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035 아카데미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방으로 돌아가던 재희는 다행이게도 피곤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민정이를 굳이 깨워 성욕을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으면서도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을 마구 희롱한 소악마 같던 예림이가 너무나 이질적이게만 느껴졌다. 민정이와는 다르게 머리를 쓸 줄 알고, 눈치도 있고, 여동생과 같은 나이라 호감이 많이 가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배신하니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충격이 맞을까. 지금 재희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어오르고 있었으며, 자꾸만 어제 민정이가 했던 애무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에 이 망할 몸뚱어리는 기뻐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 쾌감이 잊혀지지 않는지 다시금 예림이의 손이 그리워졌다. 음란하다. 너무 변태 같았다. 원래 남자였던 자신이, 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던 자신이 여자의 몸을 얻고 난 이후에 쾌감에 패배한다는 사실만으로 한숨이 내뱉어 졌다.
"내일 어떻게 보냐......“
내일 두 눈 번쩍 뜬 상태로 예림이를 볼 수가 있을지. 막막했다.
"후우... 시발.“
힘들 때마다 흥미가 솟구치던 담배. 그리고 술을 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집에 여유가 없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그 두 개가 미치도록 땅겨와 또다시 한숨을 내쉰다.
"잊자. 잊어.“
자신의 뺨을 툭툭 쳐대며 잊어보기로 애를 써 본다. 기억해봤자 좋을 것도 없고,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테니 예림이의 입장에서도 잊어주면 좋겠지. 그냥 평소대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에 돌아가 역시나 여전히 잠에 빠져있는 민정이의 옆에 누워 두 눈을 감았다.
* * *
다음날도 고된 훈련이 이어졌다. 남자라고, 여자라고 봐주는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혹한 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간중간에 도저히 못 하겠다며, 그냥 여기서 영원히 살면 안 되겠냐고 교관에게 따져 드는 교육생들에게는 따끔한 체벌을 방지한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진다.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주일간은 이 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는 건데. 재희에게는 너무나 손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몸의 적응을 거의 다 끝마쳤으며, 그 무엇보다 실험의 대가로 얻은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는 다른 이들에겐 지옥이라 생각될 게 분명한 이 훈련이너무나 쉬웠으니까. 그래서 애써 힘든 척, 남들과 비슷한 척 연기하는 게 더욱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며, 부작용으로 미칠 듯이 끌어 오르는 성욕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니이... 안 힘들어요오?“
"힘들지. 안 힘들 리가 있을까.“
점심을 알리는 교관의 말에 교육생들은 들고 있던 모형 무기들을 손에서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재희는 주저앉을 정도가 아니었기에 목에 걸어두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았으며, 그런 재희의 곁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예림이가 걸어왔다.
"아아. 저 너무 힘들어요.“
"그래... 어떻게든 버텨. 어쩔 수 없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힘든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고작 일주일 동안 대체 뭘 할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안 죽어가는 것만으로 다행이지.“
투덜거리며 예림이는 은근슬쩍 양팔을 넓게 벌려 재희를 끌어안는다. 땀에 젖은 옷과 피부라 불쾌할 법한데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팔에 볼을 비빈다.
"더러워. 하지 마.“
"뭐가요. 언니의 팔인데, 언니의 땀인데 더러울 리가 없잖아요.“
할짝.
"읏.....?!“
"맛있어요. 땀 맛이 나는데 맛있어요. 그냥.“
당연히 땀을 핥았으니 땀 맛이 나겠지. 재희는 자신의 팔을 가득 채우고 있는 땀을 핥아먹고서는 맛을 음미하는 예림이에게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그나저나. 언니. 어제 어땠어요?“
뜬금없이 여기서 어제의 일을 꺼내는 예림이. 그로 인해 재희의 몸이 딱딱하게 굳혔다.
