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029 아카데미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저 너무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서는 자신이 속한 길드에 가입시켜 친분을 만들어 놓은 뒤에 좋은 관계로 서서히 발전해 나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섭외 팀들은 비쓰온 게임 역사상 튜토리얼에서 금 등급을 받은 게 처음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재희를 원하는 욕망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 때문에 각 길드의 섭외 팀들은 외모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출중한 재희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힐끔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림이는 재희의 팔을 끌어안은 것도 모자라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민정이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둘과 만나기 전에도 이미 그녀들의 사이는 무척이나 애틋했으니까. 멀쩡히 떠지는 이 두 눈으로 그녀들이 몸을 섞는 모습을... 정확히는 재희에게 범해지는 민정이의 모습을 보았으니 둘의 사이를 억지로 떼어놓을 수가 없어 이유를 알기 힘든 화가 미친 듯이 치밀어 올랐다.
"여기가 아카데미입니다.“
커다란 건물의 앞에 걸음을 멈춘 이단죄는 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카데미?“
"네. 여러분들은 이곳에 처음 온 뉴비란 신분이라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짧은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 뉴비가 의문이 가득 담긴 어투로 이단죄가 한 말을 중얼거리자. 그 중얼거림을 들은 이단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여성분은 물론이고, 평범한 남성분들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일주일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대체 왜 이걸 하는 거지, 하고 싶지 않아. 라고 수많은 생각이 난무할 정도로 아카데미에서 뉴비인 여러분들을 굴릴 것입니다.“
그 말에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뉴비들.
"그래서 아카데미를 졸업하게 되시면 두 가지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빚을 갚기 위한 목숨을 건 게임 참가의 길. 다른 하나는 헤븐에서 영원히 살 생각으로 게임에 참가하지 않고 노동하는 길로 말이죠.“
영원히 살 생각이란다. 바깥세상에 살다 온 그들이었기에 영원히 헤븐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며, 그렇다고 빚을 갚기 위해 죽여야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게임에 참가하기는 마찬가지로 싫었다. 하지만 무조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비참한 현실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건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게임 측도 너무 악랄하지는 않아 졸업한 후에 한 달간은 지원을 받으니까요. 그럼 들어가죠.“
말을 끝으로 이단죄는 뉴비들을 바라보던 몸을 돌려 아카데미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는 밖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게 안은 무척 넓었고, 시설도 새것처럼 깨끗했다. 다만, 이질적인 점은 운동장이라 생각되는 곳에 허수아비가 여럿 박혀 있었고, 그 옆에는 잘 정리된 무기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점일까. 다시금 사람을 죽여야만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켜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강당에 도착했고, 그 강당 안에는 교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위기는 물론,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내, 눈에 띄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뉴비, 재희의 외모에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선글라스와 각 잡힌 자세로 인간이 아니라 로봇, 그리고 악마처럼 보였지만 그들도 인간은 인간이었는지 재희 하나만으로 완전히 풀어지게 되었지만.
"크, 크흠.....!“
뒤늦게 한 교관이 정신을 차리라는 듯, 소리를 내었고, 그제서야 다른 교관들은 자세를 바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은 여전히 재희를 향하고 있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아카데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체육관 단상 위에 올라있던 한 교관은 애써 태연하게. 강당에 모인 뉴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듯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사실은 시선은 재희에게 향해 있고, 속으로 감탄하는 중인데도.
"대답은 없습니까?“
"이...! 네, 네.....!“
"가, 감사합니다?“
아까와 달리 낮게 깔린 어투로 교관이 묻자 뒤늦게 대답하는 뉴비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바닥을 실실 기고 있었으며, 대답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네!“
"감사합니다!“
반복된 교관의 말. 그제야 뉴비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선 아카데미가 무엇인가.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할 점이 많을 겁니다. 자세한 건 내일. 끔찍한 곳에서 드디어 운 좋게 살아나왔는데 바로 교육에 들어가서 질질 끌 생각은 없으니까 내일 하도록 하죠.“
절대 실력으로 살아남았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교관의 말이었다. 그 때문에 재희는 물론이고 몇몇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말을 정정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별 같다는 걸 신경 쓸 생각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은 개운하게 씻은 뒤에 푹신한 침대에 몸을 쉬게 하고 싶을 뿐이니.
