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032 아카데미
어김없이 다음날이 찾아오고, 하늘에 번쩍 뜬 해의 모습에 이곳에서도 새가 아침을 알리듯 열심히 지저귄다. 마침 시간도 아카데미에서 정한 기상 시간이 다가왔는지 잠을 깨우는 나팔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진다. 그 소리를 들은 재희는 어제 그토록 피곤하여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빠진 것과는 대조되게 너무나 상쾌한 모습으로 눈을 떠서 상체를 세웠지만 이내, 자신의 바로 옆에서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있는 민정이의 모습에 몸을 굳혔다.
민정이는 아직 더 자고 싶은 건지 시끄럽게 울려대는 나팔소리가 귀에 닿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귀에 손을 가져갔다. 그래서 재희는 그냥 일어나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던 그 순간에. 어제 있었던 그 일, 생전 처음으로 여자에게 몸을 내어줬던 기억과 정말 여자가 되었다고 증명하듯 민정이의 애무에 앙앙거리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마음처럼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아우...! 시끄러워!“
끈질기게 일어날 생각하지 않던 민정이는 결국 나팔소리에 패배하여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소리친다. 그 후에 먼저 일어나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희의 시선을 알아차리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갔다. 잠시 뒤, 얼굴과 머리를 씻고 나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재희를 제촉한다.
"재, 재희야. 재희도 어서 씻어요.“
"알았어.“
"그, 그리고 방금 그건... 제 원래 모습이 아니니까 기억하지 마요! 기억에서 지워야 해요! 알았죠?“
"풉... 알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
"우우...! 전 진지한데 웃고 있어. 나빠요. 재희는.“
양 볼을 부풀리며 말하는 민정이를 내버려 둔 채로 화장실로 가 얼굴에 물을 묻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씻으려고 하자.
"아...?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모이라고 했었지?“
분명 강당으로 모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몇 시까지 모이라는 말은 없었다. 아니, 못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하필 몸도 피곤하고, 성욕도 미친 듯이 솟아올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상황. 재희는 실책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앗.....?!“
그러자 방금까지 재희가 누워있던 곳에 엎어져서는 재희가 배고잤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민정이는 깜짝 놀라 화장실에서 나온 재희를 바라본다.
"민정아. 어서 준비해.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네...? 벌서요? 이제 일어났는데요? 그리고 재희도 아직 머리를 안 감은 것 같은데......“
"그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자. 나중에 감아도 문제없어.“
"그, 그래도 그렇게 예쁜 머리카락인데. 안 감았다가 머릿결이 상하면 어떡... 꺅?!“
머릿결이 상하면 뭐 어떤가. 어차피 게임에 참가하면 더러워지기는 물론이고 제대로 씻을 수도 없는데. 관리해 봤자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그 때문에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민정이의 팔을 강제로 이끌고 나와서는 예림이가 들어갔던 방문을 두들겼다.
"네에~!“
안에서 들려오는 예림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누구와는 다르게 이미 나갈 준비를 끝마쳐둔 것처럼 보인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리고. 그런 예림이의 팔을 거칠게 이끈다.
"어, 언니...! 가, 갑자기 아침부터 왜 그래요?“
"몰라 나도오!“
체육관에 도착하자 역시 교관들은 분위기와 자세를 잡고 뉴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늦었군.“
뉴비 중에 도착한 이는 오직 셋뿐이었다. 역시 정답이었던 건가. 나팔소리는 잠을 깨우는 용도가 아니라 체육관으로 집합하라는 신호였다는 사실에 재희는 한숨을 내쉰다.
"하아... 하아......“
"느, 늦었다니... 설마 그게 기상나팔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둘은 숨을 고르며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재희를 바라보고.
"10분 경과.“
나팔소리가 들리고 벌써 10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재희들을 제외하고 체육관에 도착한 이는 아직도 없자 교관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언니 잘 잤어요?“
"그렇지 뭐.“
"그런... 가요?“
"응.....?“
옆에 민정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림이의 눈에는 오직 재희만 보이는지 해맑게 웃으며 질문을 툭 던지자. 재희는 어제 샤워실에서 민정이와 몸을 섞으며 성욕을 풀고 정말 제대로 된 잠을 잤기에 긍정했다. 그랬더니 예림이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걸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대답이 뭔가 잘못되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30분 경과. 이쯤이면 다 모였을 시간인데 황당하군.“
단상 위에 있던 교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거렸고. 그 의미를 알아차린 다른 교관은 재빨리 체육관을 뛰쳐나간다. 그러고 잠시 후에 모이지 않은 뉴비들을 강제로 데리고 오는데. 그중에는 정말 몰랐다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부터, 거칠게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리치는 생각 없는 사람까지.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 시발새끼가?“
급기야 다 끌려와 놓고선 왜 이제서야 자신을 끌고 온 교관에게 주먹질을 하기 시작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건 교관도 마찬가지였는지 설마 이곳에서 뉴비의 주먹에 얼굴을 맞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내, 얼굴이 왈칵 일그러지며 욕을 입에 담는다.
