 찾았나 싶었더니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예쁜 외모를 지닌 여자에게 그를 빼앗긴다고 생각하여 힘이 들어도 매일 그의 방을 찾아와 관계를 나누었구만 그건 단순히 성 처리에 불과했던 걸까. 그 행위에는 사랑이라는 게 담아져 있지 않았던 걸까. 큰 배신감에 드디어 재희가 아니라 남자를 원망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무시한 채로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어쩌게? 교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돈을 잘 버는 남자에게로 갈아탈 거냐? 시발. 창년아?“
한순간에 갑자기 험악한 표정으로 변해버리고.
"돈이 필요하면 줄게. 엉? 오늘 밤은 나랑 하자? 어차피 막 굴리던 몸뚱어리고 이젠 비싼 척 굴 필요도 없잖아?“
싸우기도 싫고, 죽기는 더더욱 싫은 예쁜 여자가 헤븐에서 하는 일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 그것은 바로 몸을 파는 것. 남자는 여자치곤 능력이 좋아 게임을 지속해서 참가해 빚을 갚아나가리라 생각했던 반면에 어제 오후 교육을 빠진 그녀의 모습에 당연히 몸을 팔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 여자는 여자였는지. 능력이 좋으면 뭐하나. 자존심보다는 편한 삶을 추구하는 어디에나 널려있을 법한 여자란 사실에 대놓고 식당에서 아침밥을 챙겨 먹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오늘 밤에 자신과 해달라고 말한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솔직히 등급이란 걸 차마 붙이질 못할 정도로 예쁜 외모의 여자를 안을 건데 먼저 선금을 제시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만큼 자기 자신도 얼마의 가치를 지닌 여자라 인지하고 있을 거니.
"너 지금 뭐 해?“
"......“
남자 교육생과 얼마 없는 여자 교육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재희를 안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뒤늦게 식당에 도착한 남자 교육생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가 다가와 그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허. 시발. 그냥 꺼지지? 뒤지기 싫으면?“
"아하하. 지금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병신이야?“
"뭐.....?“
"김필상. 니새끼가 여태까지 교육받는 것만 봐도 여기 있는 모두가 결과를 알 텐데. 나랑 싸워보게?“
"시발놈이.....!“
화가 났다. 최제훈이라는 남자가. 그러나 김필상은 분노만 느낄 뿐이지 최제훈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검도의 길을 걷고 있어서 다른 교육생과 다르게 검을 정말 잘 활용하기에 싸우면 백이면 백. 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김필상이 이길 확률은 아예 없다고 자신조차 확신하는 상황인데 차마 여기서 더 몰아붙이지를 못한다.
"하유나로 만족하지 그러냐?“
울먹거리며 김필상을 바라보고 있는 몸매만 좋지. 얼굴은 박살이 난 여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시발. 방음도 되지 않는데 매일 같이 섹스를 쳐서 해대더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느냐? 대놓고 사랑하는 여자 친구 앞에서 바람을 피우려고 하네? 좆같은 새끼가?"
부들부들.
죽이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죽기 직전까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주며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김필상에게는 없어서 꽉 쥔 두 주먹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저딴 년과 하는 너도 대단하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저딴 년과 하는 널 부러워한 내가 존나게 창피하다.“
어이없게 웃으며 최제훈은 말한다. 교관 아니면 같은 여자 교육생들과 섹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한 여자는 쥐죽은 듯이 지내 접점이 아예 없었고, 나머지 셋은 윤재희와 붙어 다니니 꼬실 상황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교관이나 아카데미 외의 랭커들이 그녀들을 노리고 있어서 섣부르게 다가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만날 수밖에 없는 식당에서 친분을 쌓아가려고 했거늘.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들이 많듯이 예쁜 여자의 곁에도 이런 벌레가 꼬여버렸다.
"뒤지기 싫으면 꺼져.“
"......“
헤븐에서의 싸움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금지되는 상황. 그래도 싸우고 싶다면 게임에 참가하여 우연히 만나 목숨을 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히 보장되니 겁을 먹지 않아야 하는데. 김필상은 자신을 노려보는 최제훈의 시선을 먼저 피하며 옆에서 여전히 울먹이고 있던 하유나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며 걸음을 옮긴다.
"아파...! 아프다고오!“
얼마나 꽉 쥐었는지. 하유나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지만 김필상은 놓아주지 않는다.
"닥치고 따라오라고! 시발년아!“
"아아악!“
그렇게 둘이 식당에서 모습을 감추고.
"괜찮으신가요. 재희 씨?“
그제서야 눈을 돌려 재희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어요? 만약 저새끼가 또 지랄하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싱긋.
위기에 처한 공주님을 구한 거로도 모자라 착하기까지도 하니. 저 잘생긴 얼굴로 짓는 미소에. 재희가 아닌, 다른 여자가 넋을 놓고 반해 버린다.
"왜... 왜 또 저 윤재희라는 여자한테만......!“
그냥 튜토리얼에서 자신이 윤재희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윤재희가 조폭들에게 강간당해 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옆에 있던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험한 꼴을 당했으면 저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저런 미소를 지어주었을까.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자신에게.
"창년...! 창년이.....!“
더럽게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주는 년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저 자리는, 저 대우는 자신이 받아야만 마땅한데 말이다. 남몰래 증오심을 키우며 그녀는 다른 교육생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밥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