"아카데미에서는 여러분이 게임에서 부질없이 죽어가는 걸 막고자 게임에서 느낄 강도와 전혀 다르지 않은 강도로 여러분을 교육할 겁니다. 힘들다고, 죽고 싶다는 아우성이 나와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만 알아 두시고, 남자들은 앞에 보이는 남자 교관을, 여자들은 여자 교관을 따라가 방에서 쉬시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방송이 들리면 곧장 일어나 이곳으로 모이세요. 늦을 시엔... 불이익이 따라도 모릅니다?“
교관의 입가가 악마처럼 길게 찢어졌다.
"밥은 가는 길에 식당인 곳을 교관들이 차차 알려 줄 테고 오늘만 밤 10시까지 언제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 푹 쉬시고 우리 내일 봅시다. 해산.“
"자. 남자들은 절 따라오세요.“
"여자들은 절 따라오세요.“
해산이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여자 교관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재희는 순간적으로 남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걸으려 했다가 민정이에게 이끌려 여자 교관의 앞에 섰다.
"다섯 명이라. 많이 적네요?“
여자 교관은 자신의 앞에 모인 여자들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야 그럴 것이 남자들은 몰라도 튜토리얼에서 여자들을 굳이 죽이지 않고 강간만 해대니 여자의 수는 못해도 1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생존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재희와 민정이, 그리고 예림이, 몸매는 끝내주게 좋지만 면상은 완전히 박살 난 여자와 조폭들의 등장에 재희도 눈치채지 못하게 도망갔었던 여자 한 명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솔직히 여자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요.“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는 사회에서도 크게 느껴질 정도인데 비쓰온 게임에서는 그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힘도 없지, 배려만을 받다가 이런 끔찍하고도 무식한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길러볼 생각보다는 그냥 이 한 몸을 팔아서 헤븐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걸 선호하기에 여자 교관은 기대 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걸 아는 그녀들은 입을 꾹 닫았다. 재희에게 빌붙어 살 미래가 훤한 민정이부터, 자신이 약한 걸 아는 예림이. 이미 몸을 팔았던 몸매 좋은 여자와 강간과 죽는 것이 무서워 도망친 이력이 있는 여자는 말이다.
"따라오세요.“
남자들은 이미 교관을 따라 체육관을 나간 후였다. 뒤늦게 여자 교관은 그녀들을 이끌고 체육관을 나왔고, 체육관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로 걸어갔다.
"이곳이 식당입니다. 오늘 한정으로 10시까지 운영하고, 배식도 무제한 제공되니 숙소를 배정받은 뒤에 밥을 먼저 먹던가. 씻고 먹던가 하세요.“
밥이라... 더럽게 맛있는 음식들을 배 안에서 실컷 먹었기에 식당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씻으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민정이는 헤실헤실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이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여기가 숙소입니다.“
식당을 지나쳐 또 다른 작은 건물 앞에 섰다. 2층은 없는 1층짜리 건물이지만 바깥세상에서 익숙하게 보던 기숙사 같은 모습이었다. 양쪽에 방이 여러 개 있는 것이, 다섯 명의 여자 전부가 마음 편히 한 방씩 차지해도 남을 정도였다.
"아무 방이나 잡으시면 됩니다.“
"아...! 그럼 재희야. 우리 같은 방 써요!“
"음...? 같은 방? 되도록 따로 쓰는 걸 추천드립니다만?"
"같은 방은 쓸 수가 없나요?“
"아니요. 그런 규정은 없지만 같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함이 클 겁니다. 침대의 크기나 한 명이 들어갈 정도로 작은 화장실이나 등등해서 말이죠.“
"괜찮아요! 불편한 건......“
차마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모두의 앞에서 내뱉지 못하고 민정이는 붉게 물들어 버린 얼굴을 푹 숙여버렸다.