"......“
"결정했어요? 저랑 사귈지?“
"아니......“
"왜요. 제가 싫어요? 아니면 민정이 언니랑 다르게 애 같아서 싫은 거예요? 이래 봬도 저 인기 많았는데. 얼굴은 정말 예쁜데. 몸매는... 못한 거 인정하지만 그래도 민정이 언니랑 비교해도 안 꿀릴 자신이 있다고요.“
"맞아. 예림이는 예뻐. 민정이처럼 예뻐.“
"네. 맞아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되고 민정이 언니는 되는 거예요? 언니 여자 좋아하잖아요? 언니가 원한다면 전 언제든 내줄 수 있다고요. 만약 지금 원한다면.“
".....!“
그 말을 끝으로 예림이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점심시간임에도 지쳐 차마 밥을 먹으러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쉬고 있는 교육생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내, 다짐한 표정으로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풀어간다.
"뭐해?“
"남들에게 보이는 건 싫지만 언니가 원한다면 저노출증 치녀라도 될 수 있어요.“
"하아......“
재희는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던 예림이의 손을 붙잡고선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일단... 진정해.“
"알았어요.“
"나중에... 나중에 더 생각해 보자. 알았지?“
"네.“
하는 수 없이 나중에 더 생각해 보자고 하며 풀어진 단추를 다시 끼워 준다.
'그나저나. 민정이는 어디에 있을까. 원래라면 예림이보다 먼저 다가와 안겼을 텐데.‘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민정이는 보이지 않았고, 예림이는 그런 재희의 모습에 실실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머 시발. 거기서 뭐해요.
"민정아?“
"하아... 하아... 아...! 재희야... 어서 와요... 헤헤.“
교육생들은 주저앉아서 쉬고 있는데 민정이는 운동장이 모래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은 지, 드러누운 채로 자신을 발견한 재희를 해맑게 웃으며 반기고 있었다.
"많이 힘들어?“
"아니요... 별로 안 힘들어요......“
"그, 그래?“
"네에......“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재희의 눈에만 그런 걸까.
"일어나.“
"감사해요.“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 주자마자 민정이는 곧장 재희에게 기댄다. 후두둑 하고 모래알갱이들이 쏟아지자 고운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지지만 차마 떨어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허리에 팔을 둘러 몸을 받쳐주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에......“
"네.“
민정이는 이미 둘 사이에서 무언가 있었다고 짐작을 했다. 아침에 예림이를 보던 재희의 표정에서 희미하게 균열이 일어났으니까. 그 말뜻은 어제 뭔가가, 너무 힘들어 홀로 방에서 자고 있을 때, 분명히 그때 당시 둘 사이에서 뭔가가 있었다는 의미였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일방적으로 재희가 당한 게 아닌가 싶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온다.
싱긋.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재희의 몸에 기대어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예림이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낀 예림이의 눈이 민정이로 향한다. 그리곤 싱긋. 웃는다.
'무슨... 의미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미소. 뭘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미소를 짓는 거지. 평상시에 짓던 미소와는 완전히 다른 미소에 고민이 끊이질 않았다.
"힘들면 내가 받아와 줄까? 앉아 있을래?“
"아니요... 제가 받을 수 있어요.“
"음... 힘들 것 같은데. 그냥 먼저 앉아 있어 받아서 갈게.“
"알겠어요.“
그 말대로 팔은 영 움직여주지 않는다. 걷는 것도 정말 악으로 버티며 걷고 있었는데 이런 세심한 배려에 다시금 재희에게 반하며 민정이는 힘겨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잡고 쓰러지듯 앉았다.
"너... 뭐야?“
"네? 뭐가요 언니?"
"......“
자신의 앞에 마주 앉은 예림이를 향해 날카롭게 묻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재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네? 재희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라니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뭔갈 했으면 언니가 저한테 뭐라 하거나 연. 인. 인 민정이 언니에게 다 털어놨겠죠. 안 그래요?“
연인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인데도 숨기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불쾌해진다. 뭐... 그럴 수 있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시간이라 서로의 이름과 나이 등 간단한 것밖에 모른다. 가족이 몇 명이고, 어디에 살고, 학교는 어디에 나왔는지도 모르는데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몸은 가까워도 마음은 그리 가깝지가 않았으니까.
"재희는 내 거야. 그러니까 이제 팔짱 끼지 마. 달라붙지도 말고.“
"왜요? 싫어요. 같은 여자끼리 고작 팔짱 그거 하나 끼는 게 문제될 게 있어요?"