"뭐, 시발새끼야. 뜰 거면 뜨던가. 죽여줄게.“
붉게 부어오른 뺨에 손을 대면서 자신을 때린 뉴비를 바라보자. 그 뉴비는 겁먹을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한다. 그리곤 힐끔. 재희를 바라보고.
'쯧... 한심하긴.‘
그 모습을 보니 아마도 재희에게 잘 보이고 싶나 보다. 법과 질서가 없으니 권력은 오직 돈과 힘뿐. 그래서 대놓고 재희가 보는 앞에서 교관을 때린 것도 모자라서 재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반하겠지. 반하지 않더라도 빌붙을 거라 생각하며 재희를 보지만 영 반응이 없는 모습에 그는 몸을 낮춰 자세를 잡는다. 방법은 하나뿐. 눈앞에 보이는 교관을 압도적인 힘으로 때려눕히는 것.
'못 이길 것 같은데 저 남자는.'
튜토리얼에서는 조금만 힘을 기르거나 싸우는 방법을 안다면 충분히 남들의 위에 올라설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싸움과 전혀 관계가 없이 세상을 살아가던 일반인들이 널려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곳은... 헤븐의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무엇보다 참가자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은 되도록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싸움을 배우는 것도 모자라 사람을 죽이고, 더 효율적으로 죽이다 못해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미치광이들이었으니까. 그래서 헤븐의 일반 시민들은 절대로 참가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낮은 등급인브론즈라도 말이다. 그런 곳인데. 뉴비는 어제 막 이곳에 도착했으니 그걸 알기 만무할 터. 그 때문에 교관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
'지겠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침을 퉤. 뱉으며 교관은 목을 풀었다. 재희는 확신했다. 교관은 여유로웠고. 충분히 저 남자를 제압할 수 있다고.
"별 개 같은 새끼들은 자기가 존나 센 줄 알아요.“
교관은 자세를 잡고 있는 남자를 향해 무방비하게 다가온다.
"다시 때려봐.“
"가오잡긴. 병신이.“
"가오라니. 그냥 너와 나의 차이가 이 정도의 핸디캡이 있어야 되는 걸 뭘 어쩌냐?“
"그럼 뒤져어어엇!“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참다못한 남자는 교관을 향해 달려들었고.
"자세가 크다.“
다시금 얼굴을 향해 뻗어지는 주먹을 이젠 맞을 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틀어 비함과 동시에 설교를 시작한다.
"지랄은!“
뻗었던 오른손을 거둬들이며 놀고 있던 왼손은 턱을 향해 솟아오르고.
"뻔하다.“
왼손마저 교관의 손에 가로막혀 움직임이 머졌다.
'무, 무슨 힘이?!‘
겉으로 보면 멸치처럼 보이던 교관이 알고 보니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왼손을 막은 주먹을 무시한 채로 계속 주먹을 쳐올리려던 남자였는데. 주먹에 손을 살짝 올린 것만으로 막혀버리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근본이 없는 주먹이네. 주먹을 쓰는 자세부터가 안 되어 있어. 이러면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적은 힘을 막을 수 있지. 그리고 근육은 너무 겉으로 보이게 키웠네. 여기서는 마른 사람도 괴물이다. 근육이 많아 몸집이 크든 작든 모두가 괴물인 곳이다. 그야 그들은 근육을 단련한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싸움을 단련하니까.“
"닥쳐!“
"말했다시피. 근본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재희가 보기에도 주먹을 내찌르는 자세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저러면 가지고 있는 힘의 절반도 사용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리고 행동도 무척 커서 교관은 대놓고 무슨 공격을 할지 알려주는 남자의 주먹을 여유롭게 피하고 있었다.
