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037 아카데미 (37/140)



〈 37화 〉037 아카데미

"역시 이게 가장 낫네.“

나무모형으로 만들어진 레이피어를 허수아비를 향해 여러 번 찔러본 후에 재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체력을 기르고 무기를 휘두르는 법을 차차 배우던 시간이었다면 셋째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교육생 자신이 원하는 무기를 하나하나 써 보며 가장 잘 맞는 걸 찾는 시간이었다.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무기와 비슷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가벼운 나무 무기들을 사용해 보는데. 재희는 그중에서 레이피어라는 펜싱에서 쓰는 검과 비슷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날이 얇고 긴 끝이 뾰족한 검인 레이피어. 다른 무기와 정면 전을 벌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검이지만 사흘 동안 미친 듯이 무언갈 손에 쥐고 허수아비를 쳐댄 탓에 약점을 하나 더 있다는 걸 뒤늦게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몸의 내구성이 정말 약하다는 것. 손바닥을 보면 살이 다 까져있는 상태라 얼마나 피부가 약한 건지. 검을 맞대면 베이지도 않았는데 큰 고통을 느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재희는 검을 맞대는 것을 포기하고 몸엔 전혀 무리가 오지 않는 비교적 가볍고 빨라진 신체 능력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기가 가능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심장이나 목 등의 급소를 빠르게 찌를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나중에 실전에서 써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때 바꿔도 전혀 늦지 않으니 편하게 무기를 골랐다.

힐끔.

재희는 눈을 돌렸다. 그러자 재희와 마찬가지로 레이피어를 손에 들고 열심히 허수아비를 향해 찔러대는 예림이의 모습이 보여왔다. 큰 기대를 하는 건 사치란 말인가. 역시 공부 아니면 놀기에 바빴을 고등학생이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설 속 같은 이야기는 전혀 펼쳐지고 있지 않았다. 가벼워서 다른 무기들보다는 사용하기는 보기보다 쉽지만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몇  찔렀다고 지쳐버린 모습에 한숨을 내쉰다.

민정이는 예림이와 다르게 재희가 든 무기를 따라 들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신에게 맞을 것 같다는 무기, 국궁을 선택했다. 그러나 활은 보기보다 힘을 많이 사용하는 무기라서  번도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석궁으로 교체하여 운동장 구석에있는 사격장에서 열심히 명중률을 높이느라 연습을 하고 있다.

'음... 둘은 훈련을 꽤 오래 해야   같네.‘

적당히 어림잡아 한 5년 정도.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몇 달이 흐르고, 재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또 몇 달, 그리고 충분히 살아남다 못해 사람을 죽이러 찾아다닐정도로 강하게 만들려면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을 시켜 한 5년 정도면 크게 고민할 것 없이 게임에 참가시켜도 될 것만 같았다.
응.
역시 둘은 게임에 참가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

"고생했다. 인제 그만 쉬고 점심 먹으러 가라.“
"아아... 드디어 끝났다아.....!“

교관의 말에 예림이는 입을  벌리면서 아까까지 마구 찌르고 베던 허수아비를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아직도   할 거예요? 죄송해요. 그러니까 인제 그만 말해 주시면 안 되나요?“
"......“

참고로 재희는 아침에 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고, 간간이 쉬는 시간에도 말을 섞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데 범해?‘

여자의 몸으로여자에게 자는 사이에 범해지다니. 이런 치욕적인 일이 또 있을까. 사실은 민정이에게 처녀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근데... 처녀는 있으려나? 실험이  끝이 나고 깨어나기도 전에 실험체의 외모에 홀려 상사 몰래 범해졌을 것만 같은데. 확인해볼 방법은 손을 넣어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봐달라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싫다. 몸에 무언갈 넣다니. 그건 마치, 남자의 몸으로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는 더러운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같은 남자의 것을 몸 안에 집어넣는다니. 민정이는 여자라 해당하지 않지만 그래도 안에 무언갈 넣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뭐, 애초에 처녀이든 처녀가 아니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있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아, 아아!“

예림이의 애원에도 모른 척, 몸을 돌려 혼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발은 민정이가 있을 사격장으로 향했으며,

'허어... 한 발도 못 맞춘 건가? 심각한데.'