"같은 여자라도 안 되는 건 안 돼. 다가가지 마. 언니 동생 하는 사이는 인정해 줘도 그 이상은 허락 못 해.“
재희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귀여운 외모를 가진 예림이는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고 더는 아는 체하지 말라고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정도의 선만 지킨다면 충분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돼도 뭐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선을 넘기고 달라붙는다면 참지 못한다. 너무 집착하는 걸까.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걸까. 뭐가 어찌 되었든 민정이에게는 재희만 있으면 된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심각하게 해?“
식판 두 개를 가지고 온 재희는 그렇게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졸업할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그런 얘기에요.“
마치 방금 민정이가 한 말을 모두 다 잊어버린 듯, 헤실헤실 웃으며 재희의 손에 들린 식판을 받아드는 불여우 같은 예림이의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먼저 먹고 있어. 나는 내 걸 가지고 와야 하니까.“
아무 말 없이 민정이가 식판을 받아들자 마지막 남은 식판을 가지러 다시 가고.
"언니. 언니가 뭐라 해도. 재희 언니가 뭐라 해도 0전 포기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언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솔직히 저나 언니나 여기서 뭘 할 수 있어요? 장사? 장사는 해도 추천하지 않는다는데, 그럼 게임에 참가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전 자신 없어요. 언니도 그렇지 않아요?“
"......“
"그럼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두 가지뿐. 몸을 파는 창녀가 되거나 돈 많은 남자의 아내, 첩이 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능력도 없고, 장사를 해 본적도 없는 둘인데. 가진 거라곤 외모밖에 없었다. 그럼 할 건 예림이가 말한 것처럼 창녀촌에 가서 몸을 팔면서 얼마나 걸리더라도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것. 두 번째는 운 좋게 돈 많은 부호에게 빌붙는 것. 어쨌든 몸을 팔고 인권을 잃으며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재희의 곁에 있으면 어떤가.
"근데 재희 언니도 바라는 건 저희 몸일 거예요.“
예림이는 확신했다. 어제 밤. 샤워실에서 볼품없는 자신의 어린 몸뚱어리를 보고 흥분하는 재희의 모습을.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대놓고 민정이의 몸을 사정없이 희롱하던 그 모습 때문에 말이다.
"전 재희 언니가 좋아요. 아니, 사랑해요. 그리고 재희 언니는 언니나 저나 호되게 대하지 않을 걸 알고 있어요. 그런 재희 언니인데.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려면 재희 언니의 곁에 있어야 하는데. 민정이 언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그냥 재희 언니가 민정이 언니보고 이젠 싫다고, 질렸다고 하면 방법이 있어요?“
갑은 재희고 을은 민정이다. 아쉬운 것도 민정이일 뿐이다. 재희라면 얼마든지 자신만큼 예쁜 여자들을 마음껏 골라 범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언니가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만약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재희와 알고 지내면서 연인 사이까지 발전해 나갔다면 발언권은 정말 강하여 예림이는 재희를 꾀기 전에 민정이부터 공략하여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만난 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가지고, 사람 마음은 언제든지 변해도 이상할 게 아니니 굳이 지금 예림이가 싫다고, 아는 체하지 말자 따져 들면 호감만 급격하게 떨어질 뿐이다. 즉... 재희가 무얼 하든 이해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란 것.
까득.
그걸 뒤늦게 알아차린 민정이는 여전히 수저를 들지 않은 채로 이를 까득 갈았다.
"전 언니가 뭐라 하든 재희 언니와 가까운 사이가 될 거예요. 그리고 헤븐에서는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허용되는 것 같으니 굳이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가끔 남자 교관이 셋에게 다가와서는 지켜줄 테니, 빚도 갚아줄 테니 모두 다 내 아내가 될 생각이 있냐고 묻기도 한다. 그것 때문에 헤븐에서는 부인과 남편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 알았어.“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재희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을 쳐내는 게 아닌, 재희에게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대로 해. 그래도 재희에게는 내가 첫 번째니까.“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첫 번째든 아니든, 전 그냥 재희 언니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둘은 타협했다.
"뭐해? 안 먹고?“
"그냥요. 같이 먹어야죠.“
"네~ 언니. 같이 먹어요.“
"그래? 배고프게.“
재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식판을 놓고 자리에 앉아 나빴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던 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