"이거 대단한 새끼네? 어떻게 발도 이렇게 병신같이 찰 수가 있지?“
주먹으로 교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남자가 발을 쳐올리자 그것마저 손에 막혀버린다. 그에 감탄하며 교관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개새끼가아아아!“
거대한 벽... 원래 남자가 그런 벽과 같은 존재였는데 이곳에서는 별것도 아니라 생각되는 왜소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남들이 자신에게 들었을 그 생각이 들어오니 분노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까보다 더 커졌다.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냐? 네 주먹은 근본도 없다고.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텐데.“
'너 따위는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닥쳐! 닥쳐!“
이렇게 질 수는 없었다. 언제가 자신이 최강이어야만 했고, 당당해야만 했고, 얻고 싶은 건 무조건 다 얻어야만 했다. 그런데... 고작 이따위 새끼에게 당하다니. 남자는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 끝내세요. 나머지는 다 모였으니까.“
"네. 그러겠습니다.“
단상 위에 올라와 있던 교관은 뉴비들이 다 모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싸움을 이어나가던... 아니, 남자의 일방적인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교관은 긍정하며 주먹을 내찌른다. 그 주먹은 배에 닿았고.
"커헉.....!“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는 고통 어린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약하네. 이거 하나 처맞고.“
배를 부여잡으며 꼬꾸라지는 남자의 모습이 나약하다 못해 한심하다고 교관은 생각한다.
"끝났습니다.“
"그래. 좋아.“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서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남자를 뒤로한 채, 교관은 단상 위에 서 있는 교관을 향해 말했고, 그 교관은 눈길을 돌려 체육관에 모인 뉴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첫날이기도 하고 그러니 저 정도로 끝나지만 다음에도 또 나댈시에는 제대로 교육에 들어갑니다. 알겠습니까?“
"""네!“""
"음. 어제보다 대답이 좋군요. 역시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건 짐승만이 아니죠.“
겁에 잔뜩 질린 상태로 대답을 우렁차게 하는 모습에 교관은 흐뭇하게 웃는다.
"먼저 여러분들은 이제 교육생의 신분으로 아카데미에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후에는 빚을 갚기 위해 공포를 이겨내고 용감하게 게임에 참가하느냐. 아니면 그냥 헤븐에서 영원히 살 생각으로 일을 찾느냐.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어떤 걸 선택하든 교관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의지가 없으면 시킨 일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건 교육을 받으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면 됩니다.“
힐끔. 교관의 눈동자가 재희로 향했다. 너는 당연히 게임에 참가할 것이라고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이다. 그야 그럴 것이 튜토리얼에서 금색 등급을 받은 것이니까. 등급 심사는 게임 측에서 하기에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만큼 이유가 있을 테니 굳이 게임 측에 따져 들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어떻게 브론즈 등급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금색 등급을 받는지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헤븐에 있는 랭커들이나 대형 길드 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입니다. 그 때문에 헤븐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여러분은 다행이게도 한국어를 쓰는 대한민국에서 왔으니 언어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을 질타하는 게 맞습니다.“
강자가 까라면 까야지. 약자가 굳이 강자가 정한 공용어인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얼버무리면 맞아도 싸다고 생각되는 곳이 바로 헤븐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태어난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한국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는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것도 강자가 까라면 까야한다. 그저 한국인 랭커들이 다른 언어를 못 알아들으니 이렇게 정한 것뿐이다. 못 알아 듣는다고 대놓고 앞에서 욕을 할 경우나 그냥 못 알아들어서 짜증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정한 규칙이다.
"첫날은 간단한 이론 교육으로 진행합니다. 그런데 아직 여러분은 아침밥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식당에서 아침을 먹도록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10분까지는 봐 드리지만 그 이후에 오신 분들은 굶어야 합니다.“
"그, 그럴 수가!“
"아니 언제까지 와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은 건 그쪽이잖아!“
"밥은 줘야지!“
예상대로 반발하는데 교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럼 빨리 왔어야죠? 안 그런가요?“
하필이면 비난의 화살이 옮겨지게 교관은 재희에게 물음을 던지자 재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굳이 교관의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재희는.
"그렇죠......“
긍정했다.
"세 분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오세요. 늦으신 분들은 세 분이 식사하실 동안 여기서 벌을 받아야겠죠? 모두 엎드려.“
존댓말은 사라지고 강압적인 어투로 말한다. 겁을 먹은 교육생 몇몇은 그 말에 곧장 엎드리지만 재희와 민정이, 그리고 예림이를 제외한 여자 둘과 나머지는 엎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엎드리지 않아도 돼. 근데. 우리가 엎드리게 만들어.“
"엎드려어어!“
"닥치고 엎드리라는 말 안 들리나?!“
그 말의 끝으로 교관들은 여전히 서 있는 교육생들을 발로 차거나 때리면서 강제로 엎드리게 만든다. 여자도 마찬가지. 결국 울음을 터뜨린 여자와 여자인데 엎드려야 한다고 따지는 몸매만 좋은 여자는 오히려 교관을 따지러 들었지만 역시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그 말처럼 배려란 것 없이 폭행이 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