민정이의 표적지 근처에는 소량의 활이 박혀 있었지만 원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새것처럼 알록달록한 페인트에 흠집조차 나지 않은 상황. 보기보다  심각한 실력이라 만약 재희가 없었다면 둘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질 정도다.

"아아! 재희...! 읏...! 같이가요!“

재희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뛰어오던 민정이었는데 이내, 무리한 탓에 넘어질 뻔하여지자 순간 돌아서던 걸음이 멈췄다. 그랬던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 짓거리는 언제까지 하면 좋을까나.‘

자는 사이에 범해진 건 솔직히 별로 크게 와닿거나 그렇지 않았다. 그냥 너무 잘 대해주니 선을 넘는 게 탐탁지 않아 시작한 일인데. 막상 무시를 시작하고 나니 언제 끝내야 할지 감이 영 잡히지 않았다.

"죄송해요오......“
"인제 그만 용서해 줘요. 언니.“

죄인처럼 식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지만, 허락 없인 수저도 들지 않을 기세로 사과를 하는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식겁하니까.

"네!“
"물론이에요!“

그냥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하는데 그녀들은 재희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눈앞에 군침이  도는 밥을 먹지 않을  같았기에.

"근데 예림아. 민정이는... 그렇다 치고. 너는 갑자기 왜 그랬어?“
"네? 그야. 언니를 사랑하니까요.“
"......“

뭘 그걸 묻냐는 듯이 음식물을 입에 넣은 상태로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고운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진다. 재희는 옆에 앉아 있는 민정이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슬쩍 돌린다.

"어차피 여기서는 몇 명이랑 사귀든 결혼하든 상관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민정이 언니처럼 저도 여자친구로 삼아주실 수 없어요?“

당연히 좋지.  안 되고말고. 이렇게 예쁜 여자가 애인이라는 것만으로 어깨가 으슥해지는데 또 다른 귀여운 여자를 두 번째 애인으로 삼을 수 있다니. 거절할 남자는 얼마나 될까. 그러나.

"민정아?“

이미 애인 사이라 해도 무방할 민정이의 바로 옆에서 그렇게 말하니.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 전 괜찮아요. 재희의 첫 번째가 저라면 되니까요.“
"......“

솔직히 말하자면 좋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 그야 그럴 것이 몸을 섞어도 성욕은 완전히 풀리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성욕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몇십  몸을 섞는 거로 성욕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이유로 인해 훈련으로 힘들어하는 민정이로는 성욕을 푸는 데 한계가 있으니 재희나 민정이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

굳이  기분을 표현할 필요는 없는 노릇. 아무 관심도 없다는 시크한 척. 무표정으로 말하고선 밥을 먹는다.

"정말요! 아싸! 언니 사랑해요!“

끝내 재희의 두 번째 애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 사라지지 않고 자리 잡고있던 검은 응어리가 씻겨져 내려간 듯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다. 그게 그렇게나 좋을까. 자신은 남자도 아닌 동성의 여자인데. 그것도 원래 남자였다가 여자로 변하게 된 트렌스젠더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재희였는데. 아무튼, 자기만 좋다면 잘 된 거겠지. 굳이 사실을 털어두더라도 믿어줄  만무했다.

"안녕."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복장을 보면 같은 교육생 신분이라는 걸 단번에 알  있는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재희네.‘
'언니를 노리네.‘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도 없다는 듯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수저를 움직이는 모습에 남자의 표정에 희미한 균열이 생겨난다. 그런 모습을 본 민정이와 예림이는 단번에 재희를 노리고 다가왔음을 깨달았고, 이미 둘은 재희의 애인인 상태라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지켜본다.