"뭐... 그건 자유니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바로 옆에 건물이 하나 더 있는 걸 보셨죠? 거기가 샤워실이니 씻을 분은 씻으세요. 그럼.“
여자 교관은 몸을 돌려 숙소를 나왔고, 몸매만 좋은 여자는 바로 옆에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재희들의 시선을 힐끔 살피던 여자 또한, 방을 정해 들어갔으며,
"재희 언니......“
"응?“
"아니에요. 아무것도.“
할 말은 많아 보이던 예림이. 그러나 민정이처럼 재희와 같은 방을 쓰고 싶다는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삼켜버렸다. 왜냐하면 두 명으로도 불편할 텐데 세 명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결과이니까. 그리고 민정이가 아니라 자신이 재희의 방에서 함께 자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쉬어요. 언니.“
예림이는 미묘한 웃음을 띠며 방으로 들어갔고, 재희는 그런 예림이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희야! 우린 저기 들어가요!“
고개가 갸웃거려지면서 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재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던 민정이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간지럽기는 하지만 좋을 뿐이니 해맑게 웃으며 구석진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응! 저기 구석으로요!“
잘 못 봤나 하고 재희가 되묻자 잘못 본 게 아니라 저곳이 맞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대체 왜?‘
굳이 왜 구석의 방을 원하는 건가. 재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정이를 바라보지만 민정이는 부끄럽다는 듯이 헤헤. 웃으며 팔에 볼을 마구 비비었다.
'설마 그걸 원하는 건가.‘
자신을 덮쳐주기를. 그리고 덮쳐지면서 나는 신음소리를 예림이를 포함한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 아마도 그게 분명해 보였다. 뭐 어찌 되었든 같은 방을 쓰기로 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거부하며 밀어낸다 해도 민정이는 순순히 재희의 말을 따를 것 같지도 않아 성큼성큼 걸어 민정이가 말한 방에 들어갔다.
"음......“
교관의 말대로 방은 무척 작았다. 사람이 한 명이 살기에도 작은 크기. 그래도 부엌이나 세탁기 같은 건 없지 침대나 화장실 등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존재했다.
"침대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니면 티를 냈다가는 방을 따로 쓰자는 말을 들을 것 같다는 것처럼 민정이는 웃음꽃이 여전히 피어있는 얼굴로 작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해...! 헤헤.“
오랜만에 느껴보는 푹신함. 민정이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곤 밀려오는 수마에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이내, 일정한 숨을 내뱉기 시작한다. 잔다. 완전히 뻗어버렸다고 재희는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깨울까.....?“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씻고 자면 좋을 텐데. 옷은 배에서 갈아입긴 했어도 몸을 씻을 수는 없어 살짝 불쾌하긴 하다만 얼마 전까진 이런 생활을 할 거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평범한 여자아이였던 민정이인지라 그 피곤함은 보기보다 상당하겠지. 그렇게 이해하며 재희는 민정이의 품에 안긴 이불을 빼내어 춥지 않게 덮어 주었다.
"재희.. 야아... 사랑해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민정이는 재희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하기 시작하고.
"난 씻으러 가야겠다.“
피곤한데 깨울 필욘 없다. 침대가 더러워졌다 싶으면 내일 방을 옮기면 되고. 가장 좋은 건 민정이를 여기 두고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지만 아침에 방송을 듣고 일어난 민정이가 곁에 재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며 뭐라 할지. 귀찮아 질 게 분명했기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방을 나왔다. 잘못하다간 민정이를 다시 덮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재희는 방을 나와 예림이가 들어갔던 방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말은 떨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되긴 했어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옷을 입고 있는 민정이의 모습만으로 흥분해 버린 망할 몸뚱어리는 예림이의 알몸을 보는 순간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라 애써 눈길을 돌리며 숙소를 나왔다. 그래서 재희는 자신이 방문을 살며시 닫으면서 우연히 잠에서 깨버린 민정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