"안녕?“

다시금 인사를 건네고.

"하아... 누구?“
"그냥 너와 같은 교육생이야.“

싱긋.

질척대는 이유가 자신의 외모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이기에 자신감이 붙은  같다. 그러나 재희에게 해당하지 않는 조건. 오히려 가랑이 사이에 무언갈 달고 있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만으로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냥 같은 교육생이니까 이제부터라도 친하게 지내자는 거지.“
"......“

참... 언제 죽어도 이상할  없는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아카데미에서 여자를 꼬시려고 하다니. 태평하면서도 너무 한심하다.  이런 놈들이 자신만만하게 게임에 참가해놓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것만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관심 없어.“
"에이. 그래도 여자끼리만 놀면 쓰나. 얼핏 봤는데 이 둘은 참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넌 달라 보이더라. 그러니까 모두가 적인 곳에서  같은 동료가 한 명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노골적으로 재희의 육감적인 몸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떡하니 보이는데 차마 주먹을 내찌를 수가 없는 노릇이라 한숨밖에 흘러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모르지?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되어 오빠 동생 하다가 여보가  수도?“

히죽히죽.

"관심 없어.“
"아니라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이렇게 날 밀어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안다고. 지금 이렇게 날 밀어내도 사실은 좋은 거 아니야? 밀당?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을까?“
"미친놈......“
"어? 무슨  했어?“
"아니다.“

다행히도 재희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뭐라고 말했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굳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크게, 다시 말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고, 증오를 사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더더욱 안녕이다.

"오늘  방으로 올래? 남자들이 여자 숙소 쪽으로 못 가는데에 비해 여자라면 얼마든지 남자 숙소 쪽으로 올 수가 있거든. 그러니까 와도 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음흉한 눈으로 훑어보며 입맛을 다신다. 이미 머릿속에는 알몸인 상태로 잔뜩 범해진 재희의 모습이 그려져 있겠지. 그러나 그건 망상으로만 가능한 모습이고 현실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그딴 소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이, 이게 진.....!“

참다못해 발끈하는 민정이를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제지한다.

"그냥 가."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어. 그러니까 가.“
"거짓말은.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은데. 그리고 어려서부터 검도를 다녀서 그런지 교관들이 계속 말했잖아. 나 정도면 충분히 빚을 갚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남자는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재희를 보았을 때는 여자들이 좋아하지 못할 꼬질꼬질한 모습 때문에 다가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여자 교관을 꼬셔 몸의 대화를 나누면서 화장품을 하나하나씩 얻어냈다. 드디어 오늘에서야 깨끗하고 잘생긴 외모로 돌아와 여태까지 보았던 여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얼굴과 몸매를 지닌 재희라는 여자를 꼬시려고 했는데 가드가 단단해도 너무나 단단하다. 역시 성급하게 굴지 말고 그녀의 친구부터 살살 꼬셨어야 했나.

'저 애들도 상당히 괜찮은데.‘

이 여자로 인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둘이었다. 만약 재희가 없었다면 교관들이 말하는 강한 랭커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안달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예뻤으니 그냥 셋 다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고생을 엄청나게 해야겠지.  명도 아니고 셋의 빚을 대신 갚은 뒤에 여기서 나가야 하니까. 행복하고 파란 장만한 미래를 생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어차피 지금만 이렇게 튕기지 자신에게 걸리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해롱해롱하게 만들 수 있다 확신한다.

"뭐, 지금은 아니라도 괜찮아. 그래도 인사하는 사이가 되자.“

손을 흔들며 먼저 돌아선다. 역겹네... 너무나 역겨워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지만 재희는 참았다.  뭐냐. 김태호였나. 그 남자처럼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헤븐의 안에서는 절대 싸워서는 안  것만 같은 기분이라 어떻게든 참았지만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치욕스러움을 대체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걸까. 재희는 힐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앞의 두 여자를 바라본다.

"가자.“
"아...! 